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무신도'에 해당되는 글 1

  1. 2011.01.10 [사라져가는 것들 155] 신당(神堂)4
2011. 1. 10. 08:40 사라져가는 것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도시에서,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제대로 된 신당을 찾는 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더욱, 내가 그 신당을 만난 게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와 묶인 보이지 않는 끈 같은 것이 있어서  그곳으로 당겼을지도 모른다. 시작은 내가 진행하는 방송프로그램부터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서울의 추억’, 즉 근현대 생활유산을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어서, 그와 관련한 짧은 기획물을 만들기로 했다. 제작회의를 하는 중에 데스크의 눈이 내게 멈췄다. ‘사라져가는 서울의 추억’ 이라는 콘셉트가 자연스럽게 나를 떠올리게 한 모양이었다. 군말 없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비록 케이블TV라고 해도,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직접 현장에 나가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취재원 접촉. 전화 통화를 통해 알게 된 분이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오문선 학예사였다. 여자 분이었는데 역사박물관에서 근현대생활유산 수집을 전담하는 분이었다. 오 학예사가 처음 제안한 것은 세운상가 취재였다. 세운상가에 오래된 시계수리점이 있는데, 일제 때부터 쓰던 수리용 공구를 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서 그에 맞춰 대본을 쓰고 촬영동선을 짰다. 맨 먼저 시계수리점에 들러 물품 수집 과정을 담고 기증한 분의 인터뷰를 따고, 다음에 재개발 중인 모래내시장을 들러서 촬영하고…. 맨 마지막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그동안 수집한 것들을 찍고 관장 인터뷰를 따고…. 비교적 복잡하지 않은 동선이라 하루에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촬영 당일 생겼다. 대본을 완성하고 PD, VJ와 시간을 조율하는 등 준비를 마쳐놓고 출발하려는데 오 학예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계수리점의 주인이 갑자기 병환이 나서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하는 오 학예사도 황당하다는 목소리였다.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다행이 다른 아이템으로 부랴부랴 때웠지만, 언제 퇴원할지 모르니 다음 일정을 잡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2주일 쯤 지난 뒤 다시 전화를 했더니, 그 분이 퇴원은 했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때 오문선 학예사가 조심스럽게 꺼내놓은 곳이 보광동 신당이었다. 보광동 일대에서 활동하던 장남옥이란 큰 무당이 몇 달 전에 타계했는데, 유품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수거작업을 할 때 촬영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당이라…. 낚시미늘을 물어버린 물고기처럼 거부할 수 없는 그 무엇이 확 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일이 내게 오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을까? 방송도 방송이지만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굿하는 과정을 밤새워 취재하고 글로 쓴 적이 있지만 도심에 있는 신당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촬영 약속을 잡은 날은 12월17일. 눈이 제법 내렸다. 아침 일찍 도착해보니 골목마다 떡가루 같은 눈이 흩뿌려져 있었다. 신당이 있다는 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가정집 같았다. 바깥풍경을 스케치하는 중에 오 학예사가 도착했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 따라 들어가다 보니 약간은 냉랭하고 음습한 기운이 돌았다. 신당은 전실과 신당으로 구분돼 있었고 살림을 하는 공간은 별도로 있었다. 신당의 문 앞에 서면서부터 평범하지 않은 느낌이 전신을 감쌌다. 꼭 불편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그렇다고 안온하거나 평안한 것과는 조금 다른…그물에 갇혔는데 그리 심하게 옥죄이지는 않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으니 기침 참듯 안으로 꼭꼭 갈무리 하는 수밖에. 오 학예사에 따르면, 이 신당은 서울 무당의 전통신당을 제대로 갖춘 곳이라고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침 수거팀이 도착하기 전이라 오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신당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징, 기물(器物), 종, 북, 명두 등 각종 무구(巫具)가 금방 사용하기라도 한 듯 제 자리에 놓여있었고 산신도, 최영장군상 등 무신도(巫神圖)들도 눈을 부릅뜬 채 낯선 방문객을 내려다봤다. 살림방에 들어가 보니 이불이나 요도 펴진 채 그대로였다. 누군가 잠을 자고 아침에 급히 나간 듯 모든 게 생생했다. 큰무당 장남옥 씨는 지난해(2010년) 10월에 타계했다. 1928년생으로 17세에 무당이 된 뒤 40년 동안 용산구 보광동에 거주하며, 둔지미 부군당의 당주무당으로 활동했다. 장남옥씨나 신당을 이해하자면 몇 가지를 먼저 알고 넘어가야한다. 당주무당이란 과거에 마을마다 있었던 신당의 의례를 주관하는 무당을 말한다. 또 부군당(府君堂)은 민간신앙의 대상물인 신을 모셔 놓은 신당을 말한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역에서만 그렇게 불렀으며 서울에만 15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몇 곳의 당에서는 정초에 당제를 지낸다. 이를 주관하는 것이 바로 당주무당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남옥씨가 당주무당으로 있던 둔지미부군당은 원래 지금의 용산로 6가(현 국립중앙박물관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둔지미 마을이 1930년대 일제의 군사용지로 수용되면서 보광동으로 이주할 때 함께 옮겨 앉게 되었다. 어찌 보면 기구한 사연을 지닌 부군당인 셈이다. 장남옥 씨는 둔지미부군당뿐 아니라 서빙고부군당, 동빙고부군당, 압구정동, 잠원동, 신사동 일대의 마을굿을 주관하던 큰 무당이었다. 굿거리와 재담에 능했다고 한다. 장남옥 씨의 유품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된 데에도 사연이 있다. 장 씨에게는 신내림을 해준 김점례라는 신어미가 있었다. 장남옥씨가 거주하던 신당의 원래 주인이었다. 이 분이 타계하기 전에 집을 보광동3경로당에 기증했는데, 조건은 신딸인 장남옥 씨가 살아있는 동안 쓸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미리 정리가 되는 바람에, 장 씨가 타계한 뒤 집에 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무구 등 유품이 문제였다. 장 씨에게는 자식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버릴 수도 취할 수도 없는 계륵인 셈이었다. 그래서 경로당에서는 유품의 처리와 관련해서 회의를 열었고, 결국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문선 학예사가 신당에 얽힌 사연을 거의 얘기했을 무렵 유품 수거팀이 도착했다. 훗날 신당을 그대로 복원할 계획이기 때문에 꽤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했다고 한다. 수거 며칠 전에는 실측 및 촬영 작업을 했다. 유물을 포장하는 사람들의 손놀림은 정교했다. 얼핏 보면 그냥 버려도 될 것 같은데도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촬영이 거의 끝날 무렵 경로당에서 감사를 맡고 있는 김영달 할아버지(69세)을 만날 수 있었다. 보광동 토박이라는 김 할아버지는 동네뿐 아니라 신당의 역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김 할아버지의 안내로 둔지미부군당을 찾았다. 부군당에는 마을신으로 제갈무후(제갈공명)를 모시고 있었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찾아 여러 해 전국을 헤매고 다녔지만 부군당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공부가 부족한 탓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여러 가지 생각이 명멸했다. 신당이나 무당, 무구들. 그리고 부군당.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일지도 모른다. 갈수록 잊혀져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건, 무속 자체를 미신이니 혹세무민이니 하여 경원시 하는 시각이야 말로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속은 수천 년을 이어온 이 땅 고유의 신앙이다.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고 인간의 염원을 하늘에 전하는 이들을 무당이라 불렀다. 그렇게 긴 세월 백성 곁을 지켜왔으니 전통문화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지금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훗날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중요한 유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