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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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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해당되는 글 2

  1. 2009.03.30 [사라져가는 것들 104] 버스안내양15
  2. 2007.08.15 [길섶에서 21] 엄마의 마음
2009. 3. 30. 10:08 사라져가는 것들

반가운 소식이었다. 버스안내양이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1980년대 말 이후 홀연히 자취를 감췄던 그녀들이었다. 그녀들이 사라진 뒤로 누구 하나 그리워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오래된 체기(滯氣)처럼 무지근하게 남아 있던 존재였다. 그러니 다시 볼 수 있다는 소식이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시가 마련한 소위 '해피 버스데이(Happy Bus Day)'라는 이름의 캠페인이었다. 경기침체로 고통을 겪고 있는 시민들을 위로하고 즐거움을 주기 위해 버스에 안내양을 배치하는 이벤트를 한다는 것이었다. 우이동에서 서울역을 거쳐 중앙대까지 가는 151번 버스에 안내양 10명을 배치하여 승하차 안내 및 친절 서비스를 한다는 계획이었다. 3월 17일(2009년) 치러진 이 행사는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모았다. 언론에서도 기사와 사진으로 앞 다퉈 보도했다. 하지만 시행 이후의 평가는 엇갈렸다. 많은 시민들은 20년 만에 보는 버스안내양을 재미있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또 학생들이나 청년 세대는 처음 보는 풍경에 호기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자동차 전시회 등 각종 행사장에서나 볼 수 있는 도우미들이 대신한 버스안내양을 보면서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진짜 버스안내양을 기억하는가. 깻잎머리와 실핀, 베레모로 상징되던 그녀들. 그들의 삶은 이벤트가 아니었다. 세련된 복장에 화사한 표정으로 사탕을 나눠주는 ‘예쁜’ 얼굴의 도우미들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팍팍한 삶과 치열하게 싸워야하는 투박한 얼굴의 전사들이었다. 설움을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면서도 오라이~를 외치며 버스 문을 두드려야했던 우리의 누이들. 그녀들이 버스안내양이란 이름으로 첫 선을 보인 건 1961년이었다. 그 전에는 조수라는 명칭의 남자들이 차장 역할을 했다. 근대화․민족중흥․새 조국 건설 등의 명제들이 꽁무니에 불을 붙인 채 앞만 보고 달리던 시절이었다. 농촌에 어촌에 산골에 살던 누이들은 돈을 벌어 집안을 일으켜보겠다는 일념으로 단봇짐을 쌌다. 부모 몰래 새벽기차를 타기도 했다. 하지만 애써 도착한 대도시에서 그녀들이 갈 곳은 뻔했다. 공단으로 흘러들어가 여공이 되거나 버스안내양 아니면 식모살이가 고작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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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서울신문 손형준 기자

다. 다른 직업도 별다를 건 없었지만 버스안내양들의 근무환경이나 삶의 질은 바닥이었다. 열악한 시설에서 단체 생활을 하면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급여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 약값이나 동생들의 학비를 보내고 나면 호주머니는 늘 텅텅 비었다.

1960~80년대의 교통상황은 무척 열악했다. 지금처럼 지하철로 교통인구를 분산시킬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요즘도 만원버스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당시는 더욱 끔찍했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는 전쟁 자체였다. 승객도 고통이었지만 그 고통을 고스란히 몸으로 져야하는 사람이 버스안내양이었다. 그 시절을 산 사람들은 아직도 만원버스의 악몽(?)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출퇴근 시간에는 버스정류장마다 아비규환이었다. 저만치 버스의 머리가 보인다 싶으면 단거리선수처럼 달려가는 게 예사였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힘의 논리는 작용하는 법. 힘이 약한 사람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기 마련이었다. 버스의 아가리는 이미 승객으로 가득 차서 다시 토해놓을 지경인데, 그 버스를 놓치면 낭패를 봐야하는 직장인과 학생들은 부득부득 밀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차를 출발시켜야 하는 안내양들은 뒤에서 밀어도 보고 떼어놓으려 애쓰기도 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요령 좋은 고참 들은 적절히 기회를 잡아 “다음 차 타세요.”하면서 차를 출발시켰지만, 대개는 문도 제대로 닫지 못하고 안내양 자신이 버팀목이 되어 다음 정류장까지 가는 곡예를 펼쳐야 했다.

운이 좋아 어찌어찌 버스에 탄 승객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만원지하철도 지옥이라는 표현을 동원할 정도로 끔찍하지만, 그 당시의 버스는 숨 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채워졌다. 버스가 출발하면 기사들이 하는 일이 있었다. 소위 승객정리였다. 다음 정거장에서도 손님을 태워야 하기 때문에 기사의 ‘기술’은 중요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버스를 출발 시키는 것과 동시에 한 쪽으로 핸들을 꺾어 승객들을 쏠리게 만들거나 급가속과 급브레이크를 적절히 구사해 승객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 고통 속에서도 항의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그렇게라도 학교나 회사에 가야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신발이 벗겨져 달아나는 경우도 있었다. 분명히 쥐고 있던 가방이 내릴 때쯤이면 저만치 떨어져 있거나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있기도 했다. 물론 가장 시달리는 사람은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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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안내양이었다. 그래서 신경질적이거나 피곤에 찌든 버스안내양만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녀들이야말로 착한 누이이자 눈물 많은 언니였다. 어린 학생이 토큰이나 회수권을 안 가지고 차를 타도 눈을 감아주는 따뜻한 가슴을 갖고 있었다. 남학생들 중에는 예쁜 안내양에 반해, 그녀가 타고 있는 차만 기다리거나 내릴 정거장을 놓치고 하염없이 가기도 했다.

버스 안내양들의 고난은 열악한 근무환경이나 박봉에만 있지 않았다. 배움에 대한 열망도 늘 그녀들을 주눅 들게 했다. 자기 또래 여학생들이 산뜻한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탈 때마다 부러운 마음을 피곤한 얼굴 안쪽으로 구겨 넣어야했다. 하지만 진짜 고통은 따로 있었다. 버스회사의 소위 ‘삥땅’수색이었다. 회사에서는 안내양들이 승객들로부터 받은 돈을 숨겼을 거라고 의심하고 일쑤 몸수색을 하였다. 돈을 찾아낸다고 몸을 더듬고, 이것이 성적추행으로 변질되는 경우도 있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순결함을 존중받아야 할 그녀들이 겪었을 수치심을 생각하면 가슴에 송곳이라도 들어있는 듯 아프다. 조선작의 소설로 김호선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던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그녀들이 겪었던 고통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봉제공 등을 전전한 끝에 버스안내양이 된 영자. 하지만 만원 버스에서의 사고로 팔을 하나 잃게 된다. 절망 끝에 자살을 기도하지만 그마저 실패하고 결국 창녀가 된다는 내용이다. 1970년대 중반에는 버스안내양이 5만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82년 시민자율버스가 도입되면서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89년에는 안내원을 두도록 한 자동차운수사업법 33조가 삭제되면서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버스안내양이 등장한 이벤트 사진을 보면서 그 위에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겹쳐본다. 한 장의 사진에는 비교적 한산한 버스 안에서 활짝 웃는 도우미가 컬러로 찍혀있다. 또 한 장의 사진에는 극한 상황에 놓여있는 안내양이 흑백으로 찍혀있다. 하지만 이 두 사진이 전해주는 것은 색깔의 대비나 2009년3월17일과 1974년12월5일이라는 시간의 차이가 아니다. 흑백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어느 겨울아침이었을 것이다. 버스는 문을 닫을 수 없을 만큼 승객들로 가득 찼다. 밀다 밀다 지쳐버린 안내양의 몸은 완전히 버스 밖으로 나와 매달려 있다. 위태롭게 걸친 두 발과 연약한 두 팔이 그녀의 생명을 담보해줄 뿐이다. 차는 그 상태로 출발한다. 찬바람이 그녀의 몸을 마구 꼬집고 때렸을 것이다. 한 시대의 고통을 싸안고 달리는 처절한 광경이라는 표현 외에는 쓸 말이 없다. 그날 기자가 쓴 사진설명은 이랬다. ‘밀어도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만원버스. 안내양이 문에 매달린 채 차는 떠난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애환이 어떻고 고통이 어떻고 백날 떠들면 무엇 하랴. 이 사진 한 장이 모든 걸 다 말해주는 것을. 가난했던 시절, 공장에서 버스에서 흘렸던 그녀들의 땀과 눈물은 세월이 가도 여전히 서럽다.

posted by sagang
2007. 8. 15. 18:12 길섶에서
버스 안, 옆자리의 여자는 쉬지 않고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응, 학교 마치자마자 영어학원에 가야 되고…. 그 다음은 컴퓨터학원이라니까. 학습지 선생님은 여덟시쯤 오시기로 했어. 뭐?그전? 그 시간엔 중국어학원에 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선생님 오시면 잘 지켜봐 줘. 첫날이니까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보고 판단해야….”

직장에 다니는 주부인 것 같았다. 자신이 못 챙기는 아이의 공부를 언니에게 부탁하는 모양이었다. 회사에서 늦을 수밖에 없는데, 마침 학습지 선생님이 바뀌는 날이라 누가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화는 계속 이어졌다. 학습지 회사에, 언니에게, 아이에게…. 그녀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게 아니어서, 시끄럽다기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직장은 그만둘 수 없고, 아이의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고. 때문에 학원순례에 학습지까지 시키는 것일 게다. 아이들이란 자칫하면 게임에 빠져 숙제도 놓치기 일쑤니까. 하지만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댁의 아이는 언제 하늘을 보며 상상의 날개를 펴고, 언제 친구들과 손잡고 노래라도 불러보나요? 댁의 아이는….”
2005.4,9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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