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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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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4.25 [사라져가는 것들 5] 대장간2
2007. 4. 25. 19:01 사라져가는 것들

화덕 있던 자린엔 잡초만 무성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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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살던 마을의 조씨네 대장간은, 거북고개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장장이 조씨의 집이자 일터인 대장간은 누가 파먹고 버린 게딱지처럼 납작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눈 밝지 못한 외지사람은 못 알아보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움막 같은 대장간도 막상 들여다보면 필요한 건 모두 갖추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웃통을 벗어붙인 조씨가 땅땅거리며 쇠를 아우르거나 치익치익 소리를 내며 담금질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담배 한 대를 물고 먼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는 조씨의 모습도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씨익~ 한번 웃어주는 게 조씨의 인사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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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는 홀아비였다. 원래 홀아비였던 것은 아니고, 그의 아내가 어느 날 새벽 갓난아이를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진 뒤 홀아비가 되었다. 어른들이 수군수군 한 이야기를 주워 모아 엮어보면 그랬다. 어른들은 조씨가 좀 모자라기 때문에 그의 아내가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는 꽤 오랫동안 '모자라다'는 말이 '착하다'는 말과 같은 줄 알았다. 대장장이 조씨가 젖동냥으로 키운, 아내가 떨구고 간 혈육은 커서 그의 조수가 되었다. 조씨의 '훌륭한 조수' 만복이는 아이와 동갑이었다. 만복이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대신 대장장이 아버지로부터 풀무질 하는 법이나 쇠 잡는 법을 배웠다.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고 풀무를 돌리는 만복이가 마냥 부러웠다. 하지만 누룽지 따위를 주고 역할을 바꿀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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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주 대장간에 들렀다. 어린 아이가 대장간에 볼 일이 있을 턱은 없었다. 대장간 앞에 멀찌감치 쪼그리고 앉아서 조씨가 일하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는 했다. 아이 눈 속에 들어온 조씨는 마술사가 되었다. 뭉뚱그려지고 닳고 못 쓸 것 같았던 낫이나 괭이나 도끼, 보습이 그의 손을 한번 거치면 날이 씽씽하게 선 새것이 되었다. 아이는 그 과정이 좋았다. 쓸모 없을 것 같았던 쇳덩이가 괭이가 되고 칼이 되는 과정을 보는 건 산수문제를 풀고 국어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파란 불꽃 속에 몸을 담그고 나온 쇠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쇳덩이를 앞에 두고 옷을 벗어 던질 때마다 조씨의 어깨와 팔뚝의 근육들이 아우성치며 일어섰다. 아이는 그럴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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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덕에서 벌겋게 달구어진 쇠를 집게로 꺼내어 모루 위에 얹어놓고 쇠메를 내리치며 모양을 만들어 나갈 땐 오줌이라도 질금질금 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끝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조씨의 작업은 단조롭게 반복되었다. 쇠메질을 어느 정도 하면 물에 담그고, 그것이 식으면 다시 화덕에 넣어 풀무를 돌리고, 그렇게 달궈진 다른 쇠를 꺼내어 쇠메질을 하고….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원하는 모양이 갖추어지면 숫돌에 갈아 날을 세우고 자루를 끼우면 낫이나 도끼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쇠를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 하는 과정 속의 조씨는 마치 신내린 무당 같았다. 아무 잡념도 번뇌도 없는, 무아지경 속에 있는 이처럼 거룩한 얼굴이었다.

아이는 커서 조씨를 떠올릴 때마다, 그는 어쩌면 쇠를 두드린 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두드리고 담금질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살아도 살아도 헛헛하기만  한, 가슴속의 바람구멍 같은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그렇게 두드려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이가 성인이 되어 막연한 그리움을 안고 고향을 찾았을 때 대장간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움막 같던 그의 집과 풀무와 모루, 그리고 조씨와 그의 아들 만복이가 있던 자리에는 풀만 무성하게 자라 바람결에 고개를 휘휘 내젓고 있었다. 그들이 있었다는 존재 자체를 부인이라도 하듯… 어느 시골마을이나 그렇듯 지나다니는 강아지 한마리 없어 그들의 행방을 물을 길도 없었다. 어른이 된 아이는 하릴없이, 이제 이 나라에서 대장장이를 찾기란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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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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