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느닷없이 등장한 백두산 금강대협곡 사진. 샤클르켄트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도시 카쉬

협곡을 빠져나오니 흠뻑 젖었던 옷이 그새 거의 말랐다. 극한상황 뒤의 안도감 때문인지 온몸이 나른하면서도 가뿐하다. 속옷을 갈아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캐리어를 꺼내달라고 하는 것도 미안하려니와 갈아입을 곳도 마땅치 않아 포기한다. 버스가 샤클르켄트를 출발하려는 순간, 지난봄에 다녀왔던 백두산 금강대협곡이 생각난다. , 그게 왜 이제야 생각나지? 그러고 보니 금강대협곡이 샤클르켄트보다 훨씬 멋있었다. 이곳이 조금 음울해 보인다면 금강대협곡은 훨씬 밝고 웅장했다. 금강대협곡은 백두산 아래쪽에 있는 V자의 협곡으로 화산 폭발 때 만들어진 것이다. 길이는 약 15km이며 절벽의 높이는 100m~200m. 협곡에 가기 위해 원시림을 통과해야 하는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신비롭고 장엄하다. 샤클르켄트가 계곡에서 트레킹을 직접 할 수 있도록 개발됐다면 그곳은 협곡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난간만 만들어놓았다. 아찔한 절벽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줄기란. 더구나 내가 갔을 땐 절벽 중간 중간에 진달래까지 만개했었다. 물론 그곳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는 중국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원래 땅주인인 우리는 외국 관광객이 되어 갈 수 밖에 없다. 트레킹 코스로 개발하면 세계적인 명소가 될 텐데. 그래서 잘 지켜야 하거늘. 괜한 아쉬움으로 입맛이 쓰다.

페티예에서 카쉬로 가는 길. 산을 깎아서 도로를 만들었다.

카쉬에 내리자마자 내 마음을 빼앗았던 오래된 카펫가게.

카쉬로 가기 위해 버스는 해안도로를 달린다. 산을 깎아서 만든 길은 구절양장이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구불구불 끝이 없다. 도로의 왼쪽으로는 산, 오른쪽으로 파란 바다가 이어진다. 산과 바다가 씨줄 날줄처럼 엮여 꿈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카쉬에 도착하니 오후 231. 아직 점심 전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고풍스런 건물 하나가 눈길을 잡아당긴다. 오래된 것만 보면 자석 만난 쇠붙이처럼 끌려가는 이 고질병. 다큐팀은 부두 쪽을 향해 가는데 내 발길은 자꾸 그 고택을 향해서 간다. 그 건물이 있는 쪽을 옛날 카쉬라고 부른다고 한다. 집을 반으로 나눠 왼쪽엔 부동산사무실이 있고 오른쪽은 카펫가게가 자리를 잡았는데 마당까지 카펫을 널고 깔아놓았다. 세월을 듬뿍 담은 카펫과 오래된 건물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풍경 앞에서 한참 서성거린다. 한눈에 봐도 카쉬는 천혜의 관광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도시는 크지 않지만 뒤쪽으로 거대한 바위산이 솟아있다. 그 산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안정감과 강한 인상을 준다. 산이 품은 골짜기마다 하얀 집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는 옥색 바다와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부두에 빽빽하게 들어선 배들. 이런 풍경 때문에 사람들은 카쉬를 일러 터키 남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곳이라고 하는구나.

바다에서 바라본 카쉬. 골짜기마다 하얀 집들이 들어서 있다.

일행이 탔던 유람선.

드디어 배를 타다


카쉬는 BC 6세기에 세워진 고대도시로, 그 때 이름은 안티펠로스(Antiphellos)였다. 지리적으로 리키아 연맹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지역의 대외 창구 역할을 했다. 항구도시로 누린 번영을 말해주듯이 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리스 양식의 극장과 도리아 양식의 무덤들이 남아있다. 카쉬는 패러글라이딩, 암벽등반, 스쿠버다이빙과 트레킹, 래프팅 등 다양한 레포츠를 즐길 수 있어 숱한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또한 지중해 연안 섬들을 돌아보는 보트투어의 거점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1인당 60리라 정도를 내면 아침에 출발해서 섬들을 돌아보고 오후에 돌아오는 코스다. 조금 길게 해상투어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Blue voyages를 이용하면 된다. Blue voyages란 배에서 며칠간 지내면서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해변에 중간 중간 들르는 것을 말한다. 이를 이용하면 육로로는 찾아가기 어려운 고대 리키아의 유적들을 둘러볼 수 있다. 다큐팀과 합류해보니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우리 일행도 보트투어를 한단다. 풀코스나 Blue voyages는 아니지만 근해에 나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코스가 예약돼 있단다. 야호! 철없는 아이들처럼 환호가 터진다. 저걸 못 타보고 가면 여행기가 앙꼬 없는 찐빵이 될 뻔했는데.

우리가 탔던 유람선 곁으로 지나던 다른 유람선.

유람선만 배냐? 요트도 지나간다.

우리가 탈 배는 일반적인 보트보다는 제법 크고 보드롬 해변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범선보다는 작다. 선미(船尾) 쪽에는 가운데에 놓인 식탁을 중심으로 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고, 뱃머리 쪽에는 누워서 일광욕을 즐길 수 있도록 매트리스가 깔려 있다. 일광욕이라면 목을 매는 백인들이 참 좋아하게 생겼다. 선실에는 화장실과 주방이 있다. 작은 배지만 있을 건 모두 있는 셈이다. 근처에 정박된 다른 배들도 모두 고만고만한 모습이다. 배에서 일행을 맞은 사람은 40대쯤의 강건한 인상의 남자. 조금 뒤에는 선실 쪽에서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나와서 수줍은 미소로 반긴다. 선장의 아내인 모양이다. 남자가 배의 시동을 걸자 여자가 선미로 가서 말뚝에 매어 있는 줄을 푼다. 배는 답답했다는 듯이 파란 바다를 향해 헤엄쳐 나간다. 늘 바라만 보던 바다 한 가운데로 들어서니 색다른 기분이다. 바다는 맑고 푸르다. 배가 지나가고 있는 곳의 수심이 최소 7m라고 하는데 바닥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거짓말 좀 보태면 지나가는 물고기 눈 흘기는 모습이 보일 정도다. 지중해의 시원한 바람이 귓불과 뺨을 스치고 온 몸을 간질인다. 또 한 번 전신을 적시는 평화. 배 옆으로 하얀 돛을 단 요트들이 날치처럼 지나고 점, , 점 작은 섬들도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이 물빛을 보라. 에머럴드인들 이렇게 아름다우랴.

우리의 선장 아저씨. 물론 물고기도 굽는다. 전직은 어부.

배 끝에 이런 그릴이 마련돼 있다.

선장은 어부보다 행복할까?


카야쾨이를 돌아볼 때 이미 이야기 한 적 있지만, 터키로서는 볼 때마다 배가 아파도 한참 아플 섬들이다. 세계 1차 대전에서 괜히 독일 편을 들었다가 패전국이 된 터키.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1923년에 연합국과 맺은 로잔조약에 의해 이스탄불을 되찾는 대신 그동안 차지하고 있던 섬들을 그리스에 내줬다. 유럽에 한 발을 걸치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닭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섬을 내줬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다. 터키의 앞바다인데도 섬 근처에서는 휴대전화에 그리스의 와이파이가 잡힌다고 한다. 와이파이도 제 국적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조금 더 나가니 물은 푸르다 못해 검은 색을 띤다. 햇살을 듬뿍 머금은 물비늘이 배가 지나가는 길 옆으로 잇달아 자지러진다. 부부는 항해 중에도 분주하게 오간다. 승객들이 시원한 바람과 검푸른 바다에 흠뻑 빠져 있는 사이 아내는 주방장이 되어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선장인 남편은 선미의 그릴에서 생선을 굽는다. 투어코스의 하이라이트가 점심식사기 때문이다. 남편의 직업은 어부였는데 작년에 배를 사서 해상투어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건져 올리던 손으로 관광객이 탄 유람선을 몰고 물고기를 굽는다. 이 배는 그가 평생 키워온 꿈의 결정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꿈을 이룬 지금 그는 행복할까?

선장의 아내이자 부선장이고 주방장까지 겸하는 그녀. 카메라를 절대 피하지 않는다.

가끔은 발로 배를 모는 서비스 묘기를 보이기도.

선장이 구워낸 도미. 얌마! 눈 깔어.

낯선 사람들과 만나 일하려니 힘들기도 하지만 즐거운 점도 있어요.” 말을 극도로 아끼는 그 대답에서 힘들기도 하지만이라는 부분에 좀 더 큰 무게가 실렸다고 생각하는 건 내 억지일까? 차라리 파도나 물고기와 씨름하는 게 낫지 낯선 이방인들을 태우고 고기를 잡던 바다를 돌고 도는 게 뭐 그리 신이 날까. 굳이 송충이와 솔잎까지 들먹일 생각은 없다. 돈을 벌기 위해 평생 꿈꾸던 것이겠지만, 난 그의 얼굴에서 보람대신 후회를 읽고 만다. 아무리 봐도 그는 선글라스를 쓰고 배를 모는 유람선 선장보다는 힘찬 몸짓으로 그물을 던지는 어부가 잘 어울릴 것 같다. 지금 굽고 있는 도미도 그가 직접 잡은 것이라고 한다. 잠시 뒤에는 아내가 주방에서 음식을 하나씩 내오기 시작한다. 소박한 밥상이다. 감자, 치즈, 샐러드, 마카로니. 그리고 생선구이. 음식 솜씨를 일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배어 있는 정성만큼은 천하진미다. 그녀 역시 어부의 아내에서 어느 날 유람선의 주방장 겸 부선장이 됐을 것이다. 식사를 하는 중에 선장의 아내는 입가에 순박한 미소를 띤 채 이방인들을 살짝살짝 훔쳐본다. 그러다 남편이 자리를 비우면 대신 배를 몰기도 한다.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생각보다 능동적으로 포즈를 취해준다. 가끔은 배를 발로 운전하는 묘기도 보여준다. 얼굴에는 신산한 날들이 고랑으로 그려져 있지만 열심히 살아온 한 여자의 자긍심도 함께 배어있다.

수영 삼매경에 빠진 젊은 친구들. 물이 얼마나 파란지 사람까지 파랗게 물들 것 같다.

배 위와 앞머리에는 일광욕을 할 수 있도록 매트리스가 깔려있다.

엄상욱 씨의 경우


지중해를 가르는 배에 비스듬히 누워 바람을 즐기는 시간,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하다. 여행자로서는 조금 과분해서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지만,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보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식사를 마친 젊은 친구들은 언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는지 놀란 개구리처럼 바다로 풍덩풍덩 뛰어든다. 덩치 큰 믿음 씨도 멋진 수영솜씨를 자랑한다. 내가 3년만 젊었어도. 아참, 난 수영을 못하지. . 물이 얼마나 파란지 수영하는 사람들까지 파란색으로 물들 것 같다. 몇몇 사람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물이라는 듯 물끄러미 구경만 한다. 그 중엔 바다에서 용이 단체로 승천해도 모른 척 할 사람도 있다. 바로 앞에서 몇 번 언급했던 엄상욱 씨. 그는 주변 풍경엔 아랑곳 않고 양산을 쓴 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 일을 할 때는 철저한 프로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자신만의 세상을 만끽하는 사람이다. 늘 양산을 쓰고 다니는 바람에,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내가 양산맨이란 별명을 하사했다. 그러고 보니 양산과 관련해서 그가 해준 들려준 얘기가 생각난다. 이스탄불에서 양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무조건 한국 여성으로 보면 된단다. 혼자든 단체든 차에서 내렸다 하면 양산부터 펴들기 때문에 눈에 확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은근히 흉보던 그대는 왜 우산도 아닌 양산을 그리 열심히 쓰고 다니는 거야.

이 분이 바로 양산맨 엄상욱 씨. 어디에 있든 양산과 함께 한다.

"용이 승천한들 휴대전화만 하랴"

그는 다팀의 코디네이터 자격으로 이스탄불에서 합류했다. 방송 내용에 맞는 주변 환경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코디네이터라고 하는 모양인데 스튜디오 작업만 주로 해온 내겐 조금 낯설다. 현지인 가이드인 이믿음 씨, 즉 규벤이 있으니 가이드라고 하긴 그렇고, 촬영을 좀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고용한 일종의 로드매니저 역할이다. 섭외는 주로 믿음 씨가 하고 엄상욱 씨의 일은 대부분 다큐팀 통역이다. 여행 당시 36세였으니 이제 37세가 됐다. 인물과 풍채는 훤하게 좋은데 아직 싱글. 그의 공식 직함은 FT TOUR라는 회사의 실장이다. 실질적으로는 대표지만(아주 작은 회사니 대표든 과장이든 별 차이가 없다) 실장이라는 직함을 쓴다. 회사를 차리고 처음 맡은 일이 이번 다큐팀의 코디네이터다. 그 전에는 가이드로 일했다. 터키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국내 여행 한번 변변히 가본 적이 없단다. 그런데 훗날 생각해보니 핏속에 역마살이 흐르더란다. 이스탄불에 있는 친구가 놀러 오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터키행 비행기를 탔던 게 타국살이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어쩌다 보니 눌러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친구 따라 장 구경 갔다가 장돌뱅이가 된 셈이다. 가끔 고국에 들르긴 하지만 아주 귀국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헥토르에이전시의 한국인 아가씨도 그렇고 이 엄상욱 씨도 그렇고. 그만큼 터키가 매력 있는 곳이란 얘기인지. 뭔가 핏줄을 당기는 게 있는 건지.

저 멀리 그리스 섬이 보인다.

이곳에서 배가 회항한다. 난 저 집이 무척 궁금했다. 아니 살고싶었다.

연락처를 알려드립니다

아무튼 그는 혼자 살지만 럭셔리한 생활을 한다고 자랑한다. 김치도 직접 담그고 우리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단다. 타향살이도 제대로 하려면 역시 음식 솜씨가 좋아야. 카야쾨이의 조용한 마을에서 배회로 한나절을 보낼 때, 나를 찾으러 왔던 사람이 바로 이 엄상욱 씨다. 그런데 사람의 인연이란 게 참어디에 어떤 끈으로 연결돼있을지 정말 알 수 없다.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와 나는 무관한 관계가 아니었다. 지금은 한국으로 들어와 살지만, 가까운 내 친구 하나가 그리스에서 여행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와 잘 아는 사이라는 것이다. 엄상욱 씨의 말에 따르면 내 친구가 여행사 대표로 터키 관광시장을 개척할 당시, 자신은 가이드로 일했다는 것이다. 하긴 그리스와 터키는 보통 하나의 관광코스로 묶기 때문에 만나지 않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어디 가서, 아는 사람 없다고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아무튼 이 엄상욱 씨는 무척 성실한 데다 터키어 실력도 뛰어나보였다. 다음에 전문적으로 터키를 탐구할 일이 있으면 꼭 이 친구와 함께 일을 하고 싶다. 혹시 독자들 중에 터키에 가실 분이 있으면, 가이드가 필요한 여행이라면, 슬그머니 비밀댓글로 연락하시길. 전화번호와 이메일을 전액 무료로 팡팡!!!

절벽 위에 보이는 작은 구멍이 리키아 무덤이다. 저건 또 어떻게 만들었을까.

바다 위에서 보내는 꿈같은 시간은 길지 않다.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 절벽에서 다시 리키아시대의 무덤들을 본다. 먼저 아민타스 석굴무덤에서도 그랬듯이 저 절벽에 어떻게 저런 무덤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몸을 던져 저 무덤 하나를 만들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믿음 씨가 터키와 그리스 간의 전설을 하나 얘기해준다. 지금은 그리스 땅으로 돼 있는 코스라는 섬이 있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이란 뜻인데, 터키 땅의 카쉬는 눈썹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원래 하나였던 눈과 눈썹이 헤어져 있는 셈이다. 배는 나갈 때보다 더 빨리 돌아와 일행을 부두에 내려놓는다. 이제부터는 눈썹인 카쉬의 구시가지를 본격적으로 탐색할 시간. 낯선 땅은 늘 설렘을 먼저 선물한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보드롬의 바다. 배들이 평화롭게 떠다닌다.

보드롬성으로 들어가는 길. 엄마와 아들이 정겹게 사진을 찍길래 나도 찰칵!

헤로도토스를 불러내다

점심을 마치고 보드롬성으로 간다. 비행기에서 잠을 설친데다 이른 아침부터 이리 저리 걷고, 식사까지 늦어지다 보니 발이 납덩어리를 매달아놓은 듯 무겁다. 게다가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몸은 리듬을 잃고 허청거린다. 아니면, 나이를 못 속이는 겐가. 아니야, 10kg이 넘는 카메라 장비를 메고 산을 들처럼 쏘아 다니는 체력인데. 스스로를 달래면서 성큼성큼 앞서 걷는다. 이제 보드롬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보드롬이 에게해의 끝이고 지중해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설명은 앞에서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좀 웃긴다. 누구 맘대로 어디부터가 무슨 해이고 어디까지가 무슨 바다라는 건지. 바닷물은 아무 경계도 없이 그저 오갈 뿐인데, 인간이 선을 긋고 금을 들이대며 너는 에게해고 너는 지중해란다. 그리고 그걸 두고 싸우기까지 한다. , 내가 책임 질 일은 아닌 것 같고. 보드롬에는, 보드롬이란 이름을 얻기 훨씬 전에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 역사를 쓰고 키케로에 의해 역사의 아버지라 불린 헤로도토스(BC 484~420). 그래서 이 곳의 역사는 그를 통해 들을 수밖에 없다.

보드롬 전경. 오른쪽으로 아주 작게 보드롬성이 보인다.

보드롬성 아래의 모스크와 바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그리스의 도리아인들이 먼저 등장한다.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인들의 식민지 건설이 시작됐을 때, 그중 도리아인들이 만든 6개 도시 연맹 가운데 하나가 할리카르나소스(Halikarnassos), 바로 오늘날의 보드롬이다. 이 지역은 훗날 마우솔레움의 주인이 된 마우솔로스(BC 376~353)가 통치하던 시절에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맞는다. 역사 이야기는 길게 하면 재미없다. 특히 남의 역사는 더 그렇다. 아무튼 이 곳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배를 받기도 하다가, 리디아 왕국이 페르시아에게 패망하면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BC 129년에는 로마의 영토가 됐다가 그 후 AD 654년부터 이슬람의 공격을 받는다. 꽤 오랫동안 이슬람의 영토였던 이곳은 1402년 십자군인 성 요한 기사단에 의해 함락된다. 그 들이 그때 보드롬성을 짓고 베드로성이라 불렀다. 또 이 지역을 베드로의 성이 있는 곳이란 뜻으로 페테리움(Peterium)이라 이름 지었다. 이것이 터키말로 보드롬이다. 1522년 오스만에 의해 다시 점령된 뒤에는 계속 터키 땅으로 남았다. 한 마디로, 팔자가 드세서 이놈저놈 드나들며 제 땅을 삼은 곳이 보드롬이란 얘기다.

출항대기 중인 배들.

보드롬성 입구.

보드롬성과 마우솔레움

조용한 어촌이던 보드롬이 주목을 받게 된 건 1923년부터였다. 그해 체결된 로잔 조약에 의해 다음 해 터키와 그리스가 인구를 교환할 때, 그리스영토 크레타에 살던 터키인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제법 활기찬 도시로 발돋움했다. 보드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의 역사적 유물이다. 그 중 하나가 앞서 그 유래를 설명했던 보드롬성이고, 나머지가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는 마우솔레움(Mausoleum)이다. 이제부터 그곳을 찾아가야 한다. 이 둘은 아무런 관련도 없고 또 깊은 관련이 있기도 하다. 말장난? 그렇진 않다. 마우솔레움이 BC350년대에 건설되기 시작했고 보드롬성이 1400년대에 세워졌으니 1800년 가까운 시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따지는 사람은 역사 공부에 목숨을 걸었던 분이다. 일단 궁금증을 심어놓고, 대답은 뒤로 미뤄 두는 것도 글 쓰는 자의 권리일 터. 사실은 둘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를 하려면 마우솔레움부터 들러야 술술 풀리는데 방문 일정이 보드롬성부터 잡혀 있으니 거꾸로 가는 수밖에 없다.

보드롬성 망루.

보드롬성. 워낙 튼튼하게 지어서 거의 훼손이 없다.

보드롬성으로 들어가는 길. 유럽 관광객들이 많았다.

보드롬을 상징하는 보드롬성은 양쪽에 항구를 거느린 곶의 끝부분에 제법 웅장한 자태로 서 있다. 지금까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이 성은 당시에도 에게해에서 가장 견고한 성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성 입구에는 관광객이 제법 많다. 주로 유럽인들이다. 유럽의 연합군, 즉 십자군으로 한 때 이 도시를 점령했던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온 걸까. 일본인들이 서대문형무소를 찾아오듯. 성 내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각국을 상징하는 망루, 즉 성탑들이 남아있다. 성은 현재 인근 바다 밑에서 건져 올린 유물들을 전시하는 수중 고고학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매표소를 지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면서 다시 바쁜 걸음들 속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걷는다. 우선 지친 몸도 달랠 겸 분위기 파악을 위해 벤치에 앉는다. 긴 세월을 머금은 우람한 나무들이 내리 쪼이는 햇빛을 잘 걸러준다. 땀이 좀 걷히면서 주변 풍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아래가 뾰족하고 토끼 귀처럼 손잡이가 달린 암포라들.

기사들이 예배드리던 교회. 지금은 배가 전시돼 있다.

교회 안에 전시된 배 모형. 항아리들이 가득하다.

좌측 뒤편으로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전시돼 있다. 바로 암포라(amphora)라고 부르는 항아리다 암포라는 '2개의 손잡이'라는 뜻인데 그릇마다 앙증맞게 달린 손잡이가 토끼 귀처럼 예쁘다. 포도주나 올리브유 또는 곡식의 운반저장용으로 썼다고 한다.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은 흙으로 만든, 밑이 뾰족하고 기다란 암포라다. 왜 굳이 아래를 뾰족하게 만들었을까. 고정을 위해 별도의 받침대가 필요했을 것 같다. 항아리들은 침몰된 배에서 통째로 건져 올린 듯 보존상태가 완벽하다. 앞에는 십자군 기사들이 예배를 보던 교회건물이 서 있다. 물론 십자군들이 물러간 뒤에는 이슬람사원으로 쓰였을 것이다. 정복한 자들에 의해 교회도 되고 사원도 되고. 사람으로 친다면 참 기구한 팔자다. 신들도 인간의 부름에 따라 왔다 갔다 하기에 바빴을 것 같다. 지금은 교회 안에, 해저에서 건져 올린 침몰선을 10분의 1 크기로 복원해 전시해놓았다. ()의 배()에는 항아리가 가득 실려 있다.

보드롬성 입구에 놓인 대포.

십자군 전쟁이 남긴 이야기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왕 주저앉은 김에 십자군 얘기를 잠깐 하고 지나가자. 십자군전쟁은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이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이슬람세계에 있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총 8회에 걸친 원정을 말한다. 셀주크 튀루크에게 압박을 받던 비잔티움제국(동로마)의 황제가 교황인 우르바누스2세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그러잖아도 성지순례를 이교도들에게 방해받는 게 기분 나빴던 교황은 도랑치고 가재도 잡아보겠다는 심정으로 성전을 선포한 것이다. 교황은 십자군을 모으기 위해 갖가지 당근을 내밀었다. 십자군에 참가하면 모든 교회법상의 처벌이 면제되고 전쟁에서 싸우다가 죽으면 영혼은 곧 천국에 간다고 설파했다. 결국 상인들은 돈을 좀 만져볼까 하는 마음에, 농민들은 뼈 빠지게 일 해봐야 먹고 살기도 힘겨운데 봉건영주의 등쌀에서 좀 벗어나볼까 하고 원정에 가담했다. 이러다 보니 성전은 약탈에 가까운 전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은 여덟 차례의 원정 중 1차 때인 1099년 단 한번 뿐이었다. 그마저도 1144년에는 전열을 정비한 이슬람 세력에게 다시 빼앗긴다.

석문 위로 십자군에 참가했던 나라들의 문장이 보인다.

나머지 원정은 대부분 실패였다. 가다가 전멸당하기도 하고 엉뚱한 곳으로 새기도 하고 같은 편을 약탈하기도 하고. 시쳇말로 당나라 군대짓을 하기 바빴다. 십자군 얘기를 하면서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저질렀던 잔인한 폭거. 지금 들어도 치가 떨린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그곳에 거주하던 무슬림, 유대인, 그리고 일부 기독교인들까지도 무차별 살해하기 시작했다. 만행은 무려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이 때 14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주택은 물론 이슬람사원까지 쳐 들어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였다. 종교인이 아니라 피에 굶주린 이리떼였다. 이 같은 대학살은 그동안 기독교인들과 공존하며 살아온 무슬림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물론 보드롬성을 세운 십자군과 그때의 이리떼들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보드롬에 들어온 그들은 패잔병에 가까운 십자군 끝물이었다. 로도스에 근거를 두고 마지막 항전을 하던 성 요한 기사단이, 오스만제국과 티무르 제국이 전쟁을 하는 틈을 타고 보드롬을 차지했다.

보드롬성.

성은 바다와 이어져 있다.

보드롬을 점령한 십자군은 성을 건축하고 이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주변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이때 앞에 기술했던 마우솔레움과 관계가 맺어진다. 성을 짓기 위한 석재를 찾던 그들은, 지진으로 무너진 옛 무덤 마우솔레움을 찾아내고 심봤다!!”를 외쳤다. 돌들은 즉시 건축현장으로 실려 가고 무덤을 장식했던 아름다운 조각들은 늙은 거지의 유품처럼 버려지고 파괴됐다. 덕분에 고대 7대 불가사의는 그 흔적을 깔끔하게 지우고 말았다. 또 하나의 폭거가 그렇게 저질러 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에게는 그것도 저것도 모두 유적일 뿐이다. BC350년대에 건설된 마우솔레움의 돌들이 15세기에 건설된 보드롬성의 뼈대가 되어 지금까지 버티고 있으니, 그것 또한 인연이라면 인연 아닐까. 성 요한 기사단에 관한 스토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뒷얘기가 재미있다. 느닷없는 역사 강의에 좀 지루하겠지만, 보드롬을 갔으니 이 정도는 알고 지나가야 한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표현을 앞세워 잔인한 전쟁광으로 묘사돼온 이슬람교도들. 누가 정말 잔인한지 확인할 수 있는 일화가 여기에서 나온다.

세월을 말해주듯 성벽 돌틈에서 풀들이 자란다.

성내의 석문들. 석문들마다 문장을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잔혹과 이슬람교의 관용

보드롬성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가던 성 요한 기사단은 오스만의 슐레이만 1세의 등장에 의해 일장춘몽이 깨지고 만다. ‘위대한 술탄슐레이만에 대항하기에는 보잘 것 없는 힘이었다. 보드롬에서 성 요한 기사단을 몰아낸 슐레이만은 그들의 본거지 로도스에 항복 할 것을 권유한다. 이 권고가 거부되자 슐레이만은 공격을 시작한다. 하지만 성 요한 기사단은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도 6개월을 버틴다. 그저 내버려 두기만 해도 굶어죽을 형편이었지만, 슐레이만은 공격을 멈추고 항복을 권유한다. 그때 내세운 조건이 재미있다. “그동안 너희들이 쓰던 배는 물론, 그 배에 보물이든 무기든 원하는 것을 다 싣고 가도 좋다는 것이었다. 배가 더 필요하면 빌려주겠다는 제안도 했다. 바보짓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관용이었다. 물론 그걸 거절하면 더 바보다. 152311일 성 요한 기사단은 오스만이 내준 배에 무기와 보물, 가족을 싣고 섬을 떠난다. 예루살렘에서 피바람을 일으켰던 기독교인들과, 그 후예에게 배를 빌려주며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만든 무슬림. 이런 기가 막힌 역사는 늘 작은 모습으로 숨어 있게 마련이다.

박물관의 유리제품들.


문자를 새긴 석판.

박물관의 전시물들.

상념에서 빠져나와 본격적으로 성을 탐색하기로 한다. 계단을 오르면서 석문을 지나면서 곳곳에서 당시 십자군전쟁에 참여했던 나라들의 문장(紋章)을 발견한다. 마치 15세기로 돌아간 듯 생생하다. 기사들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은 환청에 두리번거리기까지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유물들은 화려하다. 성이 감옥으로 쓰일 때 만들어진 목욕탕도 있고 곳곳에서 정교한 유리제품도 만난다. 석재 관()과 금관, 각종 장신구들, 금전들. 세월 따위는 아랑곳 안 한다는 듯 조명 아래 여전히 자태를 빛내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리 큰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 그저 갇혀버린 시대의 잔재들일 뿐. 사실 난 박물관이라는 것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심지어는 문화의 감옥이라고 폄훼하기까지 한다.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인 줄 잘 알면서도, 박물관에 갈 때마다 그들에게서 생명을 빼앗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짠하다. 모든 건 있을 곳, 아니 있던 곳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경주의 다보탑이 경복궁 마당으로 오는 순간 그저 돌덩이일 뿐이다. 하지만 바다 밑에 들어가 유물을 보고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니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성의 천장도 예술작품이다.

망루로 올라가는 길.

박물관에서 나와 성루로 올라가는 순간, ! 하는 탄성이 나온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짙푸른 바다와 그 위에 점점점 떠 있는 배들. 그리고 쏟아지는 햇빛 아래 보석처럼 빛나는 하얀 집들. 햇살을 머금은 물비늘은 자반뒤집기를 즐기고 성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청량하기 그지없다. 나는 지금 이렇게 평화 속에서 풍경을 즐기지만 이 곳은 전쟁을 위해 지어진 성. 그들의 목적이야 어쨌든, 그리고 어느 편이었든 전쟁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냈을 이들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돌 위에 철퍼덕 앉아 성을 올라오면서 본 풍경들을 하나씩 되새겨 본다. 얼굴이 사라지고 몸통만 남은 대리석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영국인들이 머리만 가져가고 남은 몸통이라고 한다. 하긴 영국박물관에 있는 유물의 대부분이 약탈물들이라나. 사람의 욕심은 돌조차도 제 땅에서 살지 못하게 한다. 옛 사람들의 욕심이야 어떻든 내겐 지금 앉은 자리가 천국이다. 몸은 무너질 듯 지쳤지만 난 지금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있지 않은가.

목이 없는 대리석상. 훔쳐갔을지도 모르는 이들의 후손(?)들이 장난스럽게 사진을 찍고 있다.


 

망루에서 바라본 보드롬.

나비가 장자더냐 장자가 나비더냐그들이 하나더냐 그들이 둘이더냐꿈인 듯 생시인 듯 나 자신을 풍경 속에 비벼 넣고 있는데 귓전을 파고드는 소음이 있다. 누가 누굴 부르는 소리다. 설마 비루먹은 당나귀처럼 늘어져 있는 나를 부르는 건 아니겠지, 돌아볼 생각도 안 하는데 그놈의 “Excuse me, Excuse me”가 멈출 줄 모른다. 에라, 어떤 부자 될 놈이. 돌아보니 터키사람은 아니고 허여멀건 한 유럽인(이 틀림없는)이 금발의 여자와 함께 날 바라보며 “Excuse me”. 야 임마. 내가 널 언제 봤다고 용서(excuse)’ 해달란 거야. 그러잖아도 너희 유럽인종들만 보면 내 나라를 침탈했던 왜족들이 생각나서 속이 뒤집어지는데. 귀찮은데 그냥 서로 갈 길 가자. 이 친구가 내 구시렁거리는 말을 알아들을 턱이 있나. 당치도 않은 미소를 앞세워 한 발 더 다가선다. 보나마나 사진 한 장 찍어달라는 것이다. 이 친구들은 큰 카메라를 가진 사람이 사진을 찍으면 정종철(본인에겐 미안합니다)을 장동건으로 만들어 주는 줄 아는가보다. 가는 데마다 귀찮게 군다. 그래도 어쩌나. ! 하고 힘을 주며 일어서고 만다.

망루에서 바라본 바다.

망루에서 본 보드롬 시내.

카메라를 내게 넘긴 이 친구가 여자친구 손을 끌고 쫄래쫄래 가더니, 하필 햇볕이 등으로 쏟아지는 자리에 선다. 하긴 그쪽이 경치가 좋긴 하다. , 임마. 거기 서면 역광 땜에 사진 안 나와. 이쪽으로 서. 그나저나 역광이 영어로 뭐더라. 암튼, 너 거기서 찍으면 얼굴 시커멓게 나온다고. 짧은 말로 설명하는 성의 따위는 아랑곳없이 이 친구 “OK“를 연발한다. 네가 찍으면 잘 나올 테니 무조건 ”Try”해보란다. 트라이 좋아한다. , 무릎 아래만 찍어버릴라. 나도 늙어가나 보다. 심술이 느는 것이. 아무튼 오케이라니 찍을 수밖에. 제대로 안 나오는 건 제 팔자지. 셔터를 눌러주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난다. 안 듣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나 간 다음에 뭐라 건 알 바 아니다. 그렇게 성에서 내려오니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피곤이 전신을 휘감는다. 이제 누가 떠밀어도 그 자리에서 자빠질 뿐, 움직일 힘이 없다. 오뉴월에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한 늙은 개처럼 혓바닥을 빼어 문 채 벤치에 등을 의지한다. 일행들이 올 때까지 이러고 있는 수밖에. 에구구! 오늘은 팔자에 없는 세계사 공부만 실컷 하다 끝났다.

 

추천과 댓글 오늘도 그냥 지나치진 않으실 거지요?^^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