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모시풀'에 해당되는 글 1

  1. 2008.10.13 [사라져가는 것들 80] 모시길쌈14
2008. 10. 13. 11:11 사라져가는 것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할머니.
지난주에는 그 곳에 다녀왔습니다.
아직 그리움이 한(恨)의 덩어리를 깨지 못해, 선뜻 고향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곳.
제 태(胎)가 묻혀있고 할머니의 무덤이 날마다 키를 낮추는 곳.
그날따라 는개만큼이나 작은 입자의 비가 내렸습니다.
세월 가도 여전히, 그 곳의 비는 가슴으로 내립니다.
해마다 베어내도 잡초가 극성을 떠는 무덤은, 살아생전 할머니의 곤고했던 삶을 어찌 그리 닮았는지.
제 가슴에도 쐐기풀들이 서걱거리며 바람에 눕습니다.
풀을 뜯어내며, 세월이 흘러도 풀어지지 않는 설움에 결국 목을 놓고 말았습니다.
할머니,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게 엎드려 있자니 울음은 스러지고, 적막만 깔려있던 산모롱이 어디쯤에선가 베틀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딸깍 스르릉… 딸깍 스르릉…
이게 무슨…?
전신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할머니가 평생 눈물로 짰던 그 많은 모시들이 올올이 풀어져 이승과 저승을 잇는 끈이 된 걸까요?
할머니는 그곳에 가서도 베틀에 앉아 계신건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할머니.
낡은 흑백사진처럼 조금 바랬지만,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한데요.
그 시절의 여름은 온천지가 모시풀이었어요.
모시풀이라는 게 6월에서 10월 사이에 세 번씩 수확하는 지라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세모시는 예나 지금이나 그 명성이 대단하지요.
가늘고 촘촘한 올, 맑고 흰 색깔, 까끌까끌하고 시원한 질감….
직접 입어본 적은 없지만, 세모시 옷을 입으면 날아갈 듯 가볍다는 말은 참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의 긴 ‘전쟁’은 모시풀을 첫 수확하는 초여름부터 시작됐습니다.
물론 삯을 받고 모시를 대신 짜 주는 게 당신이 하는 일의 대분이었지만, 모시풀을 벗겨서 태모시를 만들고 째기‧삼기‧모시굿 만들기‧날기‧매기까지 손수 할 때도 많았으니까요.
이 모든 과정은 숙련된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고난이도의 기술이었습니다.
태모시가 만들어지면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말린 뒤, 다시 물에 적셔 올을 이로 하나하나 쪼개는 일을 째기라고 하지요.
째기나, 올을 이어 실을 만드는 삼기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작업이었습니다.
실이 균일하게 이어져야하는데 대충 하다가는 들쑥날쑥 꼴도 아니게 되니까요.
그래서 당신의 앞니는 닳고 입술은 핏발이 비치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을 체에 일정한 크기로 서려 모시굿을 만들지요.
끝으로 날기와 풀 먹이는 과정인 매기를 거친 뒤에야 베틀에 올릴 수 있었지요.
모시매기 역시 보통 힘든 과정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요즘이야 가스불로 온도를 유지하면서 매니 그나마 낫지만 그땐 왕겨불로 강약을 조절하면서 했으니까요.
매캐한 연기에 눈물이 나고, 땀은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할머니.
어느 날엔가 가슴에 박힌 기억은 아직도 시퍼런 날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땅거미가 미처 사립문을 밀기도 전에 손자에게 보리밥 챙겨 먹이고, 이부자리 깔아놓고 창문도 없는 움집으로 건너가던 뒷모습.
낮에는 집안일에 품앗이에, 푸성귀라도 뜯어오느라 잠시도 앉아있을 틈이 없었던 당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녁이면 빚쟁이처럼 베틀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모시 길쌈도 계절을 타는 일이라 유달리 바쁠 때가 있었습니다.
무명이나 비단은 상관없었지만 삼베와 모시는 찬바람이 나기 전에 짜는 게 좋다고 하지요.
적절한 습기가 있는 계절이라야 모시올이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하니까요.
물론 겨울이라고 모시길쌈을 안 하는 건 아니었지만, 건조하면 실이 끊어지기 일쑤였고 다시 잇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지요.
요즘처럼 가습기라도 있었으면 계절 같은 건 상관없었을 텐데요.
한 여름에 바람 한 점 없는 움집에서 모시를 짜려니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었지요.
잠에서 깨어 오줌을 누러 나왔다가 움집 문을 살짝 열면, 정물처럼 베틀에 앉아있던 당신의 모습은 지금도 눈물입니다.
“오줌 마려워서 나왔냐? 할미 걱정 말고 어서 들어가 자거라”
당신의 목소리는 삼년 장마 끝 마른논처럼 갈라져 있었습니다.
갈라진 골골말다 붉은 설움이 석류 알처럼 배어있었다는 걸 어린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창호지에 머물던 어둠이 희부옇게 바랠 때까지도 베틀소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할머니.
저는 얼마나 철없는 손자였던가요.
당신이 가슴 속 피울음 대신 토해내던 베틀소리는, 제겐 자장가였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고 그 소리에 의해 잠에서 깨었지요.
잠 속에서도 꿈인 듯 생시인 듯 베틀소리를 들었습니다.
제 유년기는 그렇게 가난과 고독과 베틀소리가 씨줄날줄로 엮인 직조물이었습니다.
베틀은 견고한 성(城)이었습니다.
그 성의 성주는 당연히 할머니였고요.
도투마리를 얹고 잉아를 걸어 말코에 연결하고 앉을깨에 앉아 부티를 허리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두른 할머니에게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지요.
어린 저는 그 성 안에서 영원한 안온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할머니는 솜씨가 얼마나 좋았던지요.
당신이 짠 모시는 곱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15새쯤의 모시를 짰던 게 아닌지 짐작 할뿐입니다.
10새만 넘어도 세모시라 하니 15새는 인간이 짤 수 있는 가장 고운 경지를 말하지요.
하지만 그런 솜씨도, 잠을 잊어버린 근면도 가난의 늪에서 우릴 건져줄 수 없었습니다.
곤궁과 궁핍은 늘 거북껍질처럼 단단하게 당신의 등에 붙어있었습니다.
그날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할머니.
그날 아침 당신은 베틀 위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뛰어 들어가 울면서 몸을 흔들었을 땐 이미 싸늘함만 남은 뒤였지요.
당신은 그렇게 해서야 가난과 고통의 덫에서 발을 뺄 수 있었습니다.
손자가 눈에 밟혀 눈도 감지 못한 한 노인의 주검은 작고 초라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시집을 오자마자 앉은 뒤로 단 한 번도 편하게 내려와 본 적이 없던 베틀에서 세상을 떠나보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할머니.
올해도 당신의 무덤에는 바람만 하릴없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가랑비에 흠씬 젖은 동네 역시 주인이 야반도주한 빈집처럼 을씨년스러웠지요.
지금까지 길쌈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안했지만, 그 옛날 모시풀이 손을 흔들던 밭에는 과거의 흔적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값싸고 질기고 부드러운 화학섬유가 나온 뒤로는 모시농사를 지을 일이 없어졌지요.
그 덕에, 밤낮으로 고단했던 할머니 같은 여인들의 삶이 조금 편해졌을까요?
어느 곳은 묵정밭이 되어 온갖 풀들이 아우성치고 있었습니다.
밭 한 뙈기를 아쉬워하던 할머니의 얼굴이 그 위에 자꾸 겹쳐져서 여러 번 머리를 흔들어야 했습니다.
할머니.
당신의 가슴에 늘 그렇게 안타깝던 손자는 더듬더듬 세상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전히 무덤 위에 눈물이나 뿌리는 심성 무른 사내지요.
물론 오늘날까지 살아온 건 할머니가 제 앞에 깔아놓았던 모시올 덕분입니다.
어두운 길에서도 그걸 잡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지요.
할머니.
도시로 돌아온 지금도, 당신의 무덤에서 들은 베틀소리는 여전히 귀에 남아 울립니다.
딸깍 스르릉… 딸깍 스르릉…
환청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자꾸 되뇝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