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수리 중인 교회는 저렇게 보호 지붕을 쓰고 있었다.

거의 무너진 교회를 보겠다고 참 많이들도 왔다.

원래는 이런 모습이었다는데...

퇴락한 교회


이젠 성 니콜라스 교회를 본격적으로 탐색할 차례. 교회는 산타클로스 동상이 있는 광장의 끄트머리에 있다. 손수레에 과일을 늘어놓고 파는 아주머니들 곁을 지나고 몇 그루의 야자나무를 지나니 교회로 들어가는 매표소가 나온다. 여기도 또 돈이군. 교회가 광장보다 낮은 곳에 있는데도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는 건 불가능하다. 수리를 위해서인지 보존을 위해서인지 철제 빔으로 기둥을 세우고 현대식 지붕을 씌워놓았기 때문이다. 원래 있었던 지붕은 상당 부분 유실된 것 같다. 언뜻 봐도 여기저기 퇴락한 흔적이 역력하다. 반쯤 붕괴됐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무너진 건지 쌓다 만 건지 돌무더기처럼 형태만 간신히 유지한 돌담도 눈에 띈다. 어느 한 시절 화려한 모습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을 성인의 교회도 세월은 이길 수 없었나보다. 아니, 그보다는 역사의 격랑, 이 땅의 주인들이 바뀌는 과정 속에서 버림을 받았던 건 아닐까. 산타클로스라는 이름 덕분일까. 쇠락한 건물과는 안 어울리게 관람객이 무척 많다. 보드롬 마우솔레움에서 만났던 그 황량했던 풍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교회 입구에도 성 니콜라스의 동상이 서 있다. 풍상을 이끼처럼 뒤집어쓰고 있지만 발등은 반질반질 빛이 난다. 교회를 찾는 신도들이 손을 대고 축원을 한 까닭이리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무엇을 축원할까.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

벽에 그려진 성화들.

손길에 닳아 반들거리는 발등을 보고 있자니, 아들 하나 점지해달라고 손금이 닳도록 빌던 우리네 할머니어머니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어느 동네 돌미륵은, 코를 갈아 마시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코가 다 닳아 없어지기도 했다지. 혹시 나도 그런 지극정성으로 태어난 건 아닐까? 성 니콜라스의 일생을 기록한 안내판을 지나서 입구로 들어선다.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줄을 서서 관람해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다 보니 벽에 그려진 니콜라스 성화들이 눈길을 잡는다. 색채가 퇴색한 것은 물론 군데군데 벗겨지기까지 해서 만만찮은 세월을 견뎌왔음을 말해준다. 성화를 보니 성인의 모습이 제대로 확인된다. 약간 대머리고 수염이 텁수룩한데다 홀쭉한 얼굴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산타클로스와는 조금도 닮은 곳이 없다. 사람들이 비교적 적은 회랑을 따라가다 마당으로 나선다. 그곳에서 보니 비로소 원래의 건물 형체가 그려진다. 퇴락하기 전에는 제법 크고 웅장했던 것 같다. 외부에서 볼 땐 2층 건물인데 문들은 모두 아치 형태로 돼 있다. 이 교회는 성 니콜라스가 사망한 뒤인 4세기에 건축됐다고 한다. 미라(Myra)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붙인 교회를 짓고 그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석관에 시신을 안치해 두었다. 교회는 6세기에 대지진으로 파괴됐다가 복원됐다. 십자군 전쟁 때에는 성 니콜라스의 시신에도 큰 시련이 닥쳤다.

좌측 마당에서 본 교회. 제법 규모가 크다.

관람객들.

도둑 맞은 유골


1087420일 미라에 온 십자군들은 니콜라스의 석관을 부수고 유골을 추린 뒤 이탈리아로 가져가 로마의 성당에 안장했다. 그 시절에는 성당을 새로 세우면 성인의 유물을 안치해야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남의 유골까지 훔쳐다 놓고 자랑스러워 할 건 뭐람. 군대 생활을 할 때 이웃 내무반에 관물을 훔치러 가야했던 황당한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새로운 성당에 성인의 유골을 모셨으니 자신들은 자랑스러웠을지 몰라도, 내 눈에는 그저 약탈이고 노략질일 뿐이다. 더구나 종교의 이름으로 성인의 시신을 훼손하다니. 그때 미처 가져가지 못한 유골은 수습해서 안탈리아 박물관에 보관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니콜라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지은 성 니콜라스 교회에, 본인의 유골은 없고 빈 석관만 남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2010년인가? 터키가 성 니콜라스의 유해를 돌려달라고 이탈리아에 요청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과연 돌려줬을까? 대답은 글쎄요. 엄연히 우리의 유산인 조선왕실 의궤 하나 찾아오는데도 그렇게 힘든데. 세상의 모든 약탈물은 모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남의 문화재를 훔쳐다가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자랑하는 것이야 말로 나는 도둑의 자손이요, 우리 조상은 약탈자다자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이들에게 뭐라고 가르칠 것인가. 에구, 괜스레 흥분했네. 또 움직여봐야지.

예배를 보던 제대공간.

제대공간의 원형 기둥들.

 다른 문을 통해 다시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홀이 나타난다. 예배를 보는 메인 홀, 즉 제대(祭臺)공간(교회에서는 의례공간이라고 하던가?)인 모양이다. 대부분의 교회나 성당이 그렇듯 밖에서는 2층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무척 높은 단층 구조다. 돔형식의 천장은 벽돌(?)로 촘촘하게 쌓았다. 잘 다듬어진 원형 기둥과 반들거리는 돌바닥이 조화롭게 어울린다. 교회구조나 용어가 궁금하기 짝이 없는데 물을 사람이 없다. 촬영팀이나 믿음 씨, 엄상욱 씨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찾을 엄두도 안 난다. 하긴 그들은 그들 일이 있으니 돌아가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제대(祭臺)로 올라가는 계단의 뒤에는 벽을 따라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공간이 뚫려있다. 잠깐 들여다보니 안은 캄캄하다. 거기를 한 바퀴 돌면서 참회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뤄진다나? 얼굴에 소망이라고 써 붙인 사람이 줄을 서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린다. 소원은 내가 노력해서 이루면 되지. 그래도 참회할 건 참 많은데. 나도 기다려볼까 하다가 조금 구차한 것 같아서 포기한다. 대신 측면 문을 통해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 가본다. 여기서는 또 무엇을 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고, 자기 순서가 온 사람들은 경건한 얼굴로 무언인가를 만지며 기도한다.

성 니콜라스 석관을 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대부분 러시아인이란다.

성 니콜라스의 시신을 모셨던 석관.

러시아인들이 우는 까닭은?


성 니콜라스의 유골이 들어있던 석관이란다. 어떤 사람은 그 석관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다 끝내 주르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대체 이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이길래 여기까지 와서 눈물을 흘리는 걸까. 생긴 걸로 봐서 터키인들은 아니다. 또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이 나라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와 기도할 리도 없거니와 기독교 성인의 석관 앞에서 눈물을 흘릴 일은 더욱 없을 것이다. 마침 믿음 씨를 만나 물어보니 러시아정교회 신도들이라고 한다. 무슨 사연으로 러시아에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기도를 할까. 나중에 확인한 뒤에야 그럴 만하다고 수긍이 간다. 러시아 사람들, 특히 러시아정교회 신도들은 이 교회를 자기들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 Eastern Orthodox Church)의 수장이라고 생각한다. 성 니콜라스 교회와 러시아와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기독교라는 뿌리에서 어떻게 동방정교회와 가톨릭이 분리됐는지부터 알아봐야한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관계나 지역적 분포, 교리의 차이 등을 모두 알려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나 같은 문외한으로서는 벅차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 골치 아픈 문제는 종교학자나 네이버 지식인에 맡기고 여행자는 아는 만큼 간략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서서 경건하게 기도하는 여인들이 많았다.

이 석판도 니콜라스의 유물이겠지.

로마의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교는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지금의 이스탄불, 즉 콘스탄티노플(당시 이름은 비잔티움)로 로마의 수도를 옮겼다. 이후 기독교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5대 관구로 발전했다가 1054년 로마관구가 떨어져 나가면서 정교회와 가톨릭으로 양분됐다. , 로마 주교를 위시한 서방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의 정교회가 분리된 것이다. 그런데 왜 러시아는 느닷없이 정교회의 밥상에 숟가락을 올려놓고 자신들이 수장이라고 떠드는 것일까. 게다가 이 궁벽한 곳에 있는 교회를 자신들 것이라고 생각할까. 러시아정교회가 동방정교회의 최대 교파인 것은 분명하다. 10세기 말에 키예프 공화국의 블라디미르가(Vladimir)가 기독교를 믿으면서 러시아에 전파됐고 15세기에 비잔틴 교회에서 독립했다. 그래도 이것만 가지고는 소유권을 주장하기 어려울 텐데, 뭘 믿고. 동로마(비잔티움)제국이 망한 뒤 러시아의 이반 3세는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 소피아 팔라이올로고스와 결혼하고 쌍두독수리 문장을 취하면서 자칭 황제가 된다. 그리고 자신을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자로, 러시아를 제3의 로마로 불렀다. 로마제국 황제의 마지막 혈족이 러시아로 갔기 때문에 동방정교회의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주장이다.

동상 아래의 만국기. 난 기어코 태극기를 찾고 말았다.

내게 그늘을 선물한 소나무.

나는야 국수주의자


그렇다면 성 니콜라스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17~18세기경 이 지역에 지진이 또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이 교회가 다시 무너졌는데 러시아 황제가 지어줬다고 한다. 그래서 애정을 지나서 소유의식까지 생긴 모양이다. 남의 땅에 보낸 자식을 보러가 듯, 무너지다시피 한 교회를 찾아가 성인의 석관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다. 아무튼 대단한 인연이다. 또 그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마음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엉덩이가 드러날 듯, 핫팬츠를 입고 온 젊은 여성도 성 니콜라스 석관 앞에서는 얇은 천이라도 두르고 예의를 표시한다. 경건한 마음이 되어 교회를 나와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그러다 성 니콜라스 동상 하단부의 만국기 틈에서 태극기를 찾아낸다. 곳곳이 벗겨지고 퇴색했지만 분명 우리의 국기다. 느닷없이 솟아오르는 애국심이란. 그 정도에서 만족하고 그냥 지나가도 좋으련만 무슨 억하심정인지 일본의 국기를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두어 바퀴 돌 때까지도 일장기는 보이지 않는다. 아싸!! 태극기는 있는데 일장기는 없다. 이 무슨 어린애 같은 심리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국수주의자라고 욕해도 좋다. 커다란 노송이 마련해준 그늘 아래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다큐팀이 다 모일 때까지 나는 여행이 선물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점심으로 먹은 닭꼬치와 감자튀김.

먹음직스런 피데.

시원한 바람을 벗 삼아, 예가 바로 무릉도원 아니더냐~ 아닌들 어떠하랴~ 혼자 신이 나 있는데 호주머니 속의 전화기가 부르르 떤다. 에구, 짜릿해라. 그런데 이게 어인 진동? 지인들은 거의 내가 터키 여행 중인 것을 알고 있고(통화료 들어가니 본인 사망이 아니면 전화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또 지금 서울은 오밤중인데 누가 전화를? 확인해 보니 문자가 와 있다. 터키 한국대사관에서 보낸 것이다. ‘동북 지역은 위험하니 가지 말고내가 이 나라에 있는 걸 어찌 알았지? 바보다. 자국 국민이 들어온 걸 모르면 그게 이상한거지. 동북지역은 쿠르드족이 사고 있는 곳이다. 테러라는 단어를 동반하는 쿠르드족에 대해서는 차차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들의 주거지역을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아무튼, 여기까지 와서 감시를? 하는 생각에 조금 심술이 나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고마운 일이다. 나라가 있으니 이만큼이라도 챙겨주지. 다큐팀과 합류한 뒤 뎀레(미라)와 작별한다. 오전 1130, 안탈리아를 향해 출발. 안탈리아는 안탈리아주의 주도(州都)이며 터키 내에서도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큰 도시다. 가는 길에 중간에 버스가 큰 길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더니 거기서 점심을 먹는다고 한다. 숲속에서의 점심이라. 이건 또 웬 떡이냐. 이끼를 온몸에 두른 거대한 나무들과 쏟아지는 물줄기, 그리고 자연 속에 깊이 묻힌 음식점. 아름다운 곳이다.

안탈리아 콘야비치. 끝이 없다.

콘야비치의 휴양객들. 차마 '벗은 여인들'은 찍을 수 없었다.

콘얄트비치의 나녀들

이런 곳에서 먹으면 없던 입맛도 생기는 법
. 오늘 점심 역시 피데다. 색다른 환경에서 느긋하게 즐기는 점심은 역시 행복하다. 식사를 마치고 안탈리아로 가는 길, 페티예에서 카쉬로 갈 때처럼 버스는 산을 깎아 만든 해안도로를 달린다. 1450분 드디어 안탈리아의 콘얄트(Konyaalt¡)비치 도착. 시내로 들어가기 전 외곽에서 만나는 엄청나게 긴 해수욕장이다. 10월로 접어들었는데도 여긴 여전히 한여름이다. 해변에는 파라솔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파라솔 안에는 둥지에 낳아놓은 알처럼 어김없이 사람이 눕거나 앉아있다. 그런데 다른 비치와는 조금 다른 게 있다. 여성들이 브래지어 정도는 거침없이 벗어던지고 햇살을 즐기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큰 도시라 조금 더 개방적인가? 대부분은 그냥 누워있거나 무엇을 먹고 있을 뿐 책 읽는 사람조차 없다. 휴가는 철저하게 휴가로 즐긴다는 것일까?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 나 같은 일 중독자에게는 굉장한 고통일 것 같다. 노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절감한다. 비치 탐방을 간단하게 마치고 시내까지 가는 트램(tram)을 타러 간다. 안탈리아는 터키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다. 인구는 100만 명 정도인데 1년에 찾아오는 관광객은 5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만큼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다는 것이겠지. 기대로 가슴이 설렌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처음 읽는 분은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에게해. 바다의 깊이에 따라 색깔이 다양하다.


이스탄불에서 환승하다


비행장의 가로등들이 조금씩 존재를 지워가더니, 어느 순간 해가 떠오르고 찬란한 아침 햇살이 활주로를 점령한다. 시간은 늙은 개처럼 발밑에 널브러져 있는데 공항 내에 갇혀 있으려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경우는 없는 법. 어느덧 0820, 보드룸(bodrum)행 국내선 비행기에 오른다. 좌석이 다 차고 출발 예정시간 0840분이 지났는데도 비행기는 꼼짝을 안한다. 50분이 지나도 안내방송 한마디 없다. 그러다가 아홉시가 조금 넘으면서 느릿느릿 움직인다. 활주로도 이 시간은 러시아워인가?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한 시간만 날아가면 첫 번째 목적지인 보드롬이다. 잠시 뒤 수런수런 하더니 기내식이 나온다. 국제선에서 먹은 게 아직도 뱃속에 고스란히 남았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먹어둔다. 여행자의 수칙, ‘언제 또 먹을지 모르니 먹을 수 있을 때 채워둬라에 충실해야 한다. 살찌는 소리가 아련하게 귓전을 채운다.

바다를 끼고 형성된 도시. 지중해를 따라 가는 내내 이런 도시와 함께한다.


터키를 아십니까?

비행기는 비교적 낮은 고도를 유지한다. 맑은 하늘 덕분에 아나톨리아반도의 생생한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골짜기와 집들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넓은 평야와 도시들이 스쳐 지나고. 짙푸른 바다도 간간히 동행한다. 이 땅이 품고 있는 긴 세월을 실타래 풀 듯 한 가닥씩 풀어본다. 터키는 우리에게 어떤 나라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터키에 대해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아직도 많은 이들이 터키? 거기가 아시안가? 유럽인가? 여하튼, 축구는 좀 하더라고. 전에 한일월드컵 때 4강전에서 우리나라를 이겼잖아.” ‘축구는 좀 하는정도가 아니다. 축구광(?)들이 모여 사는 나라다. 우리나라 축구 열기 정도는 새발 의 피. 혹은 어떤 사람은 터키? 잘 알지. 6.25때 우리나라에 파병했던 나라잖아? 그 친구들은 우리나라를 형제국이라고 한다던데크게 고마워하는 눈치는 아니다. 아무튼, 이 정도에서 얘기는 더 이상 진전을 못 보기 마련이다.

보드롬의 바다. 실제 보면 훨씬 더 아름답다. 하얀 포말을 그리는 건 쾌속선.

하지만 그 정도로는 터키의 10%도 설명할 수 없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동양과 서양의 교차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역사가 혼재된 땅, 고대에서 현대까지 세계 문화의 용광로이 정도의 키워드는 들어가야 터키의 실체에 조금 다가설 수 있다. 터키는 동서양의 역사를 한 공간에 켜켜이 담고 있는 떡시루 같은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거기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을까. 유럽을 중심으로 기술된(혹은 왜곡된) 세계사를 비판적 안목 없이 배운 탓이다. 로마하면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반도만 기억하도록 공부한 우리에게, 330년에 비잔티움으로 부르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긴 후 로마제국의 중심은 이탈리아가 아닌 지금의 터키였다는 사실을 얘기하면 고개를 갸웃 할 수밖에 없다. 476년 서로마가 멸망한 게 로마 역사의 종지부라고 기억하는 사람에게, 그 이후에도 동로마가 1000년간이나 번영을 누렸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는 쉽지 않다. ‘비잔티움제국라는 이름의 포장에 가둬 그곳에서 로마의 이름을  탈색시키고 싶은 사람들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 유럽의 한 페이지는 상실됐다지우개로 역사를 바꾸거나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초기 기독교의 7대교회가 깃들었던,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파된 땅이라는 사실도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기억할 뿐이다.

뱀처럼 흐르는 보드롬의 수로들.

차차 설명하겠지만, 현재 터키라는 국명으로 튀르크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원래 그들의 땅은 아니었다. 흑해, 에게해, 지중해로 둘러싸인 풍요로운 이 곳에는 고대부터 다양한 인종이 거쳐 가고 숱하게 많은 국가가 명멸했다. 기원전 6500~5800년 무렵에 존재했던 신석기 주거지 차탈화위크,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집단주거지 중 하나다. 기원전 3000년 무렵에는, 트로이목마로 잘 알려진 트로이 등에서 청동기문화가 발달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인류 최초로 철을 만들어 사용했던 히타이트 문명이 발달했다. 무엇이든 만지면 황금이 된다는 미다스왕의 프리기아왕국도 이곳에 있었고 기원전 8~7세기 무렵부터는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건너와 폴리스를 건설하고 살았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1453년 오스만튀르크에게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될 때까지 이 땅에서 성쇠를 거듭됐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을 제대로 보려면 그리스나 이탈리아가 아닌 터키를 가야한다는 말은 괜한 수사가 아니다. 굴러다니는 돌도 우리로 보면 문화재급이다.

보드롬공항. 한 여름이면 이곳이 미어진단다.


보드롬공항에 도착하다

맛있는 음식도 단번에 먹으면 체하는 법. 멀고 먼 나라의 역사공부를 어찌 하루아침에 다 하랴. 785000로 남한면적의 7.8배에 달하는 이 땅, 한 때 지중해를 제국의 호수로 품었던 이 땅이 간직한 긴 얘기는 조금씩 나눠서 소화할 일이다. 기내식을 마쳤는가 싶었는데 비행기가 고도를 낮춘다. 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면서 입이 떡떡 벌어진다. ,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가! 이렇게 징그럽게 파란 바다가! 저것이 바로 터키블루의 실체? 투명한 잉크를 엎질러 놓은 것 같은 쪽빛 바다가 한없이 달려 나가고 그 위에서는 작은 배들이 하얀 포말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황홀한 그림이다. 갈래갈래 흐르는 수로들은 환영이라도 본 듯 현실감마저 무디게 만든다. 벌어진 입을 미처 다물지도 못했는데 비행기가 착륙한다. 1030. 보드롬 공항은 비교적 한산하다. 아직 태양은 이글거리는 햇살을 토해내고 있지만 휴가철 피크가 지났기 때문이리라. 짐을 찾은 뒤 대기하고 있던 미니버스와 합류했다. 다큐멘터리 촬영팀을 태우고 다닐 버스다.

올리브나무. 지중해 지역은 어디를 가나 지천이다.

올리브 열매들. 언뜻 보면 대추처럼 생겼는데 서서히 자색으로 익는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구릉이나 산마다 낮게 엎드린 낯선 나무들이었다. “사막지대인가?” 누군가 터트린 혼잣말을 터키인 가이드이드가 냉큼 수정해준다. 모두 올리브나무란다. 에게해와 지중해는 올리브가 많이 생산되기로 유명하다. 가이드는 올리브의 효용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다. 터키 남자들의 평균수명이 60, 여자는 65세라는데 지중해 쪽에 사는 남자들은 100세 이상 사는 사람이 수두룩하단다. 그게 다 올리브 덕이라는 것이다. 올리브나무는 심은 지 10년 정도가 지나야 열매를 맺는데 보통 200~300년을 산단다. 수확은 보통 3월과 9~10월 두 번씩 한다. 수확철에는 터키 동부 사람들이 품을 팔려고 몰려온다. 하도 좋다고 강조하길래, 호텔에서 여러 번 절인 올리브에 도전해봤는데 내 입에는 영 아니었다. 얼마나 짠지. 그냥 명대로 살다 가는 수밖에.

언덕 위의 하얀 집들. 파란 하늘-바다와 어울려 환상적 풍경을 연출한다.

올리브나무도 나무지만 단연코 눈길을 잡고 놔주지 않는 건 하얀 집들이었다. 집들은 주로 언덕에 터를 잡았는데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얗게 칠했다. 바다와 나무만 빼놓고 어딜 둘러봐도 하얀색이다. 하얀색도 어울려 있으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이곳 페인트 장사들은 간편해서 좋겠다. 하얀 페인트만 팔아도 되니. 처음엔 보기 좋으라고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햇볕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란다. 흰색은 햇볕을 반사하고 검은 색은 흡수하고. 초등학교 때 배운 지식이 그제야 떠오른다. 대부분 여름별장용 빌라들이라고 한다. 가이드는, 보드롬 고유의 문화는 사라지고 모두 현대식으로 바뀌어 옛날 같지 않다고 슬그머니 한탄이다. 에게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지점인 이곳은 휴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외국인, 특히 유럽인들이 엄청나게 몰려들고 있다. 오죽하면 유럽의 침실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을까. 인구 3만의 작은 도시가 여름만 되면 6만 명을 웃도는 인파가 북적거린다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 별장이든 터키인 고유주택이든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 그리고 언덕위의 하얀집들은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실감하게 해준다. 천국이 정말 있다면 이런 모습 아닐까?

보드롬 시내의 풍경. 천국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바람의 언덕'에서 바라본 보드롬성.

'바람의 언덕에 서다

보드롬에서 처음 목적지로 잡은 곳은 귬벳(Gumbet)이라는 곳. 해변을 포함한 지역 이름인지 언덕의 고유명사인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보드롬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해서 먼저 가보기로 했다. 서울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 남산으로 올라가는 격이다. 공항을 떠나 40분쯤 달려서 언덕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또 한 번 아! 하는 감탄사를 갈무리 하지 못한다. 둥그렇게 형성된 만()을 따라 짙푸른 바다와 하얀 집들이 나란히 어깨를 겯고 있다. 그리고 바다를 유유히 떠다니는 요트들. 저만치에 십자군들이 세웠다는 보드롬성이 우뚝 솟아있다. 날카롭게 벼려진 햇살들이 바다로 떨어져 내려 깔깔거리며 자맥질을 한다. 수없이 일어났다 눕는 물비늘들이 보석처럼 황홀하다. 바다에서 올라온 한줄기 바람이 낯선 나그네를 기웃거리다 기어이 옷깃을 헤친다. 가슴 속까지 시원해진다. 누가 부탁한 건 아니지만 이 언덕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기로 한다. ‘여기는 오늘부터 바람의 언덕이야제법 그럴싸하다. 바다에서 눈을 돌리니 언덕 꼭대기에 허물어져 가는 둥근 건물들이 하얀 칠을 덮어쓴 채 서 있다. 방앗간으로 쓰던 건물들이란다. 그렇다면 풍차? 한두 채가 아니다. 그럼, 그렇지. 역시 바람의 언덕이라니까.

세월에 치여 이제는 쓸쓸히 스러져가는 언덕 위의 풍차들.

풍차방앗간 안쪽에서 본 하늘.

다큐팀이 바다와 해변의 풍경에 풍덩 빠져있는 사이에
,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언덕을 오른다. 바다도 아름답지만 풍차의 잔해가 더 궁금하다. 어차피 나는 혼자 쏘아 다니는 체질이니. 언덕에 올라서니 사방의 풍경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언덕 너머 반대쪽에도 짙푸른 바다와 하얀 집들이 펼쳐져 있다. 궁금했던 건물들로 다가가 들여다보니 풍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세월에 쫓겨 날개도 잃고 방앗간도 반쯤 무너져 버린 풍차들. 이제는 초라한 몸짓조차 할 수 없게 돼버렸다. 풍차에게 보고 들었을 세월을 묻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언덕의 중간쯤에 낙타 두 마리가 앉아있고 그 옆에서 노인과 장년 사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중에 하얀 모자를 쓴 노인이 나를 부른다. 그런데 부르는 소리가 헬로~’가 아니라 까메라~’. 아마도 거기 카메라 들고 설치는 놈, 이리 좀 와 봐라정도의 의사 표현인 것 같다. 동방예의지국의 자손으로서 노인이 부르는데 안 가보면 도리가 아니지. 뛰다시피 내려가니 손짓 발짓으로 낙타를 찍으란다. 에이, 나중에 모델료 달라고 하려고?

낙타와 노인. 이 노인의 얼굴에서 고향 어른들을 보았다.

다큐팀의 여주인공을 태운 낙타.

내 마음을 읽었는지 노인이 큰 소리로 외친다. “노 페이~!!” 돈을 안 받을 테니 걱정 말고 찍기나 하란다. 그렇다면 사양할 내가 아니다. 카메라 셔터에서 불이 난다. 노인의 눈길이 내 카메라에 고정돼 있다. ! 혹시 내 카메라에 눈독을? 턱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잠시 주춤한다. 하지만 역시, 세파에 닳고 닳아 의심을 지병처럼 달고 사는 나그네의 억측일 뿐. 노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만다. 노인의 밭고랑 같은 주름과 거친 피부흰 수염, 그리고 잇몸까지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얼굴에서 오래 전 내 고향 땅의 어른들을 본다. 평생 땅을 뒤지며 농투성이로 늙어간 그들. 닮았다. 정말 닮았다. 사는 곳도 먹는 것도 말도 다른 그들이 내 땅의 그 장삼이사들과 닮아있다. 그래, 어느 나라든 민초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지. 이 노인도 낙타를 앞세워 관광객들의 푼돈이나 거두는 일이 천직은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노인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 그런데 터키 말이라면 밥 줘소리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들었지?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들은 “Where are you from”이 아닌 터키 말이 분명한데. “코리아라고 대답했더니 ! 꼬레, 꼬레하면서 반색한다. 그러더니 아예 노래 부르듯 꼬레를 반복한다. 이 아저씨, 한국을 정말 알긴 알고 이러는 거야?

벌거벗다시피 한 남녀가 바람의 언덕을 오른다. 여행 내내 물리도록 본 모습이다.

노인의 신명은 그게 끝이 아니다. 조금 뒤에는 아직도 바다풍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다큐팀까지 불러올린다. “까메라, 까메라아예 자진모리 가락으로 넘어간다. 촬영팀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낙타 옆에서 진을 치고, 다큐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여배우는 난생 처음 타보는 낙타 위에서 꺄아~ 꺄아~ 신이 났다. 이 정도 서비스를 하고도 정말 노 페이일까? 역시, 끝내 돈을 안 받는다. 말없이 낙타를 끄는 장년의 사내가 눈을 곱지 않게 뜨는데도. 대체 카메라의 위력이었을까? ‘꼬레의 위력이었을까? 사람들이 모여드니 또 그 자리를 뜨고 싶다. 그들이 난장 펼친 곳에서 빠져나와 언덕을 내려오는데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중년 남녀와 마주친다. 늦휴가를 온 유럽인들인 모양인데, 늦여름의 잔양이 그들의 몸을 붉게 붉게 태워놓았다. 그들과 스쳐 지난 나는 이국땅의 한낮을 허청허청 걷는다.

 

추천과 댓글을 잊지않은 님은 참 아름다운 분입니다^^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