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바탈가지'에 해당되는 글 1

  1. 2012.09.03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 8] 카라반사라이에서 춤을23

아슬란테페 발굴 현장.

아슬란테페 유적지 입구의 석상.

아슬란테페 유적을 찾아간다. 말라티아가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곳이다. 유적은 말라티아에서 6~7km 떨어진 오르두주라는 동네에 있다. 민가가 없어서 그런지 주변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중국 지안(集安)으로 광개토대왕릉을 보러갔을 때의 그 썰렁하던 풍경이 생각난다. 시간은 잠시만 한눈을 팔면 무엇이든 지우려 든다. 아슬란테페를 올려다보면 엄청나게 큰 능처럼 보인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비잔티움 시대에는 공동묘지로 사용했다. 그 이전에는 거대한 사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BC4000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이다. 이 유적지가 발견된 것은 1930년대였는데 1961년부터 발굴에 착수해서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초기에 참여했던 사람은 늙어서 세상을 떠났겠지? 하지만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는 부분이 더 많다고 한다. 발굴 속도가 늦은 것도 있지만 그만큼 거대한 유적이란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 유적의 가장 큰 특징은 BC3000년부터 BC1000년까지 형성된 7개 시대의 흔적이 떡시루처럼 층층이 쌓여있다는 것. 실제로 지금까지 발굴해놓은 8m 높이의 흙벽을 보면 시대별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유프라테스 강이 그리 멀지 않다. 물이 풍부하니 농사를 짓기 좋았을 것이다. 농경이 일반화됐다는 증거도 있다. 불에 그슬린 자국이 확연하게 남아있는데, 화재 때문이 아니고 불을 피워 요리를 한 흔적이다. 농사를 짓고 요리를 하는 고도로 발달된 사회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얘기다.

 

 

신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

가면 쓴 사람을 그린 벽화.

 

이 유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면 쓴 남녀를 그린 벽화. 남녀는 가면을 쓰고 무엇을 했을까. 가장무도회? 수천 년 전의 가장무도회라. 물론 가면을 쓰고 진행하는 제의(祭儀)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무도회라고 설정하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 몰래 땡땡이 쳐서 흐드러지게 놀아보려고 가면을 쓴 건 아닐까.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뭐. 요즘으로 보면 아버지 몰래 클럽에 놀러가는 젊은 남녀들. 상상이 과도했나? 기록 없는 오래된 것들은 얼마나 많은 상상거리를 제공하는지. 밖으로 나와 언덕을 오르니 시야가 사방으로 확 트여 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 저 골짜기 어디쯤에 논밭을 일궜겠지. 6,000년 전이 엊그제인 듯 시간 감각이 무뎌진다. 흙 언덕에 오르니 사람의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공동묘지였다는 증거다. 삶의 터전이었던 곳 위에 무덤이 들어서고 그 무덤도 잊혀지고 풍화되고. 수천 년 시간이 지금 내 앞에 엎드려 있다. 무덤을 지나 한참 더 걸어가니 저만치 유프라테스 강의 도도한 물결이 보인다. 드디어 인류 문명을 낳고 또 긴 세월 보듬어 키워온 강 앞에 선 것이다. 저 강은 기억하고 있겠지. 이 땅에 묻힌 인간들의 영욕을. 한낮의 태양은 그 영욕을 태워 버릴 듯 뜨겁게 불타고 있다. 출국 전에 누군가 챙겨준 면 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안전한 여행을 빌어준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따뜻한 응원이 등을 민다. 가자. 또 가보자.

 

공동묘지 자리. 뼈들이 드러나 있다.

저 멀리 구름 아래 유프라테스 강이 보인다.

라반사라이(karavan sarai), 즉 대상숙소는 말라티아의 구읍(舊邑)인 바탈가지에 있다. 바탈가지, 뭔가 친숙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마누라의 바가지'를 상상하지는 마시라. 대상숙소 앞에 서니 감개가 무량하다.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실크로드를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카라반사라이를 찾아 헤맨다. 모든 게 변한 지금 대상들이 실크로드를 오갔다는 유일한 증거가 이 카라반사라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은 거의 사라져서 흔적조차 지워버린 곳이 대부분이다. 헌데 막상 그 앞에 서니 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건 좀 심하게 현대식이다. 최근에 수리해서 오픈했다는 걸 감안해도 너무 세련됐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68˟76m의 사각형 건물에는 3방향으로 회랑이 있다. 그리고 정문 맞은편에 대상들이 묵던 숙소가 있다. 카라반사라이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따라서 밖에서 보면 마치 작은 성채처럼 생겼다. 문을 닫아버리면 날개가 없는 한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 마당은 정원식으로 꾸며져 있는데 한 가운데는 돌이, 양 옆으로는 잔디가 깔려 있다. 이곳에 말이나 낙타를 매어두었을 것이다. 이 건물은 오스만 제국의 17대 술탄 무라트4세 때인 1637, 재상이었던 무스타파 파샤가 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370년이 넘은 건물인데 지을 때도 지금의 모습이었을까? 내 괜한 의심증이 도진 것이기를 바라면서 안으로 들어가 본다. 실내도 무척 화려하다. 돌로 된 굵은 기둥과 샹들리에. 어지간한 호텔은 울고 갈 정도로 잘 꾸며 놨다. 한쪽에는 식사를 준비하던 화덕이 있다. 대상들은 여기서 잠을 자고 음식을 해먹었다.

 

카라반사라이 전경.

 

카라반사라이 실내.

아나톨리아는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실크로드를 통한 대상들의 왕래가 잦았다. 실크로드는 몇 가지 루트가 있었지만 동쪽의 끝, 즉 출발지가 중국의 옛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西安)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서쪽 끝은 이스탄불이었다. 이 개념을 신라에서 로마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금 억지스러워 보인다. 상품이 거기까지 갔다고 해서 실크로드가 연장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바탈가지도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다. 대상 교역이 크게 활성화 된 건 셀주크 투르크와 룸 셀주크 시대였다. 이 두 제국은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얻었다. 따라서 대상들을 보호하고 편의를 제공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당시 대상들은 9시간에 40km 정도를 걸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40km마다 숙소를 하나씩 세웠다. 우리의 역참처럼 관급(官給) 숙소를 만든 것이다. 숙소 이용료는 3일까지는 무료였다. 방이 없는 경우에는 마당에서도 잤다. 10시에 문들 닫았으며 아침 7시부터 출발했다. 이 숙소에 머무는 동안에는 마음 편하게 먹고 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물품들을 보관하고 지켜주기도 했다. 중간에 도적들에게 물건을 빼앗기게 되면 물건 값만큼 돈을 보조해 주기도 했다. 일종의 보험제도가 시행된 셈이었다. 그러니 교역이 활기를 띨 수밖에. 중국의 비단이 유럽의 귀족들을 환호하게 했는가 하면, 이탈리아 상인들이 가져온 유리병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카라반사라이 조감도.

카라반사라이에서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들.

 

아나톨리아 자체에서 생산되는 물품도 짭짤하게 팔려나갔다. 이곳에서 기른 양털은 유럽에서 인기가 높았다. 질 좋은 모직물을 뜻하는 앙고라라는 말은 앙카라 지방에서 수출된 염소의 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대상이 오가던 그 시절을 상상해본다. 낙타에 의지해서 수천km(이 길을 직접 걸었던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12,000km라고 썼다)를 오갔을 대상들. 오가는 길에 병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죽기도 했겠지. 한번 다녀가면 아이들이 훌쩍 자라 있었겠다. 하지만 그 아이들을 두고 또 길을 떠나야 하는 운명. 예나 지금이나 산다는 게 참 만만치 않다. 상념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와 보니 동네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어 있다. 아마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시절처럼 중국에서 대상이라도 온 줄 아는 모양이다. 바탈가지 읍장도 나왔다. 한국말로 된 설명서를 만들어 비치겠다고 요구하지도 않은 약속을 한다. 고마운 일이지. 대상들이 머물던 방은 오스만 시대의 전통공예품이나 미술품을 만들고 파는 공방으로 변신했다. 하긴 놀려두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다. 방마다 돌아다니며 각종 공예품을 만드는 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사람들 틈을 벗어나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어느 작은 방에 들어가 본다. 꼬마아이 하나가 커다란 개 그림 앞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 아직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 듯 음이 제멋대로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웠는지 그림 속의 개가 두 눈을 모으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 여기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놀러왔단다. 대상이 별을 꿈꾸던 곳에서 이젠 아이가 키를 키우고 있다.

아이는 피아노를 치고 개는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 

멀리서 온 손님들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청년.

 

땀을 들이고 있는데 누군가 빈 공간에 의자 몇 개를 가져다 놓는다. 배치가 완료되자 수염을 기른 청년 하나가 기타 같이 생긴 걸 들고 나온다. 자세히 보니 줄이 세 개뿐이다. 터키 전통악기 바흘라마란다. 이 카라반사라이에서 공연하는 청년인데 먼 나라에서 온 손님들에게 노래를 선물하겠단다. 터키 사람들이 이렇다니까. 손님 대접을 못해서 안달이다. 청년이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시작한다. 곡조가 무척 슬프다. 혹시 대상들이 먼 길을 걸으며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부르던 노래는 아닐까? 아니면 옛날부터 내려오던 터키 전통가요? 노래가 끝나고 물어봤더니 둘 다 아니다. 1960년대 어느 맹인가수가 부른 대중가요라고 한다. 왠지 한() 같은 게 깔려 있더라니. 대상하고는 상관이 없는 걸로 밝혀졌지만 가슴은 이미 촉촉해졌다. 앙코르를 요청했더니 이번엔 신나는 노래를 부른다.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을 그린 노래라는데 당신을 본 순간 세상은 끝났습니다라는 가사로 시작된단다. 호오! 멋진데. 졸지에 작은 축제가 벌어진다. 세 번째 노래가 나올 때쯤은 국적이고 뭐고 다함께 춤을 추며 어울린다. 나도 신나게 춤을 춘다. 어디서 그런 신명이 나왔을까. 내 나라에서도 사양하는 춤을(솔직히 말하면 출 줄 모르는) 터키의 시골마을에서 추다니. 혹시 내 전생이 멀고 먼 길을 걷던 대상은 아니었을까. 그 대상이 내 몸에 빙의되어 이렇게 춤을 추는 건 아닐까. 나도 나를 알 수 없는 신나는 시간이 그렇게 계속된다. 여행은 예측하지 못한 선물이기도 한다.

 

 

목걸이 만드는 처녀.

 

살구를 나눠주는 꼬마천사.

노래가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내게 급히 뛰어오더니 조그만 돌 하나를 내민다. 이게 뭐지? 돌 위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오늘 춤을 가장 열정적으로 춘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얼마나 급히 그렸는지 그림 위에 칠한 바니시가 덜 말랐다. 이곳에서 일하는 화가 중 하나가 작정을 하고 그린 모양이다. 에구, 이런 영광이. 그나저나 태극 문양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튼 이 나라 사람들 사람 감동시키는 데는 특별한 자질을 타고 났다니까. 또 한 번 가슴이 흠뻑 젖어버린다. 아무리 좋아도 한없이 앉아있을 수는 없는 법. 오른쪽 회랑을 통해 나오다가 눈에 확 뜨이는 아가씨와 만난다. 얼굴을 조금 숙인 채 목걸이 공예를 하고 있는데 예쁘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

사진 찍어도 돼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마음의 교환까지 안 될까. 사진을 보여주며 시시덕거리다 보니 주위가 허전하다. 이러다 혼자 남을라. 밖으로 뛰어나오는데 이번엔 한 아이가 앞을 가로 막는다. 손에는 허름한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이거 드세요

드세요? 사세요가 아니고? 비닐봉지에는 아직 덜 익은 살구들이 잔뜩 들어있다. 아이는 외국인들을 찾아다니며 그걸 나눠주고 있다. 저게 절대 공짜는 아닐 텐데. 받아먹는 사람도 있고 고개를 흔드는 사람도 있다. 고개를 흔드는 사람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미술의 거리 입구.

 

내내 카메라를 따라다니던 꼬마들.

 

한 사람이 아이를 부르더니 돈을 쥐어준다. 아이가 손을 흔들며 뒷걸음친다. 어라? 파는 게 아니네? 그럼 왜? 현지인에게 물어봤지만 자신들도 왜 저걸 나눠주는지 모르겠단다. 그럼 하늘에서 살구천사가 내려온 건가? 자신이 따온 살구를 관광객에게 나눠주는 아이, 돈을 달랄까봐 손사래를 치는 어른. 또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이의 얼굴에는 나눠주는 사람 특유의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오늘도 길에서 배운다. 아이와 헤어져 바탈가지 읍내 구경을 나선다. 바탈가지(Battalgazi)BC 3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도시지만 지금은 인구 16000명의 작은 마을일뿐이다. 1837년 오스만 제국이 주민들을 현재의 말라티야로 강제 이주시켰단다. 고대 성벽 등의 잔해가 곳곳에 남았지만 누구도 돌보지 않아 쓸쓸함만 더해줄 뿐이다. 작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 조금 걷다보니 단순한 골목이 아니다. 밖에서 볼 땐 오래된 골목 특유의 궁색함만 눈에 들어오더니 안으로 들어갈수록 풍경이 바뀐다. 담장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예쁜 조형물들이 손을 흔든다. , ‘미술의 거리구나. 소위 벽화마을이라고 부르는 통영의 동파랑마을이나 홍제동 개미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다. 이런 골목에서는 사람도 소품이 된다. 아이들이 가을날 잠자리 떼처럼 몰려다니다가 카메라만 들이대면 포즈를 취해준다. 한 녀석은 사진을 한 장 찍더니 조금 있다 제 동생을 데려온다. 골목을 벗어날 때쯤에는 제 누나와 함께 서서 카메라를 키다리고 있다. 에구, 귀여운 것들.

 

허름한 담장에 걸린 시인의 사진.

미술의 거리에 그려진 그림과 조형물.

미술의 거리 전속모델들(?)

무너져가는 집의 담장에 큼지막하게 확대한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다. 누구냐고 물으니 시인이란다. 시인이 왜 저곳에? 존경 받기 때문이란다. 부럽다. 시인이 존경받는 나라는 이미 부자다. 나는 사진 아래 쪼그리고 앉아 경탄의 눈으로 한없이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과 고풍스런 집들, 그 집들 사이의 골목. 그리고 담장의 그림과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 그들이 하나로 어울려 지상 최고의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가장 부러운 점은 아이들이 있다는 것. 학원에 가야하고 컴퓨터와 놀아야 하는 우리의 아이들은 절대 예술작품의 될 수 없다. 작품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넣는 아이들의 얼굴이 꽃처럼 환하다. 담장 앞에 여자들이 나란히 서 있길래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수줍게 웃으며 모델이 돼준다. 외부인을 경계하는 기색은 없다. 골목의 끝에서 울루 자미를 만난다. '울루'’ '거대한'이란 뜻을 가진 터키 말이다. '자미'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의미하는 터키어. 결국 울루 자미는 지역에서 가장 큰 사원, 즉 대사원을 가리킨다. 과거 바탈가지가 큰 도시였음을 말해주듯, 모스크는 제법 규모가 크다. 1224년 셀주크 투르크 때 지었다니까 굉장히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벽돌은 당시 지어진 그대로고 한쪽 면이 중앙 홀로 열린 형태의 4개의 방으로 구성돼 있다. 중앙 돔을 올려다보니 청색과 보라색의 타일로 장식돼 있다. 이 청색 염료는 이란에서만 생산되던 아주 귀한 것이어서 같은 무게의 황금과 교환됐다고 한다.

 

울루자미의 실내.

청색과 보라색으로 치장된 돔.

울루자미 안에서 바라본 하늘.

예배시간이 아니라서인지 사원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성소(聖所)에 왔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예의를 지켜야지. 빨간 카펫의 촉감을 즐기며 천천히 걷다가 한쪽에 가만히 앉아서 시간과 공간을 되새김질한다. 카펫은 온 몸을 감쌀 듯 편안하고 주변은 고요하다. 나는 지금 시간과 공간의 속에 있다. 여행자에겐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집을 떠나 낯선 땅을 헤매는 자체가 틈을 찾는 과정 아니던가. 삶의 본질 역시 그 틈을 통해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 온몸은 땀에 젖고 배낭에 짓눌린 어깨는 벗겨져서 쓰리다고 아우성이다. 그래도 난 지금 이곳에서 최고의 안온을 맛보고 있다. 마음은 고요하고 세상의 근심은 저만치 물러나 있다. 무엇을 성취하게 해달라고 간구할 생각 같은 건 없다. 세상을 떠돌며 산다고 소망조차 없지는 않지만 떼를 쓴다고 될 일은 아니다. 대신 오욕으로 가득한 업장(業障) 보따리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가벼워진 몸뚱이 주억주억 조아린다. 신이시여! 그 정도는 용서하소서.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