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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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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마우솔레움 입구. 표를 끊어서 전철 개찰구 같은 저곳으로 들어간다.

초스피드로 성장하는 벨라솜라. 29년 자랐다는데 300년쯤 된 나무 같다.


마우솔레움으로 가는 길

 터키, 그 중 보드롬에서의 두 번째 날이 시작됐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먹고 길을 나선다. 배낭을 메고 카메라를 바투 잡으니 언제 잠을 설쳤느냐는 듯 힘이 솟는다. 역시 나는 길바닥 체질. 마우솔레움으로 가는 길은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곡예운전의 스릴을 만끽하게 해준다. 그래도 명색이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 어찌 이 모양인지. 그나마 카페들은 그 좁은 길을 살짝 점유한 채, 탁자까지 내놓고 장사를 한다. 거기서 차를 마시는 분들은 배짱도 좋으시지. 마우솔레움 입구 역시 한숨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어있다. 안내간판도 눈에 띄지 않아서 가이드가 없었다면 그냥 지나갈 뻔했다. 주차장? 물론 없다. 결국 우리 일행이 내리기 위해서는 차를 그 좁은 골목에 세울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 뒤로 자동차가 10대 이상 밀리고, 그들이 제각기 빵빵거리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섞여 골목은 금세 아수라장이 된다. , 성질 급한 터키사람들. 그래도 우리의 운전사 하산’(멋지다라는 뜻을 가진 아랍 이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어느 절에서 수행하다 하산’(下山)했기에 저리 도가 높은지. , 느긋한 터키 사람

마우솔레움 터. 지금은 빈 자리에 돌들만 굴러다닌다.


 

박물관에 전시된 마우솔레움 모형. 맨 위에 보이는 저 마차는 대영박물관으로 가고 나머지는 산산히 흩어졌다.

사실, 내게는 길이나 주차장이 문제는 아니다. 나는 지금 고대 7대 불가사의 앞에 서 있다. 티켓을 끊고 안으로 들어간다. , 잠깐 짚고 넘어가야할 것 한 가지. 터키에서 유적지나 관광지에 들어갈 때 입장료는 꽤 비싸다. 예를 들어 이스탄불에서 고궁이나 유적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우리 돈으로 십만 원 이상 깨지는 건 금방이다. 가난한 여행자들은 안 먹고 안 타고 아낀 돈을 입장료로 쏟아 부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게까지 가서 그냥 올 수는 없지 않은가. 터키는 2차 산업이 발달돼 있지 않고 농업이나 관광수입이 경제를 지탱하는 기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지갑이 얇아질 때마다 ! 남의 유적 가지고 사람 골을 빼는군.”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리스-로마의 유물과 튀르크인들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돌덩이 몇 개밖에 없는 마우솔레움도 한 사람에 8리라씩 받는다. 우리 돈으로 5000원 정도? 그래서인지 표를 끊지 않고 입구에서 사진 몇 장 찍고 가는 사람들도 많다. 다녀간 증거만 있으면 된다 이거지?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다. 돌을 보고 가는 게 아니라,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가야 하는 것이다. 돌 하나하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다음에야 그곳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껍데기만 볼 거라면 집에서 사진을 보면 되지. 

박물관 복도에 전시돼 있는 마우솔레움의 잔해들.

돌마다 저런 조각들이 있다.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다.

미뤄뒀던 마우솔레움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할 시간이다
. 마우솔레움은 마우솔로스(Mausolos BC 376~353)의 영묘다. 묘를 뜻하는 영어 ‘Mausoleum’의 어원이기도 하다. 유익한 여행기를 읽다보니 졸지에 영어단어 하나 외우지 않았는가. 마우솔로스는 페르시아의 영향권에 있던 카리아 지방 총독을 지냈으며 수도를 밀라스에서 지금의 보드롬인 할리카르나소스로 옮기고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는 살아있을 때부터 자신의 무덤을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사후에는 그의 부인이자 누이동생인 아르테미시아가 공사를 계속했다대부분의 고대사회처럼, 그곳도 누이와 결혼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 것 같다. 그의 동생인 이드레이우스도 또 다른 누이와 결혼했다. 그렇다면 큰 누이는 아내, 작은 누이는 제수. , 족보 꼬인다. 시집 장가 잘 보내려면 애들도 남녀 골고루 많이 낳아야 했겠다. 아무튼 영묘 건설은 아내인 아르테미시아가 죽는 3년 뒤까지도 끝나지 않았다가 동생 이드레이우스가 이어 받아 완성했다. 이왕 나온 김에 그 집안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이드레이우스가 죽은 뒤 그의 부인이자 여동생인 아다가 알렉산더의 도움을 받아 여왕이 된다. 그러나 4년 뒤에는 역시 동생인 피크소도로스가 왕좌를 빼앗아 아다를 유배 보낸다. 콩가루 집안의 종결자들이다.

마무솔레움이 있던 자리.

기둥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대리석들.


절대자의 흩어진 꿈은 허허롭고

족보 얘기는 이쯤하고 마우솔레움으로 들어가 보자. 마우솔레움은 높이가 46m, 가로 36m, 세로 37m의 정방형 기단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이 무덤을 짓기 위해 3t짜리 돌 16만개가 사용됐다. 3t이면 자동차만 했을 텐데 그게 16만개라. 기단 위에 모두 36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서 있었다. 지붕은 24개 계단으로 이뤄진 피라미드 형태였는데 꼭대기에는 네 마리 말이 이끄는 이륜전차가 놓여 있었다. 그 전차는 지금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무리 전차라고 해도 혼자 바다를 건넜을 리는 없고 그게 왜 영국에 가 있을까. 보존을 위해 잘된 일인지, 약탈의 전형을 보는 것인지. 또 마우솔레움에는 총 300여 개의 조각(彫刻)들이 6층으로 배치돼 있었다. 앞에서 말했지만, 지진으로 무너진 뒤 성 요한 기사단에 의해 석재는 대부분 보드롬성을 짓는데 들어갔고, 조각들은 깨진 채 어디론가 굴러가거나 대영박물관으로 입양되었다. 입구로 들어서니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남들의 시선은 무덤자리로 가는데 내 눈길은 나무에 머문다. 무슨 인연이 있어 날 이리 잡아당기는 건가. 나무의 이름을 물으니 벨라솜라라는데 심은 지 29년밖에 안됐단다. 29? 290년이 아니고?

돌, 돌, 또 돌이다.

성장속도도 놀랍지만, 머금고 있는 수분이 워낙 많기 때문에 불이 나도 타지 않는다고 한다. 2300년 전에 만들어진 무덤은 저리 초라한 모습으로 남았는데 29년밖에 안 된 나무는 저리 하늘을 찌르는구나.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들어가는 길 왼쪽에 있는 박물관부터 보기로 한다. 박물관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전시물 중에는 완전한 모습의 돌덩이 하나 보기 어렵고 깨져서 구르던 것들을 모아 놓은 게 대부분이다. 마치 부상병 같은 돌들이 신음을 깨문 채, 박물관 밖이나 안에 지친 몸을 누이고 있다. 그 옛날의 영화에 비한다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대는 그냥 돌아서면 안 된다.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돌마다 새겨진 조각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안에서는 유물 외에도 마우솔레움에 대한 자료 등이 전시돼 있고 비디오로 설명해주기도 한다. 천천히 한 바퀴 돈 뒤 특별한 감흥을 담지 못하고 밖으로 나온다. 이제 건물이 있던 자리를 볼 차례다. 계단을 내려가니 무덤 자리는 폐허와 다름없는데, 그래도 그 곳에서 2000년을 넘게 버텨온 돌들이 세로 가로로 누워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돌은 대부분 하얀 대리석이다. 하얀 대리석은 그냥 보기만 해도 아름답다.

돌 틈으로 저런 굴이 길게 나 있다. 전실로 가는 길이었던 듯.

고대에는 근처에 대리석 산이 있느냐 없느냐가 도시를 세우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고 한다. 그밖에 바다와 지하수, 적을 막을 수 있는 산맥도 반드시 있어야 했다. 그만큼 석재건축물이나 조각의 재료로서 대리석이 중시됐던 것이다. 터키는 지금도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대리석이 많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조각품들이 존재할 수 있었겠지. 돌들의 모습은 여러 가지다. 둥글게 깎은 것도 있고 네모난 것들도 있고. 저들이 한 때는 높이 46m짜리 거대한 건축물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와 비극을 함께 지켜봤을 것이다.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 1500년을 제 모습으로 서 있었다는 이 거대 건축물. 깨어져 구르는 돌들이 세상사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살아서 누리는 부귀와 명예도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부질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죽음 이후까지 영화를 누려보겠다는 욕심이야말로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한 절대자의 흩어진 꿈이 발길마다 허허롭다. 돌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그럴 땐 다음 목적지로 떠나는 게 상책이다.

아타튀르크 공원의 나무들. 저 그늘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공원 옆의 택시기사들. 손에 차이잔을 들고 있다.

아타튀르크공원의 택시기사

다큐팀의 다음 목적지는 바자르. 어제 본 빵집 근처에서 보충 취재할 게 있단다. 거기에 더 이상 볼 일이 없는 나는 해변 옆의 아타튀르크공원에 홀로 남는다. 여행은 무조건 부지런히 다닌다고 많이 보고 많이 얻는 건 아니다. 가끔은 가만히 앉아서 세상을 관조할 때 더 많은 걸 볼 수 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다. 한번쯤은 제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야자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있자니 바람이 장난스럽게 주위를 배회한다. 녀석이 온 몸을 간질이니 솔솔 잠이 온다. 카메라를 갈무리해 넣은 배낭을 베고 그 자리에 눕는다. 벤치에서 잠 좀 잔다고 누가 잡아가기야 하겠는가. 떠돌이 여행자의 권리라는 게 이런 거지. 조용한 방에서도 잠 드는데 애쓰는 내가, 사람들이 오가고 자동차 경적소리까지 덤으로 요란한 거리의 공원에서 금세 잠 속으로 빠져든다. 역시 진정한 평화는 저잣거리에 숨어 있는 법.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세상은 그림처럼 같은 모습으로 걸려있다. 배낭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만치 택시기사들이 둘러서서 차이를 마시고 있다. 아까도 마시더니. 터키사람들은 저렇게 몇 시간에 한번 씩 차이를 마신다. 다방에 커피처럼 주문하면 배달해준다.

깊 옆에 설치해 둔 전화를 받고 운행을 다녀온 택시는 기둥에 매달아 둔 일지에 기록하게 된다.

택시 정류장에서 만난 부녀. 도시락을 먹으며 뭔가 다정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앉아있는 공원 앞쪽이 택시와 기사들이 대기하는 곳이다. 이곳 택시는 일종의 조합콜택시로 운영되는 것 같다. 길가 전봇대 같은 곳에 전화기가 걸려 있고 그곳으로 콜이 오면, 순서대로 운행을 다녀와서 몇 시에 어디를 운행했다고 기록한다. 대기 중에는 차이를 마시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기사들 틈에 여자아이 하나가 눈에 띈다. 아이가 택시 운전을 할리는 없고 심심한 딸이 기사인 아버지를 찾아왔나보다. 딸에게 점심을 사준다고 나오라고 했을지도. 초등학교 고학년쯤으로 보인다. 아주 예쁘게 생겼다. 다른 기사들과도 스스럼이 없다. 아버지가 도시락을 주문한다. 그런데 도시락이 도착하자마자 마침 아버지의 운행 콜이 온다. 딸은 도시락을 앞에 놓고 기다린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부녀는 도시락을 펼치고 다정스럽게 함께 먹는다. 부럽다. 저런 게 진정 행복 아닐까. 터키사람들은 국민소득이 높지 않은 편인데도 전체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인다. 물질적인 부보다는 정신적 행복에 가치를 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여유로움이 내게 전염된 것일까. 뭔가 모를 포만감이 가슴에 가득 찬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인가. , 자유여. 지중해의 부드러운 바람이여!!

보드롬에서 폐티에로 넘어가다 만난 해수욕장.

해수욕장 건너편의 빌라(?)촌.

나는 페티예로 간다

다큐팀과 합류한 뒤 늦은 점심을 먹고 보드롬을 떠난다. 이젠 패러글라이딩의 명소 페티예(Fethiye)로 간다. 버스는 해변과 산길을 교대로 지난다. 자리 잡은 나무는 달라도 산세는 우리나라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아 정겹다.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들이 이어진다. 바다 쪽을 바라보는 집집마다 빨간 꽃들이 담장을 덮었다. 덩굴장미는 아닌데, 뭐지? 궁금증을 참지 못해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작쿰(Zakkum)이라는 꽃이란다. 이 나라, 아니 지중해 쪽에서만 자라는 꽃인 것 같다. 달리던 버스가 어느 한적한 동네에 선다. 다큐팀이 터키 전통가옥을 찍고 갈 계획이라고 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아무 것도 없을 것 같던 한적한 마을에 웬 거대한 휴양지가? 산길에서 느닷없이 큰 짐승을 만난 듯 놀랍기까지 하다. 보드롬과는 바로 이웃인데도 풍경이 많이 다르다. 비치엔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비치라봐야 모래사장은 거의 없고 나무로 덱(deck)을 만들어 파라솔 등을 세워 놓았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모래사장은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지. 그런데도 바늘 꽂을 틈 하나 없다. 물에 들어가 수영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노인들이다. 굉장히 많다. 아마 한 여름에는 젊은이들이 즐기고 휴가철이 끝나면 노인들이 몰려오는 것 같다.

9월말인데도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해수욕장에는 노인들이 많았다.

해수욕장 옆 '작쿰'이 환하게 핀 집

뭔가 보드롬과 달라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노인들이 많다는 것이었구나. 비틀거리는 유럽 경제가 세계 경제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지만 아직은 먹고 살만 한 모양이구나. 그러니 노인들까지 이렇게 해변으로 올 여유가 있겠지. 우리나라의 노인들이 생각난다. 평생 뼈가 휘도록 일하고도 경제력이 상실되는 순간 뒷방늙은이로 전락하는 그들. 더구나 ‘58개띠로 상징되는 베이비부머들의 잇따른 자살 소식은 그런 현실을 더욱 비극으로 색칠한다. 지중해의 이름 모를 해변에서 만난 밝은 표정의 유럽 노인들을 보노라니 마음이 더욱 쓸쓸해진다. 언제쯤이나 우리나라의 해변에서도 허리 구부정한 노부부가 손을 잡고 거니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경제적 여유와 인식의 전환이 이뤄진다는 희망은 있는 걸까. 괜히 우울한 생각에 빠지는 바람에 걸음이 늦어진다. 다큐팀은 전통가옥을 찾지 못했다고 바로 출발한단다. 이제 정말 보드롬과 안녕이다. 지금 시간 오후 430. 페티예까지는 4시간 정도 걸린다. 오밤중에나 도착하겠군. 한숨 잘 수 있는 시간이지만 잠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기에는 해변길이 너무 아름답다. 마치 꿈속을 달리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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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보드롬의 바다. 배들이 평화롭게 떠다닌다.

보드롬성으로 들어가는 길. 엄마와 아들이 정겹게 사진을 찍길래 나도 찰칵!

헤로도토스를 불러내다

점심을 마치고 보드롬성으로 간다. 비행기에서 잠을 설친데다 이른 아침부터 이리 저리 걷고, 식사까지 늦어지다 보니 발이 납덩어리를 매달아놓은 듯 무겁다. 게다가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몸은 리듬을 잃고 허청거린다. 아니면, 나이를 못 속이는 겐가. 아니야, 10kg이 넘는 카메라 장비를 메고 산을 들처럼 쏘아 다니는 체력인데. 스스로를 달래면서 성큼성큼 앞서 걷는다. 이제 보드롬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보드롬이 에게해의 끝이고 지중해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설명은 앞에서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좀 웃긴다. 누구 맘대로 어디부터가 무슨 해이고 어디까지가 무슨 바다라는 건지. 바닷물은 아무 경계도 없이 그저 오갈 뿐인데, 인간이 선을 긋고 금을 들이대며 너는 에게해고 너는 지중해란다. 그리고 그걸 두고 싸우기까지 한다. , 내가 책임 질 일은 아닌 것 같고. 보드롬에는, 보드롬이란 이름을 얻기 훨씬 전에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 역사를 쓰고 키케로에 의해 역사의 아버지라 불린 헤로도토스(BC 484~420). 그래서 이 곳의 역사는 그를 통해 들을 수밖에 없다.

보드롬 전경. 오른쪽으로 아주 작게 보드롬성이 보인다.

보드롬성 아래의 모스크와 바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그리스의 도리아인들이 먼저 등장한다.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인들의 식민지 건설이 시작됐을 때, 그중 도리아인들이 만든 6개 도시 연맹 가운데 하나가 할리카르나소스(Halikarnassos), 바로 오늘날의 보드롬이다. 이 지역은 훗날 마우솔레움의 주인이 된 마우솔로스(BC 376~353)가 통치하던 시절에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맞는다. 역사 이야기는 길게 하면 재미없다. 특히 남의 역사는 더 그렇다. 아무튼 이 곳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배를 받기도 하다가, 리디아 왕국이 페르시아에게 패망하면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BC 129년에는 로마의 영토가 됐다가 그 후 AD 654년부터 이슬람의 공격을 받는다. 꽤 오랫동안 이슬람의 영토였던 이곳은 1402년 십자군인 성 요한 기사단에 의해 함락된다. 그 들이 그때 보드롬성을 짓고 베드로성이라 불렀다. 또 이 지역을 베드로의 성이 있는 곳이란 뜻으로 페테리움(Peterium)이라 이름 지었다. 이것이 터키말로 보드롬이다. 1522년 오스만에 의해 다시 점령된 뒤에는 계속 터키 땅으로 남았다. 한 마디로, 팔자가 드세서 이놈저놈 드나들며 제 땅을 삼은 곳이 보드롬이란 얘기다.

출항대기 중인 배들.

보드롬성 입구.

보드롬성과 마우솔레움

조용한 어촌이던 보드롬이 주목을 받게 된 건 1923년부터였다. 그해 체결된 로잔 조약에 의해 다음 해 터키와 그리스가 인구를 교환할 때, 그리스영토 크레타에 살던 터키인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제법 활기찬 도시로 발돋움했다. 보드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의 역사적 유물이다. 그 중 하나가 앞서 그 유래를 설명했던 보드롬성이고, 나머지가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는 마우솔레움(Mausoleum)이다. 이제부터 그곳을 찾아가야 한다. 이 둘은 아무런 관련도 없고 또 깊은 관련이 있기도 하다. 말장난? 그렇진 않다. 마우솔레움이 BC350년대에 건설되기 시작했고 보드롬성이 1400년대에 세워졌으니 1800년 가까운 시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따지는 사람은 역사 공부에 목숨을 걸었던 분이다. 일단 궁금증을 심어놓고, 대답은 뒤로 미뤄 두는 것도 글 쓰는 자의 권리일 터. 사실은 둘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를 하려면 마우솔레움부터 들러야 술술 풀리는데 방문 일정이 보드롬성부터 잡혀 있으니 거꾸로 가는 수밖에 없다.

보드롬성 망루.

보드롬성. 워낙 튼튼하게 지어서 거의 훼손이 없다.

보드롬성으로 들어가는 길. 유럽 관광객들이 많았다.

보드롬을 상징하는 보드롬성은 양쪽에 항구를 거느린 곶의 끝부분에 제법 웅장한 자태로 서 있다. 지금까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이 성은 당시에도 에게해에서 가장 견고한 성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성 입구에는 관광객이 제법 많다. 주로 유럽인들이다. 유럽의 연합군, 즉 십자군으로 한 때 이 도시를 점령했던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온 걸까. 일본인들이 서대문형무소를 찾아오듯. 성 내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각국을 상징하는 망루, 즉 성탑들이 남아있다. 성은 현재 인근 바다 밑에서 건져 올린 유물들을 전시하는 수중 고고학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매표소를 지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면서 다시 바쁜 걸음들 속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걷는다. 우선 지친 몸도 달랠 겸 분위기 파악을 위해 벤치에 앉는다. 긴 세월을 머금은 우람한 나무들이 내리 쪼이는 햇빛을 잘 걸러준다. 땀이 좀 걷히면서 주변 풍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아래가 뾰족하고 토끼 귀처럼 손잡이가 달린 암포라들.

기사들이 예배드리던 교회. 지금은 배가 전시돼 있다.

교회 안에 전시된 배 모형. 항아리들이 가득하다.

좌측 뒤편으로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전시돼 있다. 바로 암포라(amphora)라고 부르는 항아리다 암포라는 '2개의 손잡이'라는 뜻인데 그릇마다 앙증맞게 달린 손잡이가 토끼 귀처럼 예쁘다. 포도주나 올리브유 또는 곡식의 운반저장용으로 썼다고 한다.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은 흙으로 만든, 밑이 뾰족하고 기다란 암포라다. 왜 굳이 아래를 뾰족하게 만들었을까. 고정을 위해 별도의 받침대가 필요했을 것 같다. 항아리들은 침몰된 배에서 통째로 건져 올린 듯 보존상태가 완벽하다. 앞에는 십자군 기사들이 예배를 보던 교회건물이 서 있다. 물론 십자군들이 물러간 뒤에는 이슬람사원으로 쓰였을 것이다. 정복한 자들에 의해 교회도 되고 사원도 되고. 사람으로 친다면 참 기구한 팔자다. 신들도 인간의 부름에 따라 왔다 갔다 하기에 바빴을 것 같다. 지금은 교회 안에, 해저에서 건져 올린 침몰선을 10분의 1 크기로 복원해 전시해놓았다. ()의 배()에는 항아리가 가득 실려 있다.

보드롬성 입구에 놓인 대포.

십자군 전쟁이 남긴 이야기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왕 주저앉은 김에 십자군 얘기를 잠깐 하고 지나가자. 십자군전쟁은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이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이슬람세계에 있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총 8회에 걸친 원정을 말한다. 셀주크 튀루크에게 압박을 받던 비잔티움제국(동로마)의 황제가 교황인 우르바누스2세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그러잖아도 성지순례를 이교도들에게 방해받는 게 기분 나빴던 교황은 도랑치고 가재도 잡아보겠다는 심정으로 성전을 선포한 것이다. 교황은 십자군을 모으기 위해 갖가지 당근을 내밀었다. 십자군에 참가하면 모든 교회법상의 처벌이 면제되고 전쟁에서 싸우다가 죽으면 영혼은 곧 천국에 간다고 설파했다. 결국 상인들은 돈을 좀 만져볼까 하는 마음에, 농민들은 뼈 빠지게 일 해봐야 먹고 살기도 힘겨운데 봉건영주의 등쌀에서 좀 벗어나볼까 하고 원정에 가담했다. 이러다 보니 성전은 약탈에 가까운 전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은 여덟 차례의 원정 중 1차 때인 1099년 단 한번 뿐이었다. 그마저도 1144년에는 전열을 정비한 이슬람 세력에게 다시 빼앗긴다.

석문 위로 십자군에 참가했던 나라들의 문장이 보인다.

나머지 원정은 대부분 실패였다. 가다가 전멸당하기도 하고 엉뚱한 곳으로 새기도 하고 같은 편을 약탈하기도 하고. 시쳇말로 당나라 군대짓을 하기 바빴다. 십자군 얘기를 하면서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저질렀던 잔인한 폭거. 지금 들어도 치가 떨린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그곳에 거주하던 무슬림, 유대인, 그리고 일부 기독교인들까지도 무차별 살해하기 시작했다. 만행은 무려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이 때 14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주택은 물론 이슬람사원까지 쳐 들어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였다. 종교인이 아니라 피에 굶주린 이리떼였다. 이 같은 대학살은 그동안 기독교인들과 공존하며 살아온 무슬림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물론 보드롬성을 세운 십자군과 그때의 이리떼들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보드롬에 들어온 그들은 패잔병에 가까운 십자군 끝물이었다. 로도스에 근거를 두고 마지막 항전을 하던 성 요한 기사단이, 오스만제국과 티무르 제국이 전쟁을 하는 틈을 타고 보드롬을 차지했다.

보드롬성.

성은 바다와 이어져 있다.

보드롬을 점령한 십자군은 성을 건축하고 이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주변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이때 앞에 기술했던 마우솔레움과 관계가 맺어진다. 성을 짓기 위한 석재를 찾던 그들은, 지진으로 무너진 옛 무덤 마우솔레움을 찾아내고 심봤다!!”를 외쳤다. 돌들은 즉시 건축현장으로 실려 가고 무덤을 장식했던 아름다운 조각들은 늙은 거지의 유품처럼 버려지고 파괴됐다. 덕분에 고대 7대 불가사의는 그 흔적을 깔끔하게 지우고 말았다. 또 하나의 폭거가 그렇게 저질러 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에게는 그것도 저것도 모두 유적일 뿐이다. BC350년대에 건설된 마우솔레움의 돌들이 15세기에 건설된 보드롬성의 뼈대가 되어 지금까지 버티고 있으니, 그것 또한 인연이라면 인연 아닐까. 성 요한 기사단에 관한 스토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뒷얘기가 재미있다. 느닷없는 역사 강의에 좀 지루하겠지만, 보드롬을 갔으니 이 정도는 알고 지나가야 한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표현을 앞세워 잔인한 전쟁광으로 묘사돼온 이슬람교도들. 누가 정말 잔인한지 확인할 수 있는 일화가 여기에서 나온다.

세월을 말해주듯 성벽 돌틈에서 풀들이 자란다.

성내의 석문들. 석문들마다 문장을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잔혹과 이슬람교의 관용

보드롬성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가던 성 요한 기사단은 오스만의 슐레이만 1세의 등장에 의해 일장춘몽이 깨지고 만다. ‘위대한 술탄슐레이만에 대항하기에는 보잘 것 없는 힘이었다. 보드롬에서 성 요한 기사단을 몰아낸 슐레이만은 그들의 본거지 로도스에 항복 할 것을 권유한다. 이 권고가 거부되자 슐레이만은 공격을 시작한다. 하지만 성 요한 기사단은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도 6개월을 버틴다. 그저 내버려 두기만 해도 굶어죽을 형편이었지만, 슐레이만은 공격을 멈추고 항복을 권유한다. 그때 내세운 조건이 재미있다. “그동안 너희들이 쓰던 배는 물론, 그 배에 보물이든 무기든 원하는 것을 다 싣고 가도 좋다는 것이었다. 배가 더 필요하면 빌려주겠다는 제안도 했다. 바보짓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관용이었다. 물론 그걸 거절하면 더 바보다. 152311일 성 요한 기사단은 오스만이 내준 배에 무기와 보물, 가족을 싣고 섬을 떠난다. 예루살렘에서 피바람을 일으켰던 기독교인들과, 그 후예에게 배를 빌려주며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만든 무슬림. 이런 기가 막힌 역사는 늘 작은 모습으로 숨어 있게 마련이다.

박물관의 유리제품들.


문자를 새긴 석판.

박물관의 전시물들.

상념에서 빠져나와 본격적으로 성을 탐색하기로 한다. 계단을 오르면서 석문을 지나면서 곳곳에서 당시 십자군전쟁에 참여했던 나라들의 문장(紋章)을 발견한다. 마치 15세기로 돌아간 듯 생생하다. 기사들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은 환청에 두리번거리기까지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유물들은 화려하다. 성이 감옥으로 쓰일 때 만들어진 목욕탕도 있고 곳곳에서 정교한 유리제품도 만난다. 석재 관()과 금관, 각종 장신구들, 금전들. 세월 따위는 아랑곳 안 한다는 듯 조명 아래 여전히 자태를 빛내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리 큰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 그저 갇혀버린 시대의 잔재들일 뿐. 사실 난 박물관이라는 것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심지어는 문화의 감옥이라고 폄훼하기까지 한다.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인 줄 잘 알면서도, 박물관에 갈 때마다 그들에게서 생명을 빼앗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짠하다. 모든 건 있을 곳, 아니 있던 곳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경주의 다보탑이 경복궁 마당으로 오는 순간 그저 돌덩이일 뿐이다. 하지만 바다 밑에 들어가 유물을 보고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니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성의 천장도 예술작품이다.

망루로 올라가는 길.

박물관에서 나와 성루로 올라가는 순간, ! 하는 탄성이 나온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짙푸른 바다와 그 위에 점점점 떠 있는 배들. 그리고 쏟아지는 햇빛 아래 보석처럼 빛나는 하얀 집들. 햇살을 머금은 물비늘은 자반뒤집기를 즐기고 성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청량하기 그지없다. 나는 지금 이렇게 평화 속에서 풍경을 즐기지만 이 곳은 전쟁을 위해 지어진 성. 그들의 목적이야 어쨌든, 그리고 어느 편이었든 전쟁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냈을 이들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돌 위에 철퍼덕 앉아 성을 올라오면서 본 풍경들을 하나씩 되새겨 본다. 얼굴이 사라지고 몸통만 남은 대리석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영국인들이 머리만 가져가고 남은 몸통이라고 한다. 하긴 영국박물관에 있는 유물의 대부분이 약탈물들이라나. 사람의 욕심은 돌조차도 제 땅에서 살지 못하게 한다. 옛 사람들의 욕심이야 어떻든 내겐 지금 앉은 자리가 천국이다. 몸은 무너질 듯 지쳤지만 난 지금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있지 않은가.

목이 없는 대리석상. 훔쳐갔을지도 모르는 이들의 후손(?)들이 장난스럽게 사진을 찍고 있다.


 

망루에서 바라본 보드롬.

나비가 장자더냐 장자가 나비더냐그들이 하나더냐 그들이 둘이더냐꿈인 듯 생시인 듯 나 자신을 풍경 속에 비벼 넣고 있는데 귓전을 파고드는 소음이 있다. 누가 누굴 부르는 소리다. 설마 비루먹은 당나귀처럼 늘어져 있는 나를 부르는 건 아니겠지, 돌아볼 생각도 안 하는데 그놈의 “Excuse me, Excuse me”가 멈출 줄 모른다. 에라, 어떤 부자 될 놈이. 돌아보니 터키사람은 아니고 허여멀건 한 유럽인(이 틀림없는)이 금발의 여자와 함께 날 바라보며 “Excuse me”. 야 임마. 내가 널 언제 봤다고 용서(excuse)’ 해달란 거야. 그러잖아도 너희 유럽인종들만 보면 내 나라를 침탈했던 왜족들이 생각나서 속이 뒤집어지는데. 귀찮은데 그냥 서로 갈 길 가자. 이 친구가 내 구시렁거리는 말을 알아들을 턱이 있나. 당치도 않은 미소를 앞세워 한 발 더 다가선다. 보나마나 사진 한 장 찍어달라는 것이다. 이 친구들은 큰 카메라를 가진 사람이 사진을 찍으면 정종철(본인에겐 미안합니다)을 장동건으로 만들어 주는 줄 아는가보다. 가는 데마다 귀찮게 군다. 그래도 어쩌나. ! 하고 힘을 주며 일어서고 만다.

망루에서 바라본 바다.

망루에서 본 보드롬 시내.

카메라를 내게 넘긴 이 친구가 여자친구 손을 끌고 쫄래쫄래 가더니, 하필 햇볕이 등으로 쏟아지는 자리에 선다. 하긴 그쪽이 경치가 좋긴 하다. , 임마. 거기 서면 역광 땜에 사진 안 나와. 이쪽으로 서. 그나저나 역광이 영어로 뭐더라. 암튼, 너 거기서 찍으면 얼굴 시커멓게 나온다고. 짧은 말로 설명하는 성의 따위는 아랑곳없이 이 친구 “OK“를 연발한다. 네가 찍으면 잘 나올 테니 무조건 ”Try”해보란다. 트라이 좋아한다. , 무릎 아래만 찍어버릴라. 나도 늙어가나 보다. 심술이 느는 것이. 아무튼 오케이라니 찍을 수밖에. 제대로 안 나오는 건 제 팔자지. 셔터를 눌러주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난다. 안 듣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나 간 다음에 뭐라 건 알 바 아니다. 그렇게 성에서 내려오니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피곤이 전신을 휘감는다. 이제 누가 떠밀어도 그 자리에서 자빠질 뿐, 움직일 힘이 없다. 오뉴월에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한 늙은 개처럼 혓바닥을 빼어 문 채 벤치에 등을 의지한다. 일행들이 올 때까지 이러고 있는 수밖에. 에구구! 오늘은 팔자에 없는 세계사 공부만 실컷 하다 끝났다.

 

추천과 댓글 오늘도 그냥 지나치진 않으실 거지요?^^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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