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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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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19 [사라져가는 것들 26] 달동네3
2007. 9. 19. 18:28 사라져가는 것들

우리에게는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도랑에서 돌을 져왔다. 그것으로 계단을 만들고, 벽에는 시멘트를 쳤다. 우리는 아직 어려 힘드는 일을 못했다. 그래도 할 일이 많았다. 우리는 며칠 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성과 힘 刊)  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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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이름의 유래라고 내놓을 만한 게 변변찮다. 1970년대 말이었던가. '달동네'라는 TV드라마가 꽤 인기를 끈 뒤,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힌 게 아닌가 싶다.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잡은 동네다 보니 달과 가깝다는, 혹은 달이 크게 잘 보인다는 뜻에서 달동네로 불렀을 것이다. 혹자는 '달나라 천막촌'이란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에 차서 말하기도 하지만, 이름의 유래가 그리 중요할 턱은 없다. 달동네가 생기게 된 배경은 대충 거슬러 짐작할 수 있다. 달동네로 대표되는 도시 저소득층 집단주거지의 시초는 일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의 수탈에 못 견뎌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온 이들이, 국유지나 주인이 뚜렷하지 않은 산비탈 혹은 개천가에 무허가로 주거지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빈민계층의 주거지는 해방과 전쟁, 그리고 1960년대 경제개발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 늘어났다. 처음에는 청계천가처럼 '주인 없는' 평지에서 시작해서 산자락을 점차 점령하게 되었다. 도시개발 과정에 도심 판자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에 의해서 이러한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그들에게 산자락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산자락이라고 무한정 있는 건 아니었을 테니 산 중턱, 산꼭대기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도시 빈민층의 집단거주지는 급속도로 확산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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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빈민의 삶이 무조건 불행하기만 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악한 환경 속에서도 내일을 꿈꾸었고 아이들을 통해 희망을 파종했다. 도시유민을 거쳐 자신의 집을 갖는 과정은, 위에 예문으로 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이하 난쏘공)의 "하루하루가 즐거웠다"라는 구절처럼 행복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달동네는 살아가는 모습이 비슷했다. 비좁은 공간에 여러 집이 어깨를 겯고 살아가다 보니 마찰도 있었지만 자연스레 '함께 사는' 동네일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공터는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동네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그 곳에서는 가끔 축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부잣집 동네를 돌다가, 죽은 세퍼트를 얻어 횡재한 고물장수 황씨가 동네사람들에게 한 턱 쏘는 곳도 이 공터였다. 얻어온 세퍼트가 없으면 어떠랴. 소주 몇 병, 막걸리 몇 되로 고단한 일상을 씻어내고 다음날 일터로 나갈 수 있는 의지를 충전하기도 했다. 달동네에는 마음이든 문이든 늘 열려있었다. 연탄 한 장이나 물 한바가지를 놓고 이웃 간에 머리카락 빠져라 싸우는 일도 흔했지만, 속정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깊었다. 어차피 살을 맞대고 사는 가족이나 다를 바 없는 이웃들이었다. 담장이 없거나 낮다보니 서로 감출 것도 없었다. 수제비를 끓이다 이웃이 지나가면 물 한바가지 더 붓고 불러들이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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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무소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승용차도 몇 대 서 있었다. 그곳에는 두 부류의 사람밖에 없었다. 입주권을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이었다. 팔려는 사람들은 초조한 얼굴로 거간꾼들의 눈치만 보았다. 한결같이 영양이 나쁜 얼굴들이었다. 거기서는 눈물 냄새가 났다. 나는 눈물 냄새를 가슴으로 맡았다. (난쏘공, 112P) "헐릴 저희 집 같은 걸 새로 지으려면 백삼십만 원은 있어야 됩니다. 저희 아버지가 평생을 일해 지은 집예요. 우린 그걸루 이십이만 원과 바꾸어야 될 입장예요. 거기서 전세 주었던 돈 십오만 원을 제하고 나면 칠만 원이 남습니다." (난쏘공, 114P)

달동네의 외형적 모습도 국화빵 틀에 찍어낸 듯 비슷했다. 종점에서 버스를 내려 언덕바지를 조금 올라가면 동네 머리를 만나게되고 그 곳엔 그만그만한, 사는데 없어서는 안될 가게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연탄가게, 구멍가게, 잡화점, 전파사, 복덕방, 이발소, 미장원, 세탁소, 솜틀집…. 입구를 들어서면 리어카 하나쯤 지나갈 만한 길이 위를 향해 가파르게 나 있었다. 저녁이면 일터에서 돌아와 밥을 짓는 소리에 동네는 부쩍 활기를 띠고,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골목골목을 달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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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길은 겨울이면 얼어붙기 일쑤여서 연탄재라도 깨트려야 오갈 수 있었다. 봄이 되어 날이 풀리고 바람이 불면 루핑지붕에 연탄먼지가 뿌옇게 앉았다. 달동네 사람들은 부지런했다. 멀리까지 일을 나가다 보니 새벽이슬을 맞으며 집을 나서 밤이 돼야 돌아올 수 있었다. 대부분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그들에게 '부지런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는 건 진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달동네 주민들이 등에 진 '원죄'는 감해지지 않았다. 수십 년을 살아도 그들이 둥지를 튼 곳은 남의 땅이었다. 즉, 무단점유자란 주홍글씨는 세월 따위에 바래는 일은 없었다. 국가든 개인이든 땅 주인이 언젠가는 소유권을 주장하게 마련이었고, 철거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고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강제로 쫓겨나면 다른 곳에 가서 말뚝을 박아야하는 악순환이 거듭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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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나는 이들에게는 아파트 딱지(입주권)나 쥐꼬리만큼의 보상금이 주어졌다. 하지만 한가족이 살아갈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에는 턱없이 비현실적이었다. 설령 임대아파트에 입주한다고 하더라도 아파트에서의 삶은 고리대금업자처럼 비싼 대가를 요구했다. 그래서 하루를 살아내기에 급급한 철거민들은, 그림의 떡 같은 딱지를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별 대책도 없이 탑을 쌓듯 지어 올린 삶의 터전을 등져야했고, 그럴 때마다 삶의 질은 한 단계 더 추락하기 마련이었다. 그나마 집주인은 조금 나았다. 달동네에조차 집 한 채 마련할 능력이 안 되는 세입자들은 이사비용 몇 푼 쥔 채 길거리에 나앉기 일쑤였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목숨을 담보로 한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한 투쟁에도 순수하지 못한 이들이 끼어 들었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본질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쫓아내려는 쪽과 삶의 터전을 잃지 않으려는 쪽의 전쟁은 도시 근대화과정의 역사였다. 이 전쟁의 우위를 점하려는 아파트 건설업체측에서는 '전문가급' 철거용역업체를 동원하기 마련이었다. 한꺼번에 수백 명씩 투입되는 그들은 인정사정 없었다. 극렬하게 저항해보지만 대부분 역부족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엊그제까지 보금자리였던 곳에는 몇 조각 벽돌조각이 구를 뿐이었다. 인명사고도 드물지 않았다. 목숨으로 저항하는 사람도 많았다. 몸에 불을 지르기도 했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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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머니가 싸놓은 짐을 하나하나 밖으로 끌어냈다.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가 조리·식칼·도마들을 들고 나왔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나왔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공구들이 들어 있는 부대를 메고 나왔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 앞에 쇠망치 대신 종이와 볼펜을 든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가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가 바른손을 들어 집을 가리키고 돌아섰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이 집을 쳐부수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달라붙어 집을 쳐부수었다. 어머니는 돌아앉아 무너지는 소리만 들었다. 북쪽 벽을 치자 지붕이 내려앉았다. 지붕이 내려앉을 때 먼지가 올랐다. 뒤로 물러섰던 사람들이 나머지 벽에 달라붙었다. 아주 쉽게 끝났다.
(난쏘공, 123~1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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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철거·분신·딱지… 많은 사람들에게 철거를 둘러싼 분쟁이 아프리카 종족분쟁이나 중동의 종교분쟁처럼 비현실적인 단어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도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우리 이웃, 아니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다. 오늘 빈손으로 떠난 그들은 내일 또 다른 곳에서 신산(辛酸)의 보따리를 쌀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그들이 찾아들어 등 대고 누울만한 달동네도 자꾸 줄어들고 있다. 먼지 날리는 골목과 루핑지붕을 힘겹게 인 게딱지같은 집들이 엎드려있던 언덕, 그곳에는 번듯한 아파트들이 키를 자랑하고 번쩍번쩍 빛나는 차들이 달리고 있다. 뉴타운이라고 이름지어진 그 곳에서 과거 달동네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이름이 바뀐 만큼이나 눈에 보이는 건 모두 바뀌었다. 곳곳의 테니스장이나 골프 퍼팅장엔 행복이 떠다니고, 아파트 사이사이의 산책로는 분쟁 따위를 잊은 지 오래다. 높은 지대라는 흠 때문에 빈민들이 깃들여 살수밖에 없던 그곳이, 이젠 전망이 좋다는 이유로 가진 이들의 각광을 받는다. 어느 동네는 억대의 프리미엄이 붙었다던가. 그 곳 골목에서 발가벗고 뛰어 놀던 아이들이 훗날 찾아가 본다면 흔적은커녕 추억 한 자락 건져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겉모습이 바뀐다고 모든 게 다 사라져버리는 걸까. 높은 굴뚝에 올라가 먼 별로 날고자했던 난장이의 꿈처럼, 그들의 가슴에서 자라던 소망은 아직도 그 곳을 맴돌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의 눈물과 절규가 묻힌 어디쯤엔 옛날처럼 개망초 한 두 송이 몰래 피어나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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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하면서]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전형적인 달동네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 달동네였던 곳도 꼭대기에 올라가 보면 번듯한 집들이 뷰파인더에 잡히기 일쑤였습니다. 저 역시 어느 날 도시의 수레바퀴에 불쑥 끼어 든 '유입민(流入民)'으로, 수십 년을 허덕거리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달동네로 흘러드는 건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달동네의 삶을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피상적으로, 보고들은 만큼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제 무지의 소치로 잘못 기록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다행스런 건 제 글이 아니어도 달동네의 삶을 담은 수많은 소설과 산문, 보고서, 영상자료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념은 못하더라도 기록이 필요한 것은 많습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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