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방구차'에 해당되는 글 1

  1. 2010.08.30 [사라져가는 것들 146] 방역차16
2010. 8. 30. 08:56 사라져가는 것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방역차 기억하시지요?
소독차라고도 부르고 방구차, 모기차… 그러고 보니 이름도 참 많았네요.
여름해가 서산에 걸리고 저녁 땅거미가 슬금슬금 골목으로 스며들 무렵, 방역차가 나타납니다.
아, 방역차보다는 소리가 먼저 달려오지요.
부릉 부릉이나 부웅 부웅~이 아니고 방․방․방 바아앙~ 에 가까운 그 요란한 소리.
그 소리 뒤에는 뭉게구름처럼 쏟아지는 연무와 특유의 냄새 -석유? 소독약? 그 무엇도 아닌- 가 뒤를 따라오지요.
멀리서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아이들의 귀가 쫑긋 세워지고 지금까지 하던 모든 동작을 멈추게 됩니다.
골목에서 놀던 아이도,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다녀오던 아이도,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던 아이도 미친 듯이 소리 나는 곳을 향해 달려갑니다.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그저 달리고 봅니다.
이른 저녁을 먹던 아이도 수저를 내동댕이치고 뛰쳐나갑니다.
어른들이 고래고래 소리 질러 봐도 소용없습니다.
그렇게 모여든 아이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연무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차를 따라 무작정 달려가는 것이지요.
손을 마구 휘저으며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꽥꽥 지르기는 아이도 있습니다.
차 꽁무니에서 내뿜은 흰색 연무가 순식간에 아이들과 동네를 지워버립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차량방역이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니 그 이후 성장한 사람들은 방역차에 대한 추억을 어딘가에 조금씩 숨겨놓고 있을 겁니다.
주위 몇 사람에게 넌지시 화두처럼 던졌더니 별별 사연이 쏟아져 나옵니다.
누구는 연무 속을 달리다가 전봇대에 부딪혀 별을 몇 개 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에 누워 있더라나요.
누구는 짐을 잔뜩 실은 자전거와 부딪혀서 물건 값을 몽땅 물어주기도 했고요.
또 누구는 정신없이 달리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고, 날은 어두워져서 울면서 돌아왔다지요.
다른 동네까지 따라가는 바람에 아예 길을 잃었던 한 중년 사내는 방역차 말만 꺼내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군요.
그런데, 어느 집 엄마는 방역차 소리만 나면 아이들을 일부러 내보내기도 했답니다.
소독약으로 전신을 흠뻑 적시면 이도 없어지고, 실컷 들이마시면 뱃속의 회충까지 전멸시킬 수 있다나요.
참 어처구니없는 믿음이었지요.
그렇게 골목마다 방역을 한 이유는 모기나 파리를 잡기 위해서인데요.
경유나 석유에 살충제를 섞어 방역기로 가열하면, 점화되면서 연기모양으로 쏟아져나가는 원리를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방역차의 소독효과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랍니다.
방역에 쓰이는 살충제는 농도를 무척 옅게 하기 때문에(짙게 하면 여럿 잡겠지요) 모기가 맞아도 잠시 기절하거나 행동이 둔하게 되는데 그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옷 속의 이나 뱃속의 회충까지 잡는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은 어디서 왔을까요.
구충제를 사는 것조차 쉽지 않아 학교에서 나눠주던 어려운 시절이었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나저나 아이들은 방역차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걸 왜 그리 좋아했을까요?
멀리서 바앙~ 바앙~ 하는 소리만 들려도 왜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졌을까요.
냄새가 좋아서? 그 냄새를 아련한 기억 속에 ‘향기’ 쯤으로 간직한 사람도 제법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좋을 리는 없습니다.
차라리 역하다는 표현이 더 가깝겠지요.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좀 엉터리 같지만 저는 환상이나 익명성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잠시 동안이라도 짙은 안개 속으로, 아니 구름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환상에 빠지게 해주거든요.
밤도 아닌데 앞이 캄캄하고,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쳐도 누군지 구별도 안 되고.
그렇지요.
세상의 눈에서 자신을 잠시 숨길 수 있는… 본능적으로 추구하게 마련인 익명의 바다에 잠시 풍덩 빠질 수 있는….
옆에서 달리고 있는 친구가 보이지 않을 때, 그에게도 내가 보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부터 오는 해방감.
쓸데없이 심각한 해석 붙일 필요 없다고요?
그 시절엔 별로 놀고 즐길 거리가 없어서 신기한 마음에 따라다닌 가지고 별 시답잖은 소릴 늘어놓는다는 말씀이지요?
뭐, 그것도 옳은 말씀이고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렇게 성장과정을 함께했던 방역차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영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대단위아파트촌은 자체 방역을 하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기회는 우연히 왔습니다.
남녘 땅 어느 자그마한 동네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떠나려는 순간 느닷없이 방역차와 만난 것입니다.
차 백미러로 뭉글뭉글한 연무덩어리가 들어오는 순간, 생각이고 뭐고 할 틈 없이
차를 세우고 카메라를 집어 들었지요.
아, 방역차!
차도 세련되게 바뀌고 소리도 달라졌지만, 꽁무니에서 짙은 연기를 뿜어내는 건 똑같았습니다.
연무가 구멍가게와 미장원과 기름집의 간판을 쓱쓱 지워버렸습니다.
금세 추억 속으로 달려 들어갈 수 있었지요.
헌데, 다른 건 똑같은데 결정적인 게 하나 달라졌더라고요.
시골이라 아이들이 없어서 그런지, 모두 학원에 갔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소리를 지르며 꽁무니를 따라가는 꼬마들은 없었습니다.
하릴 없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배회하던 조그만 여자아이 하나가 페달을 힘차게 밟아 연무 속으로 뛰어드는 게 전부였습니다.
한 여자아이는 용기가 없었는지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고요.
연무 속으로 사라진 아이의 뒷모습이 오랫동안 눈에 고여 있어서 그랬던지, 석양을 머리에 인 마을 풍경이 갑자기 쓸쓸하게 다가왔습니다.
혼자 방역차를 쫓아간 그 아이도 익명의 해방감을 누리고 있을까?
방역차도 아이도 사라진 골목은 적막 속으로 깊게 가라앉았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