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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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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티아 고고학박물관 입구.

박물관에 전시된 칼.

말라티아 고고학박물관은 인근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한 곳이다. 지금 터키가 자리 잡고 있는 땅, 아나톨리아는 굴러다니는 돌 하나까지 문화재급이다. 그러다 보니 가는 곳마다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별로 크지는 않지만 아슬란테페 유적 등 다양한 유물들과 만날 수 있다. 아슬란테페 유적? 이름 자체가 낯설 테니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히타이트 제국 등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명멸한 문명들이 남긴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이라고 해두자. 낯선 단어만 나오다 유프라테스 강 하니까 귀가 번쩍 뜨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학교에서 들어본 단어 아니던가. 물론 되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일어난 유프라테스 강이 터키 땅에 있어? 에이, 금시초문인데. 이렇게 되면 또 막막해진다. 인류 역사를 설명하는 게 왜 이렇게 복잡하단 말이냐. 그나마 조금 덜 낯선 히타이트 문명부터 풀어가자. 이름이 낯선 사람도 인류 최초로 철을 만들어 사용하던 제국이라고 하면 아하! 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히타이트 제국은 BC 18세기경에 아나톨리아 북중부, 하투샤를 중심으로 형성된 왕국이다. 당시 유럽은 청동기 문명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철로 만든 무기를 휘두르는 자들이 나타났으니 양들 한가운데에 늑대를 풀어놓은 격이었을 것이다. 파죽지세의 히타이트 제국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과 시리아 북서부, 남쪽으로는 지금의 레바논까지,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장악했다. 그때 인류의 가장 오래된 평화 조약인 카데시 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다.

 

항아라등 도자기류.

고대 쐐기문자.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카데시라는 벌판에서 전쟁을 벌였다. 소설 람세스로 유명한 람세스 2세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 역시 용감무쌍했지만 무른 청동칼로 단단한 쇠칼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때 전쟁을 끝내면서 맺은 평화조약이 카데시 조약이다. 히타이트는 철 생산기술을 절대 다른 나라에 알려주지 않았다. 돈을 가져와 사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철값이 금값의 5, 은값의 40배까지 치솟기도 했다. 그렇다면 철을 기반으로 지중해가 마르고 아라랏산이 닳도록 번영을 누려야 했을 그 거대한 제국이 어떻게 갑자기 사라졌을까. 답은 예상 외로 좀 싱겁다. BC 1180년 이후 사라진 건 분명한데 뚜렷한 이유는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바다의 민족(그리스계 도리아인으로 추정)에 의해 멸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갑자기 그런 종족이 하늘서 떨어진 걸까? 엄청난 화재를 겪었다는 설도 있다. 또 전염병에 의한 멸망설도 있다.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전쟁을 할 때 히타이트에 사로잡힌 이집트 포로들은 천연두에 감염돼 있었다고 한다. 결국 군인들은 물론 히타이트 왕과 그의 후계자까지 천연두에 전염되면서, 급격히 쇠퇴하여 멸망했다는 설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생물학전의 원조가 아닐까. 아무튼 아무리 강한 자도 영원할 수 없다는 교훈은 분명히 남겼다. 주먹 세다고 너무 큰 소리 칠 건 없다. 히타이트 얘기는 이쯤 하자. 남의 땅의 문명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한반도에 찍힌 공룡발자국만 하랴. 지금 나는 히타이트 제국이 융성했던 땅에 서 있고, 내가 들어서는 이 박물관에 그들의 유물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설명이 좀 길어졌다.

 

화살촉 등 석기.

각종 장신구.

아기 옹관. 어린 아이의 뼈가 보인다.

박물관은 규모가 별로 크지 않다. 하지만 전시물들의 이력은 만만치 않다. 유물 중에는 BC 6000년경에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옛날 얘기를 많이 듣다 보니 면역이 돼서 BC 6000년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떡 끄덕 하지만 따지고 보면 놀랄만한 것들이다. 단순하게 비교해보자. 우리는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BC 2333년으로 본다. 그러니까 지금 내 앞의 유물들이 환웅이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뒤 웅녀를 만나 단군을 낳은 것보다 무려 3,600년 전쯤에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단군이 남긴 유물들이 있던가? 각설하고 고고학의 문외한인 내 눈에는 별로 특별해 보이는 게 없다. 돌화살 같은 석기시대 유물과 그 뒤에 만들어졌을 각종 토기, 그리고 히타이트 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칼들이 눈에 띈다. 아슬란테페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앙카라에 있는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폭풍의 신이 뱀과 벌이는 전투, 문의 사자, 타르훈자 왕의 조상, 생명의 나무, 풍요의 여신 쿠바바, 사슴사냥 등의 이름이 붙은 유물들이다. 이름들은 멋지지만 뭐가 뭔지 알 방법이 없다. 1986년 유프라테스 강에 댐을 만들면서 수몰된 유물도 많다고 한다. 역시 삽질은 반문명적이라니까. 밖으로 나오니 거리의 온도계가 34도에서 36도를 오르내린다. 서울보다는 높지만 이 정도야 뭐. 점심을 먹을 곳은 말라티아 전통가옥. 도심의 시네마 거리에 있는 이 가옥들은 1900년대에 지어진 2층집들이다. 2008년에 복원했는데 박물관, 예술의 집, 전통음식 음식점 등으로 쓰이고 있다.

 

1900년대 지어진 전통가옥.

우리로 보면 삼청각 쯤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음식 자체가 특별한 건 아니다. 역시 빵과 케밥이 주류. 하지만 역시 고급음식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입맛이 썩 당기지는 않는다. 내가 왜 이러지? 어디를 가도 없어서 못 먹는 내가 이번 여행엔 자꾸 입맛 타령을 하게 된다. 몸이 안 좋은 건가. 음식을 앞에 놓고 깨작깨작 속투정을 하다 보니 어제 이젯과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이젠 제법 친해져서 농담까지 스스럼없이 할 정도가 됐다.

일본 사람들 재미없어요. 심각해서 농담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한국 사람은 정말 재미있어요.”

정말? 혹시 일본 사람 만나면 한국 사람 재수 없다고 그러는 거 아냐?”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한국 사람이 훨씬 재미있어요. 한국 음식도 훨씬 맛있어요.”

그래? 내가 좀 재미있기는 하지. 그런데 한국에 갔을 때 뭐가 가장 맛있었어?”

김치찌개요. 그리고 라면.”

에이 참. 그게 뭐니? 입이 왜 그렇게 싸구려야?”

그런 대화를 나눴다. 헌데, 그런 말을 한 게 후회된다. 김치찌개와 라면이 싸구려라니. 그 맛있는 음식이? , 돼지고기 듬뿍 넣은 김치찌개 먹고 싶다. 고급음식 앞에서 김치찌개 타령을 하고 있자니 내 자신이 한심해 보인다. 나도 배부른 여행자가 다 된 게야. 그러다 벌 받을 텐데.

 

점식식사로 나온 빵과 샐러드.

괜히 말 시켰나봐. 이젯의 김치찌개에 대한 열망은 집요했다.

그런데, 김치찌개에 돼지고기 안 넣었으면 좋겠어요.”

? ? 김치찌개하고 돼지고기가 궁합이 얼마나 잘 맞는데 그래. 그거 없으면 고무줄 없는 거시기지.”

말을 하다 보니 아차 싶었다. 이슬람국가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실수를 한 셈이었다. 절에 가서 스님에게 왜 맛있는 새우젓을 안 드세요하면 기분 좋겠는가. 무슬림들은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걸까. 터키로 출발하기 전에 누가 농담 삼아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슬람국가에서 왜 돼지고기를 안 먹는 줄 아세요? 옛날에 어느 힘 있는 사람이 먹어보니까 너무 맛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만 먹으려고.”

, 그건 종교를 모독하는 발언이지. 혹시 먹는 것에서 초탈하라는 교훈 때문이면 몰라도. 이슬람에서 돼지고기를 금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근거가 분명하다. 역사 공부를 하느라 머리도 아플 테니 잠시 그 얘기를 풀어놓고 가자. 우선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꾸란)을 읽어보면 돼지고기에 대해 분명히 언급해놓았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빼고는 먹지 말라고 써놓은 것이다.

 

믿는 자들이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부여한 양식 중 좋은 것을 취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만을 숭배하라.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 마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먹을 경우는 죄악이 아니다. 하느님은 진실로 관용과 자비로 충만한 분이니라. (코란 2172~173)

 

 

말라티아의 일반 가옥.

 

말라티아 거리 풍경.

코란의 저런 말씀은 왜 나온 걸까. 일반적으로 돼지고기에는 여러 가지 병원균이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해롭다, 돼지의 품성이 게을러서 가까이 할 게 못된다, 고기가 부패하기 쉽기 때문에 사막의 기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고들 말 한다. 그것 말고도 돼지고기가 이슬람에서 환영 받지 못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막이나 평원에서는 이동 거리가 넓기 때문에 육포를 만들어서 갖고 다니며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한다. 헌데, 돼지고기는 그 조건에 완전 미달이다. 지방질이 많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는 건조되는 대신 부패되기 쉽다. 지금이라면 통조림이라도 만들었겠지만. 다른 동물과 달리 젖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도 선택받지 못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먹기만 하고 나눠주지를 않다니, 고연 것. 뭐 이렇게 미움을 받지 않았을까. 또 잡식성인 돼지야말로 풀만으로는 키울 수 없다.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 판에 곡식을 나눠주다니. 안 키우고 말지. 사막이든 산악지대든 초식동물의 배설물은 대부분 말려서 연료로 쓴다. 헌데 아무거나 먹어대는 이 돼지란 녀석의 배설물은 석 달 열흘을 말려도 냄새만 날뿐이다. 남 흉볼 것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것뿐인가. 다른 곳에도 쓸모가 별로 없다. 등에 짐을 나를 수 있나? 타고 적과 싸우러 전쟁터에 나갈 수 있나? 털로 실을 만들 수 있나? 그런 돼지고기가 한국에서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니, 이슬람 전파에 애로사항이 많을 것 같다.

 

간이 점포에서 옥수수 등을 팔고 있다.

지나가던 훌리아가 자신이 빠지면 큰 일 날세라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물론 음식 얘기는 끝난 지 오래였다.

터키 여자들이 가장 즐겨 입는 옷이 무슨 색깔인 줄 아세요?”

글쎄, 나는 뭐 여자들을 유심히 안 보는 점잖은 사람이라.”

킥킥!(뻥 치시네) 빨간 색 옷을 많이 입어요.”

?”

터키 국기가 빨간색이니까요.”

이거 진담이야? 사실이라면 대단한 애국심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가 이념싸움에 볼모로 잡혔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은 훌리아가 빨간 옷을 입었네? 진즉에 예쁘다고 해줄 걸.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터키가 가장 좋아하는 나라가 어딘 줄 아세요?”

으음~ 글쎄? 한국?”

물론 한국도 좋아하지만 미국을 가장 가깝게 생각해요. 경제적으로 가까운 곳은 유럽이지만.”

그럼,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어딘데?”

그리스요.”

터키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리스 사람은 터키 사람을 죽도록 싫어한다. 원래 이웃이란 건 그렇게 가깝고도 먼 것인가? 잠시 일본이라는 나라가 떠올랐다.

 

거리의 작은 가게.

그리스 하면 대개 발칸반도 남단의 반도 국가를 떠올린다. 틀린 건 아니지만 거기서 끝나면 반만 알고 있는 셈이다. 그리스는 국가 이전에 문화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정석이다.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둔 그리스 문화는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에 의해 헬레니즘 문화로 발전했고, 그리스도교와 함께 서양문화의 양대 축을 형성했다. 또 하나, 그리스는 국가라는 틀 이전에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이 먼저다. 그들이 문화를 꽃피운 곳, 즉 그리스화가 가장 잘 이뤄진 곳이 바로 지금 터키가 차지한 아나톨리아 반도다. 숱한 사람이 오가고 숱한 국가가 명멸했지만 그리스인들은 오랜 시간 이 땅에서 살아왔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면서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의 새 주인은 오스만이 되었다. 오늘 날 앙숙이 된 결정적 계기였다. 비잔티움 제국, 즉 동로마제국의 백성은 그리스인들이었다. 이름이야 어떻든 그리스인들로 보면 자신들의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오스만 체제하에서 간헐적으로 독립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리스라는 국가가 태어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18세기부터 불기시작한 자유주의·민족주의 운동이 그리스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829325일 정식으로 독립 국가를 수립한다. , 지금의 그리스라는 나라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악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패하면서 동네북이 된 터키는 왕년에 우습게 보던 그리스에게도 핍박을 당하는 처지가 된다.

 

거리의 온도계. 현재 온도 34도.

그리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고토를 수복하고, 소아시아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1919년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를 공격한다. 1920년에는 아나톨리아 서부 대부분을 차지했다가 후퇴하면서 도시들에 불을 질러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1921년에 또 다시 침공했지만 무스타파 케말에게 패퇴한다. 더 큰 미움의 씨앗은 1923년 체결된 로잔조약이었다. 세계 1차대전 패전국 터키와 연합국간에 체결된 이 조약에서 터키는 이스탄불을 지키는 대신 에게해의 섬들을 그리스에게 내주고 만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또 이 조약에 의해 자국 국민이 교환되면서 오스만 제국에 살던 130만 명의 그리스인이 터키를 떠났고 그리스 땅에 살던 40만 명이 터키로 돌아갔다. 터키인들은 지금도 바다만 바라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닭울음소리가 들리는 코앞의 섬들이 전부 그리스 영토니 볼 때마다 혈압이 오를 수밖에. 증오가 얼마나 큰지 터키에서는 TV에 그리스인이 나타나기만 해도 토마토를 던지며 괴성을 지른다고 한다. TV 깨질까봐 차마 돌은 안 던지는 것 같다. 이 정도면 견원지간이란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은 얼마나 '다정한' 이웃인지. 끝으로 정말 중요한 것 한 가지만 더. 우리나라 사람들, 그중 세계 역사 좀 안다는 사람에게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가 태어난 곳은 어디지요?’라고 물으면 터키라는 대답이 나오기도 한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혼동 때문이다. , 우리처럼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땅에서 계속 살아온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다. 헤로도투스든 사도 바울이든 소아시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터키 땅에서 태어난 것은 맞지만 터키 사람은 아니다.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멀리서 본 페르게 고대도시의 아고라.

고대도시로 들어가는 길의 안내판들.

지금은 폐허가 되어

930일 금요일 0830, 호텔 체크아웃. 오늘은 안탈리아를 떠나 지중해의 마지막 목적지인 알라니아로 가는 날이다. 도중에 페르게 고대도시, 아스펜도스 원형극장, 아폴론신전 등을 들러야하기 때문에 역시 강행군이 예고돼 있다. 하지만 육체적 피로 따위에는 더 이상 쫄지 않기로 했다. 몸은 늘 엄살을 부리기 마련이다. 자꾸 걷고 움직이다보면 알아서 따라오게 돼 있다. 배의 기름기가 허벅지의 근육으로 둔갑하는 그날까지 가열 차게 걷고 또 걸을 일이다. 오늘 첫 번 째 목적지인 페르게는 팜필리아의 고대도시다. 지금은 폐허가 됐지만, 현장에 가 보면 거대했던 도시의 규모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크게 보면 원형극장과 스타디움의 어원이 된 스타디온(stadion), 그리고 주거 도시로 나뉘어 있다. 우선 주거지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맨 먼저 로마의 문을 만난다. 바로 서울의 남대문에 해당하는 문이다. 지금은 거대한 돌덩이들의 집합체에 불과하지만 도시가 번성했던 시절의 위용을 전해주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그 문을 지나자나마 눈에 들어오는 것이 헬레니즘 시대의 옛 성문(hellenistic door)과 두 개의 탑이다. 탑들은 반쯤 무너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수리를 하는 중인지 구조물로 가려져 있다. 이곳의 건축물들은 도시가 형성된 이후 계속해서 덧 지어진 것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비잔틴의 건축 양식들이 떡시루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무너진 성곽.

옛 성문.

여기서 고대도시 페르게에 대해서 조금만 공부를 하고 지나가자. 안탈리아에서 15km 정도 떨어진 평원에 위치한 페르게는 안탈리아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팜필리아의 수도였다. 전성기에는 인구가 12만 명이었다니 어느 정도 큰 도시였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멀지않은 곳에 악수강이 흐른다. 이곳에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바로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다. 그리스 신화에는 BC 1200년 경, 의사 모프소스와 예언자 칼카스가 여러 종족으로 이뤄진 무리를 에올리아 지방에서 이끌고 와 이곳에 도시를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BC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 페르게를 장악하고 인근 도시인 아스펜도스와 시데를 공략하는 교두보로 삼았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 페르가몬 왕국의 지배를 거쳐 로마의 영토로 편입 됐으며 BC 129년에는 속주가 된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도 독자적으로 은화를 주조했다는 것으로 봐서 상당한 자치권을 갖고 번영을 누린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페르게는 쇠퇴를 거듭한다.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 중기까지는 그럭저럭 중요한 도시로 남아 있었지만 페르시아와 아랍의 침략으로 수차례 초토화가 되는 참화를 겪는다. 결국 주민들은 페르게를 버리고 이웃도시인 안탈리아로 떠나기 시작했다. 1078년에 이 지역은 셀주크터키 제국에 편입되고 1392년에는 오스만 터키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두개의 탑. 하나는 수리중?

곳곳에 이런 조각들이 굴러다닌다.

바울과 마가의 애증

이 페르게에서 우리는 반가운 이의 자취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리스도교 최고의 전도자 사도 바울(바오로, Paulus). 서기 47, 바울은 첫 번째 전도여행 중에 이곳을 방문했다. 성서에는 페르게를 버가라고 표기한다. 정작 유명한 건 바울의 전도활동이 아니라, 바울과 훗날 마가복음을 쓴 마가(요한)의 복잡한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바울의 첫 번째 전도여행에는 동역자였던 바나바, 그리고 마가가 순종자로 동행하게 된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누이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이 마가는 철딱서니가 없는데다 무척 나약했던 것 같다. 문제는 타우르스 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산맥을 넘어야 목적지인 팜필리아(밤빌리아)로 갈 수 있는데 귀하신 도련님 마가가 해발 2,000m의 험준한 산맥을 보고 아 뜨거라, 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그는 말도 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버렸다. (사도행전 13:13) 바울의 머리에서 뜨거운 김이 솟아올랐을 것은 안 봐도 비디오. 마찰은 2차 전도여행 때에 또 한 번 일어났다. ‘배신자에 대해 화가 가라앉지 않았던 바울은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기면서까지 마가대신 실라를 데리고 떠났다. 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훗날 마가는 다시 바울을 따랐으며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정성껏 돌봤다고 한다. 그 과정에 이러저러한 사연이야 없을까만은 우리는 종교가 내포한 본질을 보면 된다. 용서, 그리고 사랑.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

아고라 외곽의 기둥들.

멀리서 본 목욕시설.

로마의 문을 지나면서 관람객에게는 두 장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중앙의 큰 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아고라(Agora), 왼쪽에는 목욕시설이 펼쳐져 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다가 눈치를 보니 관광객의 대부분이 목욕시설 쪽에 몰려 있다. 그렇다면 나는 아고라 먼저.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폴리스(polis)에 형성된 광장을 말한다. 아고라라는 말은 시장에 나오다’, ‘사다등의 의미를 지니는 아고라조(Agorazo)’에서 나왔다고 한다. , 아고라의 원래 의미는 시장인 셈이다. 하지만 시장의 기능 외에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일상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나 사람들의 모임을 뜻하게 됐다. 지금 나는 1500년도 넘는 아득한 옛날에 세워진 아고라 앞에 서 있다. 일렬로 선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이 장관이다. 4세기에 형성된 이곳 아고라는 한 변의 길이가 75m의 정사각형 구조다. 단순히 물물교환이 이뤄지던 시장이 아니라 경제 활동과 여론 형성의 중심지였음을 웅변해주는 유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외곽에는 월세로 점포를 얻어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포진하고 중심부에는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물건을 파는 프리마켓이 펼쳐졌다고 한다. 그리고 맨 가운데에는 상업의 신 헤르메스 신전이 자리하고 있다. 아름다움과 조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기둥을 따라 천천히 거닐다가 어느 순간 환상의 문으로 들어가, 로마의 한 시민이 된다.

잔해조차도 아름답다.

아고라 한 가운데 있는 상업의 신 헤르메스 신전.

로마가 망한 이유는?

조금만 더 깎아 달라니까요” “이게 웬 삶은 호박에 이빨도 안 들어갈 소리여흥정하는 촌부와 장사꾼. 엄마의 치마꼬리를 붙잡고 달뜬 표정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아이. 한 중년남자는 머리에 구멍 뚫린다는 쇠고기 수입이 웬 말이냐고 침을 튀기고, 또 다른 쪽에서는 머리 허연 노인 몇이 옹기종기 앉아 호민관 거시기란 놈이 뻘건 물이 들었느니 퍼런 물이 들었느니 열을 올린다. 지중해서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 이마를 스치면서 문득 환상에서 깨어난다. 아아, 모든 것이 부질없다. 말없는 돌덩어리들만 폐허 속에 묻힌 아득한 시절을 노래한다. 발길을 돌려서 목욕시설 쪽으로 간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하얀 대리석들. 번성하던 시대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는 것. 로마가 왜 망했을까? 라는 질문에는 수십, 수백까지의 가설과 이유가 나온다. 훈족의 이동, 윤리적 퇴폐, 지도층의 질적 저하, 수도관 납중독, 페스트의 창궐. 혹시 목욕탕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치와 퇴폐의 극치를 달린 목욕문화 때문에 로마는 망했다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목욕시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목욕을 하기 위한 시설들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찜질방 그 이상이라고 보면 된다. 탈의실은 물론 냉탕, 온탕, 미지근한 탕, 증기탕, 마사지실까지 갖췄다. 구들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물론, 수영장보다 훨씬 큰 공중목욕탕의 욕조가 그 흔적을 미처 지우지 못하고 있다. 수세식 화장실과 오수 배출시설도 보인다.

공중목욕탕.

목욕시설의 수로.

중앙도로의 가운데를 달리는 수로는 물이 철철 넘쳐흘렀으며 집집마다 물을 받아썼다고 한다. 그 아득한 옛날에 말이다. 화려함과 사치는 차치하고 우선 그런 시설을 만들고 유지한 기술력에 혀를 내두르고 만다. 벽마다 구멍이 뽕뽕 뚫려있다. 총탄이나 포탄자국은 아닌데 저게 뭘까, 믿음 씨에게 물어봤더니 대리석에 구멍을 뚫고 철판이나 납판을 붙였던 자리라고 한다. 그것 역시 화려한 도시에 일조를 했을 것이다. 훗날 폐허가 되면서 너도 나도 훔쳐다 엿을 바꿔 먹었기 때문에 지금은 흉한 구멍만 남아 있단다. 궁금한 건 또 있다. 어떻게 주춧돌에 거대한 대리석 기둥을 세울 수 있었을까. 기둥이 들어갈만한 구멍을 판 것도 아닌데. 그 궁금증도 믿음 씨가 풀어준다. 주춧돌 가운데에 작은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서부터 밖으로 조그만 길을 낸다고 한다. 기둥을 세운 뒤 그 홈으로 쇳물을 부어넣으면 쇠가 식어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직접 보면 금방 이해가 가는데 말로 설명하려니 쉽지 않다. 큰 기둥을 붙일 때는 구멍을 여러 개 뚫었다고 한다. 넋이라도 있고 없고 구경 삼매경에 빠졌는데, 뭔가 마음을 끌어당기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동양인 부부다. 이렇게 피가 끌리는 사람들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한국인이다. 인사를 나누고 얘기를 해보니 45일 동안 터키를 일주하는 중이란다. 우와! 45. 부러워라. 앙카라에서 출발해서 흑해를 거쳐 지중해로 내려와서 에페소 등 에게해 인근을 가쳐서 이스탄불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여기도 목욕시설.

이렇게 홈을 파고 길을 낸 뒤 쇳물을 부어서 주춧돌과 기둥을 접합시켰다.

한국인 부부를 만나다

대화는 주로 바깥 분과 나눌 수밖에 없다. 부인은 자외선차단제를 두껍게 바르고도 모자라 스카프로 얼굴을 칭칭 싸맨 채 그늘에 숨어있다. 구경이고 뭐고 화살처럼 햇살을 쏟아내는 태양에 수박만한 감자라도 먹이고 싶다는 표정이다. 이미 얼굴이 까맣게 타버려 흑백 구분이 안 되는 남편은, 아내가 그러건 말건 이곳저곳 다니며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몸 동작이 다람쥐처럼 날래다. 터키는 20년 전에 배낭여행을 와보고 두 번째란다. 나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다. 20년 전에 유럽도 아니고 터키를 돌아다녔을 정도라면 그야말로 배낭여행의 선구자 아닌가. 그럼 그렇지. 얘기를 나누다보니 세계 구석구석 안 다녀본 곳이 없단다. 내가 늘 꿈꾸는 여행전문가를 만난 것이다. 부인은 이번에 처음 따라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이럴 줄은 몰랐다고 말끝마다 입이 두어 발씩 길어진다. ‘이럴 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개도 집을 나서면 고생이거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여행 내내 과일만 먹었다고 하소연이다. 그나마 과일값이 싼 나라니 다행이지. 게다가 지적 호기심이 넘쳐나는 남편을 따라다니려니 지칠 수밖에. 그녀의 얼굴에 김치, 된장찌개, 갈비찜그리운 이름들이 둥둥 떠다닌다. “선생님은 점점 힘이 나는데 사모님은 갈수록 지치지요?” 물었더니 어쩌면 그렇게 잘 아느냐고 용한 점쟁이라도 만난 듯 반색을 한다. 내가 며칠 뒤 귀국한다니까 따라나서고 싶은 표정이 역력하다. 무엇보다 대중교통만 이용하려니 힘들어 죽을 지경이란다.

물을 데우던 구들이 아닐까?

벽에 있는 저 구멍들이 바로 철판이나 구리판을 붙였던 흔적.

터키 여행에서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은 주로 오토뷔스(Otobus)와 돌무쉬(Dolmush). 오토뷔스는 우리로 치면 시외버스 혹은 고속버스. 터키의 면적은 우리 남한의 대략 8배 정도가 되는데 철도망은 낙후돼 기차를 이용하기는 쉽지 않다. 고속도로나 국도변의 휴게소주유소와 연계돼있는 마피아들의 방해 때문이라는 말도 있는데 설마 하면서도 아니라고 할 근거도 없다. 대신 도로망은 잘 연결돼 있어서 어느 곳을 가더라도 큰 불편은 없다. 바로 그 길을 달리는 주인공이 오토뷔스인데 시스템이나 서비스가 무척 발달돼 있다. 운행편수가 많고 시간대도 다양하며 장거리는 밤에도 운행한다. 보통 남자차장 한 두 명이 차와 간식을 제공하며 일행이 아닐 경우 남녀를 따로 앉힌다. 장거리 요금은 정찰제로 돼 있지만 돈이 없다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깎아주기도 한다니 도전해볼 만하다. 오토뷔스를 타려면 오토가르라는 곳에 가야 하는데 바로 우리의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장거리 버스의 승차권을 빌렛(Bilet)이라고 하는데 오토가르의 버스회사나 시내 대리점에 가서 사면된다. 같은 구간을 운행하는 회사가 여러 곳이기 때문에 시간대가 다양하고 선택의 폭도 넓다. 요금은 버스회사마다 조금씩 다른데, 당연한 얘기지만 비쌀수록 시설과 서비스가 좋다. 물론 장거리 이동을 할 때는 조금 비싸더라도 좌석이 편한 버스를 택하는 게 좋다.

노섬에서 파는 액세서리들.

각종 장신구를 파는 소녀. 제법 장사를 잘한다.

로마황제와 마주 앉아서

오토뷔스에서 내려서 좀 더 작은 지역으로 갈 때는 돌무쉬를 타면 된다. ‘봉고정도의 미니버스다. 이 돌무쉬의 뜻이 '다 차면 간다'라니 말 그대로 출발하는 시간은 운전사 마음이다. 대신에 내리고 싶을 때는 아무 곳에서나 내려달라고 하면 된다. 그러니까 버스와 택시의 중간쯤 되는 존재? 직접 타본 건 아니지만, 차장이 없기 때문에 버스비를 앞사람에게 주면 앞사람이 자기 또 앞사람에게 전달해서 기사에게까지 간다고 한다. 잔돈이 없을 땐? 그냥 큰 돈 내면 된다. 기사가 거스름돈을 주면 뒤로 또 뒤로 전달해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간에 가로채는 사람은 없는지 조금 궁금하긴 하다. 터키의 시골에서는 교통수단 그 이상으로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이 돌무쉬다. 물건이나 편지를 전달해주는 역할도 한다고 한다. 아무튼 터키에서 대중교통으로 여행을 하려면 바로 이 두 가지 교통수단, 오토뷔스와 돌무쉬를 잘 이용해야 한다. 다음에 이 땅에 오면 꼭 경험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마침 45일이나 그런 식으로 여행하는 부부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부인은 자신을 그렇게 끌고 다니는 남편이 미운 모양이다. 남편을 보는 눈에 검은자위보다 흰자위가 더 많다. 그러건 말건 남편의 얼굴은 여행의 희열이 넘쳐흐른다. 역시 여행 체질은 따로 있는 법. 여행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능력이 부럽다고 했더니 먹을 것까지 아끼면서 알뜰하게 다닌다고 대답한다. 그래, 돈 보다 의지가 중요하지. 가장 부러운 건 건강과 시간이다.

아크로폴리스. 역시 폐허다.

스타디온이라 불렀던 원형경기장. 마차경기와 검투가 벌어졌다.

스타디온에 흩어져 있는 돌들.

길의 끝에서 아크로폴리스(그리스 도시국가의 중심에 있는 언덕)를 만난다. 이 곳 역시 폐허가 된지 오래. 잡초만 무성하다. 페르게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폐허 속에도 아름다움은 있다. 함께 왔던 일행은 지금 어디쯤 있는지. 폐허의 영향일까. 조금은 쓸쓸한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온다.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던 노점상들이 길게 진을 치고 있다. 조금은 조악해 보이는 액세서리나 머플러 등을 판다. 노점을 펼쳐놓은 소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엊그제 안탈리아의 마리나항구시장에서 만난 소년이 다시 생각난다. 하지만 이 소녀는 그 소년보다 훨씬 씩씩하다. 수완이 좋은지 물건도 제법 잘 판다. 먼 발치에서, 아프지 않을 정도의 가난이 온몸에 미농지처럼 배어 있는 소녀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혼자 터벅터벅 스타디온으로 간다. 구르는 돌마다 새겨진 조각들이 자꾸 발걸음을 붙잡고 늘어진다. 뭐 하나 예술품 아닌 게 없다. 길이 234m에 폭 34m인 이 경기장은 마차경기와 검투사들의 결투가 주로 이뤄진 곳이라고 한다. 12000명 정도를 수용했다니 대단히 큰 경기장이다. 객석은 지금도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갖추고 있어서 소아시아에서 가장 잘 보존된 스타디온으로 꼽힌다. 객석 아래에는 30개의 아치가 받치고 있다. 아치 안을 들여다보니 하나하나 독립된 공간으로 돼 있다. 도대체 이 아치는 왜 필요했을까. 나중에 물어보니 세 개마다 하나씩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스타디온을 드나드는 출입구로 쓰였고 나머지 스무 개는 물건을 파는 가게였다고 한다.

스타디온의 아치들. 뒤가 트여 있는 것은 출입구, 막힌 것은 가게들이었다.

가게로 쓰이던 아치의 내부모습.

원형극장. 발굴이 덜 돼서 출입금지란다.

경기도 보고 쇼핑도 하고 술도 마시고 다목적 경기장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그렇게 즐길 때 글래디에이터(gladiator)라 불리던 검투사들은 삶과 죽음 사이를 수없이 오갔겠지. 설령 이긴다 해도 살육에 불과한, 그런 의미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어야했던 검투사들. 튀어 오르는 피를 보며 환호성을 질러댔을 로마시민들. 인간은 애당초 잔인하게 태어난 동물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역시 카메라가 부서질까봐 두 손을 번쩍 든 우스운 꼴. 돌무더기 위로 넘어졌으니 등뼈가 부러져도 할 말이 없을 뻔 했다. 평소에 착하게 살았기 망정이지. 원형극장에 가봤지만 발굴이 덜 돼서 입장 불허란다. 울타리 밖에서 까치발 몇 번 하다가 포기하고 돌아온다. 이곳은 어디를 파건 유물이 쏟아진다고 한다. 이 스타디온도 발굴이 덜 돼서 어디가 정문인지 아직 확인이 안됐단다. 로마인들이 마차경기와 검투사들의 혈투에 열광하던 스탠드에 앉아 지중해의 바람을 만끽한다. 돌은 무너지고 깨어졌지만 바람은 여전히 그때 그 바람이겠지. 검투사의 피에 흥분하는 로마의 귀족이 돼보기도 하고 칼 하나에 목숨을 맡긴 검투사가 돼 보기도 한다. 그 두 계급 사이를 흐르던 강은 그 얼마나 멀었던 걸까. 두두두두~ 말이 달리고 와와와~ 함성이 들린다. 좋은 세상이다. 동양의 끄트머리, 반도에 사는 한 사내가 지금 로마황제와 마주앉아 있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골목길 카페

사람은 없고 게으른 고양이만

흡연 삼매경에 빠진 그녀 

배에서 내리자마자 카쉬 탐색에 나선다. 이곳은 작은 도시고 유적이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천천히 돌아봐도 걸어서 3~4시간이면 족하다. 일행이 목표로 잡은 곳은 구시가지. 구시가지라고 해서 대단한 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자그마한 골목에 전통가옥과 기념품가게, 카페들이 늘어서 있다. 서울의 인사동쯤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여름이 지나서인지 관광객의 발길이 거의 끊겼다. 시끌벅적 호객을 하는 것도 아니고 좌판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소풍 간 날 학교 운동장처럼 조용하다. 이런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행복이다.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여행이란 완급을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달려가서 봐야 할 것도 있지만, 음미하듯 느껴야 할 것들이 있다. 관광과 여행이 다른 점이 그것이기도 하다. 외국에 나가 보면 한국인의 고질인 우르르병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깃발을 따라 우르르 버스에서 내려 우르르 기념사진 한 장 찍고 다시 우르르 버스를 타고 떠나는 과정의 반복. 그러고서 집으로 돌아간 뒤에 사진을 보면서 아! 내가 이런 곳을 다녀왔구나. 어느 땐 그놈의 우르르병 때문에 볼 일도 제대로 못 보고 우르르 버스를 타고 떠나는 해프닝도 벌어진단다. 가이드 역시 고객이 원하는 빡빡한 일정을 채우려면 양떼를 모는 목동처럼 우르르 끌고 다음 행선지로 떠날 수밖에. 본전 생각이 나서 그럴까. 그러려면 왜 떠나는 것일까. 집에서 달력사진이나 보고 있는 게 훨씬 경제적일 텐데.

흡연 삼매경에 빠진 아가씨. 너무 멀리서 잡았나?

아름다운 집도 있고

잡설이 길어졌다. 저마다 취향이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하거늘. 골목을 걸어 올라가다 2층집의 발코니에서 흡연 삼매경에 빠져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발견한다. 일행의 눈길이 힐끔힐끔 그곳으로 향한다. 그저 사내들이란. 그러는 너는? 사실 그만큼 매혹적이다. 터키인들은 담배를 무척 즐긴다. 믿음 씨도 버스가 서면 달려 내려가 담배부터 빼문다. 터키의 흡연자는 대부분 체인 스모커다. 세계 7위의 담배소비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흡연에 대한 터부가 거의 없다. 한마디로 흡연천국이다. 실내는 물론 정류장이나 공원에서조차 쫓겨 다녀야하는 대한민국의 흡연자들이 부러워할만 하다. 여성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23년 터키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여권(女權) 신장이 이뤄지면서 여성들도 담배를 피우게 됐다. 한 때는 흡연 여부가 사회적 지위를 상징했다고 한다. 여성들의 흡연은 우리처럼 은밀하지 않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많지만 터키에서는 별 차별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발코니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당당해 보인다. 골목의 총 길이는 150m 정도? 카펫을 비롯한 기념품 가게들이 주종을 차지하고 있다. 골목의 끝 무렵에서 우뚝 솟은 리키아 석관을 만난다. 거리 한복판에 이런 석관이 있다니. 지금까지 본 석관 중에서 가장 우람하고 완벽한 모습이다.

고대 석관에 기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청년-처녀들.

리키아 석관에 새겨진 고대 문자.

또 하나의 리키아 석관

아가씨의 저 당당한 모습을 보라.

그런데 석관보다 먼저 눈길이 가는 풍경이 있다. 석관과 그 옆 거대한 나무에 눕다시피 기댄 채 이야기를 나누는 청춘남녀. 남자 둘에 여자가 하나다. 이들은 아예 전용 카펫을 깔아놓고 한낮을 즐기고 있다. 이방인들은 먼 길을 찾아와서 봐야 하는 이 고대 유적이 동네 청년들에게는 그저 으슥함이 보장되는 휴식처에 불과한 모양이다. 아가씨는 무척 매력적이다. 이 동네는 미인들만 사나? 아랍풍의 푸른색 상하의에 포인트를 줘서 염색한 머리, 화려한 팔찌와 목걸이, 어깨에는 문신까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여인? 옛날, 미국 드라마 중에 내 사랑 지니인가? 하는 게 있었는데 거기 등장하는 여주인공이 연상되기도 한다. 촬영팀이 카메라를 들이대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무슨 얘기를 저렇게 재미있게 나누는 걸까. 근처 상가에서 일한다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젊은이들의 휴식처로 바뀐 이 석관은 BC 4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기단 위에 석관을 얹은 전형적인 리키아 양식인데 기단 부분에 리키아 글씨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무덤의 주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왕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석관 상단의 둥근 부분에는 네 마리의 사자 머리가 조각돼 있는데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아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다. 나도 석관 옆 나무그늘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힌다. 해가 건물 뒤로 숨는 기색이더니 골목에 땅거미가 슬금슬금 기어 다니기 시작한다.

카펫도 있고 방석도 있고 옷도 있어요.

골목은 조용하다.

내려오는 길에 노천카페에서 맥주를 한 잔 주문한다. 하루가 저물 무렵 배낭을 내려놓고 마시는 맥주의 맛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1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걷는 건 제법 힘든 일이기 때문에 잠깐씩 찍는 쉼표는 달콤하기 짝이 없다. 터키의 맥주는 에페스라는 상표 하나뿐인데 내 입맛엔 잘 맞는 편이다. 하긴 맛이 없더라도 목마른 여행자에겐 감로수처럼 달 수밖에. 맥주의 이름이 된 에페스는 도시 이름이다. 성경 에배소서()’로 잘 알려진 에배소가 바로 그곳. 꼭 가보고 싶은 곳이지만 이번 여행 코스에는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에페스는 기독교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곳이다. BC 10세기에 이오니아인에 의해 건설된 이 곳은 알렉산더대왕 이후 로마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면서 번창을 거듭했다. 철학과 문학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예술가와 상인들이 몰려들어 한때는 인구 25만 명의 큰 도시로 발전했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도 이 곳에 함께 들러 보석과 화장품을 샀다고 전해진다. 에페스는 또 서기 53년에 바울이 설교를 한 곳이기도 하다.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연설을 하는 바람에 아르테미스 신을 섬기는 군중들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지만 점차 기독교의 성지로 변해간다. 에페스가 유명하게 된 것은 성모마리아가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맥주를 서빙하는 노인. 저 깊은 눈, 득도를 한 것 같았다.

기독교 성지 에페스

에페스에서 1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산에는 성모마리아의 집이 있다. 독일인 수녀의 꿈속에 나타나는 경이로운 과정을 거쳐 1891년에 발견됐다. 그 전에는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떴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성모마리아는 예수의 부탁을 받은 요한을 따라 에배소로 갔으며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어쩌다가 시원한 에페스 맥주 한 잔이 성모마리아 이야기로 비약했지만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노천카페에서 음료수와 맥주를 서빙하는 이는 노인이다. 70세쯤 됐을까? 마른 몸피에 하얀 수염과 눈가의 짙은 주름. 그래도 노인에겐 궁상의 기운은 전혀 없다. 당당하고 빠른 동작으로 심해어처럼 손님들 사이를 유영한다. 그와 언뜻 눈길이 스쳤는데 오래 마주보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 깨달음을 얻은 성자의 눈이 저러할까. 일하는 노인, 아름답다. 일을 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게 아니라 당당해서 아름답다. 맥주를 거의 마실 무렵에 다큐팀의 멤버 한 사람과 엄상욱 씨가 신발가게 앞에서 흥정을 하는 게 눈에 띈다. 궁금해서 다가가보니 가죽신을 이것저것 신어보고 있다. 내가 즐겨 신는 캐주얼 형태의 신들이다. 나도 반 장난삼아 한번 신어본다. 비단처럼 부드러운데다 내 발에 꼭 맞는다. 옆에서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고, 지갑을 열라고 충동질이다.

카페에서 차를 즐기는 사람들. 줄담배를 피워댄다.

리어카 노점상도 지나가고.

나는 외국에 나가서도 거의 물건을 사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산 물건이 유용하게 쓰인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덜컥 신을 사고 말았다. 엄상욱 씨를 중간에 내세워 흥정했지만 많이 깎지는 못했다. ‘거금’ 35달러가 지출됐다. 터키는 공업 수준이 그리 높지 않지만 가죽공예는 세계적 수준이라고 한다. 그 말에 솔깃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만큼 마음이 느슨해졌거나. 다큐팀과 헤어진 뒤, 땅거미가 더욱더 짙어진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내려와 아타튀르크 동상 아래 자리를 잡고 앉는다. 전에도 말했지만 터키는 경치 좋은 곳이나 공원에는 예외 없이 아타튀르크 동상이 서있다. 이곳도 코앞에 짙푸른 바다가 펼쳐져있는 아름다운 공원이다. 바다 위의 배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힌다. 약간은 쓸쓸한 표정이 되어 앉아있는 내게 청년 하나가 슬며시 다가온다. 역시 시선은 사람보다 카메라로 먼저 간다. 터키의 청년들이여! 제발 카메라 좀 잊어주시게. 한참 카메라를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손짓, 몸짓으로 뭐라 묻는다. 잘 못 알아듣는 표정이자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영어로 얼마 주고 샀느냐고 쓴다. 이상한 친구일세. 글씨를 쓸 줄 알면서 왜 말로는 못 물어봐? 혹시 말을 못하나? 얼마라고 가르쳐줬다니 아무소리 없이 가버린다. 싱겁기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한참 뒤 돌아오는데 손에 SLR카메라가 들려있다. 내게 오더니 그걸 자랑 하느라 침이 마른다. 어라? 이 친구 카메라를 손에 쥐니까 말 잘하네?

나를 위해 춤을 춰주던 아이.

저건 춤이지 절대 국민체조가 아니다.

그의 직업은 웨이터

그래, 그걸로 사진 열심 찍어. 남의 카메라 부러워할 거 없잖아. 자랑이 끝났는지 또 아무 말 없이 가더니 이번엔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을 데려온다. 자기가 일하는 음식점의 요리사란다. 자기는 웨이터고. “I’m waiter!!!” 눈이 별처럼 빛난다. 자신의 직업에 저 정도 자부심을 갖는 사람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이쯤 돌아갔으면 아름다움만 남았으련만, 사진을 한번 찍어보겠단다. 그것도 내 카메라로. 그러라고 넘겨줬더니, !! 사진 실력이 엉망이다. 구도고 뭐고 깡그리 무시하고 모든 기력을 셔터 누르는데 쓰고 말았다. 공부 좀 해라, 공부해서 남 주냐? 청년이 돌아가고 난 뒤 슬그머니 사진을 지운다. 그가 떠난 자리에 예쁜 아이 하나가 지나간다. 손을 흔들며 하이! 하고 인사했더니 새침한 얼굴로 그냥 지나간다. 에구, 민망해라. 아는 척 좀 해주지. 그런데 그 상황은 순간적인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웬일인지 저만치 가던 아이가 돌아서 오더니 내게 손을 흔들며 하이! 하고 인사를 한다. 조금 불쌍해 보였나? 반갑고 예뻐서 껴안아주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유아 희롱죄로 걸릴까봐)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이걸 어쩐담. 이 녀석, 온갖 예쁜 동작을 다 보여주며 춤을 춘다. 이게 웬 떡? 카메라 셔터는 혹사를 당하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서서 박수를 친다. 저만치 갔던 아이의 부모도 돌아와 웃고. 이건 선물이다. 터키가 내게 준 선물이다.

아타튀르크 동상이 있는 작은 공원.

이제 어둠은 제법 짙어져 나무그늘 아래 머물던 빛을 거의 지웠다. 다큐팀은 어디로 갔는지 기척도 없다. 나는 아타튀르크 동상 아래에 또 다른 동상처럼 앉아 바다위의 배들을 바라본다. 그들도 이제 바다로 떠나고 싶은 열망을 잠시 접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동상도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타튀르크. 같은 세기를 살았던 위대한 독재자를 생각한다. 아타튀르크 이야기를 모두 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다. 그래도 우리는 그에 대해 겉핥기로라도 알고 갈 필요가 있다. 우리의 독재자와 이 나라의 독재자가 어떻게 달랐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아타튀르크의 본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이다. 아타튀르크는 아버지라는 뜻의 ‘ata'와 터키인이라는 의미의 ’tüurk'의 합성어다. 즉 터키인의 아버지, 국부(國父)를 뜻한다. 그밖에도 그는 케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그냥 아타튀르크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케말은 1881년 지금은 그리스 땅이 된 살로니카에서 태어났다. 케말이라는 이름은 중학교 때 수학선생님이 지어줬다고 한다. 무스타파는 완벽하다’, 케말은 성숙하다라는 뜻이다. 케말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뒤 군사 중등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스탄불의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어릴 적 군인의 뜻을 품고 정통코스를 밟은 셈이다. 이 땅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다.

아타튀르크를 아십니까

이 분이 바로 아타튀르크이시다.

케말을 민족적 영웅으로 만든 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졌던 갈리폴리 전투다. 영국 연방군과 프랑스군 20만 명이 독일을 공격하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로 상륙을 시도했다. 이에 맞서는 오스만군의 숫자는 불과 14000. 시쳇말로 새 발의 피였다. 하지만 사령관 케말은 군대를 갈리폴리 반대쪽의 차나칼레에 주둔시키고 연합군을 공격했다.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접전 끝에 케말은 결국 연합국 함대가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아냈다. 20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이 전국에 전해지면서 케말은 일약 영웅이 되었다. 이후 이빨 빠진 호랑이오스만 제국이 서구 강대국으로부터 침략 위협을 받게 되자, 터키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전쟁을 벌인 끝에 1923년 드디어 터키 공화국을 건국한다. 그는 공화국이 창건된 1923년부터 세상을 뜬 1938년까지 15년간 초대 대통령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가 그동안 한 일은 일일이 손꼽기 어려울 정도다. 무엇보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주의를 근간으로 서구식 근대화 개혁을 이끌어나가면서,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민의 긍지를 한껏 높였다. 또 새로운 문자를 도입해서 보급함으로써 문맹률을 제로에 가깝게 낮췄다. 이슬람 최상의 지도자를 나타내는 칼리프제를 폐지한 것은 물론 교육제도 개혁, 서양력 도입, 여성 참정권 부여, 라틴 숫자 도입 등이 모두 그의 시대에 이뤄졌다.

어두워져 가는 거리. 동상의 실루엣이 장엄하다.


그런 개혁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는 거의 전권을 휘둘렀다. 보는 시각에 따라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세월이 흘러도 독재자로 불리고 아타튀르크는 여전히 민족의 영웅으로 남아 있을까? 나 역시 그 정답을 아는 건 아니다. 다만 그의 행적이나 개혁 과정을 되짚어 보면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따뜻한 인간미를 간직했고 문화적 소양을 갖췄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바탕에 순수한 애국심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부패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타튀르크주의라고 불리는 케말리즘은 터키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덕목이다. 세상을 뜬지 7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아타튀르크는 민중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해마다 그가 숨을 거둔 1110일 오전 95분이면 전국에 사이렌이 울린다. 모든 차와 사람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를 기리는 묵념을 한다. 그의 초상화는 어느 곳에서든 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빠짐없이 동상이 세워져 있고 대도시의 큰 거리 대부분은 아타튀르크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아타튀르크, 이 위대한 독재자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여행을 하는 내내 나는 그런 국부를 모셨던 터키가 부러웠다. 국민소득이 낮아도 삶의 만족도가 높은 건, 아타튀르크라는 영웅을 가졌다는 자부심도 한 몫을 하는 건 아닐까.

불을 밝힌 부두의 유람선.

영웅전을 쓸 게 아닌 바에야 남의 나라 국부 얘기가 더 길어지면 재미없을 터. 남은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자. 그나저나 나는 지금 지치고 배고프다. 다큐팀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세상은 완전히 어둠의 그물 속에 갇혀버렸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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