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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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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에 해당되는 글 2

  1. 2008.10.13 [사라져가는 것들 80] 모시길쌈14
  2. 2008.09.22 [사라져가는 것들 77] 춘포(春布)길쌈13
2008. 10. 13. 11:11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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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지난주에는 그 곳에 다녀왔습니다.
아직 그리움이 한(恨)의 덩어리를 깨지 못해, 선뜻 고향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곳.
제 태(胎)가 묻혀있고 할머니의 무덤이 날마다 키를 낮추는 곳.
그날따라 는개만큼이나 작은 입자의 비가 내렸습니다.
세월 가도 여전히, 그 곳의 비는 가슴으로 내립니다.
해마다 베어내도 잡초가 극성을 떠는 무덤은, 살아생전 할머니의 곤고했던 삶을 어찌 그리 닮았는지.
제 가슴에도 쐐기풀들이 서걱거리며 바람에 눕습니다.
풀을 뜯어내며, 세월이 흘러도 풀어지지 않는 설움에 결국 목을 놓고 말았습니다.
할머니,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게 엎드려 있자니 울음은 스러지고, 적막만 깔려있던 산모롱이 어디쯤에선가 베틀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딸깍 스르릉… 딸깍 스르릉…
이게 무슨…?
전신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할머니가 평생 눈물로 짰던 그 많은 모시들이 올올이 풀어져 이승과 저승을 잇는 끈이 된 걸까요?
할머니는 그곳에 가서도 베틀에 앉아 계신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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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낡은 흑백사진처럼 조금 바랬지만,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한데요.
그 시절의 여름은 온천지가 모시풀이었어요.
모시풀이라는 게 6월에서 10월 사이에 세 번씩 수확하는 지라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세모시는 예나 지금이나 그 명성이 대단하지요.
가늘고 촘촘한 올, 맑고 흰 색깔, 까끌까끌하고 시원한 질감….
직접 입어본 적은 없지만, 세모시 옷을 입으면 날아갈 듯 가볍다는 말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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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의 긴 ‘전쟁’은 모시풀을 첫 수확하는 초여름부터 시작됐습니다.
물론 삯을 받고 모시를 대신 짜 주는 게 당신이 하는 일의 대분이었지만, 모시풀을 벗겨서 태모시를 만들고 째기‧삼기‧모시굿 만들기‧날기‧매기까지 손수 할 때도 많았으니까요.
이 모든 과정은 숙련된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고난이도의 기술이었습니다.
태모시가 만들어지면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말린 뒤, 다시 물에 적셔 올을 이로 하나하나 쪼개는 일을 째기라고 하지요.
째기나, 올을 이어 실을 만드는 삼기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작업이었습니다.
실이 균일하게 이어져야하는데 대충 하다가는 들쑥날쑥 꼴도 아니게 되니까요.
그래서 당신의 앞니는 닳고 입술은 핏발이 비치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을 체에 일정한 크기로 서려 모시굿을 만들지요.
끝으로 날기와 풀 먹이는 과정인 매기를 거친 뒤에야 베틀에 올릴 수 있었지요.
모시매기 역시 보통 힘든 과정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요즘이야 가스불로 온도를 유지하면서 매니 그나마 낫지만 그땐 왕겨불로 강약을 조절하면서 했으니까요.
매캐한 연기에 눈물이 나고, 땀은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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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어느 날엔가 가슴에 박힌 기억은 아직도 시퍼런 날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땅거미가 미처 사립문을 밀기도 전에 손자에게 보리밥 챙겨 먹이고, 이부자리 깔아놓고 창문도 없는 움집으로 건너가던 뒷모습.
낮에는 집안일에 품앗이에, 푸성귀라도 뜯어오느라 잠시도 앉아있을 틈이 없었던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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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면 빚쟁이처럼 베틀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모시 길쌈도 계절을 타는 일이라 유달리 바쁠 때가 있었습니다.
무명이나 비단은 상관없었지만 삼베와 모시는 찬바람이 나기 전에 짜는 게 좋다고 하지요.
적절한 습기가 있는 계절이라야 모시올이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하니까요.
물론 겨울이라고 모시길쌈을 안 하는 건 아니었지만, 건조하면 실이 끊어지기 일쑤였고 다시 잇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지요.
요즘처럼 가습기라도 있었으면 계절 같은 건 상관없었을 텐데요.
한 여름에 바람 한 점 없는 움집에서 모시를 짜려니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었지요.
잠에서 깨어 오줌을 누러 나왔다가 움집 문을 살짝 열면, 정물처럼 베틀에 앉아있던 당신의 모습은 지금도 눈물입니다.
“오줌 마려워서 나왔냐? 할미 걱정 말고 어서 들어가 자거라”
당신의 목소리는 삼년 장마 끝 마른논처럼 갈라져 있었습니다.
갈라진 골골말다 붉은 설움이 석류 알처럼 배어있었다는 걸 어린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창호지에 머물던 어둠이 희부옇게 바랠 때까지도 베틀소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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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저는 얼마나 철없는 손자였던가요.
당신이 가슴 속 피울음 대신 토해내던 베틀소리는, 제겐 자장가였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고 그 소리에 의해 잠에서 깨었지요.
잠 속에서도 꿈인 듯 생시인 듯 베틀소리를 들었습니다.
제 유년기는 그렇게 가난과 고독과 베틀소리가 씨줄날줄로 엮인 직조물이었습니다.
베틀은 견고한 성(城)이었습니다.
그 성의 성주는 당연히 할머니였고요.
도투마리를 얹고 잉아를 걸어 말코에 연결하고 앉을깨에 앉아 부티를 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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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른 할머니에게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지요.
어린 저는 그 성 안에서 영원한 안온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할머니는 솜씨가 얼마나 좋았던지요.
당신이 짠 모시는 곱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15새쯤의 모시를 짰던 게 아닌지 짐작 할뿐입니다.
10새만 넘어도 세모시라 하니 15새는 인간이 짤 수 있는 가장 고운 경지를 말하지요.
하지만 그런 솜씨도, 잠을 잊어버린 근면도 가난의 늪에서 우릴 건져줄 수 없었습니다.
곤궁과 궁핍은 늘 거북껍질처럼 단단하게 당신의 등에 붙어있었습니다.
그날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할머니.
그날 아침 당신은 베틀 위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뛰어 들어가 울면서 몸을 흔들었을 땐 이미 싸늘함만 남은 뒤였지요.
당신은 그렇게 해서야 가난과 고통의 덫에서 발을 뺄 수 있었습니다.
손자가 눈에 밟혀 눈도 감지 못한 한 노인의 주검은 작고 초라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시집을 오자마자 앉은 뒤로 단 한 번도 편하게 내려와 본 적이 없던 베틀에서 세상을 떠나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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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올해도 당신의 무덤에는 바람만 하릴없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가랑비에 흠씬 젖은 동네 역시 주인이 야반도주한 빈집처럼 을씨년스러웠지요.
지금까지 길쌈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안했지만, 그 옛날 모시풀이 손을 흔들던 밭에는 과거의 흔적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값싸고 질기고 부드러운 화학섬유가 나온 뒤로는 모시농사를 지을 일이 없어졌지요.
그 덕에, 밤낮으로 고단했던 할머니 같은 여인들의 삶이 조금 편해졌을까요?
어느 곳은 묵정밭이 되어 온갖 풀들이 아우성치고 있었습니다.
밭 한 뙈기를 아쉬워하던 할머니의 얼굴이 그 위에 자꾸 겹쳐져서 여러 번 머리를 흔들어야 했습니다.
할머니.
당신의 가슴에 늘 그렇게 안타깝던 손자는 더듬더듬 세상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전히 무덤 위에 눈물이나 뿌리는 심성 무른 사내지요.
물론 오늘날까지 살아온 건 할머니가 제 앞에 깔아놓았던 모시올 덕분입니다.
어두운 길에서도 그걸 잡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지요.
할머니.
도시로 돌아온 지금도, 당신의 무덤에서 들은 베틀소리는 여전히 귀에 남아 울립니다.
딸깍 스르릉… 딸깍 스르릉…
환청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자꾸 되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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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22. 10:2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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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요새는 몸이 아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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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를 타고 오는 노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단박에 거절해야 된다는 생각과, 그러면 안 된다는 인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낯선 사람과의 침묵을 먼저 못 견뎌한 건 노인이다. “잠깐 기다려 봐유“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뜨겁지만, 끝까지 버텨보기로 한다. 잠시 뒤 전화기 안으로 바깥노인의 목소리가 들어온다. 노인은 의외로 선선하다. 무슨무슨 책을 쓰는 누구누군데 찾아뵈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별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라고 대답한다. 춘포짜기를 만나기 위한 첫발을 그렇게 떼었다. 더 늦기 전에 찾아봐야 한다는 초조감 때문에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춘포는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명주실을 날실로, 모시를 씨실로 하여 짜는 천을 말한다. 올이 가늘고 빛이 고운 덕에 예로부터 잠자리 날개로 불리기도 했다. 통풍성과 내구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한번 지으면 평생을 입을 수 있다고 한다. 노란 빛깔을 띠는데, 이는 치자로 물을 들이기 때문이다. 주로 봄에 입기 때문에 춘포라고 불렀다. 오로지 청양지역에서만 이 춘포를 짰는데, 그나마 이젠 단 한 집안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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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군 운곡면 후덕리.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25호 백순기 할머니(82세)가 사는 동네다. 그 동네를 찾은 건 늦여름 햇살의 기세가 조금도 꺾이지 않은 8월말이었다. 청양은 평야지대인 예산과 홍성, 그리고 공주와 보령에 둘러 쌓여있지만 충청도에서는 보기 드물 만큼 오지다. 하지만 후덕리는, 그 이름 때문인지 한 눈에도 후덕해 보이는 들을 끼고 있다. 대부분의 농촌이 그렇듯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길을 묻기도 쉽지 않다. 마을에 도착해 몇 집을 기웃거리다 결국 전화를 건다. 파란담장집이라고 해서 둘러보니 바로 눈앞에 두고 헤매고 있었다. 마당에서 허리가 바짝 구부러진 바깥노인 한 분이 깻단을 나르다가 반갑게 맞는다. 이상준(82세) 할아버지다. 노인의 미소가 천진불처럼 푸근하다. 다짜고짜 대문 안으로 끌더니 손에 잡히는 방석을 하나 집어던지며 앉으란다. 엉덩이를 채 붙이기도 전에 노인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사람이 그리웠음에 틀림없다. 이야기는 대동아전쟁 때 관동군으로 끌려갔다 돌아온 대목부터 시작된다. 신의주를 거쳐 봉천까지 끌려갔었다고 한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몸이 많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평생 선하게 살아온 사람은 그 공덕이 얼굴에 그대로 새겨진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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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있으려니 할머니 한 분이 안채에서 나오더니, 미처 이쪽까지 건너오지 못하고 토방 의자에 않는다. 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춘포를 짜는 백순기 할머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오른다. 동갑내기 두 노인은 금슬이 무척 좋아 보인다. 할머니가 이쪽에 대고 큰 소리로 묻는다. “시골늙은이 뭐 볼 게 있다고 찾아온대유?” 대답 역시 자연스럽게 큰 소리가 된다. “여쭤 볼 게 있어서요. 서울에서는 할머니가 유명해요. 이쪽으로 오세요” 노인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섬돌 위에 앉는다. 신산했을 삶이 깊은 주름으로 새겨져 있다. 할머니는 곁에 앉아서도 별 말이 없다. 모든 말을 할아버지가 대신한다. 인터뷰고 뭐고 따로 할 필요가 없다.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듣고 싶었던 사연이 모두 들어있다. 백순기 할머니는 열아홉에 혼인을 했다. 인연이 그랬던지 처녀 적부터 길쌈을 배웠다고 한다. 시집을 오자마자 춘포를 짜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따져도 63년이다. 집안으로 보면 4대째 춘포를 짠다고 한다. 둘째며느리에게 물려준다니 5대째로 이어지는 셈이다. 지금 쓰고 있는 베틀도 100년이 넘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수줍게 고백한다. “10년 전에 살짝 풍을 맞았슈. 그래서 이젠 베틀 앞에 앉아도 전처럼 일을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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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춘포 짜는데 필요한 모든 걸 자급자족한다. 아직도 1300평의 밭에 모시농사를 짓고 명주실을 뽑기 위한 누에도 직접 친다. 할아버지는 전만큼 많이는 못한다고 한숨이다. 스스로의 몸을 건사하기도 힘겨워 보이는 노인들이 농사를 짓다니…. 누에를 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걸 농촌출신들은 안다. “평생 베틀 앞에 앉은 죄지….” 할머니는 베틀과 함께 해온 삶을 한탄처럼 말하지만, 원망이나 회한보다는 그리움이 더 많이 묻어나온다. 초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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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멀리 둔 시선에는 무상한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득하다. 젊어서는 3~4일이면 춘포를 한필씩 짜냈다는데 이제는 베틀 앞에 앉기도 힘들어졌으니. 할아버지가 방으로 잠깐 들어오라고 하더니 이것저것 주섬주섬 내놓는다. 그동안 신문과 잡지에 났던 춘포에 관한 자료, 각종 경진대회에서 받은 상장과 표창장, 춘포로 지은 옷 등이 끝없이 쏟아진다. 춘포가 관심을 받기 시작한 건 이상준 할아버지의 모친이자 백순기 할머니의 시어머니인 양이석씨부터이다. 고(故) 양이석씨는 춘포짜기 초대 기능보유자였다. 백순기 할머니는 시어머니로부터 기능을 전수받았고, 이 기능이 둘째며느리인 김희순(52세)씨에게로 넘겨졌다. 대전에 사는 김씨는 춘포짜기 기능전수자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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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베틀 앞에 앉으라고 권한다. 할머니는 먼저 춘포로 지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사진을 찍어야하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몸이 불편한 노인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묵지근해진다. 한쪽 손이 불편하니 옷고름 매는 것조차 힘겨워 보인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를 연발하지만 가슴에 얹힌 바윗돌은 여전히 천근이다. 할아버지는 연신 괜찮다며 되레 민망한 표정이다. 할머니가 베틀에 앉아 느린 손으로 춘포를 짜는 내내 경건한 마음으로 셔터를 누른다. 춘포를 짜기 위해서는 준비과정이 복잡하다. 뚝배기에 누에고치를 넣고 끓이면 고치가 풀어지면서 명주실이 나온다. 그 것을 왕채(누에고치에서 뽑은 실을 감는 기구)를 이용해 얼레에 감는다. 그 다음 딴 틀에 매고 도투마리(날실을 감는 틀)에 감는다. 이때 치자물을 들이고 풀을 먹인다. 감아진 토투마리를 베틀에 올려놓고 잉아(베틀의 날실을 한 칸씩 걸러서 끌어 올리도록 맨 굵은 실)를 건다. 이렇게 완성된 베틀에 모시실(씨실)과 명주실(날실)을 사용하여 천을 짠다. 실을 뽑고 길쌈을 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기구만도 20가지가 넘는다니 절대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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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틀에서 내려온 할머니가 실을 잣는 물레질까지 시연해 보인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까지 참아가며 사진을 찍는다. 사실 춘포짜기는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백순기 할머니의 며느리가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삶의 방편으로 하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생업으로 하는 춘포짜기는 백순기 할머니가 마지막이란 이야기가 된다. 조선 후기에 시작되어, 1940년경부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청양 춘포. 한때 운곡에서는 집집마다 춘포를 짰다고 한다. 춘포 메고 장에 갔다가 술독에 빠져 마누라에게 경을 친 동네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상준 할아버지는 엊그제 일인 양 헐헐 웃는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하나 둘 베틀에서 내려오더니 이제는 아무도 안한다고 한숨이다. 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춘포 짜는 걸 배우려 하지 않는다. 별의별 옷감이 쏟아지는 시대에, 춘포가 각광받을 만한 게 아니란 건 분명하다. 그래도 사라져가는 것들 앞에 서면 피붙이와 이별을 하는 듯 가슴이 저리다. 금방 배달될 테니 자장면 한 그릇이라도 먹고 가라는 걸, 다음 일정을 핑계로 부득부득 길을 나서면서도 마음은 자꾸 뒷걸음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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