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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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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정원에서 바라본 풍경. 건너편이 아시아 땅이다.

톱카프 궁전의 제4정원으로 가는 길은 문이 따로 없다. 보석박물관을 지나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느닷없이 시야가 탁 트인다. 오른 쪽으로는 마르마라 해협이 검푸른 색깔로 누워있고 앞으로는 아시아 땅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온다. 시선을 왼쪽으로 조금 돌리면 보스포루스 해협의 들머리가 보이고 좀 더 왼쪽에는 유럽 땅인 신시가지와 골든혼이 있다. 바다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바쁘게 또는 한가롭게 흘러 다닌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그림 같은 풍경이다. 나는 유리 안에 갇힌 억만금짜리 보석보다 이런 풍경 앞에서 훨씬 행복하다. 이곳이야말로 톱카프 풍경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원은 술탄과 그의 가족들만 드나들 수 있었다. 몰래 감춰두고 자신들만 야금야금 즐긴 비밀의 정원(secret garden)이었던 셈이다. 술탄들은 이곳에 아름다운 정자를 짓고 꽃밭을 가꿨다. 특히 아흐메트 3세 때는 튤립을 많이 심어서 튤립정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바람을 타기 시작한 튤립은 튤립시대’(1718~1730)라는 말을 낳을 정도로 열풍을 불러왔다. 튤립에 흠뻑 빠진 아흐메트 3세는 이 꽃을 즐길 수 있는 잔치를 자주 열었다. 톱카프 궁전과 정원에서는 밤낮으로 연회가 벌여졌다. 이스탄불 시내도 튤립 천지였다. 새봄의 첫 대보름에는 튤립축제가 열렸다. 술탄과 귀족들은 비단을 드리운 배를 타고 바다 위를 오가며 튤립의 정취를 즐겼다. 얼마나 낭만적인 풍경이었을까. 게다가 전쟁도 없는 태평성대였다. 하지만 그림자 없는 빛이 어디 있던가.

 

 

제4정원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신나게 놀았으니 나라 곳간이 비어가는 건 당연한 이치. 도끼 자루 썩는 줄 몰랐던 나무꾼처럼, 아차! 싶어 곳간 바닥을 긁어보지만 쌀 한 톨 나올 리 있나. 애먼 백성 허리만 더욱 구부러질 뿐이었다. 원성이 높아지자 참견꾼 예니체리(앞에서 다 배운 것들이다)가 가만있을 리 있나. 1730년 드디어 반란이 일어난다. 꽃과 사랑에 빠졌던 튤립술탄야흐메트 3세는 그렇게 권좌에서 물러나고 튤립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고 보면 꽃이든 사람이든 적당히 사랑하고 볼 일이다. 튤립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냐고? 설마! 우리는 튤립파동(Tulip mania)이라는 또 하나의 단어를 기억해야한다. 이야기는 무대를 네덜란드로 옮기면서 터키의 튤립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탄불에 와 있던 네덜란드 대사가 튤립을 가져간 게 화근이었다.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사재기가 난무할 정도로 튤립의 인기가 치솟았다. 튤립은 단기간에 번식이 어렵기 때문에 늘 품귀였고 가격은 그만큼 올라갔다. 그러다 보니 꽃이 피지 않았는데도 미래 어느 시점에 정해진 가격에 사고판다고 계약하는 선물거래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꽃은 꽃일 뿐. 16372월을 정점으로 튤립 가격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팔겠다는 사람은 넘치는데 사겠다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른바 거품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말 그대로 튤립 값은 X값이 됐고 파산자가 속출했다. 이 튤립파동은 네덜란드가 영국에게 경제대국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는 한 요인이 됐다고 한다. 꽃 하나가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아시아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나는 지금 그런 역사적 파동을 잉태한 현장에 서 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튤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진을 찍거나 난간에 기대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만 눈에 띌 뿐이다. 나 같으면 기념으로라도 튤립을 심겠다. 아픈 역사야말로 교훈의 어머니 아니던가. 바다 쪽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카페가 보인다. 관광객들이 파라솔 아래서 식사와 음료를 즐기고 있다. 언뜻 봐도 나 같은 가난뱅이 여행자가 앉을만한 곳은 아닌 것 같다. 술탄이 즐기던 비밀의 정원에서 파란 바다를 바라보며 즐기는 식사. 그것만으로도 폼 좀 나겠지. 물론 부자들 얘기다. 내려가서 구경이라도 할까 하다가 조금 구차할 것 같아서 포기한다. 대신 세월을 듬뿍 머금은 바다를 보면서 역사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시간을 오르내린다. 골든혼 쪽을 바라보다보니 느닷없이 역사의 한 자락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저쯤이 바로 배가 산으로 올라간 곳이겠구나. 배가 산으로 올라가다니, 느닷없이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정말 있었다. 이왕 역사의 현장에 왔으니 그 얘기를 좀 풀어놓고 가자. 그 일이 일어난 건 1453422일이었다. 그 즈음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초조함에 쫓기고 있었다. 비잔티움을 함락하기 위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헝가리 출신의 대포 제조기술자 우르반이 만든 거대한 대포로 연일 두드려 봤지만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잠깐, 이 우르반이란 인물이 누구던가. 콘스탄티노플에 대포를 팔러갔다가 반응이 시원치 않자 메흐메드 2세를 찾아와 거래를 성사시킨 사람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무기상들의 손에 달린 것인가.

 

가운데로 뻗어나간 바다가 보스포루스 해렵. 왼쪽 하얀 배가 진행하는 방향이 골든혼.

우르반이 만든 이 대포는 파괴력이 엄청났다. 하지만 조준이 정확하지 않았고 쏘고 나면 다시 장전하는데 오래 걸리기 때문에 하루에 7번밖에 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비잔티움의 군사들은 무너진 성벽을 보강했다. 시시포스 돌 굴리듯 결과 없는 반복의 연속이었다. 메흐메드 2세로서는 진퇴양난일 수밖에 없었다. 육지 쪽으로 돌아가자니 2, 3중 성벽이 걸리고 바닷길을 뚫자니 골든혼에 쳐놓은 쇠사슬이 문제였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게 바로 배를 끌고 산을 넘겠다는 기상천외한 발상. 술탄의 생각이었는지 부하 중에 그런 용감무식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는 사람이 더 많기 마련이니까. 술탄의 군대는 어둠을 틈 타 기름이 칠해진 둥근 통나무를 바닥에 깐 다음, 72척의 배를 밀고 산을 넘었다. 병사들은 죽을 노릇이었겠지만 보기에는 장관이었을 것 같다. 지금은 흔적이 모두 지워졌지만, 대략적으로 복기해보면 갈라타탑 동편의 톱하네에서 골든혼의 카슴파샤까지 배를 옮긴 것이다. 아침에 일어난 비잔티움 병사들은 기가 막힐 수밖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하룻밤 사이에 적의 배들이 코앞까지 들어오다니. 그렇다고 바로 콘스탄티노플이 바로 함락된 것은 아니다. 늙은 사자처럼 갈기가 부서지고 발톱은 빠졌어도, 비잔티움은 그리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나 더 지난 528일 밤, 드디어 메흐메트 2세는 16만 대군에게 총 공격 명령을 내렸다. 밤새 이어진 공방전 끝에 먼동이 틀 무렵이 되면서 콘스탄티노플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다를 보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노천카페.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다. 그날 밤을 새워 1200년 제국의 수도를 지킨 병사는 7,000여명에 불과했다. 1453529일 화요일. 로마의 적통을 이은 동로마, 즉 비잔티움 제국은 이렇게 마지막 숨결을 놓았다. 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마지막 황제의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11, 마침 동로마 제국을 일으킨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같은 이름이었다. 말을 꺼낸 김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흐메드 2세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고 가자. 그도 처음부터 잘 나가던 술탄은 아니었다. 아버지 무라드 2세가 갑작스레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바람에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술탄이 됐다. 하지만 열네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느닷없이 왕을 다시 하겠다며 아들을 내쫓았다. 그런 사람을 일러 우리 조상들은 변덕이 죽 끓듯 한다고 했다. 눈물 속에 세월을 보내던 그가 열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숨 쉴 틈도 없이 왕궁으로 말을 달려 왕관을 머리에 썼다. 아버지의 조기교육으로 권력의 비정한 생리를 일찌감치 터득한 그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도 빨리 깨달았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위대한 술탄을 꼽으라면 대부분 쉴레이만을 들지만 나는 메흐메드 2세를 앞세운다. 이 이슬람의 술탄에게 점수를 가장 후하게 주는 이유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점도 있지만, 이교도인 기독교의 유산을 파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문화와 예술이 밥 먹여주느냐는 수장이야말로 성군이 되기에는 애당초 글러먹었다고 보면 된다. 특히 성소피아 성당의 유물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건 순전히 메흐메드 2세 덕분이란 사실에 늘 감동할 수밖에 없다.

 

톱카프 궁전의 건물.

메흐메드 2세의 이야기가 길어지니 슬슬 지루하겠지만, 딱 한 가지만 더하고 가자. 게다가 이건 드라큘라 얘기다. ? 느닷없이 웬 납량특집? 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역사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연결고리가 있는 법이다. 드라큘은 또는 악마라는 뜻을 가진 루마니아 말이다. 1431~1476 사이에 살았던 드라큘라의 원래 이름은 블라드 체페슈다. 그는 루마니아 옛 왕국 중 하나인 왈라키아 공국의 계승자였다. 그의 이름이 드라큘라로 알려진 건 아버지 블라드 2세가 유럽 용의 기사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라큘라는 (드라큘)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는 메흐메트 2세와 인연이 많다. 소년시절을 인질로 오스만 제국에서 보낸 그는 왕위에서 추방됐다가 복위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친다. 두 번째 권력을 장악한 뒤 오스만제국에 대한 공납을 거부하자 메흐메드 2세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온다. 드라큘라는 게릴라전으로 여러 번 대군을 물리친다. 그는 1462년 동생에 의해 또 한 번 추방당했다가 1476년에 복위하지만 곧 오스만 군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다. 결론적으로 드라큘라는 외세에 치열하게 맞선 민족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악마가 됐을까. 이유는 이렇다. 그는 잔인한 처형 방법 때문에 많은 원성을 들었다. 특히 나무를 깎아 만든 날카롭고 긴 꼬챙이로 산 사람의 몸통을 꿰뚫는 것을 가장 즐겼다. 식사를 하면서 포로가 꼬챙이에 꿰어진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루마니아 말로 체페슈는 가시 또는 꼬챙이라는 뜻이다.

 

톱카프 궁전의 건물.

결국 드라큘라라는 이름과 피를 즐기던 괴벽이 합쳐져 Bram Stoker의 소설 드라큘라’(1897)의 모델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은 역사 얘기가 너무 길었나? 돗자리 말 듯 상념을 둘둘 말아들고 궁전을 나온다. 관람객은 여전히 정원 곳곳을 그득 채우고 있다. 그들이 타고 온 유람선은 오늘 밤 이스탄불에서 머무나 보다. 나오는 길에 오랜만에 만난 훌리아에게 궁금하던 걸 묻는다.

오늘은 저렇게 차도르 입은 사람들이 많지? 전부 터키 사람들이예요?”

아뇨. 터키 사람들은 저렇게 안 입어요. 두바이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일 거예요.”

그렇구나. 저들 역시 유람선의 승객인 모양이다. 복잡한 톱카프 궁전에서 나오니 세상이 전부 한가해 보인다. 걸음을 재촉해 그랜드 바자르로 향한다. 꼭 가보고 싶었지만 아직 인연이 안 닿았던 곳이다. 톱카프 궁전에서 그리 멀지 않다. 어지간한 명소는 걸어 다닐만한 거리에 모여 있다는 점도 이스탄불 관광의 장점이다. 먼저 그랜드 바자르 입구에 있는 개인 환전소에서 돈을 바꾼다. 대도시는 유로화가 통용되지만 지방에는 터키 리라가 필요한 곳이 많다. 환전은 유로화나 달러 모두 가능한데, 한꺼번에 100달러 이상이 돼야 바꿔준다고 한다. 별 이상한 원칙이 다 있네. 환전해주는 돈의 배분도 자기들 입맛대로다. 예를 들면 50리라 두 장, 5리라 몇 장주는 대로 받아야한다. 한국에서 환전을 해가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리라화를 바꿀만한 곳이 거의 없다. 아무튼 실탄도 장전했으니 장 구경을 해보자.

 

그랜드 바자르 입구.

바자르 안에는 이런 골목이 65개나 있다.

 

 

바자르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식량을 의미하는 아바와 장소를 의미하는 자르가 합쳐진 말이다. 그러니까 식량을 교환하던 곳이 바자르의 원조인 셈이다. 그랜드 바자르는 그랜드라는 단어답게 담과 문, 지붕을 완벽하게 갖춘 거대한 옥내(屋內)시장이다. 바자르 입구에서 고색창연한 문장(紋章)을 발견한다. 문장 안에 창이나 도끼도 있고 저울도 보이고복잡해 보이는 게 사연이 많을 것 같다. 그 밑에는 KAPALIÇARSI라고 쓰여 있고 또 옆으로 1461이라는 숫자가 있다. 맨 아래에서 드디어 GRAND BAZAAR라는 문구를 발견한다. 원래의 바자르 건물은 비잔티움 제국 때 세워졌는데 메흐메드 2세가 1461년에 확장했다고 한다. 1461이라는 숫자가 바로 그 해를 나타내는 것이다. 1701년과 1894, 1954년 등 네 차례나 큰 불이 났지만 시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3700m²의 면적에 65개의 골목과 4,000개의 점포가 들어선 거대한 시장으로 성장했다. 얼마나 미로처럼 복잡한지 골목 하나 삐끗 잘못 들어서면 국제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바자르 내에는 물건을 파는 가게뿐 아니라 식당과 카페 등 온갖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모두 27개의 문이 있는데 밤에 문을 잠그면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다. 바자르 입구에 들어서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진열된 상품도 가지각색이다. 그랜드 바자르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은 말할 것도 없고 카펫, 가죽제품, 수공예품, 각종 그릇, 동으로 만든 찻잔, 가죽의류, 모피류, 액자에 든 그림, 로쿰이라 부르는 터키 과자에구, 숨 차라. 차라리 없는 걸 찾는 게 낫지.

 

그랜드 바자르 안의 보석가게.

그랜드 바자르에서 파는 각종 그릇들.

가장 많은 건 역시 보석가게. 온갖 귀금속이 조명 아래 휘황찬란하게 빛난다. 크고 작은 금팔찌들을 수백 개 진열해놓은 가게 앞에서는, 보석에 별 관심이 없는 나까지 황홀해진다.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자랑거리가 카펫. 카펫의 발상지는 페르시아가 아닌 터키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유목민들이 이동식 천막을 칠 때 필수품이었다고 한다. 여성 동행자와 함께 보석가게 앞을 지나는데 주인이 한국말로 소리친다.

아주머니, 많이 싸요.”

아주머니? No! 아가씨!!”

내가 농담으로 받자 연신 아가씨? 아가씨?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갸웃한다. 이 아저씨, 결국 수정안을 내놓는다.

언니!! 많이 싸요.”

흐흐, 참말로. 웃어야겠지? 우리말이 튀어나오는 걸 거 보니 한국 사람도 많이 찾아오나 보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랜드 바자르야말로 외국인들에겐 필수 관광코스 중 하나다. 이곳은 흥정도 가능하다. 하긴 시장에서 흥정 빼놓으면 무슨 재미. 닳고 닳은 상인들에게 관광객쯤이야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겠지만, 어차피 깎을 걸 감안하고 부르는 값이니 밀당’(밀고 당긴다는 뜻을 모르는 분은 없지요?)의 재미를 즐겨볼만 하다. 시간과 노력에 따라 엄청 깎을 수도 있다는데, 나는 그 맛을 못 보고 말았다. 살 물건이 있어야지. 나 같은 여행자야말로 각 나라 시장의 입구마다 공적이라는 수배 전단이 붙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물건을 팔기보다는 카메라에 더 관심이 많았던 로쿰 가게 사장님(?)

한글로 쓰여진 '착한 가게'

이런 친구가 왜 안 나타나나 했다. 터키 전통과자인 로쿰 가게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는데 잘 생긴 청년 하나가 내 카메라에 시선을 들이민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물건 팔 생각을 분실한 지 오래다.

“Oh, canon! canon! My camera is Sony. Your camera is wonderful.”

처음에는 노래의 한 대목인 줄 알았다. 어찌나 운율이 잘 맞는지. 그래, 네 카메라 소니야. 그런데 내가 언제 물어봤어? 터키 청년들은 DSLR 카메라에 유난히 관심이 많다.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다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아마 일종의 유행이 아닐까. 돈을 벌어 사고 싶은 품목 1호가 카메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크로드의 종착지란 상징성에서라도 그랜드 바자르는 꼭 들르고 싶던 곳이었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나와 궁합이 척 들어맞는 곳은 아니다. 너무 규모가 크고 깔끔하다. 내가 좋아하는 시장은 말 그대로 난전이다. 시끌벅적 뒤죽박죽. 정이 강물처럼 흐르고 무질서 자체가 삶의 활력이 되는 곳. 터키에도 그런 시장이 많다. 서너 골목 탐색을 마친 뒤 밖으로 나온다. 바자르 밖의 좁은 골목이 더 재미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중에 반가운 글씨를 만난다. 나자르본주나 팔찌 같은 장신구 가게 진열대에 한글로 써놓은 착한 가게’. 장삿속이긴 하겠지만 기분이 좋다. 착한 가게 맞네요. 돈 많이 버세요. 오늘 저녁엔 이스탄불을 떠나 말라티아로 간다. 돌아오는 날 반가운 해후를 위해 마음 한 자락 놓고 가야겠지.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멀리서 본 페르게 고대도시의 아고라.

고대도시로 들어가는 길의 안내판들.

지금은 폐허가 되어

930일 금요일 0830, 호텔 체크아웃. 오늘은 안탈리아를 떠나 지중해의 마지막 목적지인 알라니아로 가는 날이다. 도중에 페르게 고대도시, 아스펜도스 원형극장, 아폴론신전 등을 들러야하기 때문에 역시 강행군이 예고돼 있다. 하지만 육체적 피로 따위에는 더 이상 쫄지 않기로 했다. 몸은 늘 엄살을 부리기 마련이다. 자꾸 걷고 움직이다보면 알아서 따라오게 돼 있다. 배의 기름기가 허벅지의 근육으로 둔갑하는 그날까지 가열 차게 걷고 또 걸을 일이다. 오늘 첫 번 째 목적지인 페르게는 팜필리아의 고대도시다. 지금은 폐허가 됐지만, 현장에 가 보면 거대했던 도시의 규모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크게 보면 원형극장과 스타디움의 어원이 된 스타디온(stadion), 그리고 주거 도시로 나뉘어 있다. 우선 주거지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맨 먼저 로마의 문을 만난다. 바로 서울의 남대문에 해당하는 문이다. 지금은 거대한 돌덩이들의 집합체에 불과하지만 도시가 번성했던 시절의 위용을 전해주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그 문을 지나자나마 눈에 들어오는 것이 헬레니즘 시대의 옛 성문(hellenistic door)과 두 개의 탑이다. 탑들은 반쯤 무너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수리를 하는 중인지 구조물로 가려져 있다. 이곳의 건축물들은 도시가 형성된 이후 계속해서 덧 지어진 것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비잔틴의 건축 양식들이 떡시루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무너진 성곽.

옛 성문.

여기서 고대도시 페르게에 대해서 조금만 공부를 하고 지나가자. 안탈리아에서 15km 정도 떨어진 평원에 위치한 페르게는 안탈리아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팜필리아의 수도였다. 전성기에는 인구가 12만 명이었다니 어느 정도 큰 도시였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멀지않은 곳에 악수강이 흐른다. 이곳에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바로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다. 그리스 신화에는 BC 1200년 경, 의사 모프소스와 예언자 칼카스가 여러 종족으로 이뤄진 무리를 에올리아 지방에서 이끌고 와 이곳에 도시를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BC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 페르게를 장악하고 인근 도시인 아스펜도스와 시데를 공략하는 교두보로 삼았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 페르가몬 왕국의 지배를 거쳐 로마의 영토로 편입 됐으며 BC 129년에는 속주가 된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도 독자적으로 은화를 주조했다는 것으로 봐서 상당한 자치권을 갖고 번영을 누린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페르게는 쇠퇴를 거듭한다.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 중기까지는 그럭저럭 중요한 도시로 남아 있었지만 페르시아와 아랍의 침략으로 수차례 초토화가 되는 참화를 겪는다. 결국 주민들은 페르게를 버리고 이웃도시인 안탈리아로 떠나기 시작했다. 1078년에 이 지역은 셀주크터키 제국에 편입되고 1392년에는 오스만 터키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두개의 탑. 하나는 수리중?

곳곳에 이런 조각들이 굴러다닌다.

바울과 마가의 애증

이 페르게에서 우리는 반가운 이의 자취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리스도교 최고의 전도자 사도 바울(바오로, Paulus). 서기 47, 바울은 첫 번째 전도여행 중에 이곳을 방문했다. 성서에는 페르게를 버가라고 표기한다. 정작 유명한 건 바울의 전도활동이 아니라, 바울과 훗날 마가복음을 쓴 마가(요한)의 복잡한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바울의 첫 번째 전도여행에는 동역자였던 바나바, 그리고 마가가 순종자로 동행하게 된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누이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이 마가는 철딱서니가 없는데다 무척 나약했던 것 같다. 문제는 타우르스 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산맥을 넘어야 목적지인 팜필리아(밤빌리아)로 갈 수 있는데 귀하신 도련님 마가가 해발 2,000m의 험준한 산맥을 보고 아 뜨거라, 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그는 말도 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버렸다. (사도행전 13:13) 바울의 머리에서 뜨거운 김이 솟아올랐을 것은 안 봐도 비디오. 마찰은 2차 전도여행 때에 또 한 번 일어났다. ‘배신자에 대해 화가 가라앉지 않았던 바울은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기면서까지 마가대신 실라를 데리고 떠났다. 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훗날 마가는 다시 바울을 따랐으며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정성껏 돌봤다고 한다. 그 과정에 이러저러한 사연이야 없을까만은 우리는 종교가 내포한 본질을 보면 된다. 용서, 그리고 사랑.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

아고라 외곽의 기둥들.

멀리서 본 목욕시설.

로마의 문을 지나면서 관람객에게는 두 장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중앙의 큰 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아고라(Agora), 왼쪽에는 목욕시설이 펼쳐져 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다가 눈치를 보니 관광객의 대부분이 목욕시설 쪽에 몰려 있다. 그렇다면 나는 아고라 먼저.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폴리스(polis)에 형성된 광장을 말한다. 아고라라는 말은 시장에 나오다’, ‘사다등의 의미를 지니는 아고라조(Agorazo)’에서 나왔다고 한다. , 아고라의 원래 의미는 시장인 셈이다. 하지만 시장의 기능 외에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일상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나 사람들의 모임을 뜻하게 됐다. 지금 나는 1500년도 넘는 아득한 옛날에 세워진 아고라 앞에 서 있다. 일렬로 선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이 장관이다. 4세기에 형성된 이곳 아고라는 한 변의 길이가 75m의 정사각형 구조다. 단순히 물물교환이 이뤄지던 시장이 아니라 경제 활동과 여론 형성의 중심지였음을 웅변해주는 유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외곽에는 월세로 점포를 얻어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포진하고 중심부에는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물건을 파는 프리마켓이 펼쳐졌다고 한다. 그리고 맨 가운데에는 상업의 신 헤르메스 신전이 자리하고 있다. 아름다움과 조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기둥을 따라 천천히 거닐다가 어느 순간 환상의 문으로 들어가, 로마의 한 시민이 된다.

잔해조차도 아름답다.

아고라 한 가운데 있는 상업의 신 헤르메스 신전.

로마가 망한 이유는?

조금만 더 깎아 달라니까요” “이게 웬 삶은 호박에 이빨도 안 들어갈 소리여흥정하는 촌부와 장사꾼. 엄마의 치마꼬리를 붙잡고 달뜬 표정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아이. 한 중년남자는 머리에 구멍 뚫린다는 쇠고기 수입이 웬 말이냐고 침을 튀기고, 또 다른 쪽에서는 머리 허연 노인 몇이 옹기종기 앉아 호민관 거시기란 놈이 뻘건 물이 들었느니 퍼런 물이 들었느니 열을 올린다. 지중해서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 이마를 스치면서 문득 환상에서 깨어난다. 아아, 모든 것이 부질없다. 말없는 돌덩어리들만 폐허 속에 묻힌 아득한 시절을 노래한다. 발길을 돌려서 목욕시설 쪽으로 간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하얀 대리석들. 번성하던 시대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는 것. 로마가 왜 망했을까? 라는 질문에는 수십, 수백까지의 가설과 이유가 나온다. 훈족의 이동, 윤리적 퇴폐, 지도층의 질적 저하, 수도관 납중독, 페스트의 창궐. 혹시 목욕탕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치와 퇴폐의 극치를 달린 목욕문화 때문에 로마는 망했다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목욕시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목욕을 하기 위한 시설들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찜질방 그 이상이라고 보면 된다. 탈의실은 물론 냉탕, 온탕, 미지근한 탕, 증기탕, 마사지실까지 갖췄다. 구들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물론, 수영장보다 훨씬 큰 공중목욕탕의 욕조가 그 흔적을 미처 지우지 못하고 있다. 수세식 화장실과 오수 배출시설도 보인다.

공중목욕탕.

목욕시설의 수로.

중앙도로의 가운데를 달리는 수로는 물이 철철 넘쳐흘렀으며 집집마다 물을 받아썼다고 한다. 그 아득한 옛날에 말이다. 화려함과 사치는 차치하고 우선 그런 시설을 만들고 유지한 기술력에 혀를 내두르고 만다. 벽마다 구멍이 뽕뽕 뚫려있다. 총탄이나 포탄자국은 아닌데 저게 뭘까, 믿음 씨에게 물어봤더니 대리석에 구멍을 뚫고 철판이나 납판을 붙였던 자리라고 한다. 그것 역시 화려한 도시에 일조를 했을 것이다. 훗날 폐허가 되면서 너도 나도 훔쳐다 엿을 바꿔 먹었기 때문에 지금은 흉한 구멍만 남아 있단다. 궁금한 건 또 있다. 어떻게 주춧돌에 거대한 대리석 기둥을 세울 수 있었을까. 기둥이 들어갈만한 구멍을 판 것도 아닌데. 그 궁금증도 믿음 씨가 풀어준다. 주춧돌 가운데에 작은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서부터 밖으로 조그만 길을 낸다고 한다. 기둥을 세운 뒤 그 홈으로 쇳물을 부어넣으면 쇠가 식어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직접 보면 금방 이해가 가는데 말로 설명하려니 쉽지 않다. 큰 기둥을 붙일 때는 구멍을 여러 개 뚫었다고 한다. 넋이라도 있고 없고 구경 삼매경에 빠졌는데, 뭔가 마음을 끌어당기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동양인 부부다. 이렇게 피가 끌리는 사람들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한국인이다. 인사를 나누고 얘기를 해보니 45일 동안 터키를 일주하는 중이란다. 우와! 45. 부러워라. 앙카라에서 출발해서 흑해를 거쳐 지중해로 내려와서 에페소 등 에게해 인근을 가쳐서 이스탄불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여기도 목욕시설.

이렇게 홈을 파고 길을 낸 뒤 쇳물을 부어서 주춧돌과 기둥을 접합시켰다.

한국인 부부를 만나다

대화는 주로 바깥 분과 나눌 수밖에 없다. 부인은 자외선차단제를 두껍게 바르고도 모자라 스카프로 얼굴을 칭칭 싸맨 채 그늘에 숨어있다. 구경이고 뭐고 화살처럼 햇살을 쏟아내는 태양에 수박만한 감자라도 먹이고 싶다는 표정이다. 이미 얼굴이 까맣게 타버려 흑백 구분이 안 되는 남편은, 아내가 그러건 말건 이곳저곳 다니며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몸 동작이 다람쥐처럼 날래다. 터키는 20년 전에 배낭여행을 와보고 두 번째란다. 나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다. 20년 전에 유럽도 아니고 터키를 돌아다녔을 정도라면 그야말로 배낭여행의 선구자 아닌가. 그럼 그렇지. 얘기를 나누다보니 세계 구석구석 안 다녀본 곳이 없단다. 내가 늘 꿈꾸는 여행전문가를 만난 것이다. 부인은 이번에 처음 따라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이럴 줄은 몰랐다고 말끝마다 입이 두어 발씩 길어진다. ‘이럴 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개도 집을 나서면 고생이거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여행 내내 과일만 먹었다고 하소연이다. 그나마 과일값이 싼 나라니 다행이지. 게다가 지적 호기심이 넘쳐나는 남편을 따라다니려니 지칠 수밖에. 그녀의 얼굴에 김치, 된장찌개, 갈비찜그리운 이름들이 둥둥 떠다닌다. “선생님은 점점 힘이 나는데 사모님은 갈수록 지치지요?” 물었더니 어쩌면 그렇게 잘 아느냐고 용한 점쟁이라도 만난 듯 반색을 한다. 내가 며칠 뒤 귀국한다니까 따라나서고 싶은 표정이 역력하다. 무엇보다 대중교통만 이용하려니 힘들어 죽을 지경이란다.

물을 데우던 구들이 아닐까?

벽에 있는 저 구멍들이 바로 철판이나 구리판을 붙였던 흔적.

터키 여행에서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은 주로 오토뷔스(Otobus)와 돌무쉬(Dolmush). 오토뷔스는 우리로 치면 시외버스 혹은 고속버스. 터키의 면적은 우리 남한의 대략 8배 정도가 되는데 철도망은 낙후돼 기차를 이용하기는 쉽지 않다. 고속도로나 국도변의 휴게소주유소와 연계돼있는 마피아들의 방해 때문이라는 말도 있는데 설마 하면서도 아니라고 할 근거도 없다. 대신 도로망은 잘 연결돼 있어서 어느 곳을 가더라도 큰 불편은 없다. 바로 그 길을 달리는 주인공이 오토뷔스인데 시스템이나 서비스가 무척 발달돼 있다. 운행편수가 많고 시간대도 다양하며 장거리는 밤에도 운행한다. 보통 남자차장 한 두 명이 차와 간식을 제공하며 일행이 아닐 경우 남녀를 따로 앉힌다. 장거리 요금은 정찰제로 돼 있지만 돈이 없다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깎아주기도 한다니 도전해볼 만하다. 오토뷔스를 타려면 오토가르라는 곳에 가야 하는데 바로 우리의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장거리 버스의 승차권을 빌렛(Bilet)이라고 하는데 오토가르의 버스회사나 시내 대리점에 가서 사면된다. 같은 구간을 운행하는 회사가 여러 곳이기 때문에 시간대가 다양하고 선택의 폭도 넓다. 요금은 버스회사마다 조금씩 다른데, 당연한 얘기지만 비쌀수록 시설과 서비스가 좋다. 물론 장거리 이동을 할 때는 조금 비싸더라도 좌석이 편한 버스를 택하는 게 좋다.

노섬에서 파는 액세서리들.

각종 장신구를 파는 소녀. 제법 장사를 잘한다.

로마황제와 마주 앉아서

오토뷔스에서 내려서 좀 더 작은 지역으로 갈 때는 돌무쉬를 타면 된다. ‘봉고정도의 미니버스다. 이 돌무쉬의 뜻이 '다 차면 간다'라니 말 그대로 출발하는 시간은 운전사 마음이다. 대신에 내리고 싶을 때는 아무 곳에서나 내려달라고 하면 된다. 그러니까 버스와 택시의 중간쯤 되는 존재? 직접 타본 건 아니지만, 차장이 없기 때문에 버스비를 앞사람에게 주면 앞사람이 자기 또 앞사람에게 전달해서 기사에게까지 간다고 한다. 잔돈이 없을 땐? 그냥 큰 돈 내면 된다. 기사가 거스름돈을 주면 뒤로 또 뒤로 전달해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간에 가로채는 사람은 없는지 조금 궁금하긴 하다. 터키의 시골에서는 교통수단 그 이상으로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이 돌무쉬다. 물건이나 편지를 전달해주는 역할도 한다고 한다. 아무튼 터키에서 대중교통으로 여행을 하려면 바로 이 두 가지 교통수단, 오토뷔스와 돌무쉬를 잘 이용해야 한다. 다음에 이 땅에 오면 꼭 경험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마침 45일이나 그런 식으로 여행하는 부부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부인은 자신을 그렇게 끌고 다니는 남편이 미운 모양이다. 남편을 보는 눈에 검은자위보다 흰자위가 더 많다. 그러건 말건 남편의 얼굴은 여행의 희열이 넘쳐흐른다. 역시 여행 체질은 따로 있는 법. 여행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능력이 부럽다고 했더니 먹을 것까지 아끼면서 알뜰하게 다닌다고 대답한다. 그래, 돈 보다 의지가 중요하지. 가장 부러운 건 건강과 시간이다.

아크로폴리스. 역시 폐허다.

스타디온이라 불렀던 원형경기장. 마차경기와 검투가 벌어졌다.

스타디온에 흩어져 있는 돌들.

길의 끝에서 아크로폴리스(그리스 도시국가의 중심에 있는 언덕)를 만난다. 이 곳 역시 폐허가 된지 오래. 잡초만 무성하다. 페르게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폐허 속에도 아름다움은 있다. 함께 왔던 일행은 지금 어디쯤 있는지. 폐허의 영향일까. 조금은 쓸쓸한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온다.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던 노점상들이 길게 진을 치고 있다. 조금은 조악해 보이는 액세서리나 머플러 등을 판다. 노점을 펼쳐놓은 소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엊그제 안탈리아의 마리나항구시장에서 만난 소년이 다시 생각난다. 하지만 이 소녀는 그 소년보다 훨씬 씩씩하다. 수완이 좋은지 물건도 제법 잘 판다. 먼 발치에서, 아프지 않을 정도의 가난이 온몸에 미농지처럼 배어 있는 소녀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혼자 터벅터벅 스타디온으로 간다. 구르는 돌마다 새겨진 조각들이 자꾸 발걸음을 붙잡고 늘어진다. 뭐 하나 예술품 아닌 게 없다. 길이 234m에 폭 34m인 이 경기장은 마차경기와 검투사들의 결투가 주로 이뤄진 곳이라고 한다. 12000명 정도를 수용했다니 대단히 큰 경기장이다. 객석은 지금도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갖추고 있어서 소아시아에서 가장 잘 보존된 스타디온으로 꼽힌다. 객석 아래에는 30개의 아치가 받치고 있다. 아치 안을 들여다보니 하나하나 독립된 공간으로 돼 있다. 도대체 이 아치는 왜 필요했을까. 나중에 물어보니 세 개마다 하나씩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스타디온을 드나드는 출입구로 쓰였고 나머지 스무 개는 물건을 파는 가게였다고 한다.

스타디온의 아치들. 뒤가 트여 있는 것은 출입구, 막힌 것은 가게들이었다.

가게로 쓰이던 아치의 내부모습.

원형극장. 발굴이 덜 돼서 출입금지란다.

경기도 보고 쇼핑도 하고 술도 마시고 다목적 경기장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그렇게 즐길 때 글래디에이터(gladiator)라 불리던 검투사들은 삶과 죽음 사이를 수없이 오갔겠지. 설령 이긴다 해도 살육에 불과한, 그런 의미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어야했던 검투사들. 튀어 오르는 피를 보며 환호성을 질러댔을 로마시민들. 인간은 애당초 잔인하게 태어난 동물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역시 카메라가 부서질까봐 두 손을 번쩍 든 우스운 꼴. 돌무더기 위로 넘어졌으니 등뼈가 부러져도 할 말이 없을 뻔 했다. 평소에 착하게 살았기 망정이지. 원형극장에 가봤지만 발굴이 덜 돼서 입장 불허란다. 울타리 밖에서 까치발 몇 번 하다가 포기하고 돌아온다. 이곳은 어디를 파건 유물이 쏟아진다고 한다. 이 스타디온도 발굴이 덜 돼서 어디가 정문인지 아직 확인이 안됐단다. 로마인들이 마차경기와 검투사들의 혈투에 열광하던 스탠드에 앉아 지중해의 바람을 만끽한다. 돌은 무너지고 깨어졌지만 바람은 여전히 그때 그 바람이겠지. 검투사의 피에 흥분하는 로마의 귀족이 돼보기도 하고 칼 하나에 목숨을 맡긴 검투사가 돼 보기도 한다. 그 두 계급 사이를 흐르던 강은 그 얼마나 멀었던 걸까. 두두두두~ 말이 달리고 와와와~ 함성이 들린다. 좋은 세상이다. 동양의 끄트머리, 반도에 사는 한 사내가 지금 로마황제와 마주앉아 있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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