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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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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간'에 해당되는 글 3

  1. 2010.08.23 [사라져가는 것들 145] 똥돼지5
  2. 2009.05.04 [사라져가는 것들 108] 똥장군15
  3. 2008.12.22 [사라져가는 것들 90] 뒷간13
2010. 8. 23. 08:57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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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을 땐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응칠아저씨가 둘도 없는 뻥쟁이라는 건 석 달 된 강아지까지 다 알고 있었거든요.
더구나 내용도 얼마나 구질구질 한지, 모두 밥 먹던 중에 입에 파리라도 들어간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요.
아저씨 말에 의하면, 제주도에 가면 돼지가 사람 똥을 먹고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특히 남자들은 조심해야 한다고, 입에 침을 튀겨가며 강조하는 거 있지요.
돼지란 놈이 떨어진 똥을 얌전히 주워 먹는 게 아니라, 학교 운동회 때 줄에 매달린 과자 따먹듯 점프를 해서 받아먹는다는 거지요.
문제는 돼지란 놈의 시력이 별로였는지, 남자의 거시기가 떨어지는 똥인 줄 알고 덥석 물어버린답니다.
그래서 거시기를 통째로 잃어버린 사람도 제법 된다고, 직접 본 것처럼 늘어놓는 겁니다.
그곳 사람들은 뒷간에 갈 때 돼지를 쫓을 수 있는 작대기를 필수적으로 지참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고요.
여자들도 안전한 건 아니랍니다.
섬사람들이야 작대기라도 들고 가지만, 뭍에서 구경 간 사람들은 뒷간에 돼지가 살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하겠지요.
볼 일을 보다 갑자기 나타나 꿀꿀거리는 시커먼 놈 때문에 아예 정신 줄 놓은 여자도 한 둘이 아니라고 또 입에 침을 튀기더라고요.
지도책에서나 제주도를 본 아이들이야, 그런 험한 곳에 갈 일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이냔 듯 한숨까지 포옥 쉬었지만, 사실 대부분 아이들은 그저 뻥 치는 거 하나 또 들었으려니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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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신기하지요.
훗날 들어 보니, 그 거짓말 같던 얘기가 상당 부분 사실이더라고요.
제주도에서는 뒷간을 통새 또는 통시라고 부른다지요?
그 통시는 돼지막인 돗통과 사람의 공간인 뒷간으로 구성됩니다.
돗통은 돼지의 공간만큼 돌로 담장을 두르고 그 위에 지붕을 덮어 주는 것입니다.
뒷간은 다른 쪽의 약간 높은 곳에 디딤돌 두 개를 놓고 사람이 앉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로 담장을 두릅니다.
비 가릴 지붕? 돼지에게는 있지만 사람은 없습니다.
비오는 날은 작대기 들고 우산 쓰고 가서 담배까지 한 대 피워 물려니 절차가 제법 복잡했겠지요.
그런 마당에 문짝인들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문짝도 없이 대충 만드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지요?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라, 볼일 보면서도 늘 경계를 하다가 적이 나타나면 후다닥 도망치기 위해서 그랬답니다.
또 볼일을 볼 땐 자주 헛기침을 해야 된답니다.
그래야 지나가던 사람이 적당히 외면해준다나요.
통시의 바닥은 마당보다 낮게 만들어 오수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와 같은 통시는 반드시 안거리 정지(부엌)와 반대쪽 큰 구들의 황벽 옆 또는 멀리 떨어진 밖거리 옆 울담에 덧붙여 만들었답니다.
제주도의 ‘남선비 설화’에 의하면 조황신과 측간신은 처첩 사이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부엌과  통시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고 믿었기 때문이라지요.
제주에서는 가장 무서운 동티를 측간 동티라 부르고, 측간의 돌멩이 하나라도 함부로 옮기지 못하게 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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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통시라고 해서 돼지를 똥만으로 키우는 것은 아닙니다.
돗통 한쪽에 먹이통을 놓아두고 거기에 음식물 찌꺼기 같은 걸 넣어주었습니다.
사실은 그게 주식인 셈이지요.
하지만 가족이 많은 집에서는 오로지 사람의 배설물로만 키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돼지란 녀석은 시력은 좀 떨어져도 후각과 청각은 무척 발달한 모양입니다.
오밤중에 조용히 볼 일을 보려고 살금살금 통시에 가도 어느 틈엔가 먹을 게 왔다는 걸 알아차리고 재빨리 달려 나온답니다.
그리고 제법 깔끔을 떨어서 몸에 오물이 묻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지요.
그래서 뭔가 묻은 느낌이 들면 정신없이 털어댑니다.
여기서 또 낭패를 보는 사람이 허다하게 등장하지요.
큰일을 보는 중에 배설물이 돼지 입으로 안착하지 못하고 몸에 떨어지면 인정사정없이 털어대는 겁니다.
그때 흘러가는 구름이나 감상하면서, 가만히 앉아있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오물을 뒤집어쓰지 않으려면 괴춤이고 뭐고 챙길 새 없이 후다닥 도망치는 게 장땡입니다.
통시 바닥에는 보리 짚이나 볏짚을 깔아줍니다.
돼지는 먹거나 잠잘 때를 빼고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분뇨를 배설하고 짚을 다집니다.
그렇게 돼지분뇨와 적당히 섞인 짚이 쌓이고 발효해서 질 좋은 거름이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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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긴 세월 자리 잡고 살던 재래돼지는 오래 전 만주지역에서 소형종이 들어온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들이 제주도까지 유입돼 토착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제주도에는 뱀이 많았는데, 뱀을 잡아먹는 돼지의 특성을 활용하기 위해서 집집마다 길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제주도의 토종돼지는 검은 색 털로 완전히 덮여있으며 얼굴이 좁고 주둥이가 길다고 합니다.
또 몸집이 작고 엉덩이와 배 부분이 좁지만 가슴은 상대적으로 넓은 편입니다.
다리는 짧고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종의 돼지보다 육질과 맛이 좋다는 것이고요.
보통 한꺼번에 5~8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새끼는 개량종들보다 성장이 느린 편입니다.
체질이 강건해서 전염병 등에 강하며 환경변화에도 잘 적응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번식력이 좋고 덩치가 큰 외국 개량종들이 대량 유입 되고, 또 토종돼지와 교잡되는 바람에 순수 혈통이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고 하지요.
지금은 제주도에도 순수한 토종 돼지는 없다고 합니다.
단지 그 혈통이 섞여있는 흑돼지가 남아 있을 뿐이지요.
물론 이 흑돼지들도 똥을 먹이는 게 아니라 보통 돼지처럼 사료를 줘 사육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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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돼지가 제주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뭍에도 인분을 돼지먹이로 삼은 곳이 꽤 있었다고 합니다.
지리산 깊은 산골에서는 최근까지도 똥돼지를 키웠다고 하지요.
하지만 노인들만 사는 그 골짜기에 돼지 먹을 인분인들 제대로 생산되려고요.
게다가 그런 식으로 돼지를 기를만한 뒷간이 어디 남아있나요.
제주도에서도 민속마을이나 가야 똥돼지의 잔재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느닷없이 거시기를 물리는 남자나 오밤중에 놀라자빠지는 여자를 볼 일은 없어진 셈이지요.
도시에서 가끔 길을 걷다보면 ‘제주도 똥돼지’라고 버젓이 달아놓은 간판을 봅니다.
‘제주 직송’이란 선전문구도 빠지지 않고요.
반가운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지만, 그야말로 과장광고일 뿐이지요.
하긴 찾아가 먹는 사람이라고 진짜 똥돼지인 줄 알고 먹겠습니까?
어느덧 전설이 되어버린 똥돼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옛날 구수한 입담을 자랑하던 응칠아저씨가 그리워지네요.
그 양반도 오래 전에 이 세상을 떠나셨지요.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가보지도 않은 제주도 이야기 한 자락 깔아놓으시려나….

posted by sagang
2009. 5. 4. 09:0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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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배아버지 석두씨의 별명은 ‘장군’이었다. 이마에 별이 번쩍번쩍 빛나는 장군이었으면 좋았으련만, 불행하게도 앞에 ‘똥’자가 붙은 별 볼일 없는 장군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 돌배는 늘 놀림거리가 되었다. “돌배아버지는 장군이래요~ 똥장군이래요~” 아이들은 그 노래를 입에 달고 다녔다. 놀림이 지나쳐 울음을 터뜨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돌배가 제 아버지에게 아이들의 횡포를 일러바쳤음직도 하건만 달라진 건 없었다. “그깟 녀석들이 뭐라고 하든 못 들은 척 해라.” 그 정도의 대답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워낙 희로애락을 내색하는데 인색하기도 했거니와 타인의 시선 따위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 그였다. 석두씨의 직업은 농부이자 ‘똥퍼’였다. 도시에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면서 "똥 퍼~!" 소리치던 사람들이 있었듯이 시골에도 똥장군이나 똥지게를 지고 남의 집 똥을 퍼주는 이가 있었다. 농촌이라고 해서 모두가 똥장군을 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동네에서는 석두씨가 그 일을 도맡아서 했다. 그래서 별명이 장군이 된 것이었다. “여보게, 석두. 우리 집 뒷간이 차버렸네.” 한마디만 하면 석두씨가 나타나 깔끔하게 비워주었다. 퍼달라고 시킨 사람 집 밭에 거름을 내게 되면 약간의 노임을 주면 되고, 그냥 가져가라고 하면 그걸로 계산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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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봄날 이른 아침, 지게에 똥장군을 얹고 밭으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분명 석두씨였다. 마을에는 석두씨가 이 밭 저 밭에 뿌린 인분냄새가 가장 먼저 봄을 알렸다. 농사철이 시작되면 그는 아침마다 똥장군을 지고 밭으로 갔다. 그가 놀아도 되지 않을 만큼 인분은 늘 생산되었다. 석두씨는 자신의 땅이 없었다. 농사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였지만, 농부에게 땅이 없다는 건 군인에게 총이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림으로 받은 가난이 지긋지긋해 소싯적에 도시로 나갔지만 결국 만신창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떠날 때와 달라진 건 아내와 젖먹이 하나가 뒤를 따라왔다는 것이었다. 한 끼의 밥이 급급한 사람에게 가족은 희망이 아니라 삶의 무게였다. 모처럼 찾아온 고향에서 그와 그의 식솔을 기다린 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처절한 현실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넋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도조(賭租)를 주기로 하고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시작했다. 석두씨는 하늘이 낸 농부였다. 척박한 땅에 씨를 뿌려도 기름진 땅보다 소출이 훨씬 많았다. 해가 갈수록 그에게 땅을 맡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워낙 부지런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결정적 배경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똥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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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분이야말로 농작물에게 가장 좋은 비료다. 사람이 땅이 낸 채소나 곡물을 먹으면 배설물로 나오고 그 배설물은 다시 흙을 살찌워 식물들의 영양소가 된다. 인분이 천연퇴비가 되고 이 퇴비로 키운 곡식이 밥상에 오름으로써 인간과 자연 사이에 끊임없는 순환이 이뤄지게 된다. 그게 원활하게 유지될 때 세상이 순리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농부들은 똥을 귀하게 여겼다. 지금이야 볼일을 보고 레버 한번 당기면 배설의 흔적까지 지워지지만, 전통적 뒷간은 똥을 모으고 발효시켜 거름으로 만드는 기능에 초점을 뒀다. 완전한 발효를 위해서 밭 근처에 구덩이를 파서 인분을 보관하기도 했다. 가끔 그 구덩이가 아이들에게는 함정이 되기도 했다. 똥을 퍼다 놓고 시간이 지나면 그럴듯한 거죽이 만들어지는데, 그게 단단해 보이기도 하거니와 색깔이 땅과 구분이 잘 안 될 때도 있다. 그래서 찬찬치 못한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어놀다가 얼떨결에 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 아무튼 석두씨가 뛰어난 농부가 될 수 있었던 건 이 인분관리를 잘 한 덕분이었다. 그는 온 동네를 뒤져 인분을 모으고, 그걸 적절하게 발효시켜서 가장 알맞은 때에 밭에 내었다. 그러니 작물들이 잘 자라지 않을 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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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진 인분을 퍼 나르는 도구가 바로 장군이었다. 똥지게라 부르는, 물지게처럼 생긴 도구를 많이 썼지만 냄새를 차단하고 좀 멀리 이동하기 위해서는 장군이 제격이었다. 장군에 오줌을 담으면 오줌장군, 똥을 담으면 똥장군이 됐다. 원래 장군은 분뇨를 운반하기 위해서만 쓰인 것은 아니었다. 술이나 물, 간장 등을 담거나 나를 때도 유용하게 쓰였다. 옹기처럼 주로 질그릇으로 구워서 만들었다. 한쪽 끝은 둥글게 처리하고 다른 끝은 평평하게 만들어 필요에 따라 세워둘 수 있도록 했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지름 30Cm, 길이 60Cm 정도가 보통이었다. 물론 그보다 큰 것도 많았다. 볼록하게 나온 배 쪽에 좁은 아가리가 있어서 그곳으로 내용물을 담았다. 다 담은 뒤에는 짚 등으로 아가리를 틀어막아 내용물이나 냄새의 유출을 막았다. 장군을 나무판자로 짜서 만들기도 했다. 나무장군은 배를 약간 부르게 만들어서 가운데에 아가리를 붙인다. 몸통에 얇게 쪼갠 대를 둘러서 고정시키고 아가리에는 단단한 나무를 깎아 박는다. 나무장군은 질그릇과 달리 쉽게 깨지지 않기 때문에 공사장 같은 곳에서 물을 나르는 데 많이 썼다. 그러나 쓰지 않을 때 나무쪽이 오그라들고 조각이 나기 때문에 불편한 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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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농가에는 어지간하면 똥장군이 하나씩 있었다. 부지런한 농부는 비료를 사지 않아도 인분이나 퇴비로 밭농사 정도는 훌륭하게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 땅 어디에 가도 똥장군을 등에 진 농부를 찾을 수 없다. 아니,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그랬다. 그리되기까지는 화학비료의 대량공급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냄새도 없고 언제든지 사서 간편하게 뿌릴 수 있는 비료가 쏟아져 나온 뒤로 애써 똥을 모으고 발효시키거나 퇴비를 만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더구나 급격한 산업화의 진행에 따른 탈농업화로 흙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배설물을 멀리하는 데만 골몰해왔다. 그러니 생명을 살찌우게 하는 원천인 똥이 귀해 보일 리 없었다. 잘 삭은 인분을 골고루 뿌리고 그 구수한 냄새와 함께 자라나는 작물을 바라보는 걸 낙으로 알았던 늙은 농부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들 눈에는 똥이 들어가지 않은 땅에서 나는 모든 작물이 도깨비가 만들어 낸 허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생태계 순환에서 벗어난 땅은 갈수록 척박해져 갔다. 그것은 일종의 재앙과도 같았다. 화학비료만으로 키운 채소와 곡물을 먹으면서 사는 사람들의 심성도 갈수록 강퍅해져갔기 때문이다.

평생을 똥장군과 함께 살았던 석두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 아버지가 싫어 일찌감치 도회지로 나갔던 석두씨의 외아들 돌배는, 새로 쓴 묘에 풀이 마르기도 전에 아버지가 평생 모아둔 땅을 남김없이 처분했다. 돌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뒤 그 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은 없었다. 주인 잃은 똥장군 하나가 외롭게 빈집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posted by sagang
2008. 12. 22. 18:31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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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오이냐! 내 새끼.
할머니, 가면 안 돼? 끝까지 거기 있어야 돼!
원, 녀석두, 걱정말래두 그러네.

한밤중에 뒷간 앞에서 벌어지던 풍경입니다.
뒷간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건 아이지만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할머니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형이나 동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다가 배가 살살 아프고 뒤가 묵지근해지면 처음엔 애써 참다가도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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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간으로 갈 수밖에 없지요.
오줌이야 급하면 요강을 쓰거나 마루 끝에 서서 토방에 내갈기기도 하지만 어디 큰 걸 볼 때야 그럴 수 있나요.
결국 머나먼 뒷간까지 가서 볼 일을 보려면 식구 중 하나를 깨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육친이라도 자다가 난데없이 찬바람 쏘이는 걸 좋아할 사람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가느니 마느니 하다가 결국 똥이 엉치 끝에 걸리면 그제야 누군가가 따라나서게 되는 것이지요.
뒷간에 전등이 걸린 시절이 아니었으니 도착하고 나서도 고난은 끝나지 않습니다.
달이라도 휘영청 밝은 날이라면 달빛에 의지하지만, 코앞의 손가락도 안 보이는 날이면 더듬더듬 찾아들어가야 합니다.
등불이나 촛불을 들고 가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때도 많거든요.
이럭저럭 옷을 내린 뒤 쪼그려 앉고 나면 밖에 사람이 서 있어도 왜 그리 무섭던지.
뒷간에 몽당 빗자루 귀신이 산다는 말도 생각나고, 손이 불쑥 나와 ‘파란종이 주랴, 빨간종이 주랴’ 한다는 이야기도 생각나고….
혹시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그냥 들어가기라도 할세라, 자꾸 자꾸 말을 시키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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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간은 요즘의 화장실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배설물을 처리하는 곳’이라는 목적은 똑같다고 해도 형태나 사용방법이 워낙 달라 동일시하기는 좀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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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라고도 많이 불렀지만 이젠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쓰지 않는 말이 되었습니다.
뒷간은 ‘뒤(똥)를 보는 집’ ‘뒤에 자리한 집’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뒷간과 사돈집은 멀수록 좋다’ 말이 있습니다.
뒷간은 가까우면 냄새가 나고 사돈집은 가까우면 말썽이 나기 쉬우므로 경계하라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먼 것도 정도가 있지, 어느 집은 한참을 가야 뒷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즉, 집 울타리 밖에 한뎃뒷간을 짓는 것이지요.
어지간한 시골집에서는 대부분 한뎃뒷간을 뒀습니다.
냄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또 위생상의 필요 때문에 그랬겠지만, 급할 때는 거기까지 가는 게 보통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행세께나 한다는 집에서는 뒷간을 이원화하기도 했지요.
여성 전용의 안뒷간과 남성 전용의 바깥 뒷간을 따로 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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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뒷간의 이름도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영 뜻을 알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정랑, 서각, 정방, 정낭, 청측, 청방, 변방, 청혼, 측간, 측실, 측청, 혼측, 혼헌, 통시, 회치실….
절에서는 근심을 푸는 곳, 혹은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해우소라 부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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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요.
부잣집이나 지체 있는 집에서는 뒷간도 그럴 듯하게 지었습니다.
벽돌을 쌓거나 목재를 써서 짓고, 겉에는 회칠을 하고 문도 짱짱하게 짜서 달았지요.
반대로 서민들의 뒷간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나무로 기둥 네 개를 대충 세우고 거적으로 얼기설기 둘러쳐 바람만 막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나무를 써서 짓는다고 지어도 찬바람이 제 맘대로 드나드는 건 마찬가지였고요.
더구나 문은 대충 얽어매기 때문에 바람결에 홀로 춤을 추거나 장단을 맞추기 일쑤였지요.
뒷간을 잿간이나 창고와 함께 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좌변기도 조금만 더러우면 구역질을 해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말만 들어도 기절할지 모르지만, 가장 재미(?) 있었던 건 두 발을 놓는 바닥이었지요.
커다란 독을 바닥에 묻고 널빤지 두 개를 가로질러 놓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장마철에는 물이 들어가 넘치기 일쑤고, 여름에 엉덩이 내놓고 앉아 있으려면 냄새와 쉬파리‧모기들의 무차별 공세 때문에 뒷간을 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습니다.
변비라도 걸려 오래 쪼그리고 앉아있으면 저려오는 다리와 옷에 배는 그 독한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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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통농경사회에서 이 뒷간이야말로 보물창고였습니다.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거름의 생산지가 바로 이 뒷간이었기 때문이지요.
즉, 뒷간은 거름공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놀러 나가는 아이들에게 이르곤 했지요.
“똥은 꼭 집에 와서 싸거라”
똥은 밥이었습니다.
똥이 거름이 되고 그 거름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를 먹고 살아가니 소중할 수밖에 없었지요.
오죽했으면 오밤중에 남의 집 뒷간을 뒤지는 ‘똥 도둑놈’도 있었겠습니까.
새벽녘, 미처 날이 밝기도 전에 똥장군을 지고 밭으로 나가는 농부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요.
지금은 유기농을 하는 극소수의 사람을 빼놓고는 똥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농사에 똥을 쓰고 싶어도 쓸 만 한 걸 구하기도 쉽지 않지요.
요즘은 시골에도 수세식 화장실이 많이 보급되고 정화조가 설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순회의 틀을 벗어난 땅도 자꾸 각박해진다고 합니다.
화학비료를 무더기로 주지 않고는 영 소출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 이유로 세상도 갈수록 각박해진다고 하면 억지일까요.
뒷간의 풍경마저 지독하게 그리울 때가 있는 걸 보면 아주 헛소리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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