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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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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에 해당되는 글 2

  1. 2012.04.30 [사라져가는 것들 165] 개미마을12
  2. 2007.09.19 [사라져가는 것들 26] 달동네3
2012. 4. 30. 08:30 사라져가는 것들

 

 

개미마을을 다녀온 건 봄꽃들이 막 기지개를 켜던 4월 첫째 주 토요일이었다. 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3호선 홍제역에서 내려 마을버스 7번을 타고 10분쯤 달렸을까? 어느 순간부터 버스는 숨을 헐떡거리며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창밖의 풍경도 조금씩 채색을 바꾼다. 언제 도심을 지나왔느냐고 시침 떼며 묻듯, 납작하게 엎드린 집들이 강낭콩처럼 박혀 있는 풍경이 이어진다. 그리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담장그림들. 허름한 집들과 화려한 그림, 어찌 보면 극단적 부조화다. 그런데 묘하기도 하지. 그 부조화가 유난히 마음을 당긴다. 마을 입구쯤에서 내려야하나 종점까지 가야하나 망설이다가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걸어 올라가는 것보다는 내려오는 게 편할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도 없지 않다. 그동안 개미마을을 몰라서 안 찾아가본 건 아니었다. 이곳이야말로 이름이 제법 알려진 곳 중 하나다. 담벼락에 그림을 그린 뒤로 벽화마을로 알려지면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진쟁이들 때문에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내가 방문을 자꾸 뒤로 미룬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제 모습을 간직한 달동네가 아니라 이미 반은 관광지화 돼 버린 그런 곳 아닐까 하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또 서울에서 숱하게 많은 곳을 돌아다녀봤지만 제대로 된 달동네를 못 찾은 탓에 거의 포기상태였다는 점도 한몫 했다. 달동네라는 곳을 찾아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뷰파인더 안에 멀쩡한 건물이 끼어들거나 아파트촌이 먼저 손을 흔들고 나서기 일쑤였다. 내 사진 속에서 그들의 존재는 천덕꾸러기나 다름없었다.

 

 

해수천식이 골수에 박힌 노인마냥, 골골골 언덕을 올라간 버스가 끄응~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승객들을 내려놓는다. 이 동네에 사는 것으로 보이는 할머니 두어 분, 그리고 나처럼 카메라를 든 남녀 네댓 명. 동네 사람보다는 구경삼아 오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이곳은 정확히 서대문구 홍제39-81번지다. 등산복을 입고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간간히 눈에 띄는 것으로 봐서는 인왕산 등산로 나들머리 중 하나로 짐작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빠른 시선으로 동네를 훑어본다. 순간 내 입이 떡 벌어지고 만다. 이 곳에 삶터를 열고 사는 분들에게는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완벽한혹은 순정(純正)달동네가 내 시선 속에 있다. 이제 이 정도의 달동네는 서울 어디에서도 보기 쉽지 않다. 전남 순천 드라마세트장 윗동네에서 거의 완벽한 상태의 달동네를 본 적이 있지만, 이미 사람이 떠나고 박제돼 걸린 곳이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저만치 시선의 끝머리쯤에 들어서 있는 아파트들조차 그리 거슬리지는 않는다. 이곳이 달동네임을 강조하기 위해 꼭 필요한 소품이 서 있는 것 같다. 대비는 또 하나의 조화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맨 먼저 화장실에 들른다. 달동네에 와서 화장실을 들른다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소변이 급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달동네의 상징에 대한 신고식이기도 하다. 과거 달동네에는 오로지 공중화장실이 있을 뿐이었다. 집에 화장실을 둘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이 달동네에서 살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아침마다 전쟁이 벌어졌다. 한 손에 휴지를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한번 들어간 사람이 영 함흥차사로 나오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벌집 쑤신 듯 아우성이 일기도 했다. 그뿐인가. ‘내가 먼저 왔네, 새치기를 하네고성까지 심심찮게 오고가고는 했다. 하지만 이 동네의 화장실은 이미 과거의 그림자를 말끔하게 지우고 현대식으로 치장돼 있다. 다행이다. 먹는 것도 그렇지만 배설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을 얼마나 치사하게 만드는지. 하지만 이렇게 공중화장실이 번듯하게 지어졌다는 건, 아직도 집에 화장실을 두지 못하는 집들이 많다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소변을 보는데 초로의 남자 하나가 들어온다. 밤새 일을 한 뒤 잠깐 눈을 붙이고 나왔거나, 아니면 아직 알코올 기운에서 해방되지 못한 초췌한 모습이다. 일을 볼 생각은 안 하고 소변기 옆에 설치돼 있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계속 손에 말아 감는다. 저 정도면 열 번은 사용할 분량인데. 하긴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화장실에서 나와 본격적으로 동네 탐색을 시작한다. , 먼저 개미마을의 유래나 현황 정도는 알고 가야지. 이 마을이 서대문구 홍제동에 속해 있다는 소개는 이미 했고, 굳이 따져 말하면 홍제동에서 세검정으로 가는 방향이다. 34,000m²의 면적에 216세대 46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09년 기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언덕에 기대어 살고 있는 셈이다.

 

개미마을이 유래는 6·25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폐허 속을 헤매던 사람들이 이 언덕까지 올라와 천막을 치거나 판자를 엮어 바람을 피하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다른 달동네들이 생기게 된 사연과 그리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인디언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옹기종기 들어선 천막이 서부영화에 나오는 인디언마을 같아서였다나? 누구는 영화에 나오는 인디언처럼 소리를 지르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인디언촌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1983년부터는 개미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주민들이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데, 글쎄 뭔가 좀 인위적인 냄새가 난다. 사실 개미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동네는 이곳 하나만은 아니다. 송파구 문정동이나 종로구 행촌동에도 그렇게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이 개미처럼 모여 사는 마을을 일컫던 보통명사 급의 마을이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맨 꼭대기에서 바라보니 마을 구조는 간단하다. 한 가운데에 큰길(커봐야 차 두 대 비켜가는 것도 허덕거린다)을 중심으로 집들이 양쪽으로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생선가시처럼, 중간 중간에는 작은 골목들이 가지를 치고 있다. 그리고 그 작은 골목의 끝에는 어김없이 가파른 언덕이나 계단이 있다. 어느 계단은 얼마나 길게 뻗어있는지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렵다. 노인들에게는 나들이 자체가 고역일 것 같다.

 

그러잖아도 가끔 눈에 띄는 주민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다. 직업은 상당수가 일용직’. 국민기초생활수급에 삶을 의지하는 사람도 많다. 겨울이면 무엇보다 난방 대책이 가장 큰 문제다. 언덕바지니 평지보다 훨씬 더 추운데 형편상 연탄을 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눈이 와서 얼어붙으면 연탄을 사다 쓰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마침 길 옆에 연탄재 2개와 빈 상자에 담긴 새 연탄 두 장이 눈에 띈다. 분명 낱개로 사다 쓰는 집이리라. 태우고 버린 연탄재는 담장 옆에도 텃밭 가에도 지천이다. 이곳 사람들이라고 모두 자기 집에서 사는 건 아니다. 전세, 월세로 사는 주민이 절반, 나머지 절반이 이곳에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언덕 끝까지 달음질치듯 올라간 집들은 형태도 다양하다. 제법 번듯에 가까운 기와집도 있고 마지못해 흉내만 낸 집들도 많다. 하지만 대개는 세월의 때가 켜켜이 얹혀 있다. 지붕은 요즘 보기 드문 슬레이트가 많다. 원래 기와였던 지붕도, 비가 새다보니 여기 저기 천막으로 때우는 바람에 아예 천막지붕이 돼버렸다. 손바닥만 한 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집도 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들이 많다더니만 전부 일터로 나간 걸까. 오고가는 주민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모처럼 오가는 건 대개 구경삼아 온 사람들이다. 빨랫줄에 줄줄이 걸린 가지각색의 빨래들만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이 마을을 가장 큰 특징은 벽마다 그린 그림이다. 칙칙하고 스산한, 전형적 달동네의 모습이던 이 마을이 환하게 바뀐 건 지난 2009년부터라고 한다. ‘빛 그린 어울림 마을 1라는 작업이 계기가 됐다. 금호건설이 진행했고 서대문구청과 홍제3동 주민센터가 후원했다. 그림을 그린 이들은 건국, 상명, 성균관, 추계예술, 한성대학교의 미술대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마을에 들어와 하나둘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회색빛으로 죽어있던 담장들은 꽃으로 동물로 바다로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났다. ‘환영’, ‘가족’, ‘자연진화’, ‘영화 같은 인생’, ‘끝 그리고 시작등 다섯 개의 주제를 담은 51가지의 그림들이 마을 곳곳에 입주해 새 식구로 자리를 잡았다. 그림들을 따라가다 보면 절로 미소가 나온다. 혓바닥을 내놓고 눈이 감기도록 웃는 개 앞에서 웃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심장에 철판을 깐 게 틀림없다. 엄마와 아기 돼지, ‘반가워라고 말하는 고양이 앞에서는 걸음이 절로 멈춰진다. 담장뿐 아니다. 가파른 계단에도 빨간 마크가 잘 익은 사과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사랑에 상처 받아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도 계단을 전부 오르고 나면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새로운 사랑의 싹이 움을 틔울 것 같다. 대학생들의 그림에 덧칠한 듯한, ‘아무새라는 제목이 붙은 서툰 솜씨의 그림에는 이런 문구도 있다. ‘아름다운 이 세상을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그리고 싶어요. 새로운 세상이 찾아올까요. 그럼 오고 말고그럼 오고 말고, 오고 말고혼자 되뇌며 걸음을 옮긴다.

 

길가에서 만난 수십 개의 화분들은 아직 아무 것도 품지 못했다. 저 화분들의 주인은 누굴까. 작년에는 어떤 꽃들을 피워냈을까? 배추나 상추 같은 푸성귀를 길러 냈을까? 인상이 제법 험악한 얼룩 개와 마주친다. 녀석은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게으르게 잠들었다. 사람이 다가가도 눈만 게슴츠레 뜨고 바라볼 뿐 움직일 생각은 전혀 없다. 험한 인상과 달리 눈빛은 순하기 그지없다. 그럼 너도 과대 포장이구나. 녀석이 경계선을 넘은 내게 조용히 경고한다. 당신 같은 사람 한 두 번 보는 거 아니거든? 제발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가. 그래도 나는 무시하고 셔터를 누른다. 이 동네에서는 그쯤은 용서가 된다. 동네의 중간쯤에서 오른쪽 언덕으로 길을 잡아 올라가니 할머니 한 분이 텃밭을 매고 있다. 일을 나갈 수 없으니 농사에 매달린 모양이다. 밭이라봐야 손바닥만 하지만, 이곳에서 희망도 일구고 가족들의 부식도 가꿔내겠지. 이 동네는 바늘 꽂을 만한 땅도 밭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여린 손을 내밀고 있는 돌나물 군락에는 제비꽃인지 얼레지인지 작은 꽃들이 봄을 노래하고 있다. 저만치 건너편 언덕에는 밭에서 무언가 태우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봄 농사를 준비하는 농촌마을 같다. 언덕에서 내려오니 작은 가게와 딱 마주친다. 등산객 두 명이 툇마루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간판도 없이 담장에다가 동래수퍼라고 써놓았다. 동래수퍼라. 혹시 주인이 부산 동래 출신?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누군가가 작은 글씨로 동래아래에 동네라고 써놓았다. , 원래는 동네슈퍼라고 쓰고 싶었구나. 더욱 정겹다.

 

 

 

음료수라도 하나 살까 싶어 안으로 들어가니 70년대 풍경이 펼쳐져 있다. 마치 영화세트장에 들어선 것 같다. 과자 몇 봉지, 세제 조금, 캔 음료 두어 박스, 간장. 그리고 음료나 맥주를 넣은 냉장고. 그게 전부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진열대는 빈칸이 더 많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소주병 두 개. 저런 소주가 어떻게 아직도 남아있는 건지. 큼직한 두꺼비가 그려져 있고, ‘眞露라고 한자로 써 있다. 물론 개봉한 흔적이 전혀 없는 새 병들이다. 여든 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 물건은 할아버지가 내주고, 몸이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는 앉아서 계산을 한다. 사실 둘이 손을 나눠야할 만큼 손님이 오는 것도 아니지만 오랫동안 그렇게 해온 듯 자연스럽다. 소주병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저런 게 아직도 남아있어요?” 물었더니 대수롭잖다는 듯 대답을 한다. “작정하고 보관한 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아직까지 있네요하지만 분명 어쩌다보니남아있는 건 아니다. 대대로 물려받은 골동품처럼 애지중지하며 자랑스러워한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다. 두 노인이 참 곱다. “어쩌면 그렇게 고우세요대답은 없지만 두 분이 수줍게 웃는다. 아무리 살아내도 곱다는 말만큼 좋은 말이 있을까. 가게를 나와 이리저리 발길을 옮기다가 낯선 간판을 하나 발견한다. ‘(가칭) 홍제3동 개미마을 지역주택조합설립 추진위원회’.

 

재개발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가건물 벽에도 그림꽃들이 피어났다. 이곳도 재개발이냐 보존이냐 문화특구 지정이냐를 싸고 논란이 오고 간지 오래다. 재개발을 주장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맞서는 형국이다. 문제는 워낙 가파른 산자락이고 용적률 확보가 안 되기 때문에 그만큼 경제적 가치가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마을을 다녀온 며칠 뒤 서대문 구청에 문의했더니 개발제한구역에서 지구단위계획지로 풀리긴 했지만 재개발 시행 여부에 대해 별 진전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누군들 시간의 덫을 피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이 마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칠 것이다. 아파트가 들어서든 또 다른 용도로 쓰이든. 주민들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 됐으면 좋겠다. 집집마다 관리번호라는 게 붙어 있다. 105, 106, 107. 하나씩 헤아리며 내려오다가 지붕 위에 누워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고양이들을 만난다. 세상사 따위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뒤로 눕고 옆으로 눕고 엎드리고. 하긴 너희들이 무슨 걱정이 있겠니. 겨울이 온다고 연탄 걱정을 하겠니, 쫓겨나듯이 떠날 걱정을 하겠니. 천천히 걸어 황금색의 봄 햇살이 누추를 감싸는 마을을 벗어난다. 금세 공간이동이라도 한 듯 질주하는 차들과 인파 속에서 비틀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꿈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마을을 돌아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그래, 특별한 기억으로 남길 건 없어. 사람이 사는 마을을 다녀왔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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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9. 19. 18:28 사라져가는 것들

우리에게는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도랑에서 돌을 져왔다. 그것으로 계단을 만들고, 벽에는 시멘트를 쳤다. 우리는 아직 어려 힘드는 일을 못했다. 그래도 할 일이 많았다. 우리는 며칠 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성과 힘 刊)  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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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이름의 유래라고 내놓을 만한 게 변변찮다. 1970년대 말이었던가. '달동네'라는 TV드라마가 꽤 인기를 끈 뒤,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힌 게 아닌가 싶다.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잡은 동네다 보니 달과 가깝다는, 혹은 달이 크게 잘 보인다는 뜻에서 달동네로 불렀을 것이다. 혹자는 '달나라 천막촌'이란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에 차서 말하기도 하지만, 이름의 유래가 그리 중요할 턱은 없다. 달동네가 생기게 된 배경은 대충 거슬러 짐작할 수 있다. 달동네로 대표되는 도시 저소득층 집단주거지의 시초는 일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의 수탈에 못 견뎌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온 이들이, 국유지나 주인이 뚜렷하지 않은 산비탈 혹은 개천가에 무허가로 주거지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빈민계층의 주거지는 해방과 전쟁, 그리고 1960년대 경제개발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 늘어났다. 처음에는 청계천가처럼 '주인 없는' 평지에서 시작해서 산자락을 점차 점령하게 되었다. 도시개발 과정에 도심 판자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에 의해서 이러한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그들에게 산자락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산자락이라고 무한정 있는 건 아니었을 테니 산 중턱, 산꼭대기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도시 빈민층의 집단거주지는 급속도로 확산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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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빈민의 삶이 무조건 불행하기만 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악한 환경 속에서도 내일을 꿈꾸었고 아이들을 통해 희망을 파종했다. 도시유민을 거쳐 자신의 집을 갖는 과정은, 위에 예문으로 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이하 난쏘공)의 "하루하루가 즐거웠다"라는 구절처럼 행복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달동네는 살아가는 모습이 비슷했다. 비좁은 공간에 여러 집이 어깨를 겯고 살아가다 보니 마찰도 있었지만 자연스레 '함께 사는' 동네일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공터는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동네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그 곳에서는 가끔 축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부잣집 동네를 돌다가, 죽은 세퍼트를 얻어 횡재한 고물장수 황씨가 동네사람들에게 한 턱 쏘는 곳도 이 공터였다. 얻어온 세퍼트가 없으면 어떠랴. 소주 몇 병, 막걸리 몇 되로 고단한 일상을 씻어내고 다음날 일터로 나갈 수 있는 의지를 충전하기도 했다. 달동네에는 마음이든 문이든 늘 열려있었다. 연탄 한 장이나 물 한바가지를 놓고 이웃 간에 머리카락 빠져라 싸우는 일도 흔했지만, 속정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깊었다. 어차피 살을 맞대고 사는 가족이나 다를 바 없는 이웃들이었다. 담장이 없거나 낮다보니 서로 감출 것도 없었다. 수제비를 끓이다 이웃이 지나가면 물 한바가지 더 붓고 불러들이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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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무소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승용차도 몇 대 서 있었다. 그곳에는 두 부류의 사람밖에 없었다. 입주권을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이었다. 팔려는 사람들은 초조한 얼굴로 거간꾼들의 눈치만 보았다. 한결같이 영양이 나쁜 얼굴들이었다. 거기서는 눈물 냄새가 났다. 나는 눈물 냄새를 가슴으로 맡았다. (난쏘공, 112P) "헐릴 저희 집 같은 걸 새로 지으려면 백삼십만 원은 있어야 됩니다. 저희 아버지가 평생을 일해 지은 집예요. 우린 그걸루 이십이만 원과 바꾸어야 될 입장예요. 거기서 전세 주었던 돈 십오만 원을 제하고 나면 칠만 원이 남습니다." (난쏘공, 114P)

달동네의 외형적 모습도 국화빵 틀에 찍어낸 듯 비슷했다. 종점에서 버스를 내려 언덕바지를 조금 올라가면 동네 머리를 만나게되고 그 곳엔 그만그만한, 사는데 없어서는 안될 가게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연탄가게, 구멍가게, 잡화점, 전파사, 복덕방, 이발소, 미장원, 세탁소, 솜틀집…. 입구를 들어서면 리어카 하나쯤 지나갈 만한 길이 위를 향해 가파르게 나 있었다. 저녁이면 일터에서 돌아와 밥을 짓는 소리에 동네는 부쩍 활기를 띠고,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골목골목을 달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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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길은 겨울이면 얼어붙기 일쑤여서 연탄재라도 깨트려야 오갈 수 있었다. 봄이 되어 날이 풀리고 바람이 불면 루핑지붕에 연탄먼지가 뿌옇게 앉았다. 달동네 사람들은 부지런했다. 멀리까지 일을 나가다 보니 새벽이슬을 맞으며 집을 나서 밤이 돼야 돌아올 수 있었다. 대부분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그들에게 '부지런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는 건 진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달동네 주민들이 등에 진 '원죄'는 감해지지 않았다. 수십 년을 살아도 그들이 둥지를 튼 곳은 남의 땅이었다. 즉, 무단점유자란 주홍글씨는 세월 따위에 바래는 일은 없었다. 국가든 개인이든 땅 주인이 언젠가는 소유권을 주장하게 마련이었고, 철거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고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강제로 쫓겨나면 다른 곳에 가서 말뚝을 박아야하는 악순환이 거듭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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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나는 이들에게는 아파트 딱지(입주권)나 쥐꼬리만큼의 보상금이 주어졌다. 하지만 한가족이 살아갈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에는 턱없이 비현실적이었다. 설령 임대아파트에 입주한다고 하더라도 아파트에서의 삶은 고리대금업자처럼 비싼 대가를 요구했다. 그래서 하루를 살아내기에 급급한 철거민들은, 그림의 떡 같은 딱지를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별 대책도 없이 탑을 쌓듯 지어 올린 삶의 터전을 등져야했고, 그럴 때마다 삶의 질은 한 단계 더 추락하기 마련이었다. 그나마 집주인은 조금 나았다. 달동네에조차 집 한 채 마련할 능력이 안 되는 세입자들은 이사비용 몇 푼 쥔 채 길거리에 나앉기 일쑤였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목숨을 담보로 한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한 투쟁에도 순수하지 못한 이들이 끼어 들었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본질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쫓아내려는 쪽과 삶의 터전을 잃지 않으려는 쪽의 전쟁은 도시 근대화과정의 역사였다. 이 전쟁의 우위를 점하려는 아파트 건설업체측에서는 '전문가급' 철거용역업체를 동원하기 마련이었다. 한꺼번에 수백 명씩 투입되는 그들은 인정사정 없었다. 극렬하게 저항해보지만 대부분 역부족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엊그제까지 보금자리였던 곳에는 몇 조각 벽돌조각이 구를 뿐이었다. 인명사고도 드물지 않았다. 목숨으로 저항하는 사람도 많았다. 몸에 불을 지르기도 했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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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머니가 싸놓은 짐을 하나하나 밖으로 끌어냈다.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가 조리·식칼·도마들을 들고 나왔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나왔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공구들이 들어 있는 부대를 메고 나왔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 앞에 쇠망치 대신 종이와 볼펜을 든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가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가 바른손을 들어 집을 가리키고 돌아섰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이 집을 쳐부수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달라붙어 집을 쳐부수었다. 어머니는 돌아앉아 무너지는 소리만 들었다. 북쪽 벽을 치자 지붕이 내려앉았다. 지붕이 내려앉을 때 먼지가 올랐다. 뒤로 물러섰던 사람들이 나머지 벽에 달라붙었다. 아주 쉽게 끝났다.
(난쏘공, 123~1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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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철거·분신·딱지… 많은 사람들에게 철거를 둘러싼 분쟁이 아프리카 종족분쟁이나 중동의 종교분쟁처럼 비현실적인 단어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도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우리 이웃, 아니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다. 오늘 빈손으로 떠난 그들은 내일 또 다른 곳에서 신산(辛酸)의 보따리를 쌀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그들이 찾아들어 등 대고 누울만한 달동네도 자꾸 줄어들고 있다. 먼지 날리는 골목과 루핑지붕을 힘겹게 인 게딱지같은 집들이 엎드려있던 언덕, 그곳에는 번듯한 아파트들이 키를 자랑하고 번쩍번쩍 빛나는 차들이 달리고 있다. 뉴타운이라고 이름지어진 그 곳에서 과거 달동네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이름이 바뀐 만큼이나 눈에 보이는 건 모두 바뀌었다. 곳곳의 테니스장이나 골프 퍼팅장엔 행복이 떠다니고, 아파트 사이사이의 산책로는 분쟁 따위를 잊은 지 오래다. 높은 지대라는 흠 때문에 빈민들이 깃들여 살수밖에 없던 그곳이, 이젠 전망이 좋다는 이유로 가진 이들의 각광을 받는다. 어느 동네는 억대의 프리미엄이 붙었다던가. 그 곳 골목에서 발가벗고 뛰어 놀던 아이들이 훗날 찾아가 본다면 흔적은커녕 추억 한 자락 건져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겉모습이 바뀐다고 모든 게 다 사라져버리는 걸까. 높은 굴뚝에 올라가 먼 별로 날고자했던 난장이의 꿈처럼, 그들의 가슴에서 자라던 소망은 아직도 그 곳을 맴돌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의 눈물과 절규가 묻힌 어디쯤엔 옛날처럼 개망초 한 두 송이 몰래 피어나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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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하면서]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전형적인 달동네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 달동네였던 곳도 꼭대기에 올라가 보면 번듯한 집들이 뷰파인더에 잡히기 일쑤였습니다. 저 역시 어느 날 도시의 수레바퀴에 불쑥 끼어 든 '유입민(流入民)'으로, 수십 년을 허덕거리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달동네로 흘러드는 건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달동네의 삶을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피상적으로, 보고들은 만큼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제 무지의 소치로 잘못 기록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다행스런 건 제 글이 아니어도 달동네의 삶을 담은 수많은 소설과 산문, 보고서, 영상자료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념은 못하더라도 기록이 필요한 것은 많습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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