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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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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07 [사라져가는 것들 127] 투망14
2009. 12. 7. 09:1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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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투망이네 집은 수리재의 발꿈치께 산모롱이에 있는 듯 없는 듯 엎드려 있었다. 마을 앞 비끄내를 따라 신작로가 난 뒤, 수리재를 넘어 외지로 가는 길은 시나브로 잊혀져갔다. 그래도 수리재를 품고 있는 쌍바우산은 나무꾼이나 약초꾼들을 곧잘 불러내고는 했다. 아이들도 지천으로 열린 다래나 으름, 밤을 따러 그 먼 길을 왕복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아이들이 쌍바우산을 가는 길에 유일한 난관이 있다면, 장투망이집을 거쳐야한다는 것이었다. 그 집 앞을 지날 때 아이들의 발걸음은 늘 조심스러웠다. 살쾡이 흉내를 내며 살금살금 걷기도 하고, 족제비 보고 놀란 장닭처럼 후다닥 뛰기도 했다. 그래도 무서움은 도깨비바위나 상엿집을 지나갈 때 못지않았다. 달콤한 열매들의 유혹이 아니라면, 늘 뱃가죽이 등짝에 붙어있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결코 지나고 싶지 않은 길이었다. 아이 역시 친구들과 쌍바우산 원정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장투망이 공포’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무엇이 왜 무서운 건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소문만 무성하게 자라나 아이들 입을 오갈 뿐이었다. 장투망이가 꼬여서 간을 내먹는다고 하는 녀석도 있었고, 한번 잡히면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두드려 팬다면서 진저리 치는 아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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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로 간을 빼앗겼다든가 눈에서 번갯불이 튀도록 맞았다는 아이는 없었다. 그래도 입을 오가면서 풍선처럼 부풀어버린 괴담은 오가는 아이들의 오금에 쐐기를 박고는 했다. 아이가 장투망이와 직접 마주친 건 지난해 가을이었다. 그날은 친구들과 쌍바우산으로 밤을 따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심부름을 하느라 조금 늦고 말았다. 먼저 출발한 아이들이 장투망이네 집을 지나가기 전에 따라잡겠다고 꼬리에 불을 달고 뛰어갔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혼자라도 ‘전선’을 돌파하느냐 그대로 돌아가느냐의 선택만 남아 있었다. 아이는 잠시 고민하던 끝에 내쳐 가보기로 결심했다. 살금살금 장투망이네 집 앞을 지나가던 아이가 어느 순간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여름을 나느라 지친 풀들이 눕거나 서로 기대어 있는 마당가에 장투망이가 서 있었다. 사실, 전에도 몇 번 먼발치에서 그를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보았던 건 뒷모습이었다. 그는 언제나 바깥세상을 등지고 마루에 앉아 투망을 짰다. 투망 자락이 조금씩 길어지는 것 외에는 늘 같은 모습이었다. 참선하는 늙은 중처럼 장중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싱싱한 간’을 지닌 아이들이 떼로 지나가도 곁눈질 한번 하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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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망은 ‘그물망을 던져 물고기를 잡는 행위’를 뜻하지만, 그물 자체를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펼치면 원추형 모양인데, 윗부분에 몇 발의 벼리(그물의 위쪽 코를 꿰어 놓은 줄로서 잡아당겨서 그물을 오므리는 역할을 함)가 있고 아래에는 납으로 만든 추(요즘은 쇠고리 같은 걸로 대체)가 달려 있다. 물에 던지면 좍 퍼지면서 바닥에 가라앉는데, 그때 투망의 범위 내에 있던 물고기들이 끌려올라오게 되는 것이다. 투망질은 강이나 내, 얕은 둠벙 등에서 주로 한다. 투망질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던지는 기술이 필요한 것은 물론, 고기가 있을 만한 곳을 한눈에 알아보는 눈도 가져야한다. 고수들은 투망질 몇 번에 한 양동이의 물고기를 잡아내기도 한다. 반대로 아무리 던져도 송사리 한 마리 건져 올리지 못하는 손방들도 없지 않다. 장투망이가 짜는 그물이 바로 그 투망이었다. 아이는 그가 왜 투망만 짜고 있는지 궁금했다. 비끄내가 지척인데도, 냇물에 들어가 투망을 던지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투망질은커녕 그가 집밖으로 나온 것을 본 기억도 없었다. 그렇다고 짜놓은 투망을 팔러나가는 것 같지도 않았다. 대체 왜 투망을 짜고, 무엇을 먹고사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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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마당가에 서 있는 장투망이를 본 아이는 오줌이라도 지릴 것처럼 놀라고 말았다. 늘 앉아서 투망만 짜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얼어붙기라도 한 듯 꼼짝 할 수 없었다. 장투망이가 웃는 것도 같기도 하고 손짓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된 활동사진을 보는 듯 모든 게 흐릿했다. 그가 아이 쪽으로 조금씩 다가왔다. 심하게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이와의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뱀 만난 개구리처럼 옴짝도 못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번개라도 잡을 듯 빠른 걸음이었다. 달음질은 마을 어귀에 들어서서야 겨우 멈췄다. 허리를 구부리고 밭은 숨을 뱉어내던 아이가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버렸다. 그날 저녁, 아이는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서 장투망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달빛이 박꽃처럼 희게 내리는 밤이었다. 전에도 몇 번 어른들에게 물었지만, 늘 고개를 젓거나 외면하고는 했었다. 기피대상인 모양이었다. 아이는 빙빙 돌아가서라도 기어코 궁금증을 풀어볼 요량이었다.
“장투망이는 투망 짜서 워따 쓴대유? 한 번도 던지는 걸 못 봤는디….”
“난들 알것냐? 워디 팔기라도 하겄지. 읍내 장거리에서 누가 사러온단 말도 있더라만. 그나저나 그 징한 인간 얘긴 워째 또 꺼내고 그런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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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장투망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슬픔과 증오, 안타까움이 묘하게 섞인 눈길을 쏟아지는 달빛에 섞었다. 그러나 다른 때와는 달리 조금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유난히 곱게 내리는 달빛 때문에 그렇게 보였는지도 몰랐다.

“투망을 던지는 대신 투망을 짜는 것이겄지. 그 사람이 투망질 하나는 최고 아녔겄냐. 그 끔찍한 일이 터지기 전에는….”
할머니는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장 부자집의 막내아들로 일찌감치 유학을 떠났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고향으로 내려왔다. ‘빨갱이 노릇’을 하다 감옥살이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실연을 당한 뒤 정신이 이상해져 병원신세를 졌다고도 했다. 고향에서 그가 할 일이란 없었다. 하릴없이 냇둑을 거닐거나 투망질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투망으로 잡은 물고기는 동네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그때 붙은 이름이 장투망이었다. 그러던 중에 전쟁이 터졌다. 북쪽에서 내려온 군인들이 마을에 나타난 뒤 장투망이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북에서 온 군인들은 그를 상전 모시듯 했다. 중앙당에서 큰일을 하실 분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장투망이의 세상’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느 날 북쪽의 군인들은 쫓기듯 물러갔다. 그 와중에 사람들이 여럿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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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투망이가 동네사람들을 죽였남유?”
“아니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 뒷감당을 혼자 하게 된 거지. 그쪽 편이었다는 이유로…. 차라리 따라갔으면 좋았으련만 고집스럽게 남아서…. 세상이 뒤바뀌니 이번엔 이쪽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았단다. 그나마 장 부자가 평소에 베푼 은덕이 있어서 죽이진 않았던 게여. 그래서 다리를 절게 되고…. 장부자도 아들 땜에 울화병으로 죽구 식구는 전부 흩어진 게지. 그런데도 당사자는 동네를 안 떠나고 저렇게 혼자남아….”
아이에게는 할머니 이야기가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십 수 년 전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기보다는 아득한 옛날이야기로 들렸다. 그리고 장투망이가 더욱 무서워졌다. 공산당들은 잔인하고 끔찍하다는데… 선생님이 분명 그리 말씀하셨는데. 왜 그가 나를 불렀을까? 장투망이는 아이의 안에서 괴물이 되어 자꾸 자라났다. 그해 여름에는 비가 많았다. 비끄내와 마을 사이의 냇둑이 두 번이나 터졌을 정도였다. 마을이 생긴 뒤 처음이라고 했다. 어른들은 올 농사는 다 지었다고, 하늘이 무너질 듯 한숨을 쉬었다. 세 번째 냇둑이 터진 날은 사흘째 쉬지 않고 비가 쏟아진 뒤였다. 가마니에 모래를 채워 임시로 막아놓은 둑이 몽땅 휩쓸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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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쳤을 땐 논밭이 온통 물바다였다.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여름의 뙤약볕이 물에 젖은 대지에 툭툭 꽂혔다. 어른들이 만복씨네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모두들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아이들도 어른들의 꽁무니를 따라 자연스럽게 모였다. 그 뒤를 강아지들이 따라붙었다. 누구 네는 돼지가 떠내려가고 누구 네는 물이 안방까지 들었다고 반 넉장거리였다. 하지만 화제는 곧바로 죽었다 살아났다는 구칠성씨 아들 용삼이에게로 집중됐다
“그래서, 장투망이가 애를 건졌다는 거여? 다리도 못 쓰는 사람이 뭔 심으로?”
“그렇다자녀. 느닷웂이 나타나더니 투망을 확 던져갖구 허우적거리는 애를 나꿔채더라는겨.”
“에이, 이 사람아. 그만한 등치를 워떠케 투망으로 끌어올려. 밧줄을 던져서 건졌다면 모르겄네만. 애가 무슨 물괴기여?”
“멀리서 봤다는 사람들이 그렇다니 그런 줄 알지. 내가 그걸 워찌 알어.”
“그건 그렇다고 쳐. 워낙 투망 귀신이었응께 송아지를 건졌다고 해도 믿을 수밖에. 헌디, 애를 건져놓은 장투망이는 워디루 갔다남?”
“글씨, 그게 참 요상한 게…. 애를 물에서 끌어내놓더니 느닷없이 허뚱허먼서 물로 쳐백히더랴. 그 뒤는 본 사람이 웂다니….”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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