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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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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령휴게소'에 해당되는 글 1

  1. 2010.07.26 [사라져가는 것들 143] 미시령휴게소18
2010. 7. 26. 09:05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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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 애인과, 친구라고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동해바다 피서를 도모해본 적 있으십니까?
이왕이면 폼 나게 가야지 대중교통이 웬일이냐고, 졸부가 된 오촌 당숙을 혀가 닳도록 설득한 끝에 차를 빌리는 데 성공하지요.
그렇게 떠나는 길, 하늘의 구름 따위는 우습게 보일 만큼 온몸이 둥둥 떴을 겁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꿈은, 곧잘 끔찍한 현실을 동반하기도 하지요.
막히는 길이야 애당초 각오했던 일이고, 애인의 솜사탕 같은 수다도 있으니 별 문제될 건 없습니다.
한숨 쉴 일은 인제를 지나 미시령 초입에 접어들어서면서 시작됩니다.
이까지 갈며 잠들어버린 철없는 애인 때문이냐고요?
그건 아니고…, 아찔한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급경사, 급커브 길 때문이지요.
숙달된 운전사도 천지신명, 조상님 찾으며 납작 엎드려야 통과시켜준다는 길이 미시령 아닙니까.
하물며 지갑 속에서 잠만 자던 면허증 소지자가 남의 차 빌려 타고 길을 나섰으니, 지옥문으로 발 하나 들여놓은 셈이지요.
하지만 자존심 하나로 험한 세상 버텨온 몸,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나요.
등이 축축해지고 이가 뽀득뽀득 갈리지만, 여유 있는 척 해가며 부득부득 올라가는 길, 그게 바로 미시령입니다.
하지만 지옥길이 언제까지 계속되는 건 아닙니다.
미시령 정상에 거의 다가갈 무렵, 차는 어느 순간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새벽녘의 들개들처럼 우우~ 소리치며 몰려다니는 그 구름을 드디어 만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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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에서 고성(古城)처럼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미시령 휴게소.
지금까지 어디서도 보지 못하던 풍경에 당신의 입은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을 겁니다.
어떻게 이 높은 고갯마루에 저리 넓은 곳을 숨겨뒀을까 싶은 광장과, 조금은 이국적 양식의 휴게소 건물.
그리고 축축한 몸을 이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구름 또는 안개.
혹시 꿈을 꾸는 건 아닌가 싶어서 꼬집어본 사람인들 없었겠습니까.
갑자기 엄마 품에라도 안긴 것 같은 안도감에, 눈물까지 찔끔거린 마음 약한 사람도 있었을 테고요.
맑은 날에 만나는 미시령 정상도 천상의 후원처럼 아름답습니다.
주차장 난간에 기대어 동쪽을 바라보면 속초 시내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게 펼쳐진 동해바다.
쓔웅! 하고 몸을 날리면 바다로 풍덩 빠져들 것 같은, 그 터무니없는 거리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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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때문에 곧잘 통제되긴 했지만, 겨울이면 겨울대로 독특한 ‘맛’이 있었습니다.
흰 눈을 가득 이고 서 있는 설악의 줄기, 봉우리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으르릉 거리는 바다….
눈 때문에 휴게소에서 오도가도 못 한, 끔찍한 추억을 가진 분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요.
휴게소는 꽤 큰지라 대형식당은 물론이고 간이음식점, 특산물 매점, 기념품가게 등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넓은 곳이 늘 인파로 북적거렸습니다.
밥을 먹으며 차를 마시며, 그저 담배 한 대 태우며 이국적 풍경을 만끽하고는 했지요.
한계령, 진부령과 함께 동해로 가는 세 개의 고개 중 하나이자, 속초로 가기 위한 유일한 관문.
그곳, 미시령 휴게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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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을 얼마 전에 다녀왔습니다.
결론부터 전해드리면 참담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때 당당함을 자랑했지만 이젠 죽음을 코앞에 둔, 늙은 짐승을 보고 온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직장동료들과 동해안으로 워크숍을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미시령옛길을 기억해내는 순간 모두가 신이 났지요.
오가는 차로 가로 가득했던 길은 왕조가 버리고 간 옛 수도처럼 쓸쓸했습니다.
덕분에 느긋함과 게으름을 한껏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휘파람이 나올 정도로 행복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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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령 정상에 올라서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짙은 구름은 여전히 달려와 반기고, 그 속에 잠겨 있는 휴게소도 옛 모습으로 손짓했습니다.
눈물이 찔끔 솟을 만큼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터널이 개통된 뒤에는 나 몰라라 하고 외면하던 무심한 사람인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다람쥐가 숨겨둔 도토리 찾아먹 듯, 추억을 하나씩 꺼내들었습니다.
심각한 문제는 휴게소에 들어가면서부터 일어났습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눈보다 몸이 먼저 감지했습니다.
오가는 사람이 드문 거야 그러려니 했지만, 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큰 식당을 할머니 한 분이 지키고 있었는데 손에는 파리채 하나만 달랑 쥐어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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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건 화장실을 가다가 본 풍경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게 텅 비어서 폐허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각종 젓갈을 진열했던 냉장고에는 먼지가 가득하고, 특산물을 팔던 가게는 할 일 없는 선반만 남았습니다.
감자수제비, 우동, 해물라면… 분식점의 조리기구는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탁자와 여기저기 올라선 의자들은 더 이상 음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절망을 웅변하고 있었고요.
세월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은 건물 밖이라고 다를 게 없었습니다.
나무 기둥과 계단은 삐걱삐걱 비명이라도 지를 듯 낡았고, 지붕 역시 손을 보지 못한 지 오래인 것 같았습니다.
뒤로 돌아가 보니 더욱 참혹했습니다.
사람 손길이 닿은 지 오래인 듯, 곳곳이 잡초가 무성했고, 한 때 화려함을 자랑했던 많은 것들이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외출중’이라는 팻말이 걸린 ‘만남의 집’ 녹슨 자물쇠는 주인이 영원히 외출했음을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한 때 화려했던 것들이 안개 속에서 하릴없이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건 고통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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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무섭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터널이 뚫린 게 2006년5월이니 5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젊고 화려했던 휴게소가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이 되어 있다니….
‘빠르고 편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도 절감했습니다.
내려가던 중에 울산바위가 코앞에 보이는 길에서 잠시 서성거렸습니다.
울산바위를 모르는 분들은 없겠지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던 그 울산바위.
뭐랄까, 집 채? 어림도 없지요.
마치 커다란 산 하나가 서 있는 것 같은 위용을 자랑하던 그 울산바위도 터널이 생긴 뒤 쓸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 앞에 서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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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바람이나 새들만 넘는 고개, 미시령.
그 곳에 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람결에 전하는 부탁이 고작이었습니다.
‘동해에 갈 사람은 구경삼아서라도, 운전이 조금 부담스럽더라도 미시령 옛길로 가 보세요. 그리고 정상에 도착하면 꼭 휴게소에 들르세요. 화장실만 가지 말고 차라도 한 잔 사드세요. 밥을 먹으면 더욱 좋겠지요. 혹시 알아요? 그렇게 해서 그 추억의 장소가 조금 더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지….’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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