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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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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프 궁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만난 카펫수선 아저씨. “훌리아! 톱카프 궁전에 가면 예니체리 나무라고 있다거든? 관계자에게 물어봐서라도 꼭 좀 찾아줘요.” 톱카프 궁전으로 가는 길에 훌리아에게 신신 당부했다. 그녀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떡인다. 하지만 성사 여부는 두고 봐야 한다. 훌리아와는 그새 제법 가까워져서 반은 내 개인 가이드가 돼버렸다. 역시 나는 사람 홀리는 데는 천부적인 재질이 있단 말이야. 오해하지 마시라. ‘여자’가 아닌 ‘사람’이라고 분명히 밝혔으니. 그녀도 예니체리는 알지만 예니체리 나무는 처음 들어본단다.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하면서 확인까지 한다. 하지만 역시 예니체리 나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다. 일단 들어가 보면 감이 잡히겠지. 톱카프 궁전 앞에는 오늘따라 이상스러울 만큼 관광객이 많다. 그래서인지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더욱 많아진 것 같다. 카펫 수선하는 아저씨가 근사해 보이길래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눈길 한 번 주더니 말없이 바느질만 한다. 터키 사람이라고 모두 상냥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다. 그래도 특별히 거절하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을 땐 그냥 찍으면 된다. 몇 마디 나눠볼까 하다가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고, 또 일행이 벌써 저만치 가 있길래 부리나케 쫓아간다. 현장에서는 혼자 다니는 걸 원칙으로 하지만 일단 매표소를 통과할 때까지는 함께 행동해야 한다. 톱카프 궁전 앞의 기념품 가게. 1472년 착공해서 1478년 준공. 1856년 돌마바흐체가 지어질 때까지 38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궁전으로 사용. 총 면적 70만m². 이런 이력을 가진 톱카프 궁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고 복잡하다. 아마 다섯 번 쯤은 와야 제대로 봤다고 큰소리 좀 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한 달쯤 머물면서 이 궁전만 연구해보리라 마음먹는다. 대문에 해당하는 커다란 문만 해도 세 개, 넓은 정원만 해도 네 곳이나 된다. 이것을 모두 한꺼번에 다 보려고 하면 체하고 말 건 당연지사. 그래도 일단은 들어가 봐야 곰을 잡든 법을 잡든 하겠지. 첫 번째 문(황제의 문)을 지나면 제1 정원이 나온다. 흔히 예니체리 정원 혹은 예니체리 마당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본거지에 들어왔으니 예니체리가 뭔지 설명하고 가야할 것 같다. 그렇다고 나하고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니다. 터키 역사서를 읽다가 그들의 시작과 끝이 유난히 가슴을 헤집었을 뿐이다. 약간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지만 긴장할 건 없다. 다 듣고 나면 아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테니까. ‘예니’는 ‘새로운’이라는 뜻이고 ‘체리’는 그 달콤한 이미지를 배신하고 ‘병사’란 뜻이 된다. 그러니까 ‘새로운 병사’가 바로 그들이다.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1세 때 만들어진 술탄 직할의 직업군인을 바로 예니체리라고 한다. 전쟁에서 대단한 용맹을 발휘해서 한 때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평상시에는 술탄의 친위대 역할을 하고 전시에는 정예군으로 싸웠다. 톱카프 궁전의 첫번 째 문. 예니체리의 시작과 끝은 영광보다는 슬픔의 역사다. 처음에는 전쟁 포로로 잡힌 아이들과 점령지 발칸반도의 그리스도교 가정 소년들로 주축을 이뤘다. 전쟁터에서 졸지에 부모와 헤어진 것도 하늘이 무너질 일인데, 낯선 땅으로 보내진 아이들. 그 슬픔과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전쟁을 일으키고 패한 것은 어른들이지 아이들이 아니거늘. 이렇게 이스탄불로 데려온 아이들은 이슬람교로 개종시킨 뒤 일반 가정으로 보내 투르크 말과 이슬람에 관한 일상을 배우게 했다. 그 후 재능 있는 아이들은 궁정 일을 배우게 하고 나머지는 '예니체리 훈련부대'로 보냈다. 그곳에서 환관들의 감독 아래 6년 이상 엄격한 훈련과 무기 다루는 기술을 가르쳤다. 훈련을 마치면 바로 부대에 배치된다. 부대는 몽골군과 비슷하게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편성됐다. 재미있는 것은 부대 용어가 주방과 관련돼 있다는 것. 부대원 하나하나는 숟가락(Kaşık)으로 불렀다. 부대장은 수프 요리사라는 뜻의 초르바즈(Çorbacı), 소대 깃발에는 커다란 솥이 그려져 있었다. '한 솥에 음식을 끓여 먹는 동지'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깃발에 그려진 솥은 큰 상징성을 갖게 된다. 예니체리는 술탄에게 불만이 있을 때마다 솥을 뒤집어엎었다. 거지들이 빈 냄비를 두드리며 각설이 타령을 부르듯, 뭔가 요구하는 도구로 솥을 활용한 셈이다. 그들은 특별한 군복을 입고 급여를 지급받았으며 다른 이슬람교도와는 달리 콧수염 외에 다른 수염을 기를 수 없었다. 또한 영외 거주는 물론 초기에는 결혼도 금지했다. 예니체리 정원. 예니체리는 전쟁터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오랜 기간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전투 능력도 탁월했고 사기 역시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서유럽에서는 '악마의 군단'이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제국 내에서도 정예병으로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예니체리의 기세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16세기. 숫자도 1만 5000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졌다. 여기까지였다. 뭐든지 문제는 잘 나갈 때 일어나기 마련. 영향력은 커지고 늘 나가 싸우는 것도 아니다 보니 자꾸 다른 곳에 정신을 팔게 됐다. 또 초기와 달리 세습체제로 바뀐 것도 권력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눈을 돌린 게 바로 정치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 그 괴물의 입에 통째로 머리를 넣었다가 신세를 망친 이들이 어디 한 둘인가. 그들은 무력을 이용해 재산을 쌓고 점차 이익집단화 돼갔다. 그에 비례해서 전투력은 약화됐다. 싸움판에서도 펑펑 나가떨어졌다. 배는 나오고 싸움은 못하는 일종의 괴물군대가 된 것이다. 그럴수록 무도함은 하늘을 찔러 술탄도 우습게보기 시작했다. 결국 17세기부터는 끄떡하면 반란을 일으켜 술탄을 살해하거나 자신들 입맛대로 갈아치웠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사람이 바로 마흐무트 2세. 참다못한 그는 예니체리를 뿌리 채 뽑아버리기로 했다. 1826년 술탄이 새로운 군대를 조직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예니체리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탕을 위한 함정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다. 반란을 유도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뻔한 결말로 갈 차례. 톱카프 궁전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해 6월 14일과 15일 예니체리 반란군은 술탄의 군대에 밀려 자신들의 막사로 후퇴했다. 하지만 끝내 항복을 거부했다. 술탄은 막사에 포격을 명령했다. 15문의 대포가 불을 뿜으면서 반란군 막사는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운 좋게 살아남은 자도 대부분 유배되거나 처형됐다. 한 때 천하를 호령하던 ‘무적의 군대’는 그렇게 사라졌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새삼스레 교훈을 들먹일 생각은 없다. 그저 그들을 상징하는 나무 한 그루를 찾고 싶을 뿐이다. 그때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시신(혹은 머리라고도 한다)을 어느 나무 아래 쌓아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나무를 예니체리 나무라고 불렀다. 그 기록을 읽으면서 그 나무를 꼭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잘못을 떠나, 아비규환 속에 눈도 못 감고 죽었을 그들에게 묵념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들의 영혼 중 하나가 내게 손짓이라도 한 것일까. 결국 예니체리 나무는 찾지 못했다. 정말 그런 나무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여기저기 알아보던 훌리아가 괜히 미안해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목 자르는 나무’가 있대요. 물 대신 피를 먹여 키웠다는데…. 혹시 그걸 말하는 게 아닐까요. 이따 보여드릴게요.” “아니야. 됐어요. 이젠 포기할래.” 호러물이 그리워서 예니체리 나무를 찾은 건 아니라네. 병사들이 훈련을 했을 법한 마당에는 잔디들이 파랗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세월을 듬뿍 머금은 나무들이 키를 자랑하고 있다. 저들 중 하나겠지. 예니체리 광장의 나무와 그 아래 잔디밭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이었던 아야 이레네.

 

사람들은 그 나무들 사이를 무심히 오간다. 잔디에 앉은 연인들의 얼굴엔 행복이라고 쓰여 있다. 저들에게 그 비극의 한 자락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어떤 방식이든 생명은 늘 오고가는 것을. 두 번째 문을 통과하려면 오른쪽에 있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야한다. 아참, 자꾸 붙잡아서 미안하지만 제1정원에서 놓치지 말고 가야 할 건물이 하나 있다. 왼쪽 나무그늘에 수줍은 듯 숨어있는 아야 이레네(Aya irene). 성소피아 성당 이전에 세워진 초창기 교회의 하나로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이었다.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는 ‘니카의 반란’ 때 불태워져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재건했다. 오스만 시대에는 예니체리의 무기창고로 쓰이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고깔모자 기둥이 2개 우뚝 서있는 두 번째 문을 지난다. 전에는 오로지 술탄만 말을 타고 이 문을 지났다고 한다. 하지만 권력도 영화도 덧없는 것. 지금은 땀에 전 동양 사내 하나가 배낭을 메고 그 문을 지난다. 문을 나서면 바로 제2정원. 다섯 갈래의 길이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져 있고 붓처럼 생긴 향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 제2정원에는 대형 부엌이 있다. 궁전에서 일하는 5,000명의 음식을 준비하던 곳이다. 예니체리들은 월급과 빵을 받을 때 궁전에 왔는데 이때 모든 빵은 무게가 같아야 했다. 만약 다를 경우 빵 만드는 사람의 손목을 댕강 잘랐다고 한다. 어디 괴기영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다. 예니체리와 관련된 얘기는 왜 이리 끔찍한 게 많지? 톱카프 궁전의 두 번째 문.  여기에도 ‘술탄의 여인들’이 사는 하렘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이번엔 하렘도 꼭 돌아보고 싶었지만 역시 여의치 않다. 별도로 티켓을 끊어서 관람해야한다. 티켓이 문제가 아니라 30분마다 그룹을 지어 입장해야 한다. 그만큼 별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훌리아를 찾아서 물어보니 일정에 하렘 관람계획은 없다고 한다. 허탈하다.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닐 때 가장 난감한 점이 이런 것이다. 조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포기하는 수밖에. 세 번째 문인 행복, 혹은 지복의 문을 지나 터덜터덜 제3정원으로 걸어들어간다. 오늘 관람객 정말 많다.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빽빽한 저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거대 유람선이 들어왔단다. 바다를 낀 도시니 크루즈로 오는 관광객도 많다. 하필 그들과 톱카프 궁전에서 만난 것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 같다. 여기가 바로 인종 전시장? 제3정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오른쪽에 있는 보석박물관. 내겐 쓰린 추억이 있는 곳이다. 지난해 왔을 때 사진을 찍으려다가 경비원에게 끌려나오다시피 물러났던 그곳. ‘스트로보를 쓰는 것도 아닌데 사진 좀 찍는다고 보석이 경기를 하냐?’ 어쩌고 꿍얼거린 기억이 있다. 거길 들어가기 위해 뙤약볕 아래 엄청나게 긴 줄이 이어져 있다. 보석에 대한 원초적 열망일까? 아니면 남들이 서니까 얼떨결에? 보물박물관 위쪽이 바로 의상 전시실이다. 옛날에는 목욕탕이었다고 한다. 역대 술탄의 옷들을 전시한 곳이다. 제2정원. 톱카프 궁전의 세 번째 문. 보석박물관 앞의 긴 줄.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옷과 비슷한 터키 전통의상이 전시돼 있다는 기 록이 생각나 슬그머니 방향을 바꾼다. 고구려와 터키인의 조상 돌궐 사이의 엄청난 비밀을 발견할지 알아? 마침 줄을 선 사람도 없고 한가한 편이다. 그렇다면 둘러보고 가자. 하지만 들어가서 첫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익숙하면서도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아니나 다를까. 보석박물관의 ‘그’와 똑같이 생긴 경비원이 눈에 불을 켜고 다가온다. 사진 찍으면 안 된다는 거지? 알았어, 알았어. 치사해서 안 찍고 만다. 그래도 한 장 찍은 건 안 지울 거지? 그대로 밖으로 나와서 나무그늘에 의지해 더위를 식힌다. 유난히 얼굴을 가린 아랍계 여성들이 많이 눈에 띈다. 히잡은 차라리 애교스러울 정도다. 아예 전신을 까만 통옷으로 덮은 여성들이 ‘Blackfish’처럼 정원을 유영한다. 심지어 한 여성은 까만 통가죽 옷을 입었다. 이 더운 여름에? 아주머니, 그러다 땀띠 나십니다. 평생 갇혀 살아야했던 하렘의 여인들이 오버랩 된다. 궁전에 갇혀 살든 검은 옷에 갇혀 살든 자유를 저당 잡힌 건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 종교 가 어떻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여성을 이야기할 뿐이다. 헌데 좀 이상하다. 요즘 터키 여인들은 시골이나 아주 신앙심이 깊은 무슬림을 빼놓고는 히잡도 잘 안 쓰는데. 이들은 어디서 온 거지? 그나저나 그녀들이 입은 게 대체 차도른지 부르카인지 알 수 없다. 역시 책으로 배운 지식의 한계다. 무슬림 여성들의 몸을 가리는 옷이 한 가지인 줄 아는 사람도 많겠지만 국가나 지역에 따라 다르다.  고구려 벽화의 옷과 비슷하다는 투르크족의 전통 의상. 우선 여성들이 밖에 나갈 때 머리에 쓰는 가리개를 히잡이라고 한다. 스카프나 두건과 비슷한데 얼굴과 가슴까지 가리는 것도 있고 머리에만 쓰고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있다. 정작 구분하기 어려운 건 머리에서 발목까지 가리는 망토 형 통옷이다. 페르시아 말에서 온 차도르(chador)는 이란 등의 시아파 여성들이 입는 검은색 옷을 말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입는 검은 망토는 아바야(abayah)라고 부르고 아라비아반도와 베두인족 일부 여성들이 입는 옷은 부르카(burqah)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뭐가 차도르고 뭐가 부르카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다. 또 옷의 형태까지 다른 건지 이름만 다른 건지도 잘 모르겠다. 재미있는 건 전에는 눈 주변에만 작은 구멍이 트여져 있거나 베일을 댔는데 요즘은 짙은 선글라스를 쓴다는 것이다. 그것 참 아이디어다. 멋도 내고 가리겠다는 목적도 달성하고. 어떤 여성은 DSLR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사진도 찍고 자기들끼리 수다도 떤다. 그래. 다를 게 무어람. 세상도 궁금하고 멋도 부리고 싶은 똑 같은 여성이겠지. 사진을 찍으려고 생각해보니 정면에서 셔터를 누르기가 민망하다. 결국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익명 속으로 가두는 수밖에. 일부러 역광을 안고 서서 뷰파인더 안에 그녀들을 불러낸다. 내 사진 속에서 그녀들은 검은 실루엣일 뿐이다.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일가족 중에 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내 앞에 멈춰 서더니 불쑥 묻는다. 톱카프 궁전의 제3정원. 

이슬람 고유 의상을 입고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여성.

 

“Where are you from? Japan? Core?” Japan 다음에 China? 라고 묻지 않은 것이 고마워서 얼른 Core라고 대답한다. 물론 나도 그냥 말 수는 없지. “그러는 너는 어디서 왔니?” “나? 제노바” 으음, 제노바. 굉장히 멀리서 왔네? 아니지? 난 지금 이스탄불에 있잖아. 그렇다면 내가 멀리서 온 거고 이 친구는 이웃에서 온 거지. 해외를 다니다 보면 가끔 그렇게 공간 개념을 분실할 때가 있다. 그런데 내 눈길을 잡아끄는 건 그의 아내다. 그녀는 부르카인지 챠도르인지로 전신을 완전 싸매고 있다. 예의 선글라스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내게 말을 건 남편이란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차림을 했고, 부인을 따라가는 아이들 셋 역시 평범한 옷차림이다. 어찌 보면 부조화의 극치다. 제노바에도 저렇게 교리를 철저히 지키는 무슬림이 살고 있나? 아니면 아랍의 무슬림이 제노바에 가서 임시 거주 중일까. 유럽인과 아랍인은 쉽게 구분이 가능한데 이 친구는 좀 헷갈린다. 궁금한 걸 푸는 건 나중문제고 이렇게 특이한 가족을 만났는데 그냥 말 수 있나. 얼른 사진 한 장 찍어두자. 또 다른 걸 참견하려는 사내를 불러세운다. “이 사람들 몽땅 네 가족이냐?” “응. 맞아.” “그럼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 “No!! 절대 안돼.”
나무그늘에서 쉬고 있는 무슬림 여성들. 뭐야, 장난하는 거야? 말이나 걸지 말지. 조금 전에는 실실 웃으며 간이라도 빼줄 듯하더니, 사진을 찍는다니까 그렇게 펄펄 뛰냐? 에라이! 치사한…. 헌데 아직도 저런 남자가 있구나. 이 더운 날 통옷을 입고 버티는 아내에게 애들 셋을 혼자 맡기다니. 남자는 슬리퍼 끌고 마실 나온 사람처럼 이 참견 저 참견 다하며 지나가는데 여자는 아이들에 짐까지… 구경이고 뭐고 집에 있는 게 낫겠다. 하긴 한국에도 저렇게 간 큰 남자들이 없지는 않더라. 남들 걱정 그만 하고, 좀 쉬었으니 다시 움직여봐야지. 카메라를 바투 쥐고 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지는 전장 속으로 돌진한다. 하나, 둘 셋…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수리 중인 교회는 저렇게 보호 지붕을 쓰고 있었다.

거의 무너진 교회를 보겠다고 참 많이들도 왔다.

원래는 이런 모습이었다는데...

퇴락한 교회


이젠 성 니콜라스 교회를 본격적으로 탐색할 차례. 교회는 산타클로스 동상이 있는 광장의 끄트머리에 있다. 손수레에 과일을 늘어놓고 파는 아주머니들 곁을 지나고 몇 그루의 야자나무를 지나니 교회로 들어가는 매표소가 나온다. 여기도 또 돈이군. 교회가 광장보다 낮은 곳에 있는데도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는 건 불가능하다. 수리를 위해서인지 보존을 위해서인지 철제 빔으로 기둥을 세우고 현대식 지붕을 씌워놓았기 때문이다. 원래 있었던 지붕은 상당 부분 유실된 것 같다. 언뜻 봐도 여기저기 퇴락한 흔적이 역력하다. 반쯤 붕괴됐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무너진 건지 쌓다 만 건지 돌무더기처럼 형태만 간신히 유지한 돌담도 눈에 띈다. 어느 한 시절 화려한 모습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을 성인의 교회도 세월은 이길 수 없었나보다. 아니, 그보다는 역사의 격랑, 이 땅의 주인들이 바뀌는 과정 속에서 버림을 받았던 건 아닐까. 산타클로스라는 이름 덕분일까. 쇠락한 건물과는 안 어울리게 관람객이 무척 많다. 보드롬 마우솔레움에서 만났던 그 황량했던 풍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교회 입구에도 성 니콜라스의 동상이 서 있다. 풍상을 이끼처럼 뒤집어쓰고 있지만 발등은 반질반질 빛이 난다. 교회를 찾는 신도들이 손을 대고 축원을 한 까닭이리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무엇을 축원할까.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

벽에 그려진 성화들.

손길에 닳아 반들거리는 발등을 보고 있자니, 아들 하나 점지해달라고 손금이 닳도록 빌던 우리네 할머니어머니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어느 동네 돌미륵은, 코를 갈아 마시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코가 다 닳아 없어지기도 했다지. 혹시 나도 그런 지극정성으로 태어난 건 아닐까? 성 니콜라스의 일생을 기록한 안내판을 지나서 입구로 들어선다.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줄을 서서 관람해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다 보니 벽에 그려진 니콜라스 성화들이 눈길을 잡는다. 색채가 퇴색한 것은 물론 군데군데 벗겨지기까지 해서 만만찮은 세월을 견뎌왔음을 말해준다. 성화를 보니 성인의 모습이 제대로 확인된다. 약간 대머리고 수염이 텁수룩한데다 홀쭉한 얼굴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산타클로스와는 조금도 닮은 곳이 없다. 사람들이 비교적 적은 회랑을 따라가다 마당으로 나선다. 그곳에서 보니 비로소 원래의 건물 형체가 그려진다. 퇴락하기 전에는 제법 크고 웅장했던 것 같다. 외부에서 볼 땐 2층 건물인데 문들은 모두 아치 형태로 돼 있다. 이 교회는 성 니콜라스가 사망한 뒤인 4세기에 건축됐다고 한다. 미라(Myra)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붙인 교회를 짓고 그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석관에 시신을 안치해 두었다. 교회는 6세기에 대지진으로 파괴됐다가 복원됐다. 십자군 전쟁 때에는 성 니콜라스의 시신에도 큰 시련이 닥쳤다.

좌측 마당에서 본 교회. 제법 규모가 크다.

관람객들.

도둑 맞은 유골


1087420일 미라에 온 십자군들은 니콜라스의 석관을 부수고 유골을 추린 뒤 이탈리아로 가져가 로마의 성당에 안장했다. 그 시절에는 성당을 새로 세우면 성인의 유물을 안치해야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남의 유골까지 훔쳐다 놓고 자랑스러워 할 건 뭐람. 군대 생활을 할 때 이웃 내무반에 관물을 훔치러 가야했던 황당한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새로운 성당에 성인의 유골을 모셨으니 자신들은 자랑스러웠을지 몰라도, 내 눈에는 그저 약탈이고 노략질일 뿐이다. 더구나 종교의 이름으로 성인의 시신을 훼손하다니. 그때 미처 가져가지 못한 유골은 수습해서 안탈리아 박물관에 보관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니콜라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지은 성 니콜라스 교회에, 본인의 유골은 없고 빈 석관만 남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2010년인가? 터키가 성 니콜라스의 유해를 돌려달라고 이탈리아에 요청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과연 돌려줬을까? 대답은 글쎄요. 엄연히 우리의 유산인 조선왕실 의궤 하나 찾아오는데도 그렇게 힘든데. 세상의 모든 약탈물은 모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남의 문화재를 훔쳐다가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자랑하는 것이야 말로 나는 도둑의 자손이요, 우리 조상은 약탈자다자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이들에게 뭐라고 가르칠 것인가. 에구, 괜스레 흥분했네. 또 움직여봐야지.

예배를 보던 제대공간.

제대공간의 원형 기둥들.

 다른 문을 통해 다시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홀이 나타난다. 예배를 보는 메인 홀, 즉 제대(祭臺)공간(교회에서는 의례공간이라고 하던가?)인 모양이다. 대부분의 교회나 성당이 그렇듯 밖에서는 2층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무척 높은 단층 구조다. 돔형식의 천장은 벽돌(?)로 촘촘하게 쌓았다. 잘 다듬어진 원형 기둥과 반들거리는 돌바닥이 조화롭게 어울린다. 교회구조나 용어가 궁금하기 짝이 없는데 물을 사람이 없다. 촬영팀이나 믿음 씨, 엄상욱 씨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찾을 엄두도 안 난다. 하긴 그들은 그들 일이 있으니 돌아가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제대(祭臺)로 올라가는 계단의 뒤에는 벽을 따라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공간이 뚫려있다. 잠깐 들여다보니 안은 캄캄하다. 거기를 한 바퀴 돌면서 참회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뤄진다나? 얼굴에 소망이라고 써 붙인 사람이 줄을 서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린다. 소원은 내가 노력해서 이루면 되지. 그래도 참회할 건 참 많은데. 나도 기다려볼까 하다가 조금 구차한 것 같아서 포기한다. 대신 측면 문을 통해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 가본다. 여기서는 또 무엇을 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고, 자기 순서가 온 사람들은 경건한 얼굴로 무언인가를 만지며 기도한다.

성 니콜라스 석관을 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대부분 러시아인이란다.

성 니콜라스의 시신을 모셨던 석관.

러시아인들이 우는 까닭은?


성 니콜라스의 유골이 들어있던 석관이란다. 어떤 사람은 그 석관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다 끝내 주르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대체 이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이길래 여기까지 와서 눈물을 흘리는 걸까. 생긴 걸로 봐서 터키인들은 아니다. 또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이 나라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와 기도할 리도 없거니와 기독교 성인의 석관 앞에서 눈물을 흘릴 일은 더욱 없을 것이다. 마침 믿음 씨를 만나 물어보니 러시아정교회 신도들이라고 한다. 무슨 사연으로 러시아에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기도를 할까. 나중에 확인한 뒤에야 그럴 만하다고 수긍이 간다. 러시아 사람들, 특히 러시아정교회 신도들은 이 교회를 자기들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 Eastern Orthodox Church)의 수장이라고 생각한다. 성 니콜라스 교회와 러시아와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기독교라는 뿌리에서 어떻게 동방정교회와 가톨릭이 분리됐는지부터 알아봐야한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관계나 지역적 분포, 교리의 차이 등을 모두 알려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나 같은 문외한으로서는 벅차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 골치 아픈 문제는 종교학자나 네이버 지식인에 맡기고 여행자는 아는 만큼 간략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서서 경건하게 기도하는 여인들이 많았다.

이 석판도 니콜라스의 유물이겠지.

로마의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교는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지금의 이스탄불, 즉 콘스탄티노플(당시 이름은 비잔티움)로 로마의 수도를 옮겼다. 이후 기독교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5대 관구로 발전했다가 1054년 로마관구가 떨어져 나가면서 정교회와 가톨릭으로 양분됐다. , 로마 주교를 위시한 서방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의 정교회가 분리된 것이다. 그런데 왜 러시아는 느닷없이 정교회의 밥상에 숟가락을 올려놓고 자신들이 수장이라고 떠드는 것일까. 게다가 이 궁벽한 곳에 있는 교회를 자신들 것이라고 생각할까. 러시아정교회가 동방정교회의 최대 교파인 것은 분명하다. 10세기 말에 키예프 공화국의 블라디미르가(Vladimir)가 기독교를 믿으면서 러시아에 전파됐고 15세기에 비잔틴 교회에서 독립했다. 그래도 이것만 가지고는 소유권을 주장하기 어려울 텐데, 뭘 믿고. 동로마(비잔티움)제국이 망한 뒤 러시아의 이반 3세는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 소피아 팔라이올로고스와 결혼하고 쌍두독수리 문장을 취하면서 자칭 황제가 된다. 그리고 자신을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자로, 러시아를 제3의 로마로 불렀다. 로마제국 황제의 마지막 혈족이 러시아로 갔기 때문에 동방정교회의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주장이다.

동상 아래의 만국기. 난 기어코 태극기를 찾고 말았다.

내게 그늘을 선물한 소나무.

나는야 국수주의자


그렇다면 성 니콜라스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17~18세기경 이 지역에 지진이 또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이 교회가 다시 무너졌는데 러시아 황제가 지어줬다고 한다. 그래서 애정을 지나서 소유의식까지 생긴 모양이다. 남의 땅에 보낸 자식을 보러가 듯, 무너지다시피 한 교회를 찾아가 성인의 석관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다. 아무튼 대단한 인연이다. 또 그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마음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엉덩이가 드러날 듯, 핫팬츠를 입고 온 젊은 여성도 성 니콜라스 석관 앞에서는 얇은 천이라도 두르고 예의를 표시한다. 경건한 마음이 되어 교회를 나와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그러다 성 니콜라스 동상 하단부의 만국기 틈에서 태극기를 찾아낸다. 곳곳이 벗겨지고 퇴색했지만 분명 우리의 국기다. 느닷없이 솟아오르는 애국심이란. 그 정도에서 만족하고 그냥 지나가도 좋으련만 무슨 억하심정인지 일본의 국기를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두어 바퀴 돌 때까지도 일장기는 보이지 않는다. 아싸!! 태극기는 있는데 일장기는 없다. 이 무슨 어린애 같은 심리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국수주의자라고 욕해도 좋다. 커다란 노송이 마련해준 그늘 아래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다큐팀이 다 모일 때까지 나는 여행이 선물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점심으로 먹은 닭꼬치와 감자튀김.

먹음직스런 피데.

시원한 바람을 벗 삼아, 예가 바로 무릉도원 아니더냐~ 아닌들 어떠하랴~ 혼자 신이 나 있는데 호주머니 속의 전화기가 부르르 떤다. 에구, 짜릿해라. 그런데 이게 어인 진동? 지인들은 거의 내가 터키 여행 중인 것을 알고 있고(통화료 들어가니 본인 사망이 아니면 전화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또 지금 서울은 오밤중인데 누가 전화를? 확인해 보니 문자가 와 있다. 터키 한국대사관에서 보낸 것이다. ‘동북 지역은 위험하니 가지 말고내가 이 나라에 있는 걸 어찌 알았지? 바보다. 자국 국민이 들어온 걸 모르면 그게 이상한거지. 동북지역은 쿠르드족이 사고 있는 곳이다. 테러라는 단어를 동반하는 쿠르드족에 대해서는 차차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들의 주거지역을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아무튼, 여기까지 와서 감시를? 하는 생각에 조금 심술이 나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고마운 일이다. 나라가 있으니 이만큼이라도 챙겨주지. 다큐팀과 합류한 뒤 뎀레(미라)와 작별한다. 오전 1130, 안탈리아를 향해 출발. 안탈리아는 안탈리아주의 주도(州都)이며 터키 내에서도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큰 도시다. 가는 길에 중간에 버스가 큰 길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더니 거기서 점심을 먹는다고 한다. 숲속에서의 점심이라. 이건 또 웬 떡이냐. 이끼를 온몸에 두른 거대한 나무들과 쏟아지는 물줄기, 그리고 자연 속에 깊이 묻힌 음식점. 아름다운 곳이다.

안탈리아 콘야비치. 끝이 없다.

콘야비치의 휴양객들. 차마 '벗은 여인들'은 찍을 수 없었다.

콘얄트비치의 나녀들

이런 곳에서 먹으면 없던 입맛도 생기는 법
. 오늘 점심 역시 피데다. 색다른 환경에서 느긋하게 즐기는 점심은 역시 행복하다. 식사를 마치고 안탈리아로 가는 길, 페티예에서 카쉬로 갈 때처럼 버스는 산을 깎아 만든 해안도로를 달린다. 1450분 드디어 안탈리아의 콘얄트(Konyaalt¡)비치 도착. 시내로 들어가기 전 외곽에서 만나는 엄청나게 긴 해수욕장이다. 10월로 접어들었는데도 여긴 여전히 한여름이다. 해변에는 파라솔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파라솔 안에는 둥지에 낳아놓은 알처럼 어김없이 사람이 눕거나 앉아있다. 그런데 다른 비치와는 조금 다른 게 있다. 여성들이 브래지어 정도는 거침없이 벗어던지고 햇살을 즐기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큰 도시라 조금 더 개방적인가? 대부분은 그냥 누워있거나 무엇을 먹고 있을 뿐 책 읽는 사람조차 없다. 휴가는 철저하게 휴가로 즐긴다는 것일까?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 나 같은 일 중독자에게는 굉장한 고통일 것 같다. 노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절감한다. 비치 탐방을 간단하게 마치고 시내까지 가는 트램(tram)을 타러 간다. 안탈리아는 터키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다. 인구는 100만 명 정도인데 1년에 찾아오는 관광객은 5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만큼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다는 것이겠지. 기대로 가슴이 설렌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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