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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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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13 [사라져가는 것들 106] 구들장논24
2009. 4. 13. 09:23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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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섬 청산도에는 뭍에 없는 것들이 많다. 그 중 하나가 구들장논이다. 구들장이면 구들장이고 논이면 논이지, 그 이질적인 것들을 어찌 합쳐 놓느냐고 따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따질 정도면 우리의 옛것을 많이 아는 사람이다. 구들장 자체가 금시초문일 요즘 젊은이들이야 아예 의문을 가질 일도 없을 테니. 구들장은 ‘방고래 위에 깔아 방바닥을 만드는 얇고 넓은 돌’을 말한다. 난방이나 취사를 나무(火木)에 의지해야했던 과거에는 집을 지을 때, 일정한 간격으로 흙 또는 돌을 쌓아올려 방고래를 만들고 그 위에 넓은 돌을 걸쳐놓았다. 그것이 구들장이다. 구들장 위에 흙을 발라 틈을 막고 장판을 깔아야 비로소 온돌방이 완성되는 것이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뜨거운 연기가 방고래를 따라가면서 구들장(방바닥)을 달구고 굴뚝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달궈진 구들장은 어지간하면 새벽까지 온기를 품는다. 이런 구들장용 돌을 방이 아닌 거친 땅에 깔고 그 위에다 흙을 덮어 농사를 짓는 논을 구들장논이라고 한다. 구들장논은 일종의 다랑논(다랭이논, 다락논)이다. 다랑논이 도저히 논을 만들 수 없는 비탈지형에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만든 논이라면 구들장논은 그보다 더 척박한 곳에 만든 것을 말한다.

자갈이나 모래로 이뤄진 땅은 물이 쉽게 빠져나가기 때문에 논을 꾸밀 수 없다. 하지만 쌀이 있어야 삶을 이어갈 수 있고, 그 쌀을 생산하기위해서는 논이 있어야 했다. 이 나라의 농부들이 누구인가. 척박한 땅을 어떻게 논으로 만들까 궁리한 끝에 찾아 낸 해법이, 구들장 같은 넓은 돌을 바닥에 깔고 이음새를 찰흙으로 메운 다음 그 위에 흙을 까는 것이었다. 이것이 소위 구들장논이다. 이렇게 하면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주기 때문에 쌀농사를 지을 수 있다. 이 구들장 논이 많은 곳이 청산도다. 초분 편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청산도는 땅 거죽을 벗겨내면 온통 돌이다. 그러니 땅은 있어도 논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사방이 온통 바다니 어족자원은 많았지만, 사람이 물고기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 더구나 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어부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구들장논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도 청산도에 있는 논의 30% 정도가 구들장논이라고 한다. 섬의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비탈마다 늙은 농부의 주름살처럼 정렬한 논들을 볼 수 있다. 60도 이상의 급경사에 만든 논도 많다. 어느 곳은 사람 두어 길 높이로 돌을 쌓았다. 구들장논의 아래에는 수로를 내었다. 비가 많이 올 때 물이 잘 빠져 흙이 떠내려가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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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물어 구들장논이 가장 많이 남았다는 부흥리로 간다. 어디를 둘러봐도 다랑논이다. 키 재기가 재미있어질 만큼 자란 마늘과 보리들이 초봄의 찬란한 빛을 한 아름씩 안고 있다. 저 평화로움 속에 얼마나 많은 애환이 배어있을까. 동네는 조용하다. 집집마다 짱짱한 돌담을 두르고 있다. 논밭을 일구는 과정에서 나온 돌일 것이다. 돌담 사이로 골목길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어쩌면 백 년 전의 어느 골목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까지 든다. 골목을 이리 저리 헤매다 중간쯤 어느 집에서 아기를 업고 있는 아주머니를 만난다. 시집 간 딸네집이라도 들르러 온 듯 도회지풍의 차림이다.
“이 동네에 구들장논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구들장논이요?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저기로 쭉 올라가면 마을회관이 있으니까 거기 가서 물어보세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약간의 걱정으로 바뀐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마을회관까지 터벅터벅 올라간다. 회관 앞도 조용하다. 짐짓 목소리를 돋워 “계십니까?” 불러보다가 그대로 문을 민다. 순간 뜻밖의 풍경에 멈칫, 뒷걸음질을 친다. 노인들이 방안 가득 앉아있다. 바깥노인들은 큰 상 서너 개에 둘러 앉아 무언가 맛있게 먹고 있고 안노인들은 솥에서 연방 음식을 퍼 나르고 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점심 무렵이다. 조금 전에 아침 겸 점심을 챙겨먹은지라, 내 배 부르다고 때를 잊은 것이다. 식사시간에 남의 집 문을 두드리다니…. 하지만 이미 늦었다.

“구들장논을 찾아서 왔습니다만….”
얼떨결에 찾아 온 목적부터 털어놓는다. 노인들의 시선이 낯선 사내에게로 쏠린다. 그런데 바라보기만 할 뿐 누구 하나 선선하게 입을 열지 않는다. 문 앞에 머쓱하게 서 있는 게 딱해보였는지 문가에 앉은 노인이 대답 아닌 대답을 한다.
“구들장논…? 뭐, 논은 그렇다 치고 들어오슈.”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벌써 점심을….”
“아니긴 뭐가 아녀. 밥 때 온 손님을 그냥 보내는 법은 없소. 일단 들어오슈.”
나름대로 버틴다고 버텨보지만 다른 노인들까지 거들고 나서는 바람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선다. 하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냥 돌아설 수도 없다. 바닥에 앉기도 전에 상이 펴지더니 음식이 날라진다. 커다란 양푼에 담겨 나오는 걸 언뜻 보니 팥죽이다. 동지 지난지가 언젠데 웬 팥죽이? 그나저나 큰일이다. 금방 밥을 먹었는데 이걸 어느 공간에 처분한담. 하지만 지금 와서 못 먹는다고 버틸 수도 없는 일. 그래봐야 죽인데…. 하지만 수저를 그릇에 넣는 순간 절망의 비명이 목에 걸린다. 팥죽이 아니라 팥칼국수다. 팥죽에 칼국수를 걸죽하게 넣고 끓인…. 피할 수 없을 땐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 밀어 넣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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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허리 꼿꼿한 나그네에게 독상을 내준 안노인들은 바닥에서 식사를 한다. 같이 하시자고 여러 번 권해보지만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든다. 손님 대접하는데 그런 법이 없다는 뜻이다. 객에게 정성을 다하는, 우리네 인심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청객에겐 영 바늘방석이다. 빠른 속도로 칼국수 한 그릇을 비워버린다. 그 사이에 노인들도 대부분 식사를 마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구들장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어쩌면 일부러 피하는 기색까지 느껴진다. 난감한 일이다. 마음 좋아 보이는 노인 한 분이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갈 때 얼른 따라가며 묻는다.
“어르신, 어디에 가면 구들장 논을 볼 수 있습니까?”
“지금 그런 게 있나? 뭐 다 옛날 얘기지.”
역시 대답하기를 꺼려하는 기색이다.
“이 동네에 많이 있단 얘기를 듣고 왔는데요.”
“옛날, 어렵던 시절에나 그런 걸 만들었지. 그냥 다랭이논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나마 몇 해 전 큰물이 나면서 많이 떠내려갔어.”
노인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니 큰물이 지나간 흔적을 미처 다 지우지 못했다. 새로 석축을 쌓고 있지만 전쟁의 잔흔처럼 어지럽다. 그 위쪽에 있는 다랑논들은 묵정논이 되어 무성한 잡초를 키우고 있다. 한눈에 봐도 구들장논들이다.

 목숨 걸고 만든 논이 묵어 자빠질 만큼 세상이 바뀐 것이다. 눈을 감고 장면 하나를 그려본다. 사람 키보다 높은 석축을 쌓고 바닥을 고르고, 구들장을 하나하나 놓고 흙을 퍼다 놓고…. 그렇게 만들어진 손바닥 만 한 논. 육체노동을 해본 사람은 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엄청난 고난이었을지.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놓아도 뭍의 기름진 논처럼 소출을 많이 내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돌 위에 흙을 다져 쌓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흙이 두텁지 못하니 물을 제대로 머금을 수 없고, 양분도 쉽게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청산도 농부들은 이모작을 해냈다. 그러려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을까. 구들장논에 대한 취재는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사진을 제대로 못 찍었으니 별 소득 없이 끝난 셈이었다. 마을회관을 떠나기 전 한 노인에게 “섬 홍보물에는 구들장하고 수로 사진이 있던데요?”하고 물으니 “외지 사람들 보여준다고 만들어놓은 건데 그나마 떠내려갔소.”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 순간 더 이상 찾아다니는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 보면 구들장논은 유형보다는 무형의 유산에 가깝다. 논이라는 형태보다는 그 안에 배어 있는 피와 눈물과 척박했던 삶이 의미하는 바가 더 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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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삼아 온 외지사람들에게는 신기하고 아름다워 보일지 몰라도, 섬사람들에게는 배고픔과 고난의 상징이 구들장논이다. 논을 만드는 과정의 고통을 몸으로 겪은 농부라면 그 결과물을 구경거리로 내놓고 싶지 않을 것이다. 큰물에 얹혀서 사라졌든 아니면 일부러 안 보여준 것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진정 아쉬운 것은 사라져가는 구들장논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들과의 이별이다. 그분들이 세상을 떠나면 투박한 말투로 나그네를 주저앉혀, 나무 등걸처럼 거친 손으로 칼국수를 퍼주는 인정은 다시 보기 어려울 테니….



초분의 경운기할아버지에 이어, 구들장논을 취재하는 과정에서도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뭍으로 돌아와 사진을 체크하던 중에, 구들장논의 흔적을 찍은 부분은 모두 하얗게 날아간 것을 발견했습니다. 굳이 기계적 설명을 하자면 카메라의 조리개우선모드가 셔터우선모드로 돌아가 빛이 과다하게 들어갔다는 것인데(그것도 저 홀로), 수년간 전국을 헤집고 다니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도착한 다른 마을에서 공동우물을 찍은 사진은 다시 멀쩡했습니다. 이런 저런 일로 구들장논은 제대로 된 사진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한 번 더 다녀가라는 뜻이었을까요?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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