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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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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01 [사라져가는 것들 87] 바심16
2008. 12. 1. 10:24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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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식(족답식)탈곡기

바심이 무슨 말이지? 궁금한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바심은 타작((打作)과 비슷한 뜻의 우리말입니다.
즉, 이삭을 떨어서 낟알을 거두는 추수의 마지막 과정을 이르는 말입니다.
가을이면 벼뿐 아니라 콩이나 깨, 수수 같은 잡곡도 바심의 과정을 거쳐서 거둡니다.
손바닥만 한 땅을 가진 집은 바심을 가족끼리 하지만, 대개는 모내기나 벼 베기처럼 품앗이를 하거나 놉을 사서 해결했습니다.
바심 자체가 약간의 숙달된 기술과 꽤 여럿의 손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벼 바심은 어느 정도 분업 형태로 진행됩니다.
논에서 벼를 져 나르는 사람, 벼를 털거나 훑는 사람, 갈퀴로 검불을 걷어내는 사람, 털어낸 볏짚을 치우거나 쌓는 사람, 알곡을 자루나 가마니에 담는 사람 등이 있지요.
벼를 져 나르거나 터는 일은 대개 힘 좋은 장정이 하고 검불을 걷어 내거나 볏짚을 처리하는 일은 연장자들이 하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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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이야 바심의 대부분 과정을 기계로 해결하지만,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벼의 탈곡(脫穀, 곡식을 떨어내는 것)은 오직 사람의 노동력에 의지했습니다.
회전식탈곡기와 같은 기계도 그걸 가동하기 위한 동력은 사람에게서 나왔으니까요.
가장 오래된 탈곡방식은 벼훑이(벼훌치라고 읽음)일 것입니다.
그 중에도 나뭇가지 두 개의 한쪽 끝을 동여매어 집게처럼 만들고 그 사이에 벼이삭을 끼워 훑는 방식이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일 자체야 누구든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지만 그 작은 도구로는 ‘세월아 네월아’ 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일단 털어낸 다음 남아있는 낟알을 마저 훑어내는데 주로 쓰였습니다.
또 납작한 쇠살을 나무판에 촘촘히 박고 그 사이에 벼이삭을 끼워서 훑는 그네도 많이 썼습니다.
쇠로 만든 큰 빗처럼 생겼는데 홀태라고도 부릅니다.
훑는 방식에 대비되는 게, 벼를 어디엔가 때려서 알곡을 털어내는 방식입니다.
나무절구 같은 큰 통을 뉘어 놓고 볏단을 새끼로 두른 다음 내리치면 낟알이 떨어지게 되지요.
이 방식 역시 근래까지 많이 쓰였지만 힘과 기술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헛손질하기 십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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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곡도구의 제왕은 누가 뭐래도 회전식탈곡기였습니다.
발로 밟아서 동력을 얻는다고 해서 족답식(足踏式)탈곡기, 혹은 호롱기(돌릴 때 나는 소리에서 나온 이름일 거라고 짐작됩니다)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둥근 통에 쇠를 ^자형으로 박아 넣은 구조인데, 사람이 페달을 밟으면 그 통이 와룽와룽~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통 위에 벼를 대면 알곡이 떨어지게 됩니다.
콤바인이나 트랙터가 보급되기 이전인 70~80년대까지만 해도 족답식탈곡기가 우리 농촌의 바심을 전담했습니다.
다른 도구나 방식에 비해서 군계일학 소리를 들을 만큼 효율적이었지요.
물론 사람이 동력을 발생시켜야 하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발은 페달을 밟고 손으로는 적절한 양의 벼를 대어 털어야하니 쉬운 작업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요.
이 기계는 꽤 비싸서 집집마다 구비할 수는 없었습니다.
논이 많은 부잣집에나 드문드문 있었는데, 소작농이나 소규모 자영농은 돈을 주고 그 기계를 빌려다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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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홀태)

수확은 기쁜 일이지만 아픔도 품고 있었습니다.
부자들에게는 최고의 날이겠지만, 남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들에게는 희비가 뒤섞이는 날이었습니다.
일정한 대가를 주고 빌려 쓰는 남의 논이나 밭을 도지(賭地)라고 하고, 치러야할 대가를 도조(賭租)라고 합니다.
바심을 한 다음 일정량의 곡식을 소작료로 떼 주는 것이었지요.
피와 눈물로 지은 곡식을 바쳐야하는 농부의 가슴은 찢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주의 대리인으로 소작인들로부터 소작료를 징수하는 사람을 마름이라고 합니다.
큰 지주들은 마름을 동네마다 두기도 했지요.
지주의 땅이 있는 곳에 상주하면서 수확량을 조사하고 소작료를 받아 상납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습니다.
소작인들이 바심을 하는 곳에는 마름의 형형한 눈빛이 함께 했지요.
아무래도 마름은 지주의 편에 서서 소작인들을 독려하게 마련이고, 땅을 얻어야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소작인들은 순종할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가끔 과도한 횡포나 갈취로 소작분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조정래 선생의 소설 태백산맥에 마름과 소작인과의 갈등관계가 잘 묘사돼 있기도 하지요.
지주에게 곡식을 떼 주고 나면 소작가구는 1년 먹을 식량이 간당간당하거나 부족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식들 공부시킬 엄두도 못 낼 수밖에 없고 가난은 자연스럽게 세습되었지요.
그렇다고 그 마저 안하면 굶어죽을 판이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갖지 못한 이들의 설움은 깊고도 높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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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깨

가을걷이가 끝난 뒤 빈 논을 뒤지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추수 후 논바닥에 떨어진 벼이삭을 줍기 위한 것이지요.
운이 좋으면 한 바가지씩의 소득이 생기기도 하지만, 매일 운이 따라주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모은 것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양식이 되었지요.
학교에서 벼이삭을 주워오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걷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논이 있는 집 아이들이야 볏단에서 한 주먹씩 뽑아 가면 그만이지만 가난한 집 아이들은 논을 뒤져야 했지요.
콩이나 팥, 메밀 등의 잡곡은 도리깨로 바심을 했습니다.
장대 끝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막대를 가로로 박아서 심을 만든 다음 그 막대 끝에 가늘고 탄력 있는 나뭇가지를 여러 개 달아놓은 것을 도리깨라고 합니다.
밭에서 거둔 곡식을 널어 잘 말린 다음 도리깨로 때리면 껍질이 열리고 알곡이 빠져나오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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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구

바심 도구 중에는 곡식의 쭉정이나 겨 등을 가리는 풍구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위쪽 깔때기 모양의 통에 곡식을 붓고 손잡이를 돌리면 날개에서 바람이 일어 쭉정이를 날려버리는 것이지요.
이제 회전식탈곡기나 풍구는 물론 도리깨조차 보기 쉽지 않습니다.
더 이상 쟁기를 끌 수 없는 늙은 소처럼, 농가 뒷담 아래에서 지나간 세월이나 되새김질하고 있을 테지요.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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