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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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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에 해당되는 글 2

  1. 2011.01.10 [사라져가는 것들 155] 신당(神堂)4
  2. 2007.10.10 [사라져가는 것들 29] 굿2
2011. 1. 10. 08:4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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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에서,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제대로 된 신당을 찾는 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더욱, 내가 그 신당을 만난 게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와 묶인 보이지 않는 끈 같은 것이 있어서  그곳으로 당겼을지도 모른다. 시작은 내가 진행하는 방송프로그램부터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서울의 추억’, 즉 근현대 생활유산을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어서, 그와 관련한 짧은 기획물을 만들기로 했다. 제작회의를 하는 중에 데스크의 눈이 내게 멈췄다. ‘사라져가는 서울의 추억’ 이라는 콘셉트가 자연스럽게 나를 떠올리게 한 모양이었다. 군말 없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비록 케이블TV라고 해도,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직접 현장에 나가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취재원 접촉. 전화 통화를 통해 알게 된 분이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오문선 학예사였다. 여자 분이었는데 역사박물관에서 근현대생활유산 수집을 전담하는 분이었다. 오 학예사가 처음 제안한 것은 세운상가 취재였다. 세운상가에 오래된 시계수리점이 있는데, 일제 때부터 쓰던 수리용 공구를 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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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에 맞춰 대본을 쓰고 촬영동선을 짰다. 맨 먼저 시계수리점에 들러 물품 수집 과정을 담고 기증한 분의 인터뷰를 따고, 다음에 재개발 중인 모래내시장을 들러서 촬영하고…. 맨 마지막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그동안 수집한 것들을 찍고 관장 인터뷰를 따고…. 비교적 복잡하지 않은 동선이라 하루에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촬영 당일 생겼다. 대본을 완성하고 PD, VJ와 시간을 조율하는 등 준비를 마쳐놓고 출발하려는데 오 학예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계수리점의 주인이 갑자기 병환이 나서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하는 오 학예사도 황당하다는 목소리였다.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다행이 다른 아이템으로 부랴부랴 때웠지만, 언제 퇴원할지 모르니 다음 일정을 잡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2주일 쯤 지난 뒤 다시 전화를 했더니, 그 분이 퇴원은 했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때 오문선 학예사가 조심스럽게 꺼내놓은 곳이 보광동 신당이었다. 보광동 일대에서 활동하던 장남옥이란 큰 무당이 몇 달 전에 타계했는데, 유품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수거작업을 할 때 촬영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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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이라…. 낚시미늘을 물어버린 물고기처럼 거부할 수 없는 그 무엇이 확 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일이 내게 오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을까? 방송도 방송이지만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굿하는 과정을 밤새워 취재하고 글로 쓴 적이 있지만 도심에 있는 신당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촬영 약속을 잡은 날은 12월17일. 눈이 제법 내렸다. 아침 일찍 도착해보니 골목마다 떡가루 같은 눈이 흩뿌려져 있었다. 신당이 있다는 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가정집 같았다. 바깥풍경을 스케치하는 중에 오 학예사가 도착했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 따라 들어가다 보니 약간은 냉랭하고 음습한 기운이 돌았다. 신당은 전실과 신당으로 구분돼 있었고 살림을 하는 공간은 별도로 있었다. 신당의 문 앞에 서면서부터 평범하지 않은 느낌이 전신을 감쌌다. 꼭 불편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그렇다고 안온하거나 평안한 것과는 조금 다른…그물에 갇혔는데 그리 심하게 옥죄이지는 않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으니 기침 참듯 안으로 꼭꼭 갈무리 하는 수밖에. 오 학예사에 따르면, 이 신당은 서울 무당의 전통신당을 제대로 갖춘 곳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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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수거팀이 도착하기 전이라 오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신당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징, 기물(器物), 종, 북, 명두 등 각종 무구(巫具)가 금방 사용하기라도 한 듯 제 자리에 놓여있었고 산신도, 최영장군상 등 무신도(巫神圖)들도 눈을 부릅뜬 채 낯선 방문객을 내려다봤다. 살림방에 들어가 보니 이불이나 요도 펴진 채 그대로였다. 누군가 잠을 자고 아침에 급히 나간 듯 모든 게 생생했다. 큰무당 장남옥 씨는 지난해(2010년) 10월에 타계했다. 1928년생으로 17세에 무당이 된 뒤 40년 동안 용산구 보광동에 거주하며, 둔지미 부군당의 당주무당으로 활동했다. 장남옥씨나 신당을 이해하자면 몇 가지를 먼저 알고 넘어가야한다. 당주무당이란 과거에 마을마다 있었던 신당의 의례를 주관하는 무당을 말한다. 또 부군당(府君堂)은 민간신앙의 대상물인 신을 모셔 놓은 신당을 말한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역에서만 그렇게 불렀으며 서울에만 15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몇 곳의 당에서는 정초에 당제를 지낸다. 이를 주관하는 것이 바로 당주무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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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옥씨가 당주무당으로 있던 둔지미부군당은 원래 지금의 용산로 6가(현 국립중앙박물관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둔지미 마을이 1930년대 일제의 군사용지로 수용되면서 보광동으로 이주할 때 함께 옮겨 앉게 되었다. 어찌 보면 기구한 사연을 지닌 부군당인 셈이다. 장남옥 씨는 둔지미부군당뿐 아니라 서빙고부군당, 동빙고부군당, 압구정동, 잠원동, 신사동 일대의 마을굿을 주관하던 큰 무당이었다. 굿거리와 재담에 능했다고 한다. 장남옥 씨의 유품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된 데에도 사연이 있다. 장 씨에게는 신내림을 해준 김점례라는 신어미가 있었다. 장남옥씨가 거주하던 신당의 원래 주인이었다. 이 분이 타계하기 전에 집을 보광동3경로당에 기증했는데, 조건은 신딸인 장남옥 씨가 살아있는 동안 쓸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미리 정리가 되는 바람에, 장 씨가 타계한 뒤 집에 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무구 등 유품이 문제였다. 장 씨에게는 자식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버릴 수도 취할 수도 없는 계륵인 셈이었다. 그래서 경로당에서는 유품의 처리와 관련해서 회의를 열었고, 결국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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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선 학예사가 신당에 얽힌 사연을 거의 얘기했을 무렵 유품 수거팀이 도착했다. 훗날 신당을 그대로 복원할 계획이기 때문에 꽤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했다고 한다. 수거 며칠 전에는 실측 및 촬영 작업을 했다. 유물을 포장하는 사람들의 손놀림은 정교했다. 얼핏 보면 그냥 버려도 될 것 같은데도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촬영이 거의 끝날 무렵 경로당에서 감사를 맡고 있는 김영달 할아버지(69세)을 만날 수 있었다. 보광동 토박이라는 김 할아버지는 동네뿐 아니라 신당의 역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김 할아버지의 안내로 둔지미부군당을 찾았다. 부군당에는 마을신으로 제갈무후(제갈공명)를 모시고 있었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찾아 여러 해 전국을 헤매고 다녔지만 부군당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공부가 부족한 탓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여러 가지 생각이 명멸했다. 신당이나 무당, 무구들. 그리고 부군당.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일지도 모른다. 갈수록 잊혀져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건, 무속 자체를 미신이니 혹세무민이니 하여 경원시 하는 시각이야 말로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속은 수천 년을 이어온 이 땅 고유의 신앙이다.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고 인간의 염원을 하늘에 전하는 이들을 무당이라 불렀다. 그렇게 긴 세월 백성 곁을 지켜왔으니 전통문화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지금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훗날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중요한 유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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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0. 10. 20:13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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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무렵이라는 건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데, 국민학교 4학년이었는지 5학년이었는지는 간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마냥 분명치 않다. 짝을 잃어 못쓰게 된 장난감 퍼즐처럼, 순서를 짜 맞추기도 힘들어졌다. 아주 드물게, 기억을 살려 완성된 그림을 그려보려 하지만 터무니없이 왜곡된 조합만이 나타나고는 한다. 그러나 망각이 위대하다면 기억도 가끔 놀라운 힘을 발휘 할 때가 있다. 예고되지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불쑥 내밀어지는 잔흔은 여전히 잘 갈린 작둣날처럼 시퍼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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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등을 여러 개 매단 마당은 제법 밝았다. 어둑신해질 무렵부터 모여든 동네사람들로 마당은 빈틈이 없었다. 초가을이었지만, 마루에 뉘어진 나는 두꺼운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나는 그 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자꾸 몸을 뒤챘다. 타는 듯한 갈증에 시달리면서 고개를 빼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태어난 기념으로,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심었다는 오동나무의 커다란 잎새 사이에 몸을 숨긴 달을 발견했을 땐 목을 비집고 나오는 탄성을 이 사이에 물고 아꼈다. 유일하게 익숙한 존재였다. 그 자리의 주인공으로 놓여진 나는 그 자리의 유일한 이방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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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색 치마저고리 위에 타오를 듯 붉은 쾌자(快子)를 걸친 무당의 머리 위에는 꽃 갓이 조금 위태롭게 얹혀 있었다. 나는 갓이 언제쯤 떨어질까 하는 아이다운 궁금증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신이 오른 무당이 달이라도 따 내릴 듯 겅중겅중 뛰었다. 무당의 양손에 들린 칼이 달빛을 머금었다 토하면서 몸을 뒤챘다. 칼끝의 쇠고리에서 나는 쩔렁 쩔렁 소리가 계속 신경줄을 비틀었다. 쇳소리 사이사이로 무당은 끊임없이 사설을 뱉어내었다. 불쌍허신 조씨 망자…… 편안허게 가옵시고……. 나는 꽁꽁 언 겨울날, 오줌이라도 지린 것처럼 진저리를 쳤다. 며칠 전 할머니와 어머니가 나누던 대화가 귓속에서 꿈틀거리며 자꾸 키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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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늬 시아버지가 갈 델 뭇 가고 구천을 떠도니께 쟤가 저렇게 자꾸 아프다는 겨. 이승에 뭐 존 걸 두고 갔다구 그러는지 원”
 할머니는 치마말기를 올려 코를 팽하고 풀었다. 개진개진 젖은 눈가가 금방 허물어질 듯 했다.
 “쟤가 워떤 애냐? 5대 독자여, 5대 독자. 굿 헐 돈 애껴서 앞길에 지 하래비 원혼을 달구 다니게 헤서야 쓰겄냐? 그러니께 너는 아무소리 허지 말고 보구만 있어”
 “그리두 요즘 시상에 굿 허는 사람이 워딨다고……. 그러너니 읍내 병원이라도 한번 더 가는 게 날텐디. 굿헐 만한 돈두 웂구…….”
 “애가 왜 자꾸 말이 많다냐? 그러다가 동티나먼 워쩔라구. 병원 가서 고칠 병 같으먼 벌써 나섰어야. 잘못되는 꼴 봐야 정신 차리 것냐? 그러구 돈 걱정은 말어. 내 몸을 팔어서라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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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는 열기 같은 것이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리저리 뜸을 들이던 무당이 작두 위로 올라서자 둘러선 사람들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렀다. 나는 이불을 제치고 조금 몸을 일으켰다. 무당은 시퍼런 작둣날에 발을 비벼댔다. 소름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작두에서 내린 무당이 훠이- 훠이- 소리내며 다가올 때쯤엔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벌레처럼 옹송그려 몸을 조그맣게 만드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의 전부였다. 자갈밭을 달리는 듯 제법 낮아졌던 징과 장구소리가 숨이라도 넘어갈 듯 긴박해졌다. 무당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떨림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다. 내 눈에 보이는 무당의 얼굴은, 악귀의 모습 그대로였다. 악귀는 순간순간 할아버지로 바뀌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생전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 놈,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이놈아. 억울해서 못 죽어. 눈을 감기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눈을 감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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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늬 시아버지가 워디서 점을 봤다는디, 쟤가 전생에 자기 웬수였다는구나. 참말로 기가 맥혀서. 그 점쟁이가 당신이 살라면 당신 손자가 죽어야헌다구 그렜다먼서, 애를 저렇게 미워하는구나. 살만치 산 당신이 가야지 웬말이냐고 퉁을 줘도 씨도 안 멕히니. 당신 목심만 중헌 줄 아는 양반이니…… 얼마나 더 살 것다고 하나밖에 웂는 손자를. 아들, 메느리 젊으니 애는 또 낳으면 된다나 워쩐다나. 젊어서나 늙어서나 웬수같은 짓만 허고 댕기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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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한을 풀지 못한 할아버지가 날 데리러 온 것이 틀림없다는 공포에 심장이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손을 연신 내저었지만 내 미약한 저항은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했다. 마당가에 서 있던 오동나무도 넓은 잎새를 흔들면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쿵- 쿵- 오동나무가 다가오는 소리…… 징소리…… 달 없는 밤길에 나선 듯 눈앞이 캄캄해졌다. 비명은 잘못 삼킨 갈치가시처럼 목에 걸려 넘어오지 않았다. 순간 의식을 잡고 있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이호준 단편 '올가미 벗어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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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하면서] 시대, 아니 그 시대를 경영하는 사람들, 그리고 특정종교와의 불화가 그들에게 돌을 던지게 했을 것입니다. 전국의 굿판을 따라다닐 만큼 열정적이지 못하지만, 무당이 인간의 서원을 하늘에 올리고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내리는 메신저 중의 하나임을 믿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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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굿이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의 하나임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무속은 혹세무민하는 타도대상이 아니라 우리 문화를 형성해온 '축' 중의 하나였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의 소리를 하늘에 전해준 이들이 그들이었습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무속신앙은 결코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용광로였고 타종교, 사회 변화와 끝없이 절충해 수천 년을 생존할 수 있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얼마 전 굿자리에 카메라 하나 들고 찾아가, 다리가 저리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특별한 몰입도 거부도 예비하지 않고 제 자신을 백지 한 장만큼이나 가벼이 한 채였습니다. 그것이 파헤쳐진 돼지의 육신에 삼지창을 꼽던 자리였는지, 늙은 만신이 맨발로 작두에 오르던 때였는지는 모릅니다. 제 눈에서 툭, 하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어둠이 깃든 자리에만 서면 천형처럼 눈물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카타르시스라 믿고 싶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제 자신을 정화하고 내일을 향해서 다시 설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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