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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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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02 [사라져가는 것들 39] 달걀꾸러미4
2008. 1. 2. 18:42 사라져가는 것들

노인을 만난 건 양평장에서였다. 애초부터 장을 보러 양평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그곳의 한 공원에서 연날리기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른 아침부터 달려간 터였다. 요즘은 연 띄우는 걸 보려면 축제장이라도 부지런히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연날리기대회였다. 그날따라 강변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바람 없는 날의 연이란 휘발유 없는 자동차나 다름 없었다. 아이들은 연을 꼬리처럼 매달고 씩씩거리며 고수부지를 달렸지만, 하늘 턱 밑에도 못 가보고 바닥에 곤두박질치곤 했다. 그래서 '읍내구경'이나 하자는 심사로 고수부지를 벗어났다. 운이 좋았던지 마침 장날이었다. 5일장이야 아무리 돌아다녀도 질리지 않는 구경거리의 진미가 아니던가.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가 튀김도 사먹고 싸구려 옷도 하나 사면서 모처럼 자신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장터에서 나오는 길에 할머니를 본 것이었다. 노인 하나가 사람들이 오가는 복잡한 길가에 신문지 한 장만큼의 전을 펴놓고 있었다. 장터의 난전에조차 진입하지 못하는 잡상인 중의 잡상인인 셈이었다. 전을 폈으니 파는 물건임에는 분명한데 너무도 초라하여 가격을 묻기도 민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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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곡에서부터 오그라든 시금치까지… 그 날 아침 집에서 동원할 수 있는 건 모두 끌고 나온 것 같았는데도 그리 초라했다. 물론 내 눈길을 잡은 건 잡곡이나 채소는 아니었다. 짚을 추려서 엮은 달걀꾸러미에 곧장 시선이 박혔다. 순간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시골에서야 아직도 드물지 않은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전 도시인으로 편입돼 다람쥐처럼 쳇바퀴나 돌리고 있는 처지로서는 뜻밖의 물건을 만난 셈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까짓 달걀꾸러미 하나에 뭘 그리 호들갑이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내게 육친처럼 반가운 사람도 다른 이에겐 낯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게 세상의 이치니까. 쪼그리고 앉아 얼마냐고 물었더니 반색하며 3천 원을 부른다. 놓아먹인 토종닭이 낳은 알이니 몸에도 좋을 거라고 입에 침이 마른다. 나는 꾸러미에 반하고 할머니는 달걀을 자랑하는 '동상이몽'이 이루어진 셈이다. 노인의 말이 그럴듯한 게, 달걀이 보통 것들의 2/3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한 꾸러미면 열 개니 하나에 300원인 셈이다. 비싼지 싼지 가늠도 해보기 전에 누가 뺏을세라 덥석 돈을 치른다. 운도 좋지, 우연히 들른 장터에서 달걀꾸러미를 만나다니. 튼튼한 계란판이 남아도는 세상에 아직도 이런 게….

초등학교 2학년이나 3학년이었을 것이다. 앞에 앉은 아이의 등판으로 통통한 이 한 마리가 고물고물 기어다닐 만큼 따뜻한 봄날이었다. 그런 날에 공부를 해야한다는 건 고역이었다. 허파에 봄바람을 가득 채우며 들판을 달리고 싶었다. 공부보다는 하품에 더 열중하던 끝에 수업은 끝났다. 하지만 소망대로 운동장으로 달려나갈 수는 없었다. 그 날은 대청소 날이었다. 난 유리창을 닦는 당번이었다. 유리창에 매달려 하아하아~ 입김을 불고 있는데 느닷없이 비명소리가 들렸다. 교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물 쪽이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우물물을 쓰고 있었다. 간혹 펌프를 놓은 곳도 있었지만 청소를 하기 위한 허드렛물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퍼서 썼다. 우물은 꽤 깊었다. 물길이 잡힐 때까지 판 다음 '노깡'이라 부르던, 시멘트 토관을 박아 넣었다. 비명은 예사롭지 않았다. 청소를 하던 아이들이 쏜살같이 우물가로 달렸다. 우물가에는 아이들 몇 명이 울면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물을 길어 올리던 남자아이가 우물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우리 반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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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들로는 뭘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짐승의 아가리처럼 컴컴한 우물을 들여다보며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그때 교무실 쪽에서 선생님이 맨발로 달려왔다. 선생님은 주변에 있던 긴 끈을 집어 한쪽 끝을 기둥에 묵고 한쪽 끝을 허리에 묶더니 줄을 타고 우물로 들어갔다. 우물 안은 이끼가 끼어 무척 미끄러워 보였다. 하지만 선생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손에 땀을 쥐는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우물에 빠졌던 아이의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이어서 선생님이 올라왔다. 무사한 두 사람을 보며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다음날 수업시간에 허름하게 차린 아주머니 한 분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섰다. 칠판에 글씨를 쓰던 선생님이 돌아서며 어찌 오셨냐고 묻자 쭈뼛쭈뼛 대답을 망설였다. "지가 **이 에민디유, 선상님이 물에 빠진 우리 애를 살려주셨다고 혀서…" 전날 우물에 빠졌던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러면서 손에 든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아이들의 시선은 모두 그 손으로 쏠렸다. 허름한 보자기로 싼 달걀꾸러미였다. "보답을 혀야 쓰것는디, 집에 이것밖에 웂어서…." 친구 어머니의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선생님은 머리에 화로라도 뒤집어 쓴 듯, 펄펄 뛰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녀는 달걀꾸러미를 교탁 위에 놓고 도망치듯 교실을 나갔다. 아! 달걀 한 꾸러미. 생각해보면 그건 그냥 달걀 꾸러미가 아니었다.

그 시절만 해도 달걀은 '귀한 것' 중 하나였다. 어지간한 집에서는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이나 밥상 위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달걀은 현금 대신 쓰였다. 그래서 비상시를 위해 아껴둬야 했다. 아이들이 학용품을 사야하거나 미술준비가 필요할 때 어머니는 돈 대신 달걀을 내밀었다. 평소에는 쌀독 깊은 곳에 하나 둘씩 모았다가 열 개, 스무 개가 차면 꾸러미로 만들어 돈을 사거나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고는 했다. 물에 빠졌던 아이의 집에서도 그렇게 아끼고 아껴 모았던 달걀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가장 귀중한 그것을 자식의 목숨을 구해준 선생님께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긴 다른 것을 드리고 싶어도 그럴 만한 게 있을 리 없는 살림이었겠지만…. 양평장에서 만난 할머니와 그 앞에 놓인 달걀 꾸러미 위에 40년 전 교실의 풍경이 겹쳐졌다. 이상하게도 시야가 자꾸 흐려졌다. 그 시간 이후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모두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결국 입을 떼지 못하고 돌아섰다. 다 팔아도 몇 만원이 안 될 것 같은 물건을 앞에 놓고 떨고있는 노인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면 죄가 될 것 같았다. '사라져가는 것'의 자료를 확보하는데는 실패한 셈이다. 하지만 장을 벗어나는 내내 시선은 뒷꼭지에 가 있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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