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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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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나무'에 해당되는 글 2

  1. 2011.05.30 [사라져가는 것들 160] 미선나무2
  2. 2009.08.10 [사라져가는 것들 119] 옹달샘11
2011. 5. 30. 08:30 사라져가는 것들

 

미선나무라는 이름과 처음 마주친 건 충북 괴산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던 중이었다. ‘세계에서 한 종밖에 없는 한국 특산식물이란 설명이 뇌리에 와서 박혔다. 그런 게 있는데도 아직 모르고 살았다니. 마침 그쪽 지역을 한 바퀴 돌려고 벼르던 참이었던지라,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해 볼 틈도 없이 괴산으로 향했다. 여름을 턱 밑에 둔 6월이었다. 미선나무는 충북 괴산군과 진천군, 영동군과 전북 부안 등 소수 지역에서만 자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괴산군 칠성면 추점리와 장연면의 율지리, 송덕리가 주 자생지라고 할 수 있다. 공부 안한 학생이 고민도 없이 시험문제를 찍듯, 사전 정보도 없는 내가 선택한 곳은 추점리였다. 도착해 보니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농촌마을이었다. 세계에 단 하나뿐인 천연기념물이 있는 곳이니 번듯한 안내판라도 있거나 뭔가 그럴 듯하게 꾸며놨으리라는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여기 저기 기웃거려 봐도 특별하다싶은 나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낭패가 있나. 마을을 한참 돌아본 뒤에야 트럭을 몰고 가는 청년을 만났다. 근처에 미선나무 군락지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선선하게 설명해 준다. 청년의 손끝이 가리킨 곳은 동네를 꽤 벗어난 곳이었다.

군락지는 양지바른 언덕 쪽에 있었다. 보호목책이 둘러쳐져 있어서 금세 눈에 띄었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 가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대체 무엇이 미선나무라는 거지? 목책 안에는 덩굴식물에 가까운 관목들만 낮은 가지를 뻗고 있었다. 키가 큰 활엽수일 거라고 근거 없는 예단을 했던 나로서는 당혹스런 풍경이었다. 사전에 공부를 안 한 탓이었다. 그 작은 나무들이 바로 미선나무였다. 터무니없는 기대 때문인지 실망스럽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언덕 아래 길가에서 옥수수를 파는 아주머니에게 미선나무가 맞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꽃필 때 와야 볼게 있지, 여름 다 돼서 미선 찾는 사람은 첨 보네유, 그렇구나. 나무가 아니라 꽃을 보러 와야 하는구나. 사진 한 장 못 건지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돌아와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보고서야 미선나무에 대해 조금 알 수 있었다. 미선나무의 이름은 한자어 尾扇에서 나왔다고 한다. , 열매의 모양이 둥근 부채를 닮아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열매의 위쪽은 꼭 옛날이야기책에 나오는 궁중 부채처럼 오목하게 패어있다. 말이 열매지 잎으로 착각하기 좋게 생겼다. 그 잎처럼 생긴 열매 속에 2개의 씨가 들어있는 것이다.

미선나무는 성격이 조금 독특하다. 볕이 잘 드는 산기슭을 좋아하는데 돌밭 같은 척박한 땅을 택한다. 나무줄기는 보통 원통형이지만 어릴 때는 각진 연필처럼 사각형이고 속은 비어있다. 1m 정도까지 자라며 3월에 잎보다 먼저 꽃이 핀다. 꽃은 보통 흰색으로 개나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 작은 편이며 훨씬 총총하게 달린다. 개나리처럼 생긴 꽃 모양 때문에 영어 이름이 흰색 개나리를 뜻하는 White Forsythia이다. 연분홍색 꽃도 있지만 흰색에 비해 흔치않은 편이다. 분홍색 꽃이 피는 것을 분홍미선이라고 한다. 또 상아색 꽃이 피는 것도 있는데 이를 상아미선이라고 하고 꽃받침이 연한 녹색인 푸른미선도 있다. 열매 끝이 오목하게 파이지 않고 둥근 모양은 둥근미선이라고 한다. 비슷하게 생긴 개나리꽃에 향기가 없는 것과는 달리 미선나무의 꽃은 뛰어난 향기를 자랑한다. 그 향기는 반경 2km까지 퍼진다고 한다. 꽃받침은 종 모양의 사각형으로 길이가 33.5mm이며 네 개로 갈라진다. 갈라진 조각은 달걀 모양의 타원형이다. 번식은 주로 꺾꽂이로 한다. 종자번식은 쉽지 않다고 한다. 최근에는 많은 연구를 통해 휘묻이, 분주법 등 여러 가지 번식법이 개발됐다.

미선나무는 1917년 정태현 박사가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서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1919년 일본인 학자 나카(中井)라는 사람이 새로운 종()이란 것을 확인했고, 1924년 이시토야 쓰토무(石戶谷勉)가 학계에 처음 보고함으로써 ‘Abeliophyllum distichum’이라는 학명을 얻었다. 1997년 산림청이 희귀 및 멸종위기식물 제173호로, 1998년 환경부가 보호양생식물 제49호로 지정했다. 내가 다시 미선나무를 찾아간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 이번에는 꽃피는 계절에 맞췄다. 목적지도 추점리가 아니라 장연면의 율지리로 잡았다. 하지만 두 번째도 그리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 율지리에 도착해서 마침 지나가던 아주머니에게 미선나무 많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뜨뜻미지근했다. “글쎄유. 우리 집에 두어 그루가 있긴 헌디, 많이 피는 데는 모르것는디유?” 이 동네가 율지리가 맞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틀림없단다. 동네사람이 모른다니, 이런 황당한 일이. 여기저기 둘러봤지만 미선나무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주민에게 물어봐도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려 추점리로 향했다. 역시! 그곳엔 미선나무들이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파른 언덕이고 목책을 둘러놓아서 접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되랴. 어렵게 만난 미선나무꽃인데.

미선나무를 그리 어렵게 찾아다니지 않아도 됐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서울에 돌아온 뒤였다. 야생화 사진을 찍는 지인이 창경궁에도 미선나무가 있다는 얘기를 해줬다. 지척에 두고 그 먼 길을 찾아다녔다니. 조금 허탈했지만, 어차피 한 번 갔어야할 자생지를 다녀왔다는 걸 위안으로 삼고 창경궁으로 찾아갔다. 홍화문을 지나 옥천교를 건너지 않고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춘당지로 가는 길목. 미선나무꽃들이 지천이었다. 토양이 달라서일까. 꽃들이 얼마나 탐스러운지 마치 꽃방망이 행렬을 보는 것 같았다. 자생지에서는 드물었던 분홍미선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미선나무를 모르는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나는 보물이라도 만난 듯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을 원()으로 바꾸고 벚나무를 심었던 일제의 잔재를 파내는 김에, 미선나무 같은 우리 고유 수종을 옮겨 심은 모양이었다. 객지에 와서도 자리를 잘 잡은 걸 보니 번식이 그리 어려운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유일의 희귀식물 미선나무, 그 나무가 이 땅에 뿌리 내리게 된 데는 깊은 뜻이 있을 터. 이왕이면 전국 곳곳에 퍼트려서 이 나라의 봄을 가장 먼저 여는 꽃으로 자리 잡게 하면 어떨지. 향기가 2km나 퍼진다니 그 얼마나 황홀한 봄이 될까. 미선나무 곁에서 생각은 자꾸 곁뿌리를 내리고, 고궁의 봄은 초록빛을 자꾸 토해내고 있었다.

 

posted by sagang
2009. 8. 10. 09:20 사라져가는 것들

‘괴산(槐山)은 충청북도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군청소재지다.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이 대치하던 시기에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날만 새면 드잡이하는 전장이기도 했다.’ 괴산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의 전부가 이 두 줄이었다. 그런 괴산을 느닷없이 찾게 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풀 한 포기에도 애정을 쏟지 못해 안달이 난 어느 선배 덕이었다. 그는 최고의 ‘문화탐사가’이기도 하다.
“괴산에 가면 말일세. 기가 막힌 샘이 하나 있다네. 말로 설명하긴 그렇고… 언제 나하고 한번 가보세.”
기가 막힌 샘이라…. 샘이라봐야 물이 솟아서 고이는 곳이겠지, 어찌 생겼으면 기가 막힌다는 표현이 가능할까. 궁금증이 생기면 못 참는 성격이라 그 선배가 ‘틈’을 내기도 전에 혼자 괴산행을 감행했다. 같이 못 가는 걸 영 아쉬워하던 선배가 샘의 위치를 가르쳐주면서 미선나무 군락지도 찾아가보라고 당부했다. 꽃피는 시절이 아니니 별로 볼 건 없을 거라는 첨언과 함께…. 미선(尾扇)나무는 열매의 모양이 둥근 부채를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데, 한반도에서만 자란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충북 괴산과 전북 부안 등에만 분포돼 있다. 귀한 나무라니 보지 말라고 해도 찾아봐야할 참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충북 괴산군 장연면추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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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까지는 별 무리 없이 도착했지만, 아무리 잘 난 내비게이션이라고 해도 미선나무가 어디서 자라는 지까지 가르쳐줄 수는 없는 법. 워낙 일찍 도착한데다가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바람에 동네를 한 바퀴 돌 때까지도 사람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난감해져서 두리번거리는데 저만치서 젊은이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동네 사람인지 아니면 근처에 일 때문에 온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세주라도 만난 양 반갑게 달려가서 길을 물었다.
“미선나무요? 저~쪽 아닙니까. 저 길로 오셨을 테니 다시 돌아가서 삼거리가 나오면 좌회전 하세요. 목책을 쳐놨으니 바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한 청년이 선선하게 길을 가르쳐줬다. 그러던 참에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청년이 말을 자르고 나섰다.
“아니야, 이 분이 찾는 곳은 거기가 아니라 약수터 미선나무일 거야. 여기서 나가서요. 오시던 길로 계속 가면 고개가 하나 나타나고, 그 고개를 넘으면 약수터가 나오거든요. 거기에도 미선나무가 있습니다.”
가만? 듣다보니 약수터란 곳이 선배가 가르쳐 준 그 ‘기가 막힌’ 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두 곳 모두 가보지요 뭐. 저야 다 보면 좋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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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미선나무 군락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미선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조차 한 적이 없는 터라 아예 목책을 목표로 가다 보니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헌데 문제는 미선나무를 촬영하는 게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3월에 핀다는 꽃을 7월에 구경할 방도야 애당초 없는 것이고, 열매가 열렸는지는 목책을 넘어 들어갈 수 없으니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언덕 위의 미선나무 군락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중에 시선을 잡아당긴 것이 옹달샘이었다. 언덕 밑에 샘 하나가 수줍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네와 꽤 떨어진 곳에 있으니 인위적으로 파서 만든 우물은 아닐 테고, 분명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는’ 옹달샘이 틀림없었다. 산기슭에서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걸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 둘 돌을 쌓고 지붕까지 만들어 보호하기 시작했으리라. 그런데 샘은 더 이상 샘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입구에는 모터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고, 그 모터에 주둥이를 댄 파이프 하나가 샘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샘 바닥은 거의 말라 있었다. 샘이 마른 뒤 파이프를 박은 건지 파이프를 박아서 샘이 마른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산 거북이 등처럼 세월이 새겨져있는 옹달샘에 파이프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파이프를 박아 물이 나올 정도면 수원이 끊긴 샘은 아닐 텐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안내판 하나를 발견했다. ‘추점유샘’이라는 고색창연한 이름까지 있는 오래된 샘이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심한 가뭄이 들어도 맑고 깨끗한 물이 언제나 솟아 오른다하여 이곳 샘을 ‘류(流)샘’이라 불러왔으며… 마을 사람들이 옻이 오르거나 두드러기가 났을 때에는 이 샘의 차가운 물로 씻어 효험을 보았다하여 ‘옻샘’이라 부르기도…‘
심한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는 샘이 어찌 나그네에게 물 한 모금 줄 수 없는 초라한 모습이 되었을까. 심지어 안내판 한편에는 ‘먹는데 부적합’하다는 경고문까지 있었다. 두드러기도 낫게 해줬다는 샘이 어느 날 저 홀로 독을 품어 못 먹게 됐을 리는 없고, 이 역시 인간들의 횡포가 만들어놓은 결과가 아닐까. 그러고 보면 그 흔하던 옹달샘들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옛날에는 어지간한 산기슭마다 하나씩 있었는데…. 길을 지나던 나그네에게, 목마른 나무꾼에게, 밭을 매던 아낙네에게 시원한 물을 주던 그 옹달샘들. 저 홀로 물이 퐁퐁 솟아오르던 곳에 사람들이 지나며 돌도 둘러놓고 주변도 치우고 해서 쉼터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도시에 가까운 곳에 있는 샘은 약수터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여전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대부분은 세월과 흙에 쓸려 그 흔적을 지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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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넘으면 ‘약수터’가 또 하나 있다하니 부지런히 찾아갈 수밖에. 선배가 이야기한 옹달샘과 같은 곳이라면 추점유샘을 보며 불편해졌던 마음을 씻어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발길을 재촉했다. 샘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선배가 침이 마르게 칭찬하더니 유명하긴 한 모양이었다.주변에 차가 여러 대 서 있고 꽤 많은 사람들이 복작거렸다. 아예 판을 벌이고 음식을 해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역시 입간판이 서 있고 ‘솔티찬샘물(옹달샘)‘이라는 샘 이름과 함께 유래를 써놓았다.
‘솔티마을 앞을 지나던 한 나병환자가 찬 샘물을 마신 후 보리가리 아래서 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신기하게도 나병이 깨끗이 치유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으로… 지금도 솔티재를 오가는 나그네들이 즐겨 찾아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나병환자를 낫게 했다니 보통 샘은 아닌 모양이다. 샘 쪽으로 내려가 보니 역시 돌로 지붕을 만들어놓은 조그만 샘이 있었다. 돌 틈에서 물이 용솟음치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샘의 규모에 비해 수량이 만만치 않았다. 샘이 이고 지고 살아왔을 긴 세월을 주변의 돌과 파란 이끼들이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샘 주변에 난 풀들이었다. 견문이 부족해서겠지만,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풀들이 물이 솟아오르는 바위주변을 파랗게 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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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셔봤다. 시원한 느낌이 입과 목을 통해서 흘러내려가더니 내장까지 청량해지는 느낌이었다. 매일 마시는 ‘정수된’ 강물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아! 이 맛 때문에 사람들이 좋은 물을 찾아다니는구나. 수십 년 전, 아니 수백 년 전 이 곳을 지나갔을 나그네의 심정이 되어 물맛을 음미해봤다. 지친 몸을 이끌고 길을 가다 산기슭에서 퐁퐁 솟는 옹달샘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으랴. 잠시 뒤 멀지 않은 곳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중년남자가 큰 물통을 들고 내려왔다. 자리를 비켜주며 눈인사를 하니 말을 건넸다.
“물맛 좋지요? 여기 물이 얼마나 좋은지 장 담그는 계절만 되면 저만치까지 줄을 섭니다. 각지에서 뜨러 오니까요.”
절로 고개가 끄떡거려졌다. 그러다보니 조금 전에 봤던 추점유샘이 다시 생각났다. 한 때 같이 사랑을 받았던 옹달샘들일 텐데 어떤 곳은 가슴에 파이프롤 박아 그 의미를 잃고 어떤 곳은 사람들이 줄로 서서 물을 뜨고 있다. 무엇이 그 운명을 바꾼 것일까. 결국 사람들의 변덕과 무관심이 낳은 결과일 것이다. 주변에 널려있는 비닐봉지를 걷어내며 이 샘이라도 잘 보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슴에 안았다. 옹달샘 하나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지는 모르지만, 그 역시 선인들이 살아온 자취이다. 무엇인들 함부로 버릴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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