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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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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08 [사라져가는 것들 75] 외나무다리10
2008. 9. 8. 13:13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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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책보를 등에 비껴 메고 단단히 묶는다. 이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연다. 숨소리라도 들릴세라 까치발이 조심스럽다. 문을 열다말고 뒤를 한번 돌아본다. 동생은 아직 깊이 잠들어 있다. 쌔근쌔근 숨소리가 고르다. 오늘은 잘하면 성공할 것이란 생각에 살짝 한숨을 내쉰다. 문을 열자 밤산 꼭대기에서 기다리던 해가 쏘아낸 화살들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 바람에 동생이 몸을 한번 뒤척인다. 아이는 흠칫하면서 얼른 마루로 나가 문을 닫는다. 마루를 지나 토방 댓돌에 놓인 검정고무신을 꿰어 찰 때까지도 고양이걸음이다. 개수통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던 할머니가 그러는 아이를 보고 쓴 웃음을 깨문다. 신발을 신자마자 아이가 마당을 가로질러 사립문 쪽으로 달음질친다. 문만 벗어나면 무사탈출에 성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리 자비롭지 못하다. 아이가 사립문을 미처 벗어나기도 전에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동생이 쏟아지듯 튀어나온다. 동시에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절규가 함께 터진다. “오빠! 안 돼. 가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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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겨울부터 시작된 아침 행사다. 병이라고 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꽤 심각한 증세다. 일이 시작된 계기는 그랬다. 방학을 하기 전이니까 11월이었을 것이다. 아이는 전날 저녁부터 몸살에 시달렸다. 열이 오르고 목이 부었다. 하지만 학교에 빠지면 벼락이라도 떨어지는 줄 아는 아이는 기어코 집을 나섰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광고라도 하듯, 바람이 유난히 극성스런 아침이었다. 마당가의 감나무 빈가지가 무당 손에 잡힌 신대처럼 연신 몸을 떨었다. 문제는 마을과 학교 사이를 가로 지르는 비끄내(斜川)를 건너는 것이었다. 그리 넓은 내는 아니었지만 수량은 제법 많았다. 내를 건너는 수단이라야 윗동네의 징검다리와 마을 앞의 외나무다리가 전부였다. 시멘트다리가 그리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그나마도 큰비라도 오면 떠내려가기 때문에 해마다 새로 놓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비껴서는 것도 불가능할 만큼 좁은 다리였다. 여름엔 첨벙첨벙 그냥 건너고 한 겨울엔 얼음 위로 건너면 됐지만, 나머지 계절엔 없어서는 안 될 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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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외나무다리에 다다랐을 때 주변엔 찬바람만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징검다리로 건너려면 한참 걸어야 하기 때문에 주로 외나무다리를 이용한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학교로 간 모양이었다. 겁이 좀 많은 아이에게는 평소에도 무서운 다리였다. 다리 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이상하게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지러웠다. 평소에는 들어가서 멱도 감고 물고기도 잡는 내건만 다리를 건널 때는 물이 열 길 스무 길이라도 되는 듯 공포가 밀려왔다. 그래도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아이는 조심스럽게 다리 위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감나무 가지를 흔들고 냇둑의 미루나무까지 흔든 다음 들판을 달려온 바람은 거세게 아이 몸을 떠밀었다. 그러잖아도 전신을 태울 것 같은 열로 몸을 가누기 힘든 판에, 바람까지 불어대니 죽을 맛이었다. 중간쯤 건넜을 때였다. 갑자기 돌풍으로 변한 바람이 휘익~ 하고 아이의 몸을 때렸다. 순간 아이가 기우뚱하더니 다리 밑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뼈까지 파고들만큼 찬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는 게 아이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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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정신을 차린 건 그날 저녁이었다. 마침 지게를 지고 이른 나무를 가던 영천이 아버지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발견하고 뛰어 들어 건졌다는 것이었다. 금세 들쳐 메고 집으로 갔지만 아이는 정신을 놓은 다음이었다. 어른들은 까딱하면 황천을 건널 뻔했다고 혀를 끌끌 찼다. 무릎도 차지 않는 물에서 발버둥 한번 못 치고 죽을 뻔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뒤로 동생의 그런 증세가 나타났다. 제 오빠를 잃을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축 늘어진 아이가 업혀 들어오고 어른들이 비명을 지르는 걸 지켜보면서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던 모양이었다. 이 세상에서 제 오빠가 가장 귀한 줄 아는 아이였다. 그래서 학교에 가는 걸 질색했다. 학교를 가려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하니, 잘못하면 죽을 거라는 것이었다. 알아듣게 설득하고 어른들까지 나서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한바탕씩 홍역을 치렀다. 없으면 안 되는 외나무다리가 누구에게는 그렇게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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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는 대지를 적시며 흐르는 내가 많은 만큼 다리도 많았다. 튼튼하기로는 그나마 돌다리가 낫지만 돌이라고 어느 동네나 지천인 건 아니었다. 돌 하나 없이 모래만 있는 내나 강도 많다. 큰 돌이 없어 징검다리를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큰 다리를 놓을 역량도 안 되는 마을에서는 통나무를 반으로 켜서 나무다리를 놓았다. 제재술이 좋은 요즘이야 매끈한 다리 하나 만드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겠지만 옛날에는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통나무를 대충 손질해서 걸쳐놓았으니 무섭고 위태로운 건 말할 것도 없다. 널빤지를 여러 장 잇거나 작은 통나무를 겹쳐서 비교적 넓게 놓은 나무다리도 있었지만 그리 흔치 않았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어느 곳에서는 흔들흔들 춤을 추기 마련이어서 바람만 세게 불어도 일쑤 내로 떨어졌다. 지게를 지고 가던 나무꾼도 모시옷에 단장을 짚은 점잖은 어르신도 눈 깜짝할 새에 강물로 곤두박질했다. 앵두꽃 피던 봄날에 담봇짐을 쌌던 순이가 추석이라고 ‘삐딱구두’ 신고 돌아오다 곤두박질친 이야기는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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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높지 않으니 떨어져도 다칠 일은 없지만 구차하기 짝이 없었다. 여름엔 옷을 훌훌 털어 입고 가면 되지만 겨울에는 얘기가 달랐다. 겨울이라고 내내 물이 얼어있는 것은 아니니 찬물에 옷이 흠뻑 젖을 때가 많았다. 허우적거리며 탈출 해봐도 옷은 꾸닥꾸닥 굳어가지 몸은 얼어붙지…. 섶다리나 징검다리가 그렇듯 외나무다리도 질서와 기다림을 가르쳐주는 존재였다. 저쪽에서 어른이나 여자, 아이가 건너오면 기다렸다가 건너는 게 예의였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볼상놈’으로 따돌림 받기 일쑤였다. 기다림의 가치를 안다는 건 세상살이에 얼마나 도움이 되던지. 동네에 따라서는 중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걸 해결해보려고 궁리 끝에 ‘비켠다리’를 만들기도 했다. 가운데쯤에 다리 한 칸을 덧붙여 잠시 비켜설 수 있게 만든 다리였다. 외나무다리가 있던 풍경, 가만히 떠올려 보면 가슴 한 편에 갈무리해뒀던 아픔과 웃음이 함께 걸어 나온다. 깊은 골을 지나다 외롭게 서 있는 외나무다리를 만나면 오랫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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