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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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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에 해당되는 글 1

  1. 2012.04.23 [이야기가 있는 사진 15] 산 아래 사는 재미12
2012. 4. 23. 08:30 이야기가 있는 사진

 

 

 

 

3월하고도 24일 아침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한달이 지났군요.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몇몇 지인과 나들이를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휴일인데도 일찌감치 부지런을 떨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주방 쪽에서 비명에 가까운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와!” 혹은 !” 정도까지는 들었는데 그 다음은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내의 목소리는 분명한데, 평소 그리 호들갑스럽지 않은 사람인지라,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어 후다닥! 달려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급박했던 소리와는 달리 그니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뜻밖에 고요한 뒷모습에 대고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새삼스러워 제 시선도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향했지요.

그리고 저 역시 못이라도 박힌 듯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 시야 속으로 기가 막힌 풍경이 달려 들어왔습니다.

인수봉과 백운대가, 아니 북한산 전체가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도심에 하루 종일 내린 비가, 산 위에서는 눈이 됐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북한산에 눈 내린 거 처음 봤느냐고요?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 정도는 겨우 내내 봤지요.

하지만 겨울에 본 풍경과는 완연히 다른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딱 꼬집어 무엇이라고 표현하긴 어려웠습니다.

같은 눈인데 왜 저렇게 달라 보일까.

그러다 깨닫듯 발견한 게 있었습니다.

대비(對比)였습니다.

아직 갈색을 벗지는 못했지만, 온 산의 나무들은 이제 막 새 빛으로 떨쳐 일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하얀 색과, 아직은 느낌만으로 존재하는 푸른색의 대비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 히말라야 어디쯤에서 설산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찬바람은 몰아치는데 추운 줄도 모르고, 베란다 창까지 활짝 열어 제친 채 오랫동안 산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다 기어이 제 입에서 한마디 터지고 말았습니다.

집값 손해 본 거 한꺼번에 다 뺐다

 

북한산과 도봉산의 가운데쯤에 사는 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곤 했습니다.

대체 왜 그 구석에 살아?”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은 첫 인사가 이랬습니다.

아직도 거기서 살아? 집값은 좀 올랐어?”

그럴 만도 했습니다.

교통이 편하길 한가, 집값이 오르길 하나.

집값? 시 경계를 벗어난 의정부보다도 더 싼 곳이 이 동네입니다.

바보들이나 사는 동네 취급을 당하기 딱 알맞았습니다.

그런데도 전 20년 가까이 이 동네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들이 집을 옮겨 다니며 매매 차익으로 쏠쏠한 재미를 볼 때, 저는 집값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입이 찢어지곤 했습니다.

아니, 사실 그것조차도 신경 써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참 무능한 가장입니다.

그러면서 늘 변명처럼 늘어놓는 말이 그거지요.

이 집 팔고 나가봐야 다른 곳에서는 전세도 못 얻어

애들 학교 때문에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제가 이사를 못 가는 이유는 이 동네가 좋아서입니다.

일상이 주는 행복과, 백운대와 인수봉이 눈을 뒤집어쓰고 짠! 하고 나타는 정도의 깜짝쇼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길 하나 건너면 북한산이든 도봉산이든 마음 놓고 오를 수 있습니다.

아파트 뒤가 바로 텃밭입니다.

개천에는 개구리와 도롱뇽이 지천입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이지만, 맹꽁이도 있습니다.

여름 내내 개구리 맹꽁이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듭니다.

지척에 있는, 750년 묵은 은행나무는 아직도 여름이면 아낌없이 그늘을 드리웁니다.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곳이 서울에서 얼마나 있을까요.

저 같은 도시부적응자에게는 하늘이 내린 길지(吉地)’나 다름없습니다.

 

이 정도면 20년 째 무능한 가장을 감수하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저는 여전히 이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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