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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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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저물어 가는 카쉬의 바다. 저 한 가운데의 파운이 지금의 내 마음이다.

낮에 보았던 카펫 가게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터키의 유료화장실

이국 바닷가 마을의 밤은 점점 깊어가고 뱃가죽은 자꾸 등이 그립다고 아우성이다. 오래 전 헤어진 다큐팀은 어디서 무얼 하는 걸까. 섬 그늘로 굴 따러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목을 늘리고 두리번거려보지만 지나가던 바람만 뺨을 스칠 뿐이다. 그런데, 이건 또 뭐야? ‘눈 온데 서리가 또 온다(雪上加霜)’는 말을 믿지 않았건만, 이 참을 수 없는 요의(尿意)? 에구, 결국 올 게 왔구나. 터키에서는 거의 모든 공공화장실에서 돈을 받는다. 그래서 호텔이나 음식점을 갈 때마다 볼 일을 보는 게 좋다. 나 역시 그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 정도 돈이 없다거나 아낄 요량이라기보다는 돈 내고 볼일을 본다는 게 영 정서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남의 집에 마실을 갔다가도 똥, 오줌 마려우면 집에 와서 처리했다는 전설이 아직도 생생하거늘. 그 귀한 걸 주는데 돈을 내라니. 하지만 유료화장실에 대해서 별로 큰 소리 칠 건 없다. 우리나라도 몇 십 년 전까지 공중화장실 앞에서 돈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 저들도 먹고 살아야지. 이번 한번은 인심을 쓰자. 두리번거리며 찾다보니 저만치 화장실 표시가 보인다. 골목을 한참 꺾어 들어가니 드디어 목적지. 들여다보니 노인이 안에 앉아서 돈을 받는다. 어느 곳은 밖에다 작은 책상 하나 달랑 놓고 돈을 받기도 한다. 입구에 가격을 써놓았다. SHOWER 6TL/3EURO, WC 0.50Cent.

내 주머니를 털어간 공중화장실. 돈을 받는만큼 관리가 잘돼 깨끗했다.

샤워는 6리라. 볼일만 보면 50센트.

, 여기서는 공중화장실에서 샤워를 할 수도 있구나. 바닷가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화장실 이용은 50센트라니까, 300원이 조금 넘겠군. 돈을 내는데 노인이 내 얼굴을 보다 싱긋 웃는다. 저 미소의 의미는? 너처럼 불쌍하게 생긴 녀석은 말만 잘하면 공짜로 해줄 수도 있었다는? 그래, 이왕 돈 주고 들어온 거 본전이나 뽑자. 길고 길게 볼 일을 마친 뒤 화장실에서 나오니 다큐팀이 기다리고 있다. 야호! 이젠 호텔로 갈 수 있다. 호텔은 그리 멀지 않다. 헌데,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에구구! 신음이 절로 터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PRINCESS HOTEL. 이름도 좋고 전망도 좋은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객실은 3층에 있는데 거기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없단다. 저기까지 캐리어를 들고(계단이니 끌고가 아니다)가야한다는 말인데, 지칠 대로 지친 몸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다. 그나마 나는 캐리어가 하나지만 촬영팀 친구들은 저 장비를 다 어쩐담. 하지만 하늘은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 조금 있으니 벨보이들이 하나 둘 내려온다. 작은 호텔은 보통은 벨보이를 두지 않는데, 이 곳은 워낙 조건이 험하니 짐만 전문으로 옮기는 친구들이 있는 모양이다. 대신 1달러는 기본. 지금 1달러가 문제냐? 오케이!! 호기롭게 짐을 맡긴다. 하지만 키를 받아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또 한 번 예사롭지 않은 풍경 앞에 망연해지고 만다.

카쉬에서 하루 신세를 졌던 호텔. 여인숙 수준이지만 밤풍경은 좋았다.

여인숙 같은 호텔

우리나라 70년대 여인숙에 들어선 느낌이 이럴까? 방은 엉덩이 큰 사람은 드나들기도 어려울 만큼 비좁은데 화장실에 물은 뚝뚝 떨어지고 샤워기는 아무리 돌려도 감감무소식이다. 이게 원래 장식용이었나? 답답해서 문이라도 열어둘까 했더니 발코니로 통하는 문은 황소고집이다. TV는 구식 중의 구식(사실 볼 일도 없지만)이라 켜질까 의문이고 냉장고는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다른 물건들도 방금 골동품가게의 창고에서 탈출한 듯 고색창연하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건 침대 다리는 네 개 모두 있다는 것. 그럼 됐지. 언제부터 고급스럽게 살았다고 투정이야. 그동안 너무 호강을 했던 게지. 방은 좀 그래도 한 층 아래에 있는 야외식당은 제법 괜찮다. 음식이야 별로 특별할 건 없지만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한다. 저만치 있는 바다는 어둠 속에 몸을 묻어 뭍과의 경계를 지웠고 작은 불빛들만 유난히 반짝거린다. 오랜만에 보는 어둠이다. 그래, 가끔은 어둠 속에서 어둠을 바라보기도 할 일이다. 세상살이가 이리도 험한 것은 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어둠 속에서의 안온을 잊어버렸다. 덕분에 별빛도 달빛도 잃었다. 그것들을 잃으면서 꿈조차도 희미해졌다.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도 많은 법이거늘.

호텔방에서 바라본 밤바다.

특별히 아픈 곳이 없는데도 밤새 끙끙 앓았다. 그래도 여섯시 무렵에는 어김없이 잠에서 깬다. 하늘은 여전히 맑다. 아침 식사를 한 뒤 바로 호텔을 출발한다. 0830. 오늘은 안탈리아로 가는 날이다. 가다가 성 니콜라스(St. Nicholas) 출생지에 들를 계획이다. 성 니콜라스. 산타클로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산타의 고향이 터키의 궁벽한 곳이라고? “에이~”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또 산타클로스의 고향은 핀란드 아냐? 자신 있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다. 산타클로스는 지금의 터키, 아나톨리아반도의 남단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죽었다. 그런데 왜 산타의 고향이 북구인 핀란드라고 알려져 있을까. 그 배경은 이렇다. 2차 대전으로 초토화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핀란드 정부는 관광산업 육성에 집중 투자했다. 산타마을은 70여개 기업이 컨소시엄을 형성해 건설한 인위적인 마을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 산타마을에서는 세계 어린이들의 편지를 받고 답장도 써준다. 물론 대역이다. 사연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산타가 그곳 사람인 줄 안다. 산타클로스, 즉 성 니콜라스의 고향은 지금의 터키 남쪽 지중해 연안의 안탈리아에서 144km 떨어진 소도시 뎀레(Demre)다. 그 당시 이름은 미라(Myra). 이곳이 바로 성서에 나오는 무라(Mura)’인데 AD 60년 사도 바울이 로마로 끌려갈 때 탔던 배가 이곳 항구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카쉬에서 안탈리아로 가는 길에 만난 울트라마라톤 지원팀.

산타클로스 이야기

우리 일행은 카쉬에서 출발했으니 안탈리아의 반대쪽에서 내려가는 셈이다. 가는 길에 믿음 씨는, 철거됐던 산타클로스 동상이 다시 세워졌을지 모르겠다고 걱정이다. 자신도 오랜만에 가보는 지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걱정이 되는 이유는 지금 터키의 수상이 이슬람당이기 때문이란다. 이슬람당은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 타 종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산타클로스 동상을 세우는데 관심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교도가 97%라는 이 나라에도 알게 모르게 종교적 갈등이 존재하는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뎀레를 향해 달려가는 중에, 길에서 뜻밖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난다. 엊그제 페티예에서 손을 흔들어 장도를 빌어줬던, 리키아 울트라마라톤 선수들을 지원하는 팀이 길에서 쉬고 있다. 선수들도 어제 카쉬에 도착해서 묵고 오늘 아침 안탈리아 쪽을 향해 출발했단다. 이런 인연이. 고향친구들을 만난 듯 반가워서 한참 수다를 떨다 헤어진다. 믿음 씨가 차 안에서 산타클로스가 된 성 니콜라스 주교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성 니콜라스의 생애를 기록한 확실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의 실재를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터키사람들은 그들의 땅에서 태어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긴 한 성인의 존재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 분이 바로 산타클로스가 된 성 니콜라스.

성 니콜라스는 AD 280년 경 지중해 연안 리키아의 주요도시 중 하나인 파타라(Pttara)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부유한 곡물 상인이었다. 니콜라스가 존경을 받게 된 것은 그의 너그러운 미음과 따뜻한 동정심 때문이었다. 부친이 사망하자 상속자가 된 그는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기로 작정했다. 어느 날, 파타라 시에 사는 몰락한 귀족에게 장성한 딸이 셋이나 있는데 결혼 지참금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곤궁에 처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됐다. 그 당시는 지참금이 없으면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 귀족의 집에는 언제나 근심이 가시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그 귀족을 몰래 돕기 위해서 가족들이 잠든 사이 큰 딸의 방 창문으로 금주머니를 던져 넣었다. 큰 딸은 그 돈으로 혼인을 할 수 있었다. 니콜라스는 다른 두 딸들에게도 지참금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 창문이 모두 잠겨 있어서 금주머니를 전할 방법이 없었다. 궁리 끝에 그 집 굴뚝으로 금주머니를 던져넣었다. 여기서 드디어 산타클로스의 굴뚝 출입설에 대한 근거가 나온다. 니콜라스는 선원들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 배를 기도로 구하고, 익사할 위기에 있는 선원들을 소생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성 니콜라스 동상이 서 있는 거리.

성 니콜라스의 행적을 적어놓은 것 같다.

성 니콜라스의 기적들

성 니콜라스가 남긴 이야기는 그밖에도 강가의 모래 만큼이나 많다. 고향인 파타라에서 이웃 도시인 미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기적은 계속 일어난다. 미라지역에 기근이 들었던 어느 해, 니콜라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비잔틴으로 곡물을 운반하는 배들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선장들에게 각 배에서 두 말씩의 곡식을 넘겨달라고 부탁했다. 선장들은 마지못해 응했는데 항해가 끝나고 돌아와 보니 그들의 곡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선장들이 남겨 두고 간 곡식은 미라 사람들이 2년 동안 양식을 하고도 씨를 뿌릴 수 있을 만큼 충분했다고 한다. 흉년과 관련한 이야기는 또 있다. 어느 해 큰 흉년이 들어 끼니를 못 때우는 집이 속출했다. 니콜라스는 커다란 자루에 양식을 넣고, 이곳저곳 마을을 찾아다니며 가난한 집에 몰래 전했다. 어느 날 그는 어느 숲속에 있는 여관에 도착하였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이상한 영감을 받게 된다. 그 여관의 주인은 흉악한 강도였다. 소년들을 유괴해서 시체를 토막 내어 소금에 절였다가 그 고기를 나그네들의 특별 메뉴로 내놓고는 했다. 니콜라스가 그 여관에 도착했을 때에도 세 소년이 소금에 절여지고 있었다. 영감을 통해 그 사실을 안 니콜라스는 소년들을 절여 넣은 독 위에서 십자가를 긋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독을 두드리자 뚜껑이 열리며, 독 안에서 세 소년이 뛰어 나왔다.

거리엔 과일장수도 있고.

그 소년들은 소아시아의 부잣집 아들들로서, 공부하러 아테네로 가는 도중 흉악한 강도에게 걸려들게 됐다는 것이었다. 니콜라스에 의해 구원 받은 소년들의 이 이야기가 곳곳으로 퍼지면서, 그는 어린이와 학생들의 보호 성자로 숭배를 받게 됐다. 16세기의 그림과 조각에는 여관 주인이 식칼로 아이들의 몸을 자르는 것을 니콜라스가 다시 살려내는 장면을 그린 것이 많다. 그 미술품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산타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나? 남의 얘기 빌어서 여행기 공짜로 먹으려고 한단 얘기 듣기 전에 그만 해야지. 그래도, 산타클로스가 아닌 주교 니콜라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 니콜라스 역시 초대 교회 당시의 다른 기독교인들처럼,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훗날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석방되어 그리스도인들의 쇄신과 선교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325년에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 성직자를 때렸다가 투옥됐다. 옥중에 있던 그에게 한밤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는데, 예수는 그에게 성서를 건네주었고 마리아는 그에게 오모포리온(omophorion, 정교회 사제의 전례의상)을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에 간수가 보니 니콜라우스가 감옥 안에서 오모포리온을 두른 채 성서를 읽고 있었다.

성 니콜라스 교회로 들어가는 길.

상업주의가 만든 산타

그렇게 숱한 이적을 행하던 니콜라스는 65세가 되던 해 126일 미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의 산타클로스는 그가 남긴 여러 이야기에 숱한 전설이 결합돼서 창조된 것이다. 믿음 씨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버스는 어느 새 뎀레에 도착해서 광장에 일행을 내려놓는다. 다행이 성 니콜라스의 동상이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 쪽 어깨에 사내아이를 올려놓고 한쪽 손에는 조금 큰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있다.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봐 온 산타클로스의 모습과 하나도 안 닮았지? 하얀 수염에 빨간 옷을 입고 조금 뚱뚱하고 루돌프를 탄 산타클로스는 어디로 간 거야. 거기엔 이유가 있다. 성 니콜라스 이야기가 유럽 쪽으로 건너가면서 숱한 변모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산타는 상업주의가 낳은 변종이라고 한다. 1931년 코카콜라의 겨울철 판매량이 감소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한 캠페인 전략으로 코카콜라 브랜드의 상징색인 붉은색 옷을 산타에게 입혀 홍보에 나선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흰 수염은 콜라 거품을 상징한다나? 결국 자본주의는 성인의 수염까지 팔아먹는구나. 아무튼 산타클로스는 코카콜라에 의해 친근하지만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재창조된 셈이다. 또 산타의 썰매를 끄는 루돌프는 오딘이라는 신이 순록을 끌고 다닌다는 것에서 착안해서 접목시켰다고 한다. 하긴 남부 지중해에 눈이 올 턱이 있나. 재주들도 참 좋다.

인도의 수행자 같았던 노숙인(?)

경찰관과 한바탕 하고 있다.

! 믿음 씨에게 성 니콜라스 동상 이야기를 들을 때 왜 철거했는지 묻지 못했는데, 원래 코카콜라 산타였기 때문이었구나. 원형대로 복원하기 위해서. 성 니콜라스의 동상이 있는 광장에서 한 노인을 만난다. 흰 수염에 만만치 않은 눈빛, 마치 인도의 수행자 사두같다. 나무 그늘이 있는 화단 턱에 앉아있는데 바닥에 이불과 베개까지 있는 것을 보면 그곳이 그의 인가 보다. 결국 노숙인인 셈인데 입성이 깨끗하고 운동화는 하얗게 빛나서 절대 남에게 신세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있는데 경찰관 한 사람이 다가와 노인에게 뭐라고 하더니 금세 언성이 높아진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대충 알 것 같다.
여기서 나가라. 이러고 있으면 관광객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못 나간다. 여긴 내 자리다. 난 원래 여기에 있었고 관광객들은 스쳐가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무슨 권리로 앉아있는 것조차 못하게 하는가?”
사실 내가 경찰관이라도 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경찰관은 진퇴양난이다. 칼은 빼들었는데 내리칠 호박은 없고 그냥 물러나자니 자존심 상하고. 한참 멋쩍게 서 있더니 결국 그냥 돌아선다. 경찰관이 간 뒤에도 노인은 분이 안 풀렸는지 큰 소리로 욕을 해댄다. 정부를 향한 욕이라고 한다.(궁금해서 엄상욱 씨에게 물어봤다) 그 잠깐의 해프닝에서 무질서나 불협화음보다는 자유를 느낀다. 경찰관에게 대놓고 나라 욕을 할 수 있는 나라. 그 나라는 국민이 존중 받는 국가다.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산타클로스 얘기를 신나게 하다 보니 성 니콜라스 교회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이번 회가 끝났다. 교회가 코앞이니 다음 회에 좀 더 충실히 전해드리는 수밖에.


추천
(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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