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페티예 화요장터 들어가는 길. 관광 삼아 나온 외국인들도 많다.

화요장터 초입. 온갖 과일과 채소들이 나와 있다.

거대한 규모
에 놀라다

927일 화요일. 지중해는 아직 여름의 잔양(殘陽) 아래서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서울은 지금쯤 가을 기운이 완연할 텐데. 쏟아지는 햇살은 날카로운 창날처럼 대지에 박힌다. 오늘은 페티예를 떠나는 날. 3일 동안 신세진 호텔에서 체크아웃 한다. 며칠 지나면서 다큐팀 스텝들과 제법 친해졌다. 작업과 행동반경이 다르다고 오고가는 정이 없으랴. “저희 때문에 깊이 봐야하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시는 거 아닙니까?” 이런 기특한 인사를 해주는 젊은 친구도 있다. “책을 쓰시게 되면 저를 주인공으로 해주세요. 감자튀김 좋아하는 투덜이PD." 이런 인사도 한다. 그럼, 그럼. 세상에 주인공 아닌 사람이 있나.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믿음 씨가 터키의 한국인 우대 이야기를 해준다. ”한국 사람들은 한 달에 1, 2달러만 내면 장기체류비자를 내줘요,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 수 있는 거지요이거 제법 쓸 만한 정보다. 하긴 부자에게 이 나라는 천국이다. ”휴양지 호텔은 하루 숙식비가 80달러에서 300달러까지 해요. 그것만 내면 세끼 식사는 물론 술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거든요유럽인들 중에는 호텔서 꼼짝 않고 먹고 마시고 수영을 하다 돌아가는 사람도 많단다. 그래, 돈만 있으면 어딘들 천국이 아니더냐.

고추도 각양각색

옥수수를 보니 고향생각이

가지도 가지각색.

오늘의 종착지인 카쉬까지 가기 전에 몇 가운데 들러야 한다. 맨 먼저 들를 곳은 페티예 화요장터. 매일 열리는 바자르와 달리 말 그대로 화요일마다 열리는 장이다. 우리의 5일장과 같은 곳으로 생각하면 된다. 장터는 수량이 제법 많은 큰 내를 낀 넓은 공터에 펼쳐져 있다. 우리네 장터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규모는 상상 밖으로 크다. 터키인, 외국인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간다. 외국인들에게는 관광코스 중 하나이기도 한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 장터로 들어가니 끝이 안 보일 정도로 포장이 쳐 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물건들이 나와 있다. 물건의 양과 종류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입구 쪽에는 채소와 과일 등이 주로 진열돼 있다. 사과복숭아자두수박토마토멜론에구, 숨차다. 따뜻한 기후, 축복받은 땅이라서 그런지 여름 과일, 가을 과일 없는 게 없다. 우리나라에 있는 과일은 모두 다 있어서 정겹기까지 하다. 채소도 마찬가지. 마늘감자양파배추고추호박강낭콩오이상추김장을 담가도 되겠다. 상추를 보니 느닷없이 삼겹살 생각이 나고 호박을 보니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진다. 고추의 모양도 각양각색, 가지의 색깔도 가지각색이다.

덩어리 치즈와 가루 치즈.

올리브 파는 아저씨.

치즈와 올리브 가게에서


조금 안쪽엔 치즈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덩어리로 된 것도 있고 가루로 된 것도 있고. 큰 놈은 거짓말 좀 보태서 설악산 울산바위 만하다. 치즈의 세계에도 양반 상놈이 있는지 고급치즈는 동물의 가죽으로 싸놓았다. 그래야 잘 보관된단다. 아침 아홉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장터는 활기가 넘친다. 사람들 생긴 것만 조금 다르지 고향의 5일장을 돌아다니는 것과 똑같다. “아따, 그러지 말고 일루 점 와봐. 싸게 줄 테니께손님들을 부르는 소리, “워매, 뭐가 요래 비싸대유. 좀만 깎아줘유물건 값 깎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장터 한가운데 서서 사진을 찍고 수첩에 뭔가 적고 있으니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 동네도 별 살 것도 없이 사돈 따라 장 구경 나온 사람들이 있나보다. 돋보기가 없는 게 한이라는 듯, 내 수첩에 코를 박는 아저씨에게 묻는다. “이 글씨 아세요?” “……????” 그럴 줄 알았답니다. 그놈의 호기심이 죄지 아저씨야 무슨 죄가 있겠어요. 정말 사돈을 만난 건지 장터 한 가운데에 자전거를 세우고 수다에 빠진 아저씨들도 있다. 옆집 강아지 새끼 몇 마리 낳은 얘기까지 해야 길을 비켜줄 모양이다. 그렇다고 큰 소리 치거나 짜증내는 사람은 없다.

곡물 파는 아저씨. 전형적인 튀르크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남편 보고 "챔피언"이란다.

올리브 가게 앞에서 기웃거린다. 점잖게 생긴 주인이 쓰레받기 같은 걸 들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걸로 주문에 따라 올리브를 담아주는 것이다. 올리브도 종류가 무지하게 많다. 수확한 지역에 따라 모양이 다르기도 하고 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기도 한단다. 우리의 장아찌처럼, 소금이나 레몬으로 간을 해서 시장에 낸다. 맛을 본다는 핑계로 먹어 보지 않으면 장터가 아니지. 살 것도 아니면서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본다. 우웩!! 역시 짜다. 호텔서 한번 당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이 선천성 기억상실증이란. 이번엔 곡물 파는 아저씨 가게. 여기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다양한 곡물이 있다. 명색이 촌놈인데도 아는 건 쌀달랑 하나? 아니다. 고춧가루도 있구나.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함께 장사를 하는데 두 분이 전형적인 터키사람이다. 그 옛날 몽골초원에 살던 돌궐족이 중앙아시아를 지나면서 적당히 피를 섞은 뒤, 아나톨리아 땅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과 가장 근접한 얼굴 아닐까? 아주머니는 남편 보고 챔피언이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무슨 챔피언이란 걸까? 무얼 잘하면 마누라한테 저런 소리 듣고 살까? “어이구, 이 화상아. 잘할 생각 접어두고 허구헌날 싸돌아댕기지나 말어.“ 왜 요즘 환청이 이렇게 자주 들릴까?

엄마를 조르더니 도넛 하나 얻었다. 그러나 또 조를 태세.

멜론을 준 아저씨. 제가 그렇게 불쌍해 보였나요?

멜론을 얻어먹다


근처 가게에서는 군것질거리를 파는데 대여섯 살 쯤 된 아들이 엄마 치마꼬리를 붙잡고 늘어진다. , 저 녀석 봐라. 안 먹어도 퉁퉁 불어있구먼.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아이의 손에 큼직한 도넛이 쥐어진다. 옛날 생각이 난다. 그 먼 길,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가면 풀빵도 먹고 싶고 사탕도 먹고 싶고그냥 돌아서는 할머니가 얼마나 야속했던지. 냉정하게 돌아서야 하는 당신은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 것이 얼마나 측은하고도 야속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할머니가 손자의 군것질거리와 바꿀 수 있는 건 눈물밖에 없었다. 할머니 잘못했어요. 그 속죄 언제나 다 하고 이 소풍을 마칠 수 있을까. 그렇게 혼을 내려놓고 서 있는 나를 과일가게 아저씨가 부른다. 아이 손에 들린 도넛이 먹고 싶어서 침을 흘리고 있는 줄 알았나보다. 멜론 한 조각을 쑹덩 잘라서 손에 쥐어준다. 아무래도 멜론을 사라는 건 아닌 것 같고, 동양에서 온 거지쯤으로 여긴 것 같다. 하긴 여행 내내 수염 한번 깎은 적 없고, 걸친 옷이라 봐야 추레하기 그지없으니, 그렇게 봐도 할 말은 없다.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에서 왔는데 인사 하나는 제대로 차려야지. 고맙습니다. 아저씨. 그런데 제가 그렇게 불쌍하게 생겼나요? 멜론을 우물거리며 과일채소전을 벗어난다.

전통과자 5상자를 사면 1상자는 거저 준단다.

빗자루. 참 곱게도 엮어놨다.

빵장수 아저씨.

세제설탕휴지치약칫솔생활필수품 가게를 거쳐, 젤리에 가까운 터키 전통과자를 파는 곳을 지난다. 다섯 상자를 사면 한 상자는 공짜로 준단다. 그래도 전 안사요. 어느 집 앞에는 곱게 짠 빗자루들을 세워놓았다. 옛날 우리네 빗자루와 비슷하게 생겼다. 솜씨도 좋지. 너무 고와서 방을 쓸기에는 아까울 것 같다. 좀약이나 바퀴벌레 약을 파는, 70년대가 생각나게 하는 난전도 있다. 그럼 그렇지, 왜 없겠어.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빵을 파는 아저씨를 만나니 반가움이 울컥 솟는다. 어릴 적 풀빵이나 호떡을 팔던 아저씨를 만난 셈이다. 이제부터는 공산품공예품 가게들이다. 가방 가게에는 물건도 다양하게 많고 다른 곳보다 손님도 많다. 터키는 다른 산업에 비해 가죽공예가 비교적 발달한 편이다. 신발가게도 샌들부터 운동화까지 다양한 품목을 갖춰놓았다. 그곳을 그냥 지나쳐 공예품가계로 들어가 본다. 부채나 보석함 등 온갖 공예품들이 그걸 만들었을 사람의 정교한 솜씨를 말해준다. 그중에서도 유리공예품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각종 등()이나 터키 특산물인 물담배 파이프에 특히 눈길이 간다. 내가 들어서자 종업원 청년의 눈은 카메라에 가서 꽂혀버린다. 물건을 팔겠다는 생각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버린 눈치다.

각종 유리공예품들.

공예품 가게의 사장님.

공예품 가게의 사장과 종업원


자꾸 와서 들여다보고 관심을 보이길래, “한번 찍어볼래?” 하며 손에 쥐어줬더니 입이 쭈욱 찢어지면서 카메라를 들고 온갖 폼을 잡는다. 찍힐 놈이 폼을 잡아야지 왜 네가 폼을 잡니? 또 다른 종업원이 다가오더니, 제 동료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걸 보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덥석 내 어깨에 팔을 얹는다. 한 방 찍어보자 이거지? 그래, 카메라 든 친구 기분이나 좋게 해주자. 나도 덥석 어깨동무를 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이리 키가 큰 거야. 잠시 뒤 들려오는 셔터소리. 뒤에 조명이 너무 강해서 분명 시커멓게 나왔을 거다. 아무렴 어떠랴. 그런 얘기를 수첩에 적고 있자니, 카메라를 내게 넘겨준 청년이 곁에 와서 들여다본다. 이 나라 사람들 호기심은 정말 못 말린다. “, 이 글자 알아?” 물었더니 대답도 없이 제 팔을 어깨까지 둥둥 걷어붙인다. 일본어 문신이 새겨져 있다. 이 친구 생각으로는 같은 동양인이고 글자가 낯설긴 마찬가지니 같은 나라 말인 줄 알았나보다. “그건 일본 글씨야. 난 한국 사람이거든. 코리아라고 들어는 봤나?” 영어와 한글로 코리아라고 써주니 뭘 좀 알아들었는지 수첩에다 자기들 말로 코리아라고 써준다. 에구, 귀여운 것. 앞으로는 한국을 많이 사랑해라. 그리고 가능하면 지금 문신은 지우고 한국 만세!’ 이런 걸로 새로 새겨봐.

내 카메라에 '눈독'을 들였던 청년. 잘 생겼다.

공예품 가게 사장의 이름은 야곱이이라는 장돌뱅이다. 가게 규모가 하도 커서 말뚝 박고 장사하는 사람인가보다 했는데, 매일 매일 장 따라 옮겨 다닌단다. 그는 다큐팀이 자기네 가게를 들러준 걸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코리언이라니까 곧바로 “Brother”가 터져 나오면서 특유의 잃어버린 형제를 상봉한표정을 짓는다. 이런 식의 반응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하지만 여러 번 겪어도 감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야곱은 한국인에 대한 우의로 스텝들이 산 기념품 값을 끝내 받지 않는다. 가게를 나오는데 사진을 찍었던 청년이 따라 나오더니 악수를 청하며 “Nice Korea”를 연발한다. 그래, 열심히 살아.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일본어 문신은 지워. 터키사람들은 왜 그렇게 한국인들을 환대할까. 진심일까? 장담하건대 진심이다. 어딜 가나 피를 나눈 형제라는 뜻의 칸카르데시라고 부르는 터키인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만큼 두 나라의 인연은 가볍지 않다. 인연의 뿌리를 찾자면 제법 아득한 과거까지 올라가야 한다. 우리 땅이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뉘어 있을 때, 돌궐족은 튀르크제국을 세워 몽골 땅을 호령했다. 그때 튀르크 제국과 고구려가 연합해서 수나라에 대항하기도 했다. 튀르크의 무한 카간이 사망했을 때는 고구려에서 조문사절단을 파견했다.

신발 가게.

한국인을 형제로 부르는 이유

고려 때에는 튀르크계의 일족인 위구르족이 개경에서 살기도 했다. 그때 지어진 야한 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회회아비가 바로 그들이다. 한국과 터키가 진짜 피를 나눈건 물론 6.25전쟁 때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터키는 150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이는 유엔군 가운데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터키군이 중공군을 맞아 싸웠던 평안북도 군우리 전투는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돌궐의 후예들은 백병전에 특히 능해서 일당백의 위용을 보였다. 5배 이상 되는 적에게 막혀 자신들도 위험한 상황이었던 터키군 1여단은 예상을 깨고 전멸 위기에 처한 미 2사단을 구하려 중공군 진지로 뛰어들었다. 착검을 한 채 알라후 아크바르(Allāhu Akbar 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며 돌격하는 터키군을 맞아 중공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중공군에게 터키군은 공포의 군대로 새겨졌다고 한다. 터키군은 한국전을 통해 750여명이 전사했고 32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터키인들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용사들을 코레 가지라고 부른다. 코레 가지들은 한국을 조국이라는 뜻의 바탄이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한국인이라는 뜻의 코렐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악기점 주인 아저씨.

타국에서 희생한 그들은 그렇게 한국을 잊지 않고 사랑하는데, 피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과연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진정 고마워하고 있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큰 소리를 칠 자신이 없다. 터키는 멀리 있는 그렇고 그런 나라일 뿐이고, 터키인들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는 게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여행 내내 환대를 해주는 그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반대로 터키인들은 한국인이라면 일단 감동할 준비부터 한다. 특히 2002년 한일월드컵이 거기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축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터키 국민들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했고, 2002년에는 1954년 이후 48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으니 나라가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더욱 감격한 건 한국과 치른 3, 4위전이었다. 한국인 응원단이 펼친 터키국기, 그리고 자국 선수들을 향한 응원과 박수에 그들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저들이 바로 피를 나눈 형제들이야. ‘형제의 나라는 다시 한 번 뼛속 깊이 다시 각인됐다. 우연이었든, 의도한 일이었든 경기에 지면서도 박수를 쳐준 건 참 잘한 일이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변하지 않는 우의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었으니.

아으, 셔!!! 석류 주스를 짜고 있다.

즉석에서 나무를 깎아 공예품을 만드는 할아버지. 원탁 위에 진열된 것들이 바로 새총이다.

뜨거운 전송을 받으며 공예품 가게를 나와 옷 시장 입구에서 전통악기를 파는 아저씨를 만난다. 아저씨는 “Happy birthday”를 연주하며 유혹한다. 에이, 아저씨 사람 보실 줄 모르네. 살 사람을 꼬여야지요. 악기 이름은 듀라’. 박수까지 치며 함께 놀다가 손을 흔들고 자리를 뜬다. 천변에는 카페가 늘어서 있다. 우리가 장터에 가서 국밥 한 그릇을 먹듯이 장을 보러온 사람들이 음식도 먹고 음료수도 마신다. 석류주스를 갈아 파는 가게 앞에 멈춰 선다. 신 음식이라면 냄새만 맡아도 저만치 도망가는 나지만 예쁜 색깔이 자꾸 유혹한다. 혹시 달콤하지 않을까? 그래, 도전!!! 내 인생에서 혹시역시로 바뀌지 않던 적이 있던가. 나는 그날 울면서 석류주스를 마셨다. 무려 3리라나 투자하고서. 장터 날머리에서 트럭을 세워두고 나무로 공예품을 깎아 파는 할아버지를 만난다. 수저머리빗홍두깨참 솜씨도 좋다.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건 새총. 어릴 적엔 겨울마다 저걸 들고 들이고 산이고 얼마나 쏘아 다녔던지. 터키 아이들도 저걸 갖고 노는구나. 동질성은 곳곳에 숨어있다. 이제 장구경도 끝났고 페티예를 떠날 시간이다. 안녕! 페티예. 3일 동안 행복했어.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이왕 읽어주실 거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보드롬 바닷가. 배들이 빽빽하게 정박해 있다.

보드롬 해변과 거리의 카페.

아잔, 그리고 무슬림의 예배

아주 오래된 빵집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는 길이다. ‘바람의 언덕에서 내려와 좁은 길을 따라 한참 내려가다 보니, 언덕 위에서 보았던 보드롬성 근처의 해변에 닿는다. 이곳은 아직 휴가의 여진으로 들끓고 있다. 벌거벗은 인파가 물고기 떼처럼 거리를 유영한다. 하긴 9월말이라고는 해도 30도를 웃도는 날씨니 바다를 떠나기는 아쉬울 것이다. 부두에는 호화롭게 치장한 요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몸을 부비고 있다. 부자들의 개인요트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세용이다. 요트를 세 내어 인근 바다에 나가 수영도 하고 배에서 만들어주는 즉석 해물 요리로 점심식사를 하는 재미가 근사하단다. 말 그대로 저 바다에 누워평화로운 한낮을 보낼 수 있다는 얘기다. 돈만 있다면. 대부분 유럽인들이 이용한다고 한다. 유럽에 비해서 비교도 안될 만큼 싼 가격에 호화로운 피서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보드롬이다. 해안가를 따라 각종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부터 카페, 음식점, 바들이 나란히 서 있다.

1720년에 지은 모스크(이슬람교의 예배당)

해변 탐색은 뒤로 미루고, 일단 빵집이 있다는 바자르(이슬람 특유의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 보통 시장을 이르며 상점이나 공방이 늘어선 골목도 그렇게 부른다)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보드롬성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일종의 쇼핑타운이다. 바자르로 들어가기 직전, 광장에서 생전 처음 듣는 낯선 소리와 마주친다. 노랫소리 같기도 하고 어쩌면 불경을 외는 소리 같기도 하고, 주문 같기도 한. 그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거리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 무슬림들의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이구나. 그러면 저곳이 이슬람사원인 모스크. 그나마 공부 좀 했다고 바로 눈치를 챈다. 이슬람교도들은 아침에 해 뜨기 전 잠자리에서 일어난 뒤, 정오를 넘긴 낮, 오후, 해가 질 무렵,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도(聖都)인 메카 쪽을 향하여 모두 다섯 번의 기도를 한다. 그 기도시간이 되었다는 걸 알리는 소리가 아잔이다. 물론 새벽에도 아잔은 울린다. 전에는 모스크 한쪽에 높은 미나레트(첨탑)를 세워 담당 무슬림, 즉 무아진이 육성으로 기도시간을 알렸다는데 지금은 모두 확성기를 이용한다.

기도를 하기 전에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다.

이 아잔은 노래에 가까울 정도로, 특유의 리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러 번 들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뜻은 알라는 지극히 크시도다. 우리는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맹세하노라. 예배하러 오너라. 구제하러 오너라. 알라는 지극히 크도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느니라라고 한다. 과연 조금 있으니까 무슬림들이 모스크를 향해서 꾸역꾸역 모여든다. 바자르나 인근에서 생업을 하는 사람들이리라. 모스크 입구에는 1720년에 지었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긴 세월에 감탄하고 있는데, 누군가 저 정도면 그리 오래된 모스크는 아니라고 일러준다. 무슬림들을 따라 슬그머니 모스크로 들어가 본다. 일찍 온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가 기도 준비를 하고, 미처 못 들어간 사람들은 마당에 자리를 잡는다. 묵묵히 기도를 준비할 뿐, 누구도 이방인을 경계하는 기색은 없다. 오른쪽 마당으로 가보니 수도꼭지들이 있고 그 앞에 나란히 의자들이 놓여 있다.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거기서 손발을 씻는다. 젊은이들이 제법 많은데, 그 중엔 곱상하게 생긴 친구도 우락부락한 친구도 있다.

모스크 실내가 차면 자리를 깔고 바깥에서 기도한다.

튀르크족, 즉 지금의 몽골 땅에서 살던 돌궐족이 언제부터 이슬람교를 접했는지는 딱 집어 말하기는 쉽지 않다. 아나톨리아로 땅으로 들어오기 훨씬 전인 8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돌궐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아바스왕조(7501258년에 동방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칼리프조)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이슬람교가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터키 인구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다. 하지만 이슬람교가 국교는 아니다. 터키공화국을 수립한 아타튀르크가 1928년 헌법을 수정하면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히잡을 쓰는 등 종교적 특성을 나타내는 행위는 금지된다. 이를 세속주의라고 하는데 종종 저항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세속화와 서구화에 대한 반대하고 이슬람으로 복귀하자고 주창하는 정치 세력이 등장하기도 했다. 세속화의 영향으로 터키에서 교리의 적용은 다른 이슬람국가에 비해 그리 엄격하지 않다. 음주도 비교적 자유롭다. 일부 터키사람은 농담 삼아 스스로를 사이비 이슬람교도라고 칭하기도 한다.

바자르로 들어가는 길.


바자르에서 만난 사람들

기도를 더 이상 방해하면 안 되지. 모스크에서 나와 바자르로 들어간다. 햇볕을 막기 위해 친 하얀 차양이나 나무 넝쿨이 멋진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관광객들은 느긋하게 거리를 오가고 갖가지 상품들이 손짓을 한다. 나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길을 걷는다. 동양인이 신기해서일까? 장사를 하는 사람마다 “Where are you from”을 아끼지 않는다. 하긴 보드롬을 돌아다니는 내내 동양인들을 본 적이 없다. 대답을 안 하면 물건 파는 건 뒷전이고 따라오면서까지 국적을 캐묻는다. 재팬? 차이나? 그러다 코리아라는 대답이 나오면 곧바로 “My brother!!!“가 튀어나온다. 17년 전에 헤어진 형이라도 상봉한 듯 호들갑스럽다. 물론 거기서 끝나는 건 아니다. ”네가 코리언이고 내 형제니까 특별히 ‘Good price’로 줄 테니 물건 하나 보고 가라.“는 말을 빠트리지 않는다. 그쯤이면 궁금해진다. 정말 한국인이 반가운 거야, 아니면 누구에게나 하는 장삿속이야. 설령 장삿속이라고 해도 불쾌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귀찮게 물고 늘어지지도 않거니와, 물건을 사든 안 사든 낄낄거리며 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점을 치는 아저씨도 있고 달랑 저울 하나 밑천 삼아 몸무게를 재주고 돈을 받는 아이도 있다. 자유와 활기가 넘치는 거리다.

바자르를 오가는 관광객들.

오래된 빵집은 골목 중간쯤에 있다. 하지만 그 앞에 서는 순간 실망감이 앞선다. 화려한 겉모습이 여느 현대식 빵집과 다르지 않다. 종업원들도 세련된 모습이다. 허름한 가게에서 늙어 꼬부라진 영감님이 빵을 굽고 있을 거라는 상상이 순식간에 깨져버린다. 들어가 봐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마침 내가 서 있던 집이 음식점 앞이었나 보다. 돌아보니 음식점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입에 환한 웃음을 베어 물고, 얼음을 가득 채운 오픈형 냉장고를 가르친다. 얼음 속에는 문어나 각종 생선이 터키 맥주 에페스와 함께 묻혀 있다. 그걸 먹고 가라는 것이다. 얼음 속에서 문어를 꺼내 싱싱하다고 흔들어 보이기까지 한다. 한 냉장고에 생선과 맥주를 동거시키다니 참 특이하다. 먹을 생각이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 아저씨도 그냥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카메라를 보더니, 식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굉장한 풍경이 있다면서 “Take photo”를 외친다. 떠밀리다시피 들어가 보니 식당과 바다가 맞닿아 있고 차양 아래 관광객들이 음식을 먹고 마시며 한낮을 즐기고 있다. 유유히 떠다니는 배들, 저만치에서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보드롬성. 자랑할 만도 하다.

우연히 들어가게 된 음식점. 맥주와 생선이 한공간에...

맥주와 음료를 즐기는 관광객들. 저만치 보드롬성이 보인다.

135년을 이어온 빵집을 가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눈치 없는 종업원이 다가와 ‘One beer’를 외친다. 콜라 한 잔이라도 팔겠다는 결의가 얼굴에 가득하다. 사진 찍으러 들어온 거라고, 사양하면서 나오는데 굳이 따라 나오면서 말을 건다. 당연히 “Where are you from”이다. 코리아라는 대답에 반색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혹시 터키 초등학교 교과서에 동양인을 보면 그렇게 물어야 한다고 나와 있는 게 아닐까 궁금해진다. 이 친구 끝내 따라 나오면서, 자기네 사장이 태국의 방콕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고 자랑한다. 코리아와 방콕이 엎드리면 코 닿을 정도의 이웃인 줄 아나보다. 결국 나를 사장에게 데려가더니, 이 사람이 한국에서 왔다고 입에 거품을 문다. 사장 역시 반색을 하면서 자신이 애인과 함께 방콕을 세 번이나 다녀온 사람이라는 걸 거듭 강조한다. 그래, 좋겠다. 네 번 다녀오면 확성기 들고 돌아다니겠다. 별로 통하지도 않는 영어로 수다를 떨다 작별하고 나오는데, 그제야 빵집 간판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SINCE 1876’. 가만 계산해보니 135년이다. 참 오래도 됐다. 10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빵장사 하나로 버텼다니, 뭔가 들을 만한 얘기가 있을 것 같다.

135년 된 빵집 내부. 너무 현대식이라 세월을 실감할 수 없다.

빵집 간판

빵집 주인은 친절이 뼛속까지 배어있다. 장사에 방해가 될 법도 한데 다큐팀이 영상장비를 들고 들쑤시고 다녀도 마냥 웃는 얼굴이다. 어쩌면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터키인의 주식은 빵이다. 쌀농사도 조금 짓기도 하지만 소비가 많지는 않다. 아직도 시골에 가면 빵을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에는 대부분 기계가 만든 빵을 사다 먹는다. 이 빵집도 전에는 식사용 빵만 만들다가 요즘은 케이크나 다이어트용 등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 판다고 한다. 그 말을 뒷받침 하듯 수백 가지의 빵들이 진열돼 있다. 그런데 운영방침이 좀 독특하다. 관광객이 몰려오는 여름을 중심으로 6개월 동안은 24

빵집 주인. 전형적 낙천주의자다.

시간 장사를 하고 겨울시즌에는 문을 닫고 논단다
. 그거 참 괜찮다. 아예 눌러앉아 취직을 해버려? 주인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빵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일종의 가족기업이다. 지금 함께 일하는 종업원들도 모두 친척이란다. 빵은 공장에서 새벽 3시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손으로 빵을 만들던 시절은 이제 아득한 옛날이 되었다는 걸 그의 말에서 읽는다. 그래도 한 장소에서 135년 동안 대대로 빵을 파는 사람들, 그 또한 장인정신이 아니고 무엇이랴.

케밥을 만들기 위해 돌려가면서 구운 고기를 자르고 있다.

케밥과 맥주 한 잔의 기쁨

빵집에서 나와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간다. 뱃가죽이 등으로 달라붙은 지 오래다. 차를 통한 이동이나 식사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춰야 하니 별 수 없다. 기내식을 제외하면 터키에서 먹는 첫 번째 식사다. 기대가 크니 더욱 배가 고프다. 프랑스와 중국에 이어 터키음식을 세계 3대 음식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터키 대신 인도를 앞세워 4대 음식에 넣기도 한다. 3대면 어떻고 4대면 어떠랴. 맛있다는 얘기겠지. 특히 다양한 종류와, 뛰어난 맛을 자랑하는 케밥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야외 음식점에 자리를 잡은 뒤 케밥을 시킨다. 터키에서는 글과 말을 몰라도 마음에 드는 음식점을 찾기 어렵지 않다. 식당 앞 큰 메뉴판에 음식 사진과 가격을 함께 적어놓은 곳을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들어가서도 메뉴판을 달라고 해서 맛있어 보이는 걸 가리키면 된다. 음료는 터키의 전통요구르트 아이란(Ayran) 외에도 콜라나 스프라이트, 과일주스 등이 있다. 보통 생맥주도 파는데 당연히 가격은 음료수보다 비싸다. 음식점을 찾는 또 하나의 팁은, 가능하면 화덕이 있는 집으로 가라는 것이다. 다양한 음식을 맛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맛도 어느 정도 보장된다. 화덕은 보통 입구 근처에 있기 마련이다.

터키에서 첫 식사로 먹은 케밥.

불에 구운 요리를 뜻하는 케밥은 그 종류가 셀 수 없이 많아서 일일이 구분하고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 고기를 매달아놓고 돌려가면서 구운 뒤 얇게 잘라서 야채와 함께 빵 사이에 끼워 먹는 되네르(Döner)케밥이다. 국민요리라고 할 수 있는 이 케밥은 길거리 노점에서부터 카페, 식당 등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양도 제법 많아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다. 잘 알려진 대로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송아지고기나 양고기를 재료로 쓴다. 닭고기를 재료로 하는 음식도 제법 많다. 케밥은 음료수와 함께 먹기도 하지만, 앞에 말했듯이 보통 아이란을 곁들인다. 터키의 요구르트는 걸쭉하기 때문에 보통은 떠서 먹는데, 아이란은 여기에 시원한 물을 타서 묽게 만든 것이다. 바다와 가까운 지역에서는 해물 요리도 먹을 수 있다. 나는 단 한 번 먹어봤는데 가격은 그리 싼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회는 없었다. 또 유명한 터키음식 중의 하나가 이스탄불 갈라타다리 부근에서 파는 고등어샌드위치. 일정 마지막에 이스탄불에 갔지만 시간에 쫓기는 바람에 이것 역시 먹어보지 못했다. 다음엔 꼭 먹어보리라 다짐하며 돌아섰던 아픈 기억이 있다.

터키식 피자인 피데를 만드는 청년.

다 만든 피데를 화덕에 넣고 있다.

조금 뒤 나온, 되네르케밥은 역시 맛있다. 허겁지겁 먹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남기는 사람도 있다. 막입인 나만 맛있는 걸까? 남들이 콜라나 생수를 시킬 때 눈총을 무릅쓰고 맥주를 시킨다. 흘린 땀이 얼만데. 몇 시간 전부터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했다. 가이드와 몇몇 일행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점심 먹으며 술 마시는 사람도 있네? 혹은, 기자라는 족속들은 역시그런 눈초리. 아무렴 어떠랴. 이 황홀한 순간을 포기할 수 없는 걸. 잠시 뒤 화덕 쪽에서 수런수런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청년이 나와서 터키식 피자인 피데 만드는 시범을 보인다. 식사를 해 준 이방인들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피데쇼를 보여주는 것 같다. 밀가루를 두드리는 장단이 아주 경쾌하다. 미안하게도 밀가루 반죽을 허공에 던져서 넓히는 장면은 한국에서도 여러 번 봤다. 하지만 신기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쳐다봐준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청년의 동작에 신명이 붙고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이른 아침 샘물처럼 맑은 얼굴이다. 하루 동안 만난 터키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다. 욕심이나 원망보다는 긍정과 희망이 가득 찬 얼굴들. 거기서 힘을 얻는다. ! 일어나자. 또 걸어야지. 어쩌자고 하늘은 저렇게 푸르단 말이냐.

 

추천과 댓글란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님은 참 아름다운 분입니다^^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