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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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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전기 남포'에 해당되는 글 1

  1. 2007.06.13 [사라져가는 것들12] 등잔4
2007. 6. 13. 13:39 사라져가는 것들

꼭 필요한 만큼만 밝혀주던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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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심지만 뽑아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그으름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타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결국은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들기름 콩기를 더 많이 넣지 않아서/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넘치면 나를 태우고/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욕심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내 마음의 등잔이여/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권/거뜬히 읽을 수 있는/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도종환의 '등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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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전기라는 존재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였다. 아이는 훗날 도시인으로 편입된 뒤에도 그 날의 충격을 영 떨쳐내지 못하고 살았다. 누군가 떨리는 손으로 스위치를 올렸을 때, 팟!!! 하고 눈을 찌를 듯 달려들던 불빛. 그건 쇠망치로 뒷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아니, 어쩌면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순간이었다. 전기를 만나기 전까지 밤, 즉 어둠은 딱지를 몰래 숨겨둔 뒷산의 작은 굴처럼 적당한 은밀함이 있었다. 그래서 땅거미가 물고 와 마당을 지나 토방, 마루를 거쳐 방으로 입장하는 밤은 새아씨의 뒷자태처럼 매일매일 설렘을 동반했다. 밤은 좀 너른 품으로 맞는 게 제격이었다. 어둠 속에서 방바닥을 기어다니는 '설렝이' 한 두 마리쯤은 받아들여 같은 잠자리를 쓸 줄 알아야 하고, 개복숭아에 들어있는 벌레쯤은 영양식으로 알고 그대로 삼켜야했다. 아이는 전기의 충격에서 깨어나자마자 그런 시절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것을 깨닫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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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불이란 게 그랬다. 아무리 심지를 돋궈도 어느 정도 이상의 빛을 내어주진 않았다. 그을음만 신경질적으로 뿜어낼 뿐이었다. 등잔이 특별히 인색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다. 과도함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걸 몸짓으로 가르쳤다. 인간에게는 어쩌면 그 정도의 빛이 삶을 영위하는데 적절한 것인지도 몰랐다. 인위적으로 내는 빛은 등잔불만큼이어야 밤하늘의 별도 제 빛으로 반짝이고, 달도 아름답게 빛나고, 반딧불도 소중해지는 것이었을 게다. 어쩌면 전기가 발명된 뒤로 인간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것, 그걸 꿈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하다. 어머니는 그 침침한(전깃불을 만나기 전까지는 침침함이라는 말을 잘 몰랐다.) 불빛 아래서 바느질을 했다. 어머니가 그 불빛 아래서 꿰맨 옷을 보면, 재봉틀로 바느질한 것처럼 한 땀 한 땀 간격이 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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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오줌이 마려워서 일어나 보면 어머니는 초저녁과 똑같은 자리에 앉아 미동도 없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돌이 되었다는' 옛날 이야기처럼, 어머니도 돌이 되어 굳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조심 불러보고는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꿈꿨냐? 오줌 누고 어여 자라" 한 마디를 남기고 또 바느질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바느질로 살아온 어머니는 훗날 고백했다. "전깃불이 들어온 뒤로는 당최 바늘이 헛먹어서 고생했지 않겠냐?" 아이도 아이의 형도 친구들도 등잔불빛 아래서 숙제를 하고 연도 만들고 딱지왕 용식이에게 복수전을 벌일 새 딱지도 접었다. 그래도 공책 안의 글자는 제법 반듯했고 연도 하늘을 펄펄 날았다. 그렇지만 아이는 '인간은 눈만으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기에는 너무 어렸다.

아이들이 밤에 자지 않고 오래 놀고있으면, 할머니는 걱정이 백태처럼 낀 목소리로 일렀다. "지름(기름=석유) 닳는다. 어여 불끄고 자라." 그 말은 "배 꺼진다. 어여 이불 속에 들어가 자라."라는 말과 가끔 교대됐지만 아이는 그 두 가지 말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등잔보다 조금 밝은 것은 남포등이었다. 밝기로야 촛불도 등잔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제사를 지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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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아니면 구경하기 힘들었다. 아이의 집에도 남포등이 하나 있었지만 그것 역시 아무 때나 켜지는 않았다. 늦게까지 마당에서 일을 할 때나, 아버지가 먼 길을 떠났을 때만 내걸었다. 아버지가 올 때가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으면, 할머니는 꼭꼭 숨겨두었던 병을 꺼내 남포에 석유를 담았다. 불을 켜고 처마 밑에 매달면서 주문인지 기원인지를 쉬지 않고 외웠다. 그래야 길 떠난 아들이 그 불빛을 보고, 자갈길에 넘어지지 않고 냇물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믿는 듯 했다.

전기가 안 들어가는 곳이 거의 없는 지금, 등잔을 보기란 쉽지 않다. 사냥꾼의 총에 넘어진 짐승처럼, 잘 박제된 등잔들이 박물관이나 카페의 장식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희미한 불빛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가슴속의 등잔은 성인이 된 아이에게 항상 말한다. "두 눈에 보이는 게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남포를 꺼내 닦던 할머니와, 할머니가 밝혀준 불빛으로 무사히 돌아오시던 아버지…. 할머니도 남포도 아버지도 세월 속으로 걸어들어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어떤 바람도 가슴속의 불빛까지 끌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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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하면서] 아직까지 등잔을 켜고 사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 자신의 정성이 부족한 까닭이겠지요.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은 분명히 있습니다. 등잔을 구하려고 벼룩시장을 뒤졌습니다. 등잔+등잔대 가격이 만만치 않더군요. 이제 물량이 거의 나오지 않는 까닭이겠지요. 가난한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비교적 싼 등잔만 샀습니다. 남포를 하나 사려했는데 등잔보다 훨씬 비쌌습니다. "미제라 비싸고…" 어쩌고 하는데, 아아! 그 당시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남포 하나 만들 기술도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잔과 남포를 찾아 좀 더 헤매겠습니다. 찾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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