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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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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페티예 화요장터 들어가는 길. 관광 삼아 나온 외국인들도 많다.

화요장터 초입. 온갖 과일과 채소들이 나와 있다.

거대한 규모
에 놀라다

927일 화요일. 지중해는 아직 여름의 잔양(殘陽) 아래서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서울은 지금쯤 가을 기운이 완연할 텐데. 쏟아지는 햇살은 날카로운 창날처럼 대지에 박힌다. 오늘은 페티예를 떠나는 날. 3일 동안 신세진 호텔에서 체크아웃 한다. 며칠 지나면서 다큐팀 스텝들과 제법 친해졌다. 작업과 행동반경이 다르다고 오고가는 정이 없으랴. “저희 때문에 깊이 봐야하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시는 거 아닙니까?” 이런 기특한 인사를 해주는 젊은 친구도 있다. “책을 쓰시게 되면 저를 주인공으로 해주세요. 감자튀김 좋아하는 투덜이PD." 이런 인사도 한다. 그럼, 그럼. 세상에 주인공 아닌 사람이 있나.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믿음 씨가 터키의 한국인 우대 이야기를 해준다. ”한국 사람들은 한 달에 1, 2달러만 내면 장기체류비자를 내줘요,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 수 있는 거지요이거 제법 쓸 만한 정보다. 하긴 부자에게 이 나라는 천국이다. ”휴양지 호텔은 하루 숙식비가 80달러에서 300달러까지 해요. 그것만 내면 세끼 식사는 물론 술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거든요유럽인들 중에는 호텔서 꼼짝 않고 먹고 마시고 수영을 하다 돌아가는 사람도 많단다. 그래, 돈만 있으면 어딘들 천국이 아니더냐.

고추도 각양각색

옥수수를 보니 고향생각이

가지도 가지각색.

오늘의 종착지인 카쉬까지 가기 전에 몇 가운데 들러야 한다. 맨 먼저 들를 곳은 페티예 화요장터. 매일 열리는 바자르와 달리 말 그대로 화요일마다 열리는 장이다. 우리의 5일장과 같은 곳으로 생각하면 된다. 장터는 수량이 제법 많은 큰 내를 낀 넓은 공터에 펼쳐져 있다. 우리네 장터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규모는 상상 밖으로 크다. 터키인, 외국인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간다. 외국인들에게는 관광코스 중 하나이기도 한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 장터로 들어가니 끝이 안 보일 정도로 포장이 쳐 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물건들이 나와 있다. 물건의 양과 종류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입구 쪽에는 채소와 과일 등이 주로 진열돼 있다. 사과복숭아자두수박토마토멜론에구, 숨차다. 따뜻한 기후, 축복받은 땅이라서 그런지 여름 과일, 가을 과일 없는 게 없다. 우리나라에 있는 과일은 모두 다 있어서 정겹기까지 하다. 채소도 마찬가지. 마늘감자양파배추고추호박강낭콩오이상추김장을 담가도 되겠다. 상추를 보니 느닷없이 삼겹살 생각이 나고 호박을 보니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진다. 고추의 모양도 각양각색, 가지의 색깔도 가지각색이다.

덩어리 치즈와 가루 치즈.

올리브 파는 아저씨.

치즈와 올리브 가게에서


조금 안쪽엔 치즈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덩어리로 된 것도 있고 가루로 된 것도 있고. 큰 놈은 거짓말 좀 보태서 설악산 울산바위 만하다. 치즈의 세계에도 양반 상놈이 있는지 고급치즈는 동물의 가죽으로 싸놓았다. 그래야 잘 보관된단다. 아침 아홉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장터는 활기가 넘친다. 사람들 생긴 것만 조금 다르지 고향의 5일장을 돌아다니는 것과 똑같다. “아따, 그러지 말고 일루 점 와봐. 싸게 줄 테니께손님들을 부르는 소리, “워매, 뭐가 요래 비싸대유. 좀만 깎아줘유물건 값 깎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장터 한가운데 서서 사진을 찍고 수첩에 뭔가 적고 있으니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 동네도 별 살 것도 없이 사돈 따라 장 구경 나온 사람들이 있나보다. 돋보기가 없는 게 한이라는 듯, 내 수첩에 코를 박는 아저씨에게 묻는다. “이 글씨 아세요?” “……????” 그럴 줄 알았답니다. 그놈의 호기심이 죄지 아저씨야 무슨 죄가 있겠어요. 정말 사돈을 만난 건지 장터 한 가운데에 자전거를 세우고 수다에 빠진 아저씨들도 있다. 옆집 강아지 새끼 몇 마리 낳은 얘기까지 해야 길을 비켜줄 모양이다. 그렇다고 큰 소리 치거나 짜증내는 사람은 없다.

곡물 파는 아저씨. 전형적인 튀르크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남편 보고 "챔피언"이란다.

올리브 가게 앞에서 기웃거린다. 점잖게 생긴 주인이 쓰레받기 같은 걸 들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걸로 주문에 따라 올리브를 담아주는 것이다. 올리브도 종류가 무지하게 많다. 수확한 지역에 따라 모양이 다르기도 하고 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기도 한단다. 우리의 장아찌처럼, 소금이나 레몬으로 간을 해서 시장에 낸다. 맛을 본다는 핑계로 먹어 보지 않으면 장터가 아니지. 살 것도 아니면서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본다. 우웩!! 역시 짜다. 호텔서 한번 당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이 선천성 기억상실증이란. 이번엔 곡물 파는 아저씨 가게. 여기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다양한 곡물이 있다. 명색이 촌놈인데도 아는 건 쌀달랑 하나? 아니다. 고춧가루도 있구나.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함께 장사를 하는데 두 분이 전형적인 터키사람이다. 그 옛날 몽골초원에 살던 돌궐족이 중앙아시아를 지나면서 적당히 피를 섞은 뒤, 아나톨리아 땅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과 가장 근접한 얼굴 아닐까? 아주머니는 남편 보고 챔피언이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무슨 챔피언이란 걸까? 무얼 잘하면 마누라한테 저런 소리 듣고 살까? “어이구, 이 화상아. 잘할 생각 접어두고 허구헌날 싸돌아댕기지나 말어.“ 왜 요즘 환청이 이렇게 자주 들릴까?

엄마를 조르더니 도넛 하나 얻었다. 그러나 또 조를 태세.

멜론을 준 아저씨. 제가 그렇게 불쌍해 보였나요?

멜론을 얻어먹다


근처 가게에서는 군것질거리를 파는데 대여섯 살 쯤 된 아들이 엄마 치마꼬리를 붙잡고 늘어진다. , 저 녀석 봐라. 안 먹어도 퉁퉁 불어있구먼.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아이의 손에 큼직한 도넛이 쥐어진다. 옛날 생각이 난다. 그 먼 길,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가면 풀빵도 먹고 싶고 사탕도 먹고 싶고그냥 돌아서는 할머니가 얼마나 야속했던지. 냉정하게 돌아서야 하는 당신은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 것이 얼마나 측은하고도 야속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할머니가 손자의 군것질거리와 바꿀 수 있는 건 눈물밖에 없었다. 할머니 잘못했어요. 그 속죄 언제나 다 하고 이 소풍을 마칠 수 있을까. 그렇게 혼을 내려놓고 서 있는 나를 과일가게 아저씨가 부른다. 아이 손에 들린 도넛이 먹고 싶어서 침을 흘리고 있는 줄 알았나보다. 멜론 한 조각을 쑹덩 잘라서 손에 쥐어준다. 아무래도 멜론을 사라는 건 아닌 것 같고, 동양에서 온 거지쯤으로 여긴 것 같다. 하긴 여행 내내 수염 한번 깎은 적 없고, 걸친 옷이라 봐야 추레하기 그지없으니, 그렇게 봐도 할 말은 없다.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에서 왔는데 인사 하나는 제대로 차려야지. 고맙습니다. 아저씨. 그런데 제가 그렇게 불쌍하게 생겼나요? 멜론을 우물거리며 과일채소전을 벗어난다.

전통과자 5상자를 사면 1상자는 거저 준단다.

빗자루. 참 곱게도 엮어놨다.

빵장수 아저씨.

세제설탕휴지치약칫솔생활필수품 가게를 거쳐, 젤리에 가까운 터키 전통과자를 파는 곳을 지난다. 다섯 상자를 사면 한 상자는 공짜로 준단다. 그래도 전 안사요. 어느 집 앞에는 곱게 짠 빗자루들을 세워놓았다. 옛날 우리네 빗자루와 비슷하게 생겼다. 솜씨도 좋지. 너무 고와서 방을 쓸기에는 아까울 것 같다. 좀약이나 바퀴벌레 약을 파는, 70년대가 생각나게 하는 난전도 있다. 그럼 그렇지, 왜 없겠어.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빵을 파는 아저씨를 만나니 반가움이 울컥 솟는다. 어릴 적 풀빵이나 호떡을 팔던 아저씨를 만난 셈이다. 이제부터는 공산품공예품 가게들이다. 가방 가게에는 물건도 다양하게 많고 다른 곳보다 손님도 많다. 터키는 다른 산업에 비해 가죽공예가 비교적 발달한 편이다. 신발가게도 샌들부터 운동화까지 다양한 품목을 갖춰놓았다. 그곳을 그냥 지나쳐 공예품가계로 들어가 본다. 부채나 보석함 등 온갖 공예품들이 그걸 만들었을 사람의 정교한 솜씨를 말해준다. 그중에서도 유리공예품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각종 등()이나 터키 특산물인 물담배 파이프에 특히 눈길이 간다. 내가 들어서자 종업원 청년의 눈은 카메라에 가서 꽂혀버린다. 물건을 팔겠다는 생각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버린 눈치다.

각종 유리공예품들.

공예품 가게의 사장님.

공예품 가게의 사장과 종업원


자꾸 와서 들여다보고 관심을 보이길래, “한번 찍어볼래?” 하며 손에 쥐어줬더니 입이 쭈욱 찢어지면서 카메라를 들고 온갖 폼을 잡는다. 찍힐 놈이 폼을 잡아야지 왜 네가 폼을 잡니? 또 다른 종업원이 다가오더니, 제 동료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걸 보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덥석 내 어깨에 팔을 얹는다. 한 방 찍어보자 이거지? 그래, 카메라 든 친구 기분이나 좋게 해주자. 나도 덥석 어깨동무를 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이리 키가 큰 거야. 잠시 뒤 들려오는 셔터소리. 뒤에 조명이 너무 강해서 분명 시커멓게 나왔을 거다. 아무렴 어떠랴. 그런 얘기를 수첩에 적고 있자니, 카메라를 내게 넘겨준 청년이 곁에 와서 들여다본다. 이 나라 사람들 호기심은 정말 못 말린다. “, 이 글자 알아?” 물었더니 대답도 없이 제 팔을 어깨까지 둥둥 걷어붙인다. 일본어 문신이 새겨져 있다. 이 친구 생각으로는 같은 동양인이고 글자가 낯설긴 마찬가지니 같은 나라 말인 줄 알았나보다. “그건 일본 글씨야. 난 한국 사람이거든. 코리아라고 들어는 봤나?” 영어와 한글로 코리아라고 써주니 뭘 좀 알아들었는지 수첩에다 자기들 말로 코리아라고 써준다. 에구, 귀여운 것. 앞으로는 한국을 많이 사랑해라. 그리고 가능하면 지금 문신은 지우고 한국 만세!’ 이런 걸로 새로 새겨봐.

내 카메라에 '눈독'을 들였던 청년. 잘 생겼다.

공예품 가게 사장의 이름은 야곱이이라는 장돌뱅이다. 가게 규모가 하도 커서 말뚝 박고 장사하는 사람인가보다 했는데, 매일 매일 장 따라 옮겨 다닌단다. 그는 다큐팀이 자기네 가게를 들러준 걸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코리언이라니까 곧바로 “Brother”가 터져 나오면서 특유의 잃어버린 형제를 상봉한표정을 짓는다. 이런 식의 반응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하지만 여러 번 겪어도 감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야곱은 한국인에 대한 우의로 스텝들이 산 기념품 값을 끝내 받지 않는다. 가게를 나오는데 사진을 찍었던 청년이 따라 나오더니 악수를 청하며 “Nice Korea”를 연발한다. 그래, 열심히 살아.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일본어 문신은 지워. 터키사람들은 왜 그렇게 한국인들을 환대할까. 진심일까? 장담하건대 진심이다. 어딜 가나 피를 나눈 형제라는 뜻의 칸카르데시라고 부르는 터키인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만큼 두 나라의 인연은 가볍지 않다. 인연의 뿌리를 찾자면 제법 아득한 과거까지 올라가야 한다. 우리 땅이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뉘어 있을 때, 돌궐족은 튀르크제국을 세워 몽골 땅을 호령했다. 그때 튀르크 제국과 고구려가 연합해서 수나라에 대항하기도 했다. 튀르크의 무한 카간이 사망했을 때는 고구려에서 조문사절단을 파견했다.

신발 가게.

한국인을 형제로 부르는 이유

고려 때에는 튀르크계의 일족인 위구르족이 개경에서 살기도 했다. 그때 지어진 야한 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회회아비가 바로 그들이다. 한국과 터키가 진짜 피를 나눈건 물론 6.25전쟁 때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터키는 150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이는 유엔군 가운데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터키군이 중공군을 맞아 싸웠던 평안북도 군우리 전투는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돌궐의 후예들은 백병전에 특히 능해서 일당백의 위용을 보였다. 5배 이상 되는 적에게 막혀 자신들도 위험한 상황이었던 터키군 1여단은 예상을 깨고 전멸 위기에 처한 미 2사단을 구하려 중공군 진지로 뛰어들었다. 착검을 한 채 알라후 아크바르(Allāhu Akbar 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며 돌격하는 터키군을 맞아 중공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중공군에게 터키군은 공포의 군대로 새겨졌다고 한다. 터키군은 한국전을 통해 750여명이 전사했고 32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터키인들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용사들을 코레 가지라고 부른다. 코레 가지들은 한국을 조국이라는 뜻의 바탄이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한국인이라는 뜻의 코렐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악기점 주인 아저씨.

타국에서 희생한 그들은 그렇게 한국을 잊지 않고 사랑하는데, 피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과연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진정 고마워하고 있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큰 소리를 칠 자신이 없다. 터키는 멀리 있는 그렇고 그런 나라일 뿐이고, 터키인들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는 게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여행 내내 환대를 해주는 그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반대로 터키인들은 한국인이라면 일단 감동할 준비부터 한다. 특히 2002년 한일월드컵이 거기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축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터키 국민들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했고, 2002년에는 1954년 이후 48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으니 나라가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더욱 감격한 건 한국과 치른 3, 4위전이었다. 한국인 응원단이 펼친 터키국기, 그리고 자국 선수들을 향한 응원과 박수에 그들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저들이 바로 피를 나눈 형제들이야. ‘형제의 나라는 다시 한 번 뼛속 깊이 다시 각인됐다. 우연이었든, 의도한 일이었든 경기에 지면서도 박수를 쳐준 건 참 잘한 일이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변하지 않는 우의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었으니.

아으, 셔!!! 석류 주스를 짜고 있다.

즉석에서 나무를 깎아 공예품을 만드는 할아버지. 원탁 위에 진열된 것들이 바로 새총이다.

뜨거운 전송을 받으며 공예품 가게를 나와 옷 시장 입구에서 전통악기를 파는 아저씨를 만난다. 아저씨는 “Happy birthday”를 연주하며 유혹한다. 에이, 아저씨 사람 보실 줄 모르네. 살 사람을 꼬여야지요. 악기 이름은 듀라’. 박수까지 치며 함께 놀다가 손을 흔들고 자리를 뜬다. 천변에는 카페가 늘어서 있다. 우리가 장터에 가서 국밥 한 그릇을 먹듯이 장을 보러온 사람들이 음식도 먹고 음료수도 마신다. 석류주스를 갈아 파는 가게 앞에 멈춰 선다. 신 음식이라면 냄새만 맡아도 저만치 도망가는 나지만 예쁜 색깔이 자꾸 유혹한다. 혹시 달콤하지 않을까? 그래, 도전!!! 내 인생에서 혹시역시로 바뀌지 않던 적이 있던가. 나는 그날 울면서 석류주스를 마셨다. 무려 3리라나 투자하고서. 장터 날머리에서 트럭을 세워두고 나무로 공예품을 깎아 파는 할아버지를 만난다. 수저머리빗홍두깨참 솜씨도 좋다.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건 새총. 어릴 적엔 겨울마다 저걸 들고 들이고 산이고 얼마나 쏘아 다녔던지. 터키 아이들도 저걸 갖고 노는구나. 동질성은 곳곳에 숨어있다. 이제 장구경도 끝났고 페티예를 떠날 시간이다. 안녕! 페티예. 3일 동안 행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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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페티예에서 가장 먼저 찾았던 '유령도시' 카야쾨이

페티예로 가는 길

페티예로 가는 길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창문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굽이굽이 산길로 접어들었는가 싶었는데 느닷없이 해변이 나타나고, 그 해변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늦여름의 햇살을 온 몸으로 즐기고 있다.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산들은 고향에 온 듯 정겹다. 해변을 따라 달리던 버스가 조금 넓은 도로로 접어든다. 곳곳에서 길을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다. 짙푸른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서 느린 걸음으로 뒤를 따라온다.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언젠가 직접 운전해서 이 길을 달려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온다. 그러는 사이 차는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고원지대가 이어진다. 어느 순간부터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내륙 고속도로를 탄 것 같다. 중간에 주유소 겸 휴게소에 들러 차도 마시고 화장실도 간다. 터키의 기름 값은 한국보다 더 비싸다. 휘발유 값을 적어놓은 입간판을 보니 리터당 3000원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차는 무척 많다. 그 중에는 현대자동차도 많이 눈에 띈다. 지난해에는 판매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현대차에서 윈도우브러시 하나 공짜로 받은 적 없지만 괜스레 뿌듯하다. 터키인 가이드는 쓸데없이 차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고 볼멘소리다. 어딘들 안 그럴까.

보드롬에서 페티예로 가는 길에 곳곳에서 만난 비치. 9월말인데도 여름이다.

어느 순간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눈을 떠보니 창밖 세상은 온통 검은색으로 채색돼 있다. 잠시 뒤 멀리서 불빛들이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금세 페티예 시내로 진입한다. 페티예는 전날 묵었던 보드롬보다 큰 도시로 인구도 5만 명이 넘는다. 물론 여름에는 유럽인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10만 명이 넘게 북적거린다고 한다. 호텔에 도착하기 전에 슈퍼에 들러 술과 안주를 산다. 이왕 일행이 됐는데 정식 상견례 겸 술이라도 한잔씩 하자고 K가 바람을 잡았다. 나로서야 술 소리만으로도 저절로 입이 벌어질 수밖에. 호텔에 도착하니 아홉시. 부지런을 떨어야 밥이라도 한 술 얻어먹을 거 같다. 호텔 이름은 ‘Marina Vista’. 역시 자그마한 호텔이다. 어제 묵었던 곳과 달리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주변 경관이 무척 아름다울 것 같다. 페티예에서는 일정이 많아 이 호텔에서 3일 동안 묵을 예정이라고 한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니 또 30분이 후딱 지나갔다. 뱃가죽은 등에 달라붙은 지 오래다. 야외식당으로 가니 닭요리가 나온다. 뷔페식이 아니라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찜닭 같기도 하고 백숙 같기도 하고…. 점심에도 닭고기를 먹었는데, 전생에 터키 쪽에 사는 닭하고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 ‘시장이 반찬’이라는 경구가 어디 틀려본 적 있던가. 순식간에 한 그릇 뚝딱 해치운다. 닭 아니라 돌을 구워 와봐라. 내가 외면하나.

고속도로의 휴게소. 백화점처럼 다양한 물건을 팔았다.

터키의 주유소. 기름값이 우리나라보다 꽤 비싸다.

술병을 전멸시키다

식사를 하는데 인근 음식점에서 느닷없이 함성이 터진다. 저 정도 함성이면 축구중계를 하는 게 틀림없다. 이 나라 사람들의 축구사랑은 말 그대로 ‘광적’이다. 터키의 프로축구의 역사와 규모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깊고 크다. 1959년부터 리그가 시작됐고 팀은 1부 리그에 18팀, 2부에 20팀이 있다. 축구경기장은 늘 도가니처럼 뜨겁다. 열정적이고 급한 국민성이 그곳에서라고 달라지랴. 야유나 욕설이 난무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유명한 팀의 경기가 있는 날은 곳곳에서 난리법석이 벌어진다. 음식점마다 응원열기로 들끓고, 경기가 끝나면 응원하는 팀의 깃발을 휘날리며 차들이 거리를 질주하기도 한다. 우리가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벌였던 그 ‘광란의 밤’을 상상하면 된다. 뒤에 소개하겠지만 우리의 사랑스런 터키인 가이드 이믿음 씨 역시 축구광이다.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하루 종일 콧노래가 멈추지 않는다. 축구중계를 하는 시간에 일을 하자고 하면 표정이 헐크처럼 변한다. 식사를 마친 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 되는지 확인해 본다. 호텔에서 준 ID와 비밀번호를 넣으니 거짓말처럼 부풀어 오르는 와이파이 표시. 우와! 고마운 것. 이것저것 체크하고 회사 일을 몇 가지 한다. 좋은 세상이다. 시작한 김에 카톡으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을 불러볼까 하다가 시간을 보니 거긴 새벽. 단잠을 깨울 수는 없으니 포기.

Marina Vista 호텔의 수영장.

페티예에서 3일동안 묵었던 Marina Vista 호텔

방으로 돌아오니, 술자리가 준비됐다는 전갈이 온다. 이게 얼마 만에 마셔보는 술이냐. (따지고 보면 사흘밖에 안됐다) 술 욕심이라면 이태백도 울고 간다는 내가 아니던가. 특히 라크(LAKI)라는 술이 손을 자꾸 끌어당긴다. 라크는 포도주를 증류한 뒤 향료를 첨가해 만든 술이다. 잔에 따르면 무색투명한데, 거기에 물을 붓는 순간 우유처럼 부옇게 변한다. 그래서 터키에서는 사자의 젖이란 뜻의 아슬란스투라고 부른다. 터키 아니면 감히 어디서 사자의 젖을 먹어보랴. 중국술이 그렇듯이 독특한 향이 있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도 많다. 그 자리의 젊은 친구들도 한번 맛을 보더니 대부분 찡그리며 내려놓는다. 향도 향이지만 젖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것과 달리 알코올 도수가 40도다. 내가 언제 맛보고 도수 봐가며 술을 마셨더냐. 술이라면 온갖 미련을 떠는 나, 결국 그 한 병을 혼자 몽땅 해치우고 말았다. 그러고도 보너스로 맥주 몇 캔 추가. 이 정도면 차라리 걸신이다. 한두 명 빠지기 시작해서 모두 제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그날 사온 술병들을 대부분 자빠트렸다. 눈을 비비고 보니 새벽 2시. 어제 잠을 설쳤으면 정신 좀 차릴 만하건만 또 일을 저질렀다. K가 화합을 위해 마련한 자리였는데 어쩌다가…. 그나마 다행인 건, 바닷가니 ‘개닭’은 안 울 것 같다. 몇 시간이라도 자봐야지.

카야쾨이 마을로 들어가는 길의 기념품가게. 산 사람은 또 저렇게 살아가는 법.

카야쾨이 마을로 올라가는 길.

카야쾨이로 가다

새벽, 알람에 의지해서 힘들게 눈을 뜬다. 아니나 다를까 몸은 천근만근 속은 울렁울렁이다. 과음한데다 기껏해야 네 시간 밖에 못 잤으니…. 하늘은 청명하고 바다는 저리 아름다운데 내 몸은 고장 난 장난감처럼 뒤뚱거린다. 아침식사는 뷔페식. 아무리 찾아봐도 해장국은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은 술도 안마시나. 이것저것 챙겨들고 식탁으로 갔지만 쓰라린 뱃속은 그 무엇이라도 거부할 태세다. 돌도 씹어 먹는다는 내가…. 스스로가 이렇게 한심할 수가 없다. 여행을 한다는 자가 그리 술에 욕심을 내다니. 체력을 비축하고 시간을 잘 나눠 써야 하는 여행자에게 과음은 금물이다. 마음껏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탐할 바에야 여행자보다는 여유로운 관광객이 되면 된다. 애당초 여행이 목적이었다면 여행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관광을 목적으로 했다면 그에 맞게 즐기면 될 터이다. 이런 땐 라면이나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지만, 그래도 여행자의 철칙을 배신할 수 없어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야외식당은 바다에 이어 테라스처럼 만들어놓아서 풍광이 그만이다. 지중해의 아침은 괜히 배신감을 느낄 만큼 아름답다. 곤두박질친 햇살이 자맥질을 하더니 반짝이는 은빛 비늘들을 잔뜩 건져 올린다. 그 사이로 날렵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영한다. 지중해는 거대한 수족관이다.

돌집들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꽤 높은 건물이었던 듯.

식사를 마치고 첫 번째 목적지인 카야쾨이(Kayaköi)로 향한다. 일명 ‘유령도시(ghost town)’로 불리는 이곳은, 꼭 들러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다. 오래 전 주민들이 떠난 뒤 폐허가 된 마을, 사람 대신 빈집을 지키는 돌덩이마다 눈물을 머금고 있는 곳. 카야쾨이의 슬픈 사연을 말하려면, 거창하게도 세계1차 대전을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에서 잠시 다리쉼 하면서 역사 공부를 좀 해보자.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당시 터키의 주인이었던 오스만제국에서는 한쪽에서 구경하다 떡이나 얻어먹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미 러시아로부터 ‘유럽의 병자’라고 놀림을 받을 만큼 쇠약해진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부의 선택은 엉뚱하게도 독일 쪽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판단 잘못으로 나라를 거덜 낸 게 어디 한 둘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독일의 패망과 함께 사돈 따라 장에 갔던 터키 역시 집도 절도 잃을 처지가 되고 말았다. 생떼같은 젊은이들 수십만 명을 잃은 채…. 결국 패망국으로서 연합국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 했다. 그게 바로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이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와 아프리카 영토 대부분을 잃고 이스탄불 일대와 아나톨리아반도만 달랑 남기게 되었다. 게다가 실질적 주권조차 남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마을의 꼭대기에서 바라본 풍경.

교회로 가는 길.

전쟁이 남긴 또 하나의 비극

이 대목에서 그냥 하늘만 바라보고 있으면 용맹한 돌궐의 후예 튀르크족이 아니다. 세브르 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온 나라가 들끓었다. 분노는 곧 범국민적인 독립운동으로 승화된다. 이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 바로 아타튀르크, 즉 터키의 아버지라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이다. 조금 복잡해지니까 이 ‘위대한 독재자’를 해부하는 건 뒤로 미루기로 하자. 저항이 만만치 않자 연합국들은 스위스 로잔에서 터키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세브르조약을 파기하고 터키의 요구를 반영한 로잔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1923년 7월4일 새 조약은 체결됐지만,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의 비극적 이야기도 이날 시작된다. 로잔조약을 체결할 때, 연합국은 터키의 오랜 숙적인 그리스의 입장을 대변해서 ‘이스탄불이 있는 유럽 쪽 영토를 포기하고 에게해 섬들을 차지할 것인가, 이스탄불을 갖는 대신 인근 섬들을 그리스에게 양보할 것인가’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무스타파 케말은 고심 끝에 섬들을 포기하고 이스탄불을 선택한다. 이에 따라 터키 연안의 모든 섬들은 그리스 영토가 된다. 곧 이어 그리스 땅에 살던 터키인은 터키로, 터키 땅의 그리스인은 그리스 땅으로 돌아오라는 소환령이 떨어진다. 터키에 살고 있던 130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강제로 터키를 떠나야 했고, 그리스에 있던 40만 명의 터키인이 눈물을 머금고 보따리를 싸야 했다.

17세기에 세워진 그리스정교회.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교회의 내부.

손가락을 꼽는 정도의 셈법으로야 얼마나 좋은 일인가. 각자 제 나라에 가서 살게 되었으니.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그들은 그리스국민, 터키국민이라는 이름의 ‘국민’이기 이전부터 자신들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자연인이었다. 누대로 살아왔으며 낳고 자란 땅에서 어느 날 영문도 모르고 쫓겨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누구말대로, 국가가 뭐 해준 게 있다고 태를 묻은 땅을 떠나라는 것인지. 그들은 울면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낯선 땅으로 떠나야 했다. 노인도 아이도 예외 없이 그 행렬 속에 포함됐다. 그렇게 해서 폐허가 된 곳 중 하나가 바로 카야쾨이다. 고증에 의하면 이 골짜기에서는 BC 3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5천년이나 이어온 마을이다. 터키니 그리스니 하는 국가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마을이 사라지기 전, 1922년까지는 3000명의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잘 살았다고 한다. 2개의 교회와 학교가 있었을 정도로 번창한 마을이었다. 가서 살아야 할 나라, 그리스 말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떠난 뒤 아주 오랫동안, 카야쾨이 출신의 그리스 노인들이 찾아와서 울면서 마을을 둘러보고 돌아갔다고 한다. 여우도 죽을 땐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 했던가. 죽기 전에 낳고 자란 땅을 보고 싶었겠지.

부천에서 온 아가씨. 혼자 여행하는 용기가 아름다워 오래 바라보았다.

용감한 그녀를 만나다

차가 카야쾨이로 들어서면서, 원(怨)이 응결된 곳 특유의 음산함이 온몸을 감싼다. 산비탈 가득 회색빛 빈집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마치 영화세트장 같다. 그들은 애당초 왜 넓은 땅을 두고 저 비탈에 집을 지었을까. 유령마을 입구에 두어 곳의 기념품 가게가 있다. 조금은 조악해 보이는 액세서리와 머플러 등을 판다. 남들이 눈물을 흘리며 떠난 자리가 있어 이들은 먹고사는구나. 마을로 올라가는 길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래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남들보다 한발 앞서 걸음을 재촉한다. 대부분의 석조주택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나무는 썩어 없어졌지만 돌들은 비바람 속에서도 긴 세월을 버텨낸 것이다. 얼마나 단단하게 지었는지 페티예대지진도 견뎠다고 한다. 헉헉거리며 걸음을 재촉해 교회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먼저 온 사람이 있다. 어? 동양인 여자다. 우리 일행은 아닌데, 누구지? 도시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동양인을 이 골짜기에서 만나다니. 아니, 동양인이 아니라 분명 한국인이다. 아, 핏줄이란 얼마나 무서운지. 느낌으로 단번에 알아본다. 직감을 믿고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이리 신기할 데가. 젊은 아가씨가 혼자 이 골짜기에 와 있다니. 한OO. 26세. 부천 거주. 그녀의 신상명세서다. 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에 다니며 모은 돈을 모두 해외여행에 쓰기로 했단다. 그 첫 번째 대상이 터키였다. 그래, 잘했네. 세상이 학교지, 그 용기가 대단하다.

시간은 집 안에도 저만한 나무들을 키워놓았다.

돌담을 뚫고 자란 무화과나무.

혼자 다니기 무섭지 않느냐고 물으니, 원래는 일행이 있었단다. 인터넷 여행 사이트에서 만나 같이 떠났는데 몇 곳을 거쳐 오면서 각자 다니기로 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하긴 낯선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려면 혼자 다니는 게 최고다. 버리지 않고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외로움 정도는 감수해야 씁쓸달콤한 ‘나만의 시간’이라는 열매를 딸 수 있는 것. 17세기에 지어진 그리스정교 교회 앞에서 서울에서 온 남자와 부천에서 온 여자가,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듯 긴 얘기를 나눈다. 내 나라, 내가 사는 도시에서 만났으면 그냥 스쳐지나갔을 사람들. 인연은 장소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돌담 사이 오솔길로 떠나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뒷모습이 아름답다. 평생 살아가는데 자양분이 될 수 있는 여행을 하길. 또 홀로 되어 언덕을 오른다. 깃대가 우뚝 솟은 저 건물은 학교였을까? 아니면 촌장이 살던 집? 공회당? 혼자 걸으며 상상 속에 빠진다. 작은 집도 있고 제법 큰 집도 있다. 저쪽, 아슬아슬한 축대 위에 세워진 집에는 누가 살았을까. 저곳에서 태어난 아이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빈 집은 슬픔이다. 슬픔만 차 있는 게 싫었던 걸까. 시간은 집 안 곳곳에 소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심어 키워냈다. 방이었던 곳에서도 부엌이었던 곳에서도 홀로 열려 익어가는 무화과들, 강제로 떠나야했던 그리스인들의 눈물인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던 도마뱀이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이들이 마을의 주인이다.

이름은 모르지만 많이 눈에 띈 식물. 에델바이스인 줄 알았다.

난 유령을 만나고 온 걸까?

내친 김에 마을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보기로 한다. 곳곳에서 낯선 식물들을 만난다. 에델바이스 같기도 한 이 식물의 이름은 무얼까? 어느 집 벽에서 놀던 무지갯빛 도마뱀이 낯선 나그네를 향해 잔뜩 경계의 눈길을 보낸다. 그래, 이제 너희들이 마을의 주인이구나. 너희들은 강제로 쫓겨나지 말고 오래 오래 이곳을 지키렴. 옛날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낭자했을 골목길. 이제는 오솔길이 되어 나그네의 허허로운 발길 아래 게으르게 누워 있다. 갑자기,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걸음을 멈춘다. 이리 저리 둘러보지만 잔뜩 야윈 내 그림자만 어서 가자고 재촉이다. 문득 내려다본 저 아래 세상이 아스라하다. 원래 이곳이 세상이었거늘. 뒤따라 올라왔던 사람들이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나 보다. 누군가 내 이름을 크게 부른다. 분명 내 이름인데도 처음 듣는 듯 낯설다. 그 낯선 이름이 유령처럼 웅웅웅 울며 빈집 사이를 떠돌아다닌다. 뛰다시피 언덕을 내려온다. 버스가 있는 곳에 도착하니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서 있기도 어렵다. 그대로 돌 위에 주저앉는다. 온몸이 목욕이라도 한 듯 땀에 젖었다. 과음과 수면부족 때문이겠지? 아니, 그게 전부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난 정말 저곳에서 유령들을 만나고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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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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