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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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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축제'에 해당되는 글 1

  1. 2009.08.24 [사라져가는 것들 120] 뗏목13
2009. 8. 24. 11:39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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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뗏목 탄 사람이 어디 나 하나만 남았겠소만, 서울까지 다녀본 건 근동에서 나 말고 없을 게요.”
노인의 목소리에는 험한 물길과 싸웠던 시절의 자부심과 흘러가버린 세월에 대한 회한이 칡넝쿨처럼 얽혀있다. ‘마지막 떼꾼’ 홍원도 노인(76세)을 만난 건 영월에서 열리는 동강축제를 찾았을 때였다. 동강축제에서 가장 볼만한 건 뗏목시연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뗏목을 엮는 과정이나 뗏목이 물길을 헤치는 장면을 보는 건 쉽지 않다. 축제가 열리는 영월읍의 동강둔치보다 한참 상류에서, 그것도 평일인 금요일에 뗏목을 띄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제를 찾은 사람들은, 할 일 다 하고 강변에 대어져 있는 ‘전시용 뗏목’만 구경하고 가기 일쑤다. 뗏목을 엮는 곳은 영월읍 거운리 둥글바위 앞 백사장이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역시 외지인이라고는 나 하나뿐이었다. 주민으로 보이는 수십 명이 백사장에 친 천막 아래에 둘러앉아 있었다. 저만치 보이는 뗏목 앞으로 가는데 천막 안에서 누가 부른다.
“어이, 사진작가 양반. 이리 좀 와보소.”
“예? 저 말입니까?”
“그렇소. 남의 동네 와서 사진부터 찍으면 쓰나. 우선 막걸리부터 한 잔 하소. 안 그러면 사진 못 찍게 할 거요.”
외지인을 반기는 그들의 인사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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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른 사람은 거운리 이장이었다. 그가 뗏목을 엮고 띄우는 모든 일을 주관하고 있었다.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잔 가득 막걸리를 따라준다. 차를 가지고 와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손사래 쳐도 막무가내다. 잔을 비우니 금세 또 채운다. 에라! 모르겠다. 언제 술 마다한 적 있더냐. 오늘 못 가면 내일 가지. 이왕 주저앉은 거 본전이나 뽑아야겠다 싶어 본론을 꺼낸다.
“혹시, 전에 뗏목 타던 분 안 계십니까?”
“왜, 없겠소. 저기 저 양반이오.”
이장의 손끝을 따라가 보니 얼굴이 불콰한 노인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있다. 마시던 술잔을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얼른 노인 앞으로 간다. 꼭 한번 만나고 싶었던 홍원도 노인이었다. 이런저런 책을 쓰는 사람이라고 인사를 하고 질문부터 던진다.
“언제까지 뗏목을 타셨습니까?”
“열아홉부터 타기 시작해서 스물여섯에 그만뒀으니… 가만있자. 내가 지금 칠십하고도 여섯이란 말이오? 그럼 몇 년 전인가. 딱 오십년 됐구먼.”
50년이면 1959년까지 뗏목을 탔다는 얘기다. 말문이 트이니 노인의 얘기는 동강 물줄기처럼 거침없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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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에만 뗏목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정선에서 출발해 천 이백 리 한강 물길을 타고 가는 뗏목은 예로부터 유명했다. 뗏목은 벌목장에서 나온 나무를 운반하는 수단이었다. 지금 같으면 트럭이나 철도를 이용하겠지만, 그런 게 없었던 시절에는 나무를 엮어서 물길을 타고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뗏목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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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떼꾼' 홍원도 노인

은 강의 얼음이 다 녹는 3~4월부터 시작됐다. 통나무를 엮은 떼 한 묶음을 한 바닥이라고 한다. 바닥 당 길이는 30m, 폭은 4~5m 정도가 됐다. 보통 바닥 세 개를 이어서 뗏목 하나를 만들었다. 완성하는 데까지는 2~3일이 걸렸다. 뗏목의 앞과 뒤에는 노의 역할을 하는 긴 막대를 다는데 이를 ‘그래’라고 불렀다. 2인 1조로 이동하게 되며 앞에는 물길에 익숙한 경험자가 그래를 잡고 뒤에는 초보가 탔다.
“출발하는 곳이 딱 정해져 있는 건 아니고 벌목 현장이 있으면 게서 엮어서 띄우는 거지. 물의 양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들쭉날쭉 해. 물이 좋을 땐 7일에서 10일까지 걸리고, 양이 적으면 20일에서 30일 걸리기도 하고…. 서울에서도 노량진이나 마포나루, 뚝섬 같이 떼를 넘기는 장소가 달라."
길면 한 달을 물 위에서 보내야 했으니 절대 만만한 일은 아니다. 내내 고난의 연속이었다.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 곳곳에 급류 등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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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위험을 무릅 쓰고 떼를 타는 건 물론 돈 때문이었다. 통나무 위에 모진 목숨 얹어놓고 멀고 먼 물길을 헤쳐가라고 등을 떠밀 수 있는 게 돈 외에 무엇이 있을까. 심신이 채 여물지도 않은 열아홉 산골 소년을 뗏목에 올렸던 것도 가난이란 이름의 천형이었을 것이다. 짠한 마음과 달리 질문은 엇나간다.
"떼꾼들은 돈을 많이 벌었다면서요? 떼돈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글쎄….”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물론 운 좋으면 많이 벌 수도 있었지. 허나 대부분 그렇질 못했어. 그 돈이 전부 강변 주막으로 들어갔거든. 주막집마다 떼꾼이 모여들었지. 게서 술 마시고 노름하고 치마폭에 쏟아 붓는 일이 허다했거든.”
떼돈이라는 말이 실감나던 시절이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었을 때라고 하던가. 임진왜란 때 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자니 나무가 엄청나게 필요했을 터. 떼꾼들의 몸값도 자연히 올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번 떼돈을 집까지 무사히 가지고 가는 것은, 바다로 나갔던 연어가 고향으로 회귀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고 한다. 길목마다 포진하고 있는 갖가지 유혹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떼돈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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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함백선)가 놓이면서 뗏목 띄울 이유가 사라지고 댐이 들어서면서 물길까지 잃어버렸지만, 그 시절의 이야기까지 모두 세상을 뜬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빠지지 않는 얘깃거리가 ‘전산옥 주막’이다. 전산옥(全山玉. 1909~1987)은 강가에 있었던 주막집 주인의 이름이다. 그녀가 운영하는 주막을 전산옥 주막이라고 불렀다. 정선 아우라지를 떠난 뗏목이 굽이굽이 흐르다가 어라연을 돌아 500m쯤 내려가면 된꼬까리라는 여울목에 이른다. 동강에서 물살이 가장 험한 곳이, 조금 더 상류에 있는 황새여울과 이 된꼬까리여울이다. 떼꾼들이 늘 긴장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목숨을 건 전쟁을 한바탕 치루고 만지에 이르면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귀에서는 쇳소리가 요동쳤을 것이다. 그런 땐 누구라도 막걸리 한 잔 생각이 간절한 법. 자연스럽게 들르는 곳이 전산옥 주막이었다고 한다. 한숨 돌린 떼꾼들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정선아리랑 가락이 흘러나왔을 것이고. 
‘우리 서방님은 떼를 타고 가셨는데/황새여울 된꼬까리 무사히 지나 가셨나//황새여울 된꼬까리 다 지났으니/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차려 놓게’
떼꾼들의 온갖 사연과 체취가 진하게 배어있던 이 주막은 1970년대 초반에 문들 닫았다고 한다. 하지만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전산옥이란 이름은 여전히 동강을 흐르고 있다. 만지의 주막 터 역시 풀숲에 누워 지난날을 반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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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도 노인의 이야기는 물처럼 이어진다. 술에 취한 것인지 회상에 취한 것인지 목소리가 축축하다.
“물길이 고단하고 지루하니까 술판, 노름판이 벌어지고 여자를 찾게 되는 것이지. 나? 허허. 나야 아홉 명의 가족을 부양해야했으니 여자 쳐다볼 틈이나 있나. 술이야 한 잔씩 했지만…. 그렇게 해도 돈이 모아지지는 않더라구. 워낙 나 하나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뗏목 타는 걸 그만 둔 뒤로는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모아둔 돈도 없고 사놓은 땅도 없었으니 남의 토지를 얻어서 농사를 지을 수밖에. 그는 그렇게 짓는 농사를 ‘노동농사’라고 표현했다.
“뭐 그래도 칠남매 잘 키워서 대처로 내보내고, 이젠 할멈하고 둘이 사는데 괜찮아….”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노인이, 어라연 부근에서 ‘강변상회’라는 상점을 하고 있다고 귀띔해준다. 그때,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던 홍 노인의 얼굴에 갑자기 활기가 돈다. 무슨 일인가 해서 바라보니 승용차에서 내린 몇 사람이 천막 쪽으로 걸어온다. 옆에 있던 사람이 군수 일행이 도착했다고 알려준다. 뗏목을 띄우려면 고사를 지내야하는데 군수가 오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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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는 군수를 비롯해 몇 사람이 차례로 절을 하더니 금세 끝난다. 막걸리 한두 잔씩 나눠 마신 떼꾼들이 준비된 흰 옷으로 갈아입고 뗏목에 오른다. 뗏목은 여섯 바닥짜리로 모두 일곱 명이 탄다. 맨 앞에 선 홍 노인이 그래를 잡는다. 그 순간 눈을 의심할만한 광경이 펼쳐진다. 한 잔 술에 기대어 강물에 떠내려간 청춘과 고난의 세월을 되새기던 무기력한 노인은 눈 깜짝할 새 사라져버린다. 대신 천군만마를 이끄는 장수처럼 꼿꼿한 모습의 한 사내가 그 자리에 서 있다. 장수가 된 홍 노인이 출발 신호라도 하듯 그래를 힘차게 당기자, 긴 뗏목이 순한 양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뜨거운 한 여름의 햇살이 물 위로 쏟아져 박히고, 그 위로 뗏목이 진군하면서 숱한 은빛 물비늘들이 자지러져 눕는다. 뗏목이 물살을 타고 앞으로 나간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움직임을 멈춘다. 뗏목만 춤추듯 강 위를 흐른다. 뗏목과 흰옷의 떼꾼들이 작은 점으로 멀어진다. 어디선가 정선아리랑 한 대목이 귓전을 파고든다.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를 지어 놓았네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놓게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지냈으니
영월 덕포 공지갈보 술판을 닦아놓게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뜬구름만 흘러도
팔당주막 들병장수야 술판 벌여 놓아라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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