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막걸리'에 해당되는 글 2

  1. 2008.11.10 [사라져가는 것들 84] 벼베기8
  2. 2008.01.14 [사라져가는 것들 41] 술도가10
2008. 11. 10. 11:29 사라져가는 것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일은 벼 베는 날이니 어여 자거라. 아침에 일어나서 할 일이 많다”
“응, 그런데… 음… 나도 벼 베보면 안 돼?”
“얘가 무슨 새빠진 소릴 하는 겨. 그게 도나 개나 다 하는 일인 줄 아냐?”
삶은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갈 소리 그만 두고 잠이나 자라는 듯 어머니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하지만 아이는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맨 날 애들인 줄 아나…. 나도 이제 5학년인데 씨이~ 비 맞은 중처럼 웅얼거려보지만 그 정도로 상황이 바뀔 턱은 없다. 아이는 꼭 벼를 베어보고 싶은데 어른들은 말도 못 꺼내게 한다. 아이 눈에는, 낫으로 써억 써억 벼를 베어 나가는 광경이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애당초 아이 가슴에 불을 지른 건 동네친구 창식이였다. 어느 하굣길에 녀석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니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말을 꺼냈다.
“너 벼 베어봤냐?”
“뭔 소리여? 어떻게 애들이 벼를 베냐?”
“그래서 늬들은 맨 날 얼라들인 겨. 벼를 베어봐야 어른이 되지. 이 형은 작년부터 벼를 베었단 말이다”
벼를 베어야 어른이 된단 말이 개 풀 뜯는다는 소리처럼 뜬금없어 보이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벼는 어른들만 베지 않던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창식이가 벼를 베어본 건 그럴만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창식이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그래서 어머니 혼자 농사를 짓는다. 모를 내는 것처럼 큰일이야 동네사람들의 도움이나 품앗이로 해결한다지만 어지간한 일은 혼자 해야 한다. 그러니 창식이 어머니는 맨 날 논밭에서 살다시피 한다. 창식이 역시 반농군이 될 수밖에 없다. 창식이가 자랑하는 것도, 손바닥만한 다락배미의 벼는 놉을 사지 않고 모자가 직접 베다 보니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정이 아니라면 시퍼렇게 날 선 낫을 아이에게 들려 논으로 들여보낼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손을 베거나 다리를 찍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더구나 벼 베기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여러 포기를 한꺼번에 잡고 약간 비스듬히 베어 올려야하는데 숙달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에게 그런 사정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꼴망태 메고 풀 뜯으러 다닌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지게 지고 나무하러 다닌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벼 베는 일이라고 다를 게 뭐 있담. 아이는 뒷간이라도 가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간다. 등잔불 아래에서 양말을 꿰매던 어머니가 힐끔 쳐다봤지만 별 말은 없다. 달이 금가루를 온 세상에 골고루 뿌리고 있다. 마당가에 선 오동나무가 잎을 흔들어 아는 체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무신을 꿰어 신은 아이가 뒷간 아닌 뒤꼍으로 간다. 벽에 낫들이 나란히 걸려있다. 그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빼어든다. 달빛을 가득 삼킨 낫이 시퍼런 살기를 연신 토해낸다. 온 몸에 스치는 써늘한 기운에 아이가 움찔한다. 아버지가 오후 내내 갈아놓은 낫들이다. 달도 밝은데 이걸 들고 논에 가서 몰래 베어봐? 암만 못해도 한 마지기는 너끈하게 벨 것 같은데…. 아이의 상상이 날개를 단다. 아아, 나도 얼른 어른이 되고 싶다. 벼만 베어보면 되는데…. 하지만 아이는 낫을 제자리에 놓고 힘없이 돌아선다. 아무것도 결
사용자 삽입 이미지
행하지 못한 밤은 쏘아놓은 화살처럼 빠르게 달려 아침을 데려다 놓는다. 뒤척이다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벌써 어른들의 목소리가 두세두세 창호지를 두드린다. 모심기가 그렇듯이 벼 베기 역시 주로 품앗이로 해결한다. 동네사람들이 오늘은 누구 집 내일은 누구 집 하는 식으로 순번을 정해놓고 차례로 하는 것이다. 순번이 닿은 집은 일꾼들이 오기 전에 여러 가지 준비를 해놔야 하기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다. 모내기철이나 추수철에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말이 실감 날 만큼 일손이 부족하다. 그러니 아이들 역시 놀고 있을 틈이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누구보다 어머니가 가장 분주하다. 새벽부터 부엌에서 종종걸음이다. 며칠 전부터 조금씩 준비한다고 했지만 장정 여럿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장만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침‧저녁은 각자 집에서 먹는다고 해도 점심 전 새참, 점심, 그리고 점심 뒤 새참까지 세 번의 음식을 내야한다. 일꾼들 먹을 것만 마련하는 건 아니다. 가을걷이 때는 수확의 계절답게 모를 내는 봄보다 훨씬 풍요롭게 마련이다. 그래서 날마다 작은 잔치가 벌어진다. 일하는 사람은 물론 가족까지 벼 베는 집에 가서 점심을 먹는다. 일도 품앗이로 하지만 먹는 것 역시 품앗이인 셈이다. 다행(?)히 아이 집은 논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일꾼이 적은 편이다. 아이도 집과 논을 오가며 심부름을 하느라 바쁘다. 물주전자를 들고 논에 도착했을 땐 동네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벼를 베기 시작한 뒤다. 하늘은 유난히 높고 푸르다. 누렇게 익은 벼는 금세 줄어들고 봄부터 벼를 안아 키운 논은 감춰뒀던 속살을 수줍게 내놓는다. 아이는 다시 한 번 벼를 베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린다. 어른들이 하는 걸 보면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벼 포기를 왼 손으로 잡고 오른손에 든 낫으로 써억~하고 베어내면 그만 아닌가. 대체 왜 못하게 하는 건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생각에 빠져 넋을 놓고 있는데 멀리서 어머니가 부른다. 또 막걸리 심부름이다. 아침부터 벌써 두어 행보를 했건만 참과 점심을 먹으려면 더 필요한 모양이다. 농사채가 많은 집에서는 막걸리를 통째로 주문하기도 하지만 소농들은 수요를 봐가며 조금씩 사 나른다. 막걸리를 받아오던 아이가 밤산 모퉁이를 돌다 말고 서더니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댄다. 하지만 주전자가 워낙 크고 무거운지라 자꾸 아래로 쳐진다. 아이는 아예 주전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엎드려서 주전자 주둥이를 빤다. 잠시 뒤 캬아~ 하면서 어른 흉내를 내더니 진저리를 한번 친다. 막걸리 심부름을 하면서 아이들이 흔히 하는 짓이다. 그렇게 홀짝홀짝하다가 너무 많이 먹어버려 당혹스러울 때도 있다. 그럴 땐 들킬까봐 샘에서 물을 채워갖고 가기도 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그걸 모를 턱이 없다. 얼굴 색깔만 봐도 한눈에 알아챈다. “뭔 막걸리가 뜨물마냥 이렇게 싱겁다냐?” 하면서도 짐짓 모른 체 한다. 자신들도 어려서 많이 해본 짓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논둑에 도착했을 때 마침 어머니와 동네아주머니 두엇이 새참을 내온다. 논의 벼는 벌써 반 남짓 줄어들었다. 타작까지 하루에 마쳐야 하니까 베는 건 오전에 끝낼 모양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정네들이 새참과 술을 먹는 동안 어머니와 아주머니들도 한켠에 앉아 남은 참을 먹는다. 남자들은 밥보다 막걸리에 손이 더 자주 간다. 두어 잔 씩 돌려 마시고도 입맛을 쩍쩍 다신다. 하지만 누구도 취한 기색은 없다. 새참 그릇을 물린 어른들이 담배를 한 대씩 무는 사이 아이가 슬그머니 논으로 들어간다. 우렁이라도 주우러 가나보다 생각하는지 눈 여겨 보는 사람은 없다. 아이가 볏단에 꽂아둔 낫을 슬쩍 빼들더니 벼 포기를 잡고 당겨본다. 벼는 예상 외로 질기게 저항한다. 어? 이상하네? 어른들은 낫을 대기만 하면 썩썩 잘리던데? 아니나 다를까. 논둑에서 고함이 터져 나온다. “야 이 녀석아, 다친다. 어여 나와라” 춘길이 아버지의 목소리다. 아이가 낫을 놓고 힘없이 돌아선다. 긴 꿈과 작은 반란은 너무 싱겁게 끝났다. 난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나? 어른들이 일어서서 엉덩이를 툭툭 털더니 논으로 들어선다. 아이가 터벅터벅 논을 나선다. 벼 베는 날의 한나절은 하늘의 구름처럼 순식간에 흘러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낫으로 벼를 베는 모습은 이제 그 어디서도 보기 어렵다. 요즘은 어지간한 골짜기 논까지 기계로 추수를 한다. 설령 기계가 들어가지 않는 논이라고 해도 옛날처럼 흥겨운 풍경은 없다. 노인들의 굽은 허리만 안타까울 뿐. 세월은 속도와 편리함을 가져다주고 사람 사이의 정을 거둬가 버렸다. 동네사람들이 논에 모여 춤을 추듯 벼를 베던 풍경. 에헤야 데헤야~ 들녘 가득 울려 퍼지던 풍년가. 그곳엔 인정과 사랑, 웃음과 한숨이 골고루 버무려진 우리네 수 천 년의 역사가 있었다.

 

posted by sagang
2008. 1. 14. 13:48 사라져가는 것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리에서 자꾸 힘이 빠져나간다. 아이는 허청거리는 걸음을 가까스로 추스른다. 눈이 감길 듯 자꾸 무거워진다. 따뜻한 햇살이 깔린 잔디가 이불처럼 포근해 보인다. 달려가 눕고 싶다. 하지만 볼을 꼬집으면서라도 참아야한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 오르지만 걸음을 재촉한다.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학교에 도착해야한다. 잘못하면 또 놀림감이 될 게 뻔하다. 얼굴은 홍시처럼 붉어졌을 테고 입에서는 단내가 풍길 것이다. 할머니가 술도가에서 술찌게미를 얻어온 다음 날 아침이면 반드시 치러야하는 절차다. 술찌게미는 술을 거르고 난 뒤 남는 곡물찌꺼기를 말한다. 영양분은 없지만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다. 찌게미를 먹으면 술기운이 돌아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숨이 가빠지고 얼굴이 붉어진다. 하지만 굶는 것보다는 찌게미라도 먹는 게 낫다. 학교 근처 술도가 앞을 지나던 아이가 잠시 걸음을 멈춘다. 일꾼들이 자전거에 나무로 만든 술통을 싣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막걸리 배달을 가는 모양이다. 노인 하나가 하얀 쌀로 지은 고두밥을 멍석에 깔고 있다. 술을 만드는 재료다. 아이의 목울대가 꿀꺽, 하고 요동친다. 술찌게미가 아니라 고두밥을 실컷 먹고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60~70년대에 술도가, 혹은 양조장은 최고로 잘 나가는 업종이었다. 당시 국민주(酒)였던 막걸리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허가는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점의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가정집에서는 함부로 술을 담글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가장 무서운 것이 술 단속과 땔감으로 쓰는 나무 단속이었다. 제사나 집안 어른의 생일을 앞두고 직접 술을 담그는 것이 오랜 우리네 풍속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집에서 술을 담그는 것이 금지되었다. 식량부족 때문에 나라에서 선택한 고육책이었다. 헌데, 아무리 밑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해도 술이 없으면 판이 성립되지 않는 게 우리 민족 아니던가. 논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새참 때가 되면 막걸리타령이 절로 나왔다. 밥보다는 막걸리가 먼저였다. 풋고추나 쉰 김치 한 점에 막걸리 한 잔 쭉~ 들이켜야 힘이 솟고 온갖 근심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잔칫집이야 일러 무엇하랴. 동네에 잔치가 벌어졌다고 하면 술도가는 분주해졌다. 결혼식이든 초상집이든 다르지 않았다. 부잣집은 아예 우마차로 실어 날랐고 가난한 집도 막걸리 서너 통은 주문해놔야 잔치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학교 운동회는 물론이고 윷놀이 등 놀이판에도 막걸리는 필수였다. 철철 넘치는 잔으로부터 모든 인심이 나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니 술도가로서는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한 때 전국에 2500개가 넘는 술도가가 호황을 누렸다. 젊은 대학생들에게도 막걸리는 인기였다. 현실은 통탄스럽고 미래는 캄캄하던 시절, 그나마 막걸리가 곁에 있어 견딜 만했다. 하지만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이 어디 있으랴. 서민들과 함께 질펀하게 세월을 낚던 막걸리에게도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부터 수요가 줄기 시작하더니 갈수록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농으로 농촌이 비어가고 기계화에 따라 협동농업이 사라짐에 따라 막걸리를 마시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또 막걸리를 대신 할 수 있는 수많은 술과 음료가 쏟아져 나왔다. 독한 시대라, 그에 어울리는 술이 필요했던지 막걸리보다 도수가 훨씬 높은 소주가 국민주의 자리를 차고앉았다. 맥주도 대중주로서 전성기를 노래했다. 막걸리 힘으로 일한다던 말도 옛말이 돼버렸다. 농촌의 새참으로 자장면이 배달되고 막걸리 대신 잘 냉각된 캔맥주가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다방아가씨들이 논둑을 누비며 커피 배달을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술도가의 기둥이 삭아 내리고 지붕에는 풀이 돋았다. 문을 닫는 곳이 속출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지평리에 있는 '지평막걸리(지평양조장)'를 찾은 건 쇠락의 끝자락에 서 있을 술도가의 모습을 담아두기 위해서였다. 1925년에 문을 연 지평막걸리는 막걸리 하나로 80년 넘게 버텨온 '전설의 술도가'다. 전국 술도가의 70%가 문을 닫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찾아간 날은 햇살이 좋은 초겨울 아침이었다.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큰길에서 조금 들어가니 바로 만날 수 있었다. 80살의 나이를 이고 있는 건물은 주변 풍경과는 조금 이질적으로 보였다. 비바람에 바래버린 2층 집, 그 위의 함석지붕에는 시간의 무게가 그대로 얹혀져 있었다. 그 무게는 곧바로 가슴으로 전이됐다. 반도막만 남아 몽당빗자루처럼 짧아진 버드나무, 창문마다 둔탁하게 덧대놓은 창살, 곳곳에 땜질한 흔적의 시멘트벽, 나무문… 모두가 길고 길었던 세월의 강을 건너느라 입은 상처를 훈장처럼 매달고 있었다.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 보니, 내부는 조용했다. 술을 빚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인 듯 했다. 관리실인 듯한 곳으로 가 두드리니 한 남자가 나온다. 사진을 찍겠다는 부탁에 "작업장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전제를 못박으며 고개를 끄떡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술을 만드는 과정을 담을 수 없으니 목적의 반만 이루는 셈이었다. 밖에선 2층으로 보이던 건물이 실상은 1층 짜리 구조였다. 높은 천장에서 아침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와 벽에 그림을 그렸다. 내부 역시 곳곳에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었다. 얼마나 넓은지 한쪽 편에 커다란 우물도 있었다. 지하수를 끌어올려 쓰는 것 같았다. 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으로 들어가 한쪽 공간을 들여다보니 커다란 독들이 술도가임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또 다른 공간에는 곡물포대가 쌓여있고 술을 만드는데 쓰이는 도구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평막걸리는 아직도 옛날 방식으로 막걸리를 빚는 유일한 술도가라고 한다. 지평막걸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뛰어난 '맛' 덕분이다. 달달한 게 한번 맛들이면 잊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양평 일대뿐 아니라 서울까지 소문이 나 있다. 몇 해 전에는 드라마 '술의 나라'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도가에서 나와 조금 떨어져 있는 판매장으로 가 지평막걸리를 한 병 샀다. 햇빛 잘 드는 빈터에 앉아 막걸리를 조금씩 마시며 소망 하나를 품었다. 이런 양조장들이 오래 오래 살아남아 우리 고유의 맛을 지켜주길…. 그래서 '사라져가는 것들' 품목에서 뺄 수 있기를….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