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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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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30 [사라져가는 것들 160] 미선나무2
2011. 5. 30. 08:30 사라져가는 것들

 

미선나무라는 이름과 처음 마주친 건 충북 괴산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던 중이었다. ‘세계에서 한 종밖에 없는 한국 특산식물이란 설명이 뇌리에 와서 박혔다. 그런 게 있는데도 아직 모르고 살았다니. 마침 그쪽 지역을 한 바퀴 돌려고 벼르던 참이었던지라,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해 볼 틈도 없이 괴산으로 향했다. 여름을 턱 밑에 둔 6월이었다. 미선나무는 충북 괴산군과 진천군, 영동군과 전북 부안 등 소수 지역에서만 자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괴산군 칠성면 추점리와 장연면의 율지리, 송덕리가 주 자생지라고 할 수 있다. 공부 안한 학생이 고민도 없이 시험문제를 찍듯, 사전 정보도 없는 내가 선택한 곳은 추점리였다. 도착해 보니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농촌마을이었다. 세계에 단 하나뿐인 천연기념물이 있는 곳이니 번듯한 안내판라도 있거나 뭔가 그럴 듯하게 꾸며놨으리라는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여기 저기 기웃거려 봐도 특별하다싶은 나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낭패가 있나. 마을을 한참 돌아본 뒤에야 트럭을 몰고 가는 청년을 만났다. 근처에 미선나무 군락지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선선하게 설명해 준다. 청년의 손끝이 가리킨 곳은 동네를 꽤 벗어난 곳이었다.

군락지는 양지바른 언덕 쪽에 있었다. 보호목책이 둘러쳐져 있어서 금세 눈에 띄었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 가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대체 무엇이 미선나무라는 거지? 목책 안에는 덩굴식물에 가까운 관목들만 낮은 가지를 뻗고 있었다. 키가 큰 활엽수일 거라고 근거 없는 예단을 했던 나로서는 당혹스런 풍경이었다. 사전에 공부를 안 한 탓이었다. 그 작은 나무들이 바로 미선나무였다. 터무니없는 기대 때문인지 실망스럽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언덕 아래 길가에서 옥수수를 파는 아주머니에게 미선나무가 맞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꽃필 때 와야 볼게 있지, 여름 다 돼서 미선 찾는 사람은 첨 보네유, 그렇구나. 나무가 아니라 꽃을 보러 와야 하는구나. 사진 한 장 못 건지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돌아와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보고서야 미선나무에 대해 조금 알 수 있었다. 미선나무의 이름은 한자어 尾扇에서 나왔다고 한다. , 열매의 모양이 둥근 부채를 닮아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열매의 위쪽은 꼭 옛날이야기책에 나오는 궁중 부채처럼 오목하게 패어있다. 말이 열매지 잎으로 착각하기 좋게 생겼다. 그 잎처럼 생긴 열매 속에 2개의 씨가 들어있는 것이다.

미선나무는 성격이 조금 독특하다. 볕이 잘 드는 산기슭을 좋아하는데 돌밭 같은 척박한 땅을 택한다. 나무줄기는 보통 원통형이지만 어릴 때는 각진 연필처럼 사각형이고 속은 비어있다. 1m 정도까지 자라며 3월에 잎보다 먼저 꽃이 핀다. 꽃은 보통 흰색으로 개나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 작은 편이며 훨씬 총총하게 달린다. 개나리처럼 생긴 꽃 모양 때문에 영어 이름이 흰색 개나리를 뜻하는 White Forsythia이다. 연분홍색 꽃도 있지만 흰색에 비해 흔치않은 편이다. 분홍색 꽃이 피는 것을 분홍미선이라고 한다. 또 상아색 꽃이 피는 것도 있는데 이를 상아미선이라고 하고 꽃받침이 연한 녹색인 푸른미선도 있다. 열매 끝이 오목하게 파이지 않고 둥근 모양은 둥근미선이라고 한다. 비슷하게 생긴 개나리꽃에 향기가 없는 것과는 달리 미선나무의 꽃은 뛰어난 향기를 자랑한다. 그 향기는 반경 2km까지 퍼진다고 한다. 꽃받침은 종 모양의 사각형으로 길이가 33.5mm이며 네 개로 갈라진다. 갈라진 조각은 달걀 모양의 타원형이다. 번식은 주로 꺾꽂이로 한다. 종자번식은 쉽지 않다고 한다. 최근에는 많은 연구를 통해 휘묻이, 분주법 등 여러 가지 번식법이 개발됐다.

미선나무는 1917년 정태현 박사가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서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1919년 일본인 학자 나카(中井)라는 사람이 새로운 종()이란 것을 확인했고, 1924년 이시토야 쓰토무(石戶谷勉)가 학계에 처음 보고함으로써 ‘Abeliophyllum distichum’이라는 학명을 얻었다. 1997년 산림청이 희귀 및 멸종위기식물 제173호로, 1998년 환경부가 보호양생식물 제49호로 지정했다. 내가 다시 미선나무를 찾아간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 이번에는 꽃피는 계절에 맞췄다. 목적지도 추점리가 아니라 장연면의 율지리로 잡았다. 하지만 두 번째도 그리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 율지리에 도착해서 마침 지나가던 아주머니에게 미선나무 많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뜨뜻미지근했다. “글쎄유. 우리 집에 두어 그루가 있긴 헌디, 많이 피는 데는 모르것는디유?” 이 동네가 율지리가 맞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틀림없단다. 동네사람이 모른다니, 이런 황당한 일이. 여기저기 둘러봤지만 미선나무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주민에게 물어봐도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려 추점리로 향했다. 역시! 그곳엔 미선나무들이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파른 언덕이고 목책을 둘러놓아서 접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되랴. 어렵게 만난 미선나무꽃인데.

미선나무를 그리 어렵게 찾아다니지 않아도 됐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서울에 돌아온 뒤였다. 야생화 사진을 찍는 지인이 창경궁에도 미선나무가 있다는 얘기를 해줬다. 지척에 두고 그 먼 길을 찾아다녔다니. 조금 허탈했지만, 어차피 한 번 갔어야할 자생지를 다녀왔다는 걸 위안으로 삼고 창경궁으로 찾아갔다. 홍화문을 지나 옥천교를 건너지 않고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춘당지로 가는 길목. 미선나무꽃들이 지천이었다. 토양이 달라서일까. 꽃들이 얼마나 탐스러운지 마치 꽃방망이 행렬을 보는 것 같았다. 자생지에서는 드물었던 분홍미선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미선나무를 모르는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나는 보물이라도 만난 듯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을 원()으로 바꾸고 벚나무를 심었던 일제의 잔재를 파내는 김에, 미선나무 같은 우리 고유 수종을 옮겨 심은 모양이었다. 객지에 와서도 자리를 잘 잡은 걸 보니 번식이 그리 어려운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유일의 희귀식물 미선나무, 그 나무가 이 땅에 뿌리 내리게 된 데는 깊은 뜻이 있을 터. 이왕이면 전국 곳곳에 퍼트려서 이 나라의 봄을 가장 먼저 여는 꽃으로 자리 잡게 하면 어떨지. 향기가 2km나 퍼진다니 그 얼마나 황홀한 봄이 될까. 미선나무 곁에서 생각은 자꾸 곁뿌리를 내리고, 고궁의 봄은 초록빛을 자꾸 토해내고 있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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