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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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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에 해당되는 글 1

  1. 2008.06.16 [사라져가는 것들 63] 다듬이질4
2008. 6. 16. 10:4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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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내 딸 꽃님아!


밥상 앞에 혼자 앉을 어미가 안타까워 비린 것이라도 한 손 사둔다고, 네가 장터거리에 나간 새 다듬이돌과 마주앉아 있다.

다듬이질이라 하면, 둘이 앉아 가끔은 눈도 마주치면서 또닥또닥 박자를 맞춰야 제 맛인데, 너 없이 혼자 하는 지금은 헐겁기 짝이 없구나.

너 떠날 날 그리 머지않으니 이 다듬질 얼른 마쳐야 바느질 한 땀이라도 부지런히 할 텐데, 방망이 잡은 손이 신대라도 잡은 듯 이리 떨리니 황망하지 않을 수 없다.

애야, 꽃님아.

원앙금침이야 언감생심 꿈꿔본 적도 없지만, 햇솜 곱게 타고 천 넉넉히 끊어 이불 한 채 지어 보내는 것이 소망이었는데 그것마저도 못하는 어미가 되었구나.

헌 이불 홑청 벗겨 풀 먹이고 다듬질 질기게 해보지만 어찌 새 이불에 비하겠느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듯 부풀어 오르다가도, 옷 입은 채 물에라도 빠졌다 나온 듯 이리 까라지는 건 어인 까닭인지 모르겠다.

손가락 위의 모래처럼 흘러내리는 마음을 추스르려 애써도 눈물이 앞을 가려 일이 더디기만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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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꽃님아!

세월이 시위 떠난 화살처럼 빠르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구나.

네가 세 살 나던 해였을 게다.

네 아버지 피를 한 말 가웃이나 쏟고 가버리던 날, 이 어미는 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한에 몇 번을 혼절하였구나.

당장 쓰러져 죽어야 마땅할 것 같더니, 모진 목숨 스무 해 남짓을 또 살았다.

네 오라비 고등학교라도 가르친다고, 넌 기껏 소학교 문턱만 구경시켰으니 못할 일 참 많이 하였다.

헌데, 하늘은 우리 식구에게 왜 그리 가혹했단 말이냐.

네 오라비 역시 그 꽃 같은 나이에 데려가 버렸으니.

제대휴가를 나와,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신신당부하고 가더니, 며칠 뒤 도착한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라니.

그 곳 지리라면 손금 들여다보듯 할 네 오라비가 새삼 눈이 먼 것도 아닐 텐데, 무슨 연유로 지뢰를 밟았다는 것인지.

살아도 산 게 아니었구나.

이 한 많은 세상 떠나고자 양잿물을 마셨으나 그 또한 허락 받지 못했다.

사진 복사(헤이리)

내 딸, 꽃님아!

따뜻한 이밥 한번 실컷 못 먹인 네게 험한 일 참 많이 시켰다.

입에 풀칠이라도 해보겠다고 읍내 이불빨래를 도맡아 하다보니 어느덧 너도 ‘빨래처녀’가 돼 있더구나.

네겐 버거웠을 방망이를 쥐고 이 어미와 장단 맞춰 다듬이질을 하는 널 보며 어찌 안쓰럽지 않았겠느냐.

그런 날들 속에서도 5월의 바람처럼 부드럽고 순했던 너는 내게 불만 한번 말하지 않았다.

불만은커녕 항상 따뜻한 눈으로 어미를 위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린 참 많은 대화를 나눴구나.

“엄마, 다듬이질은 왜 하는 거예요?”

“천의 주름을 펴주기 위해서 하는 거지. 이거 보렴. 다듬이돌 위에 놓고 두드리니까 다림질 한 거 보다 더 매끄럽게 되지 않니? 천을 빨래한 뒤 다듬질하면 올이 촘촘해져서 더 튼튼해지고 광택도 난단다. 천을 매끄럽게 해주면 때도 덜 타고 찬 기운을 막아주는 효과도 있고.”

별처럼 빛나는 네 눈을 보며 더 가르치지 못한 이 어미가 부끄러워 속울음 운 적이 한두 번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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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꽃님아!

네가 어느덧 자라 처녀꼴이 나고, 나보다 더 힘 있게 방망이질을 하게 되면서 또 다른 가슴앓이가 시작되었구나.

어서 혼처를 정해야한다는 생각에 속이 바짝바짝 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범절이나 살림살이는 누구 못지않게 가르쳤다고 자신한다만, 시집장가 가는 일도 사람보다는 돈이 하는지라.

그런데 마침 성실하다고 소문난 네 신랑감을 보내주었으니 하늘도 끝까지 무심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가난하고 나이 좀 들었으면 어떠냐.

사람 하나 진국이고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면 그만 아니겠느냐.

혼사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절대 시집 안 간다고, 어머니 모시고 평생 살 거라고 울며불며 매달리는 너를 달래는 게 가장 어려웠느니.

내 어찌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하지만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내려면 그렇게 한 가지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이 어미야 언젠가는 네 곁을 떠날 테고, 그 때 네 곁에 든든한 서방이라도 있어야 안심하고 눈을 감지 않겠느냐?

너도 가시버시 이뤄 살면서 소생도 보고 서방 사랑도 받아봐야지 않겠느냐?

네 시집 역시 가난이 골수에 배었다니, 손바닥의 굳은살이 사라질 날은 없겠지만 그래도 새 봄에 꽃밭 일구듯 네 삶을 가꿔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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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님아, 꽃님아. 내 어여쁜 딸 꽃님아.

이제 몇 날 뒤면 네가 떠나겠구나.

숟가락 한 벌에 헌 이불 한 채 들려 시집을 보내는 이 어미 심정이 찢어져 펄럭거린다.

하지만, 내 딸아.

잘 살아야한다.

다듬질 마디마디 배인 이 어미의 눈물은 오간데 없이 털어내고 희망과 기쁨을 서리서리 담아 이불 한 채 꿰매리니.

아아, 왜 이리 자꾸 눈물이 흐르는지 모르겠다.

이 다듬질 얼른 마쳐야는데….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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