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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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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흐맛 강이 있는 다렌데.

다렌데로 가는 길에 만나는 산들은 황량하다.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다. 하지만 이 지역엔 10년 전보다 눈()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막화는 분명 아닌데. 신기한 게 하나 있다. 아나톨리아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렇게 삭막한 땅 천지다. 그런데 이 나라는 7,0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먹고 남을 정도의 식량대국이다. 비옥한 토지는 대체 어디에 숨겨놓은 것일까. 다렌데에 도착한 것은 점심 무렵. 이곳은 말라티아주 서쪽 끝에 있는 조그만 읍이다. 말라티아 시내에서 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토흐맛강 주변에 형성된 유원지 덕분. 버스에서 내리니 조그만 광장이 인파로 북적거린다. 마침 인근의 모스크에서 금요예배를 마친 무슬림들이 쏟아져 나올 시간에 도착한 것이다. 사람이 많으니 활기가 넘쳐서 좋다. 동네 한 가운데로 토흐맛강이 힘차게 흐른다. 물은 석회 성분이 섞인 듯 뿌연 색을 띄고 있다. 산은 나무 한 그루 품지 못하는데 어디서 이런 물이 나올까? 아마 지하에서 솟은 물이겠지.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강변마을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아니, 음식점 빼면 별게 없다. 커다란 모스크와 우뚝 선 미나레트가 차라리 이질적으로 보인다. 강 위엔 엄청나게 큰 수차가 돌아가고 있다. 지금은 구경거리로 전락했지만 한 때는 물방앗간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밀을 찧어 가루를 만들고 그 밀가루로 빵을 만드는 빵집이 생기고 동네 사람들은 아침마다 빵을 사러오고. 사는데 없으면 안 되었던 것들도 세월이 흐르면 그저 풍경으로 남거나 등을 돌려 떠나야 한다. 사람이라고 안 그럴까.

 

토흐맛 강.

소문주 바바 사원의 미나레트.

점심식사로 나온 송어구이.

풍경이 좋은 강가에 앉았지만 내게는 어떤 음식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이곳 역시 송어구이가 나온다. 유프라테스 강가의 송어요리와 다른 점은 양념을 안 하고 구웠다는 것. 아마 귀한 손님에게 내놓는 요리인 모양이다. 귀한 손님은 아무나 하나? 내 위장에 앉은 커다란 바위덩어리 하나는 꿈쩍도 안 한다. 소화제를 먹고 응급조치를 취해보지만 나아질 기색이 없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음식을 앞에 두고 계속해서 물이나 마시자니 보통 고역이 아니다. 정말 걱정되는 건 체력이 급격이 떨어지면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하는데 타격이 크다는 것. 차차 나아지겠지.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강 건너편에는 잘 지어진 정자들이 서 있는데 가족이나 친구들과 소풍을 온 사람들이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남자들은 불을 피우느라 연기와 싸우고 있고 여자들은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어딜 가나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 불을 피우는데 영 재주가 없는 가장도 있다. 30분 째 부채질을 하지만 여전히 연기에게 쫓겨 다니기 바쁘다. 저러다 저 가족 굶는 거 아냐? 공공기관에서 세운 정자들은 이용료를 받지 않는단다. 이곳 사람들은 좋겠다. 유원지에 돗자리 하나 까는데도 돈을 내느니 마느니 싸워야하는 나라에서 온 사람은 부럽기만 하다. 음식점에서 나오는 길에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코레가지의 손자와 만났다. 이름은 이 나라에 흔한 메흐메트. 15살의 고등학생이다. 물론 그냥 평범한 동네 아이들 중의 하나다. 이 동네에서 계속 살아온 할아버지는 18년 전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토흐맛 강의 수차.

토흐맛 강에 소풍 나온 연인들.

한국전에 참전한 '코레가지'의 손자.

아이가 코레라는 나라를 어찌 알 것이며, 설령 안다고 해도 할아버지가 60년도 더 지난 과거에 그 나라에 가서 싸웠다는 게 무슨 의미를 지닐까. 아이에게는 반가움보다 어색함이 더 크다. 하지만 내 감정은 그렇지 않다. 이런 산골에서 내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했던 한 촌부의 손자를 만난다는 게 우연에 기대는 것으로만 가능한 일일까. 아이와 악수를 나누고 훌리아를 불러 통역을 부탁한다.

네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진심으로 고맙다. 우리는 영원한 형제다.”

느닷없이 형제라고 우기는 낯선 사내가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아이와 헤어져 소문주 바바 박물관으로 간다. 소문주 바바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 테니 잠깐 설명하고 가자. 소문주 바바(Somuncu Baba)는 사람의 이름이다. 투르크족의 정복 전쟁을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소아시아로 이주한 그의 집안은 오스만 제국을 건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훗날 이슬람의 저명한 학자가 된 그는 긴 여행 끝에 부르사라는 곳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는 빵을 구워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한다. 선행이 계속되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는 빵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보시만큼 큰 보시가 어디 있으랴. 그의 큰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사원을 짓고 박물관을 만들었다.

 

 

소문주 바바 박물관에 전시된 빵.

소문주 바바 사원의 아름다운 뜰.

소문주 바바 사원 내부.

박물관을 둘러보다 보니 이 나라, 아니 최소한 이 지역 사람들이 소문주 바바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땅에서 꽃피운 그리스-로마에 비해 문화나 인물의 빈곤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터키 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큰 자부심을 주는 지도 짐작이 간다. 박물관은 소문주 바바를 기리는 사원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모스크는 지금까지 본 어느 사원 못지않게 아름답다. 특히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서 토흐맛강을 내려다보는 미나레트가 장엄하다. 파란 물빛을 자랑하는 연못에서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있다. 소문주 바바의 후손이 지금도 이 모스크의 이맘(이슬람교에서 예배를 선도하는 사람)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이 또한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겠지.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니 규모는 작지만 무척 짜임 새 있는 공간이 펼쳐져 있다. 한 가운데에는 소문주 바바의 유해를 안장한 목제 구조물이 있고 그 앞에서 무슬림들이 경건한 표정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온 무슬림 여인의 간절한 얼굴이 가슴에 와 닿는다. 재미있는 건 실내에 토흐맛강의 근원이라는 수원(水源)이 있다는 것. 조그만 틈으로 들여다보니 정말 물이 흐르고 있다. 또 옆방에는 소문주 바바의 후손들을 안장한 무덤도 있다. 모스크에서 나오니 말라티아 주정부에서 토흐맛강 래프팅을 준비했다고 한다. 래프팅? 물속에 들어가는 거잖아.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건 아무리 재미있어도 무효. 나만 남기로 한다.

 

 

한국-터키인 혼성 래프팅 팀.

인공폭포.

내가 래프팅을 안 한다니 훌리아도 그냥 남겠단다. 오해할라. 내가 안 하겠다고 해서 남은 게 아니라 원래 그녀도 물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게다. 이렇게 말하면 더 변명 같은가? 래프팅 팀은 강의 상류로 올라가고 훌리아와 나는 점심을 먹었던 자리에서 그들을 기다리기로 한다. 래프팅 팀이 내려오는 걸 볼 수 있는 위치다. ! 이제 청춘(?) 남녀가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공간에 남았으니 뭔가 비밀스런 일이라도 일어나야 되지 않을까? 훌리아가 내 곁으로 바투 당겨 앉더니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선생님, 제가 비밀 하나 알려 드릴까요?”

호오! 비밀? 좋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훌리아는 자꾸 뜸을 들인다. 사랑 고백을 하려고 그러나?

그만 뜸들이고 얼른 말해봐.”

사실은요.”

, 그래. 그래.”

저 폭포짝퉁이예요.”

? 그 소리를 하려고 그렇게 망설인 거야? 멋대가리 없이 험악하게 생긴 바위산에서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가 하나 있다. 소문주 바바 사원 바로 옆인데 음식점에서 바로 코앞이다. 나는 처음 보는 순간 물을 퍼 올려서 내려 보내는 가짜 폭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훌리아가 아주 엄청난 비밀을 가르쳐준다는 듯이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난 또. 애가 순진한 거야? 키들거리고 있는데 저만치 래프팅 팀이 내려온다. 모두들 흠뻑 젖어있다. 거봐. 안 가길 잘했지.

 

가장 먼저 사진을 찍어달라고 찾아온 꼬마손님들.

 

동네 아이들이 다 모였다.

일행이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동네 아이들과 사진놀이를 하면서 논다. 너도 나도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며 아우성이다. 제 카메라나 휴대전화를 가져온 녀석들도 있다. 맨 처음엔 초등학교 고학년 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동생들을 데려와 수줍게 모델 노릇을 하더니 잠시 뒤에는 수염까지 듬성듬성 난 녀석들이 와서 줄을 선다. 웬 아저씨들? 나이를 물어보니 열여덟 살이란다. 방학을 맞이해서 집에 내려온 학생들이다. 녀석들~ 아들벌도 안 되는 것들이 수염은 많아가지고 사람 쫄게 만들고 있어. 그 중 하나는 아까 길에서 살구 팔던 녀석이다. 아이들은 하나 같이 갓 따온 오이처럼 싱싱한 표정들이다. 방학이고 뭐고 공부에 치여서 파김치가 다 돼 있을 우리 아이들이 생각난다. 아무튼 동네 아이들 다 모였다. 하나 둘 셋 카운터에 들어갔다가 카메라 배터리 떨어졌다고 집으로 달려가는 녀석, 전화 왔다고 셔터 누르는 걸 잠깐 유예해 달라는 녀석. 가지각색이다. 아무렴 어떠랴. 행복한 시간이다. 이번엔 이 동네 사는 유치원부터 초등학생들이 다 모였다. 녀석들 줄 세우는 것도 일이다. 제대로 됐나 싶으면 딴전 피우는 놈, 저는 왜 안 찍어주느냐고 징징거리는 녀석. 얌마! 너희들이 가만히 있어야 찍지. 그걸 못 기다리고 그냥 집으로 가는 녀석은 또 뭐람. 작은 동네에 이렇게 아이들이 북적거리니 활기가 가득하다. 이 아이들이 터키의 미래다. 사진을 다 찍고 강을 따라 가는 협곡 트래킹을 하기로 한다. 내가 래프팅은 싫어도 트래킹은 자신 있다.

 

동굴 수영장.

음식을 조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강가의 화덕.

지난해 폐티예에서 카쉬로 가던 길, 샤클르켄트 협곡에서 트래킹을 하다가 웅덩이에 빠지고 수첩을 잃어버렸던 악몽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이번엔 물속으로 가는 길이 아니니 위험할 게 없다. 경치는 샤클르켄트보다 훨씬 아름답다. 길도 안전을 고려해서 제대로 만들어놓았다. 노인이든 아이든 누구나 갈 수 있을 것 같다. 강변에는 음식을 해먹으며 쉴 수 있도록 정자를 세워두었다. 물론 이용료는 없다. 정자에는 전기 콘센트까지 달아두었고 그 옆으로는 커다란 화덕을 세워놓았다. 음식재료만 싸오면 한곳에서 모든 게 해결되도록 했다. 그것 뿐 아니다. 곳곳에 어린이 놀이터도 만들어놓았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주민복지가 뭐 별것인가.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제대로 쉬게 해주는 게 최고지. 국격(國格)이 어떠니 하는 거창한 구호 한마디보다 이런 배려가 훨씬 피부에 와 닿는다. 조금 내려가니 수영장이 나온다. 이곳의 물이 바로 소문주 바바 사원의 수원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천연동굴 수영장도 있는데 동굴에서 나오는 물은 항상 22도라고 한다. 동굴 속으로 사람들이 드나들며 수영을 즐긴다. 수영장이라기보다는 온천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러잖아도 신경통을 앓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내려갈수록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절벽에는 5000~7000년 전에 쌓았다는 다렌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 그 옛날에도 이 골짜기에 사람이 살았구나. 단 하나 눈에 거슬리는 게 있다면 곳곳에 쌓여 있는 쓰레기. 여기 사람들도 좀 문제가 있다. 자신이 만든 쓰레기를 각자 가져가면 얼마나 좋을까.

 

까마득한 절벽에 놓인 길.

폭포 앞의 음식점.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넥타이처럼 좁은 길이 위태롭게 걸려 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힐끗 쳐다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다. 누가 저 길을 지나간단 말이냐. 나는 돈을 지게로 담아준다 해도 못한다. 무섭고도 아름다운 협곡이다. 협곡을 벗어나 균프나르라는 동네로 간다. 계곡 사이로 들어가니 바위 사이로 거대한 폭포가 굉음을 내며 쏟아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풀 한포기 깃들 여지도 없는 바위산에 어떻게 저런 폭포가 생겨났을까. 저 물 역시 지하에서 용출한 것이겠지. 폭포 바로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는단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의 아름다운 곳은 모두 음식점이 차지했다. 나는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은근히 겁이 난다. 도대체 몇 끼를 굶은 거야. 여행자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래도 남들보다 더 돌아다니고 사람을 더 만나는 걸 보면 아직은 견딜만 하다는 것이겠지? 뭐 안 먹고 일하면 경제적인 거지. 남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하염없이 폭포나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저 거대한 폭포도 내겐 그리 감동적이지 않다. 스토리가 없는 풍경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촌로의 깊은 주름만큼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저 기념사진 몇 장 찍을 거리에 불과하다. 먹는 것도 없이 폭포 앞에 앉아 있으려니까 몸에 한기가 든다. 한낮의 폭염은 기억 속에서 지워진지 오래다. 저녁을 먹고 나니까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내가 부탁했던 동굴 사람들의 인터뷰가 성사됐단다. 내일 새벽에 그들을 찾아가기로 한다. 배고픈 게 싹 가시며 몸에 기운이 솟아오른다.

 

균프나르 폭포.

숙소로 가는 길에 훌리아가 터키에서 운전면허 따는 법을 들려준다. 먼저 학원에 등록해서 석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해야한다. 비행기나 탱크 면허 따는 것도 아니고 석 달씩이나 걸린담. 2개월은 집중 교육을 받는데, 차가 고장이 날 경우 직접 고칠 수 있도록 엔진구조까지 가르친단다. 모든 국민을 정비사로 만들 생각 아닐까? 그래서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면 각국에 취업을 시키는 거지. 물론 나 혼자만의 상상이다. 그러고 보면 장점도 꽤 많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 차가 고장 나도 보닛조차 열지 못하고 발을 구르는 경우가 한 두 번인가. 두 달의 공부가 끝나면 남은 1개월은 진짜 운전 연습을 한다. 필기와 기능은 우리처럼 학원에 위탁해서 시험을 본다. 시험에 합격하면 학원에서 국가에 기록을 보내고 면허증이 발급된다. 절차가 길고 복잡해서인지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은 우리나라보다 적은 것 같다. 최소한 직진만 3시간짜리 초보운전자는 없을 것 같다.

 

 

동굴로 가는 길가의 양귀비꽃.

아침 다섯 시. 부랴부랴 일어나 샤워를 한다. 오늘 아침에도 코피는 어김없이 흐른다. 뱃속에 들어앉은 돌멩이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도 힘차게 숙소를 나선다. 동굴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길이다. 말라티야 시내에서 한 시간 넘게 달려가야 한다. 지대가 높아지면서 차도 헐떡거린다. 가드레일도 없는 절벽 길의 연속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차 안에서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렇게 돌고 또 돌아 산정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아래서는 위가 까마득해 언제 가나 싶더니, 이제는 저 아래가 까마득한 세상이 돼버렸다. 이 길이 생기게 된 데도 사연이 있다. 꽤 오래 전 동굴에 사는 가장이 수상에게 편지를 썼단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최소한 길은 뚫어줘야 할 것 아니냐고. 그 수상 착하기도 하지. 주 정부에 지시를 내려 다리를 놓고 길을 만들어줬단다. 그 덕분에 지금 나는 편하게 올라간다. 하지만 어느 지점쯤 가니 차도 주저앉는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가야한다. 차에서 내려 보니 모든 게 저 아래 엎드려 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저절로 왕이 될 것 같다. 세상이여, 내게 경배하라! 중간 중간에 집들이 보이고 손바닥만큼 작은 밭들도 여기 저기 박혀있다. 척박한 환경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의지가 읽혀진다. 이른 아침이고 2000m가 넘는 고지대다 보니 제법 쌀쌀하다. 배낭에 넣어뒀던 점퍼를 꺼내 입는다. 엉겅퀴와 꽃양귀비가 햇살에 꽃잎을 널어놓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빨간 양귀비, 고독해 보여서 더욱 아름답다. 사람도 가끔은 그렇게 홀로 서 볼 일이다. 사랑하는 그대여, 대중 속에서 떠나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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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티아의 아파트와 삭막한 산.

예실류트로 가는 길. 산은 헐벗었어도 골짜기의 집들은 풍요로워 보인다.

 

730분으로 맞춰놓은 알람은 끝내 울지 못했다. 알람이 밥값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깨어버린 탓이다. 차라리 귀신을 속이지. 나는 늘 이렇게 나 자신을 속이는데 실패하고 만다. 시간을 보니 정확하게 오전 6. 내 안의 자명종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배고플 때마다 울린다는 전설의 배꼽시계도울고 갈 지경이다. 그런데 이건 말이 안 된다. 6시라고는 하지만 시차를 감안한다면 6시가 아니잖은가. 지금 서울은 낮 12시다. 내 몸이 기계적으로 길들여져 있다면 내가 잠에서 깼어야 할 시간은 지난 밤 12시다. 내 몸에 누가 자동인식 칩이라도 심었나? 조금 더 잤으면 좋으련만, 이미 각성을 맛본 몸은 더 이상 눕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과 터키의 시차는 7시간이다. 서머타임을 적용하는 328일부터 1030일까지는 6시간 차이가 난다. 피곤의 찌꺼기를 빨래 털 듯 털어버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문 쪽으로 다가간다. 창밖은 이미 환하게 밝은 눈치다. 억세 보이는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도 부족해서 두꺼운 커튼을 밀어부치고 있다. 커튼과 창문을 활짝 열어 제친다. ! 창밖엔 뜻밖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혹시 내가 어느 혹성에 불시착한 건가? 이스탄불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해 떠돌았던 지중해 풍경과도 어디 하나 닮은 곳이 없다. 저 멀리로 황량한 산이 끝없이 달리고 눈앞으로는 성냥갑처럼 생긴 아파트들이 열병식을 하고 있다. 두 풍경은 밤새 싸우고 돌아앉은 고부(姑婦)처럼 은근히 배타적이다. 한밤중에 도착하는 바람에 볼 수 없었던 말라티아와의 조우는 이렇게 낯설음으로 시작한다.

 

중간 중간 나타나는 사막 같은 지형.

 

샤워를 하는데 뭔가 찝찝한 느낌에 거울을 보니 또 코피가 흐른다.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최근 며칠 간 아침마다 치르는 행사다. 처음엔 놀라고 낯설었던 것들도 익숙해지면 풍경처럼 객관이 된다. 휴지로 대충 막고 샤워를 마친다. 늦은 밤 빨아놓은 빨래는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남쪽의 고원지대로 내려왔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머리를 다 말리고 나도 움직여야 할 시간은 아직 한참 더 남았다. 뭘 하지? 몇 가지 기록을 한 뒤 비행기에서 읽다만 소설가 김훈 선배(같은 시대 신문사 밥을 먹었다는 일방적 동질감으로 일면식도 없으면서 이렇게 부른다)바다의 기별을 펴든다. 출발할 때 열 권 쯤의 후보들 중에 엄선된 책이다. 그물코처럼 촘촘한 문장들 속으로 풍덩 빠져든다. 어느 대목에서 기어이 코끝이 찡해지고 만다. 사위인 김지하가 교도소에서 나오기로 한 어느 겨울 날, 김지하의 아이를 업고 멀찍이 서서 발을 동동거리는 박경리 선생. 어둠이 깔려도 사위는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한 시대의 질곡이 삭막한 풍경화로 그려져 책 속에 걸려있다. 박경리를, 김지하를, 그의 아이를, 그 풍경을 바라봤을 기자 김훈을 생각한다. 카메라와 배낭을 챙겨 밖으로 나오니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이 눈에 가득 찬다. 돌을 던지면 쨍! 하며 깨질 것 같다. 기온은 생각보다 그리 높은 것 같지 않다. 몇 도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섭씨 30~32도 정도라고 한다. 그러면 서울과 비슷하네. 괜히 쫄았나. 버스는 말라티아 시내의 남쪽에 있는 예실류트라는 곳으로 향한다.

 

공동묘지.

 

경찰차가 계속 앞서 달리길래 우연인 줄 알았더니 일행을 경호(convoy)하는 거란다. 어젯밤 공항에서는 장갑차가 대기하고 있더라니. 고백하건대, 이런 호강 여행은 그리 달갑지 않다. 아니, 도와주고 고생하는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무척 싫어한다. 호강에 겨우면 본질을 놓치기 쉽다. 현지 사람들과의 만남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잘못하면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내가 즐기는 뒷골목 탐험 같은 건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내 마음대로 시간을 쓸 수 없으니 사색의 시간도 줄어든다. 내 여행은 어느 정도 정처 없음이 전제가 돼야 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난 여전히 돈과 시간에 지배당하는 아마추어 여행가일 뿐이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이런 여행에 장점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큰 불편 없이 그 지역에 있는 명소를, 가끔은 남들이 볼 수 없는 것까지 속속들이 볼 수 있다. 그래도 이번엔 여행 전문기자나 여행작가와 동행하기 때문에 다행이다. 그들과는 기대치도 비슷하고 어느 정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는 같이 움직이되 현장에서는 최대한 내 시간을 만드는 수밖에. 말라티아 시내는 그리 넓지 않다. 금세 교외로 빠져나간다. 숙소에서 봤던 황량한 풍경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깊은 골짜기와 좁은 길이 이어진다. 어느 순간 살구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살구가 밭에 있다니, 기껏해야 마당가에 서 있는 늙은 살구나무만 보던 내게는 낯선 풍경이다. 아침햇살을 받은 열매들이 푸른 보석처럼 빛난다.

 

덜 익은 살구.

터키의 말라티아는 살구와 체리의 고장으로 불린다. 그래서 어디를 가도 살구나무가 지천이다. 여름에 살구가 노랗게 익어가는 모습은 장관이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엔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만으로도 흐뭇해진다. 그 계절에 꼭 한번 다시 와야지.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동요도 생각난다. ‘살구꽃이 필 때면 돌아온다던~’ 나훈아 노래는 덤으로. 말라티아 사람들은 지상에서 가장 맛있는 살구가 이곳에서 난다.”고 자랑한다. 세계에서 소비되는 말린 살구의 80%가 말라티아산이라고 한다. 또 하나 유명한 게 체리다. 체리가 익을 무렵엔 페스티벌도 열린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이 도시를 잠깐 소개하고 가자. 말라티아는 아나톨리아 남동부 고원 내륙에 있는 말라티아주의 주도(州都). 유프라테스 강과 지류들이 만든 평야에 자리 잡고 있다. 이스탄불에서는 비행기로 1시간 35분쯤 걸리는데 0640, 2010분 등 매일 2회의 직항이 있다. BC 2000년경부터 히타이트 제국의 중요 도시였으며, 아시리아에 예속되기도 했다. 로마시대에는 소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고 아랍과 셀주크투르크, 오스만투르크, 티무르 등의 지배를 받았다. 현재의 말라티아는 19세기에 만들어진 새로운 도시다. 원래는 북동쪽 20km 지점에 있는 바탈가지가 도심이었다. 도시에는 대상들의 숙소인 카라반사라이 외에는 특별한 게 없지만, 이 말라타야말로 아나톨리아의 숨어있는 보석이다. 조금만 돌아다니다 보면 금방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말을 인정할 것이다.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 그대는 귀빈이 된다.

 

아침식사를 한 음식점 안뜰.

체리와 살구나무를 따라 가는 길은 다채로운 풍경이 교대로 나타난다. 산에는 나무 한 그루 없지만 골짜기에는 숲이 우거지고 빨간 지붕의 집들이 그림처럼 들어서 있다. 농가들일까? 아름답고 풍요로워 보인다. 지붕마다 원통형의 구조물이 달렸길래 뭐냐고 물었더니 태양광 시설이란다. 하긴 일조량이 좋으니 태양광을 사용하는데 제격일 것 같다. 가는 길에 동승한 말라티아 주의 관계자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살구 자랑을 좀 해보라니까 떠돌이 약장수 못지않게 신이 오른다.

변비에 즉효예요. 아침 식사 전에 살구 하나 먹으면 금방 해결됩니다.”

만병통치라고 안 한 게 다행이다. 나는 변비 걱정을 해본 적 없으니 그리 실감나는 얘기는 아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살구의 원산지는 중국이라고 한다. 실크로드를 따라서 왔나? 참 먼 곳까지 와서 산다. 그에게 넌지시 속내를 드러내본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여기 와서 살고 싶은데 어때요?”

환영입니다. 언제든지 오세요. 주거문제 책임지겠습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감탄하면 나중에 정말 아름다운 곳에 가서는 어쩌려고 그래요?”

그래. 네 동네 아름다워서 좋겠다. 조금만 칭찬을 해주면 그저. 하지만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차가 멈춘 곳은 한적한 시골 마을. 조금 걸어 들어가니 숲속에 커다란 음식점이 숨듯 웅크리고 있다. 우리로 보면 전원식당인 셈이다. 아침 먹을 곳이다.

 

푸짐한 아침식사.

음식점 마당에는 살구나무와 체리나무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뽕나무. 여기서는 오디나무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 , 잎이 아닌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 심는다. 서울에서도 엄지손가락만한 오디가 시장에 나온 것을 보긴 했지만 이곳 오디는 정말 탐스럽다. 특이하게도 다 익으면 하얀색에 가깝다. 처음엔 병든 오디인 줄 알았는데 먹어보니 달콤한 게 자꾸 손이 간다. 그나저나 아침상 한번 푸짐하다. 민트 등을 주재료로 하는 각종 채소에 토마토, 오이, 고추 등이 포진하고 있다. 치즈도 참 다양하다. 두부처럼 생긴 것, 가루를 뭉쳐놓은 것, 떡가래처럼 뽑아놓은 것. 그리고 올리브. 라와시라고 부르는 빵도 아예 소쿠리로 나온다. 날마다 이렇게 먹으면 살림 거덜 나겠다. 나그네가 이렇게 잘 먹고 다니면 눕고 싶어지는데. 그게 끝이 아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살구와 체리, 그리고 오디. 내 손은 식사보다는 살구와 체리에 주로 머물러 있다. 그 중에 체리가 압권이다. 평소에는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것이다. 오늘 허리띠 한번 풀어 보자. 살구는 언뜻 보기에 아직 덜 익은 것 같은데도 전혀 시지 않다. 거참 이상하기도 하지.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西安)까지 실크로드를 걸었던 프랑스 퇴역기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도 살구 먹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 대목을 읽을 때마다 얼마나 배고프면 저 신걸 먹는담혀를 끌끌 차고는 했는데, 이 정도면 괜한 걱정이었다.

 

살구와 체리, 그리고 오디.

내 어릴 적 먹었던 살구는 시금털털한 기억밖에 없다. 과일 축에 끼지도 못했다. 하지만 새벽마다 그걸 주우려고 졸린 눈을 부비고 일어났다. 김나는 쇠똥도 빵으로 보일만큼 배고프던 시절이었다. 주인 영감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늘 고양이 걸음이었다. 바깥마당에 지천으로 떨어져 썩어가는 데도 들키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러니 살구에 대한 추억이 별로 안 좋을 수밖에. 왜 이렇게 맛이 다를까. 이게 정상이라면 과거에 먹은 건 작은 이도령 설 때 춘향이가 먹는 개살구였단 말인가. 에라, 모르겠다. 공짜라니 그냥 먹어나 보자. 평생 먹을 체리와 살구를 한꺼번에 다 먹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아가씨 하나가 유난하게 자주 들락거린다. 그러면서 일행의 얼굴을 유심히 훔쳐본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다. 훌리아를 불러 저 아가씨가 왜 그러는지 물어보라고 했더니 내 짐작이 옳았다. 치담이라는 스물한 살 먹은 이 아가씨, 열렬한 한국 팬이란다. 한국 영화를 무척 좋아하고 드라마도 자주 본다고 고백한다. 특히 좋아하는 건 대장금이란다. 요리하는 것 나오는 드라마가 좋다나. 비행기로 무려 14시간 넘게 걸리는 이곳에 한국 연예인에 열광하는 시골처녀가 있다니. 이게 정말 한류의 힘이라는 건가? 좀 미심쩍던 한류의 실체를 온몸으로 실감한다. 아가씨를 불러, 나도 TV 정도는 숱하게 나왔으니 사진 한 장 찍자고 했더니 부리나케 달려가 카메라를 가져온다. 헌데 원래 눈독을 들인 건 내가 아니었나 보다. 나와 사진을 한 장 찍더니 용기가 생겼는지 일행 중의 젊은 친구 옷소매를 잡아끈다. 그럼 그렇지. 요즘 젊은 것들이란. 체리의 뒷맛이 느닷없이 씁쓸하다.

예실리티 읍장의 집.

 

아기까지 구경을 나왔다.

식당에서는 살구와 체리를 한보따리 싸준다. 흔한걸 걸신들린 듯 먹는 게 안쓰러웠나? 인심이 그만큼 좋은 것이겠지. 그나저나 먹는 고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예실류트 읍장이 자신의 집에 일행을 초대한단다. 7년 전에 서울에 가서 3일이나 묵었다고 자랑하는 슈남이라는 이름의 읍장은 친한파(親韓派)를 자처한다. 터키는 일본보다 한국을 닮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옳으신 말씀. 이 동네 분들은 따로 교육이 필요 없다니까. 1936년에 이 동네에서 태어난 그는 1994년 읍장이 된 이후 20년 가까이 장기집권 하고 있다. 존경 받는 지도자의 표상을 보는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초대는 무슨, 가만 놔두는 게 도와주는 건데. 투덜거려 보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읍장 집으로 가는 동안 아까 그 친구와 또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전부 살구나 체리농사로 먹고 살아요?”

다 그런 건 아니고요. 주로 시내에서 직장을 갖고 있으면서 이 동네에서 출퇴근하는 사람이 많아요.”

, 베드타운이구나.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집 하나 봐놓고 갈까? 돈도 없는 주제에 시골집 욕심은 습관이 돼버렸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다. 읍장님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을 뒤뜰에 풀어놓는다. 그 순간 투덜거린 게 미안해진다. 내가 여행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던가. 현지 사람들을 만나고 삶을 들여다보고 친구가 되는 게 아니던가. 그런데 이 좋은 기회를 준 분에게 투덜거리다니.

 

잘 익은 체리.

노란 체리.

'체리아가씨' 베릴.

모두들 입에서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뒤뜰엔 커다란 체리농장이 있다.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란다. 이참에 열매 많이 달린 체리 나무 한 그루 뽑아갈까? 이거야 원. 손을 쓸 필요도 없다. 입만 열면 체리가 알아서 척척 들어온다. 씹기만 하면 된다. 예가 바로 천국 아닌가? 배가 조금의 틈도 없이 꽉 차고 나서야 고국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이 난다. 그들도 함께 먹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신기한 건 검은 체리만 있는 게 아니다. 노란 체리를 아십니까? 정말 있다. 주로 잼용으로 쓴단다. 먹어보니 그 역시 맛이 있다. 읍장 집은 우리 일행 말고도 현지인들로 북적거린다. 남녀노소가 골고루 섞여 있다. 외국에서 손님이 왔다고 동네 사람들이 몰려온 것 같다. 특히 아이들이 많다. 벌써 방학 중이란다. 터키는 여름방학이 무척 길다. 68일부터 924일까지 무려 3개월이 넘는다. 그럼 겨울방학은? 15일에서 20일 정도밖에 안 된다.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비교적 춥지 않기 때문이다. 베릴이라는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와 친구가 됐다. 열 두어 살은 돼 보이는데 아홉 살밖에 안됐단다. 이 소녀는 아버지가 축구단 구단주다. 이 나라에서 구단주는 최고의 권력이다. 그 최고 권력의 딸 베릴은 체면도 없이 카메라를 졸졸 따라다닌다.

베릴, 여기 좀 서볼래? 아니, 이렇게 말이야.”

모델 요청을 하면 스무 번 백 번이라도 거절하는 법이 없다. 착한 것. 체리를 따서 입에 넣으라면 넣고 귀에 걸라면 걸고 웃으라면 웃고 멀리서 걸어오라면 군말 없이 걸어오고. 세상에 이렇게 말 잘 듣는 모델이 어디 있어.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한 동네 아가씨들.

예실류트 읍장님.

모두 나와 전송해준다.

친절한 건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손님이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다. 혹시 불편한 게 없나 지켜보다가 목이마른 눈치면 물을 날라다 주고 차를 권한다. 의무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대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물을 마시고 컵을 어디다둘까 두리번거리면 읍장님이 저만치서 달려온다. 이 동네에서 가장 존경 받는 76세의 노인이 스스럼없이 컵을 받아간다. 우리나라 정치하는 분들 연수 좀 보냈으면 좋겠다. 조금 지나니 누가 한국 사람이고 누가 터키 사람인 지 잘 구분이 안 간다. 어울려서 얘기하고 어깨동무하고 사진 찍고 그네도 타고. 말이 통하면 통해서 웃고 안 통하면 안 통해서 깔깔거리고. 결국 몇몇은 페이스북 주소까지 주고받는다. ! 지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디에 살든 애당초 남남이 아니었나보다. 아침 먹을 때만 해도 이런 기록은 생략하려고 했었다. 어떻게 하면 이들과 헤어져 혼자 돌아다녀볼까 머리만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생애 최고의 특별한 기억을 놓칠 뻔 했다. 읍장 가족,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작별을 하는데 도로가 가득 찰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다. 사진 찍자고 부르면 끊어진 진주목걸이처럼 까르르 도망치던 아이들까지 모두 달려 나와 손을 흔든다. 출발은 자꾸 지연된다. 하지만 시간은 조금도 아깝지 않다. 살면서 이만한 환대를 받아본 적이 있던가. 더 잘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던가.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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