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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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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09 [사라져가는 것들 97] 쥐불놀이14
2009. 2. 9. 10:55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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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곡(哭)할 노릇이었다. 누구 눈에 띌세라 그렇게 꼭꼭 숨겨뒀건만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아이는 뒤란을 몇 바퀴째 돌고 굴뚝 주변을 이 잡듯 뒤지면서도, 눈앞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깡통이 사라진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감춰둔 깡통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일이었다. 그게 어떻게 해서 얻은 물건인데….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무렵, 아이가 된통 앓아누운 적이 있었다. 처음엔 감기인줄 알고 가볍게 지나쳤는데, 날이 갈수록 심해지더니 결국은 사경을 헤맬 지경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눈을 번쩍 뜨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복숭아통조림 하나만….” 죽어가던 아이가 깨어난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난데없이 통조림을 달라니. 어른들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지 뭔 일은 못하랴 싶어서 통조림을 사다 먹였더니, 그길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정작 앓고 일어난 아이에게 복숭아든 포도든 내용물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건 깡통일 뿐이었다. 아이는 기운을 차리자마자 깡통에 구멍을 뚫고 철사를 매달았다. 그리고 그걸 굴뚝 옆 멍석 사이에 잘 감춰두고 쓸 날이 오기만 기다렸다. 겨울아, 빨리 와라, 깡통 없던 작년의 설움을 갚아 주리라.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쓸 때가 되니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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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에서 깡통이 얼마나 귀한 물건인가는 그런 곳에 살아본 사람만 안다. 겨울만 되면 아이들은 굼벵이를 찾아다니는 암탉처럼 코를 땅에 박고 쏘아 다녔다. 그렇다고 없는 깡통이 땅에서 솟을 리도 없건만…. 잃어버린 깡통 때문에 실의에 빠진 아이가 저녁을 먹고 냇가로 갔을 때 다른 아이들은 쥐불놀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불이 제대로 붙지도 않은 나무를 대충 구겨 넣고 깡통을 돌리느라 씩씩거리는 성급한 녀석도 있었다. 부러움이 가득 찬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이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멎었다. 유난히 눈에 띄는 깡통이 하나 있었다. 아, 병구 녀석이 들고 있는 저 깡통!!!! 틀림없었다. 황도복숭아가 그려져 있고… 나란히 구멍을 뚫은 것 하며… 바닥에 엎드린 채 후후 불며 불을 붙이기에 여념 없는 병구에게 아이가 다가갔다.
“야, 조병구. 너 그 깡통 어디서 났어?”
“왜 임마. 울 아버지가 줬다. 그걸 네가 왜 물어?”
“너 그거 우리 집 굴뚝에서 가져왔지? 내가 만들어 놓은 거 훔친 거지?”
“뭐, 이 자식아? 이렇게 생긴 깡통이 네 거 하나야? 누굴 도둑으로 몰고 있어. 죽어볼래?” 두 아이가 치고받으며 냇둑을 뒹굴기 시작했다. 산 위로 얼굴을 내밀던 달이 씨익 웃으며 구름 속으로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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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불놀이는 우리의 풍습이자 놀이였다. 농촌에서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서 논두렁에 불을 놓았다. 농작물을 축내는 들쥐를 잡고 마른 풀에 붙어 있는 해충의 알을 태워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풍습이 일종의 놀이로 발달한 것이 쥐불놀이인데 대보름 밤에 절정을 이뤘다. 겨울이 지나갔으니 한바탕 놀고 농사를 시작한다는 준비이자 선언이었던 셈이다. 또 민간신앙에 기반을 둔 기복적인 의미도 있었다. 농촌에는 보름날 불을 놓으면 잡귀를 쫓고 액을 달아나게 하여 1년 동안 탈 없이 지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달집태우기 역시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보름날이면 남정네들이 들로 나가 밭두렁‧논두렁에다 짚을 깔아 놓았다가 해가 지면 일제히 불을 놓았다. 동네마다 거의 비슷한 시간에 불을 놓기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불길이 일어나 장관을 이뤘다. 이것을 쥐불놀이(鼠火戱)라 했다. 이 쥐불의 크기에 따라 그해 농사가 풍년일지 흉년일지를 가늠하고 마을의 길흉을 점치는 풍습이 있었다. 따라서 마을마다 서로 불길을 크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쥐불싸움’이 되기도 했는데, 불의 기세가 큰 마을이 승리하는 것이었다. 한쪽 마을의 불이 왕성하면 쥐들은 기세가 약한 쪽 마을로 몽땅 쫓겨 가게 된다고 믿었다. 자정이 되면 사람들은 모두 마을로 돌아가지만, 들판에 놓은 불은 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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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쥐불놀이는 논두렁 태우기 풍습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놀이였다. 이른바 ‘깡통돌리기’인데 일종의 합법적 불장난이었던 셈이다. 아이들은 겨울이 깊어지면 대보름 전부터 깡통돌리기를 하고 놀았다. 설 무렵이 되면 지난해 갈무리해뒀던 깡통을 찾아내거나 새 깡통을 구해서 구멍을 숭숭 뚫고 철사를 매달아 손잡이를 만들었다. 좀 더 멋진 깡통, 좀 더 관솔이 많이 들어가는 깡통을 구하기 위해 아이들은 노심초사였다. 깡통돌리기의 연료로는 관솔이 최고였다. 부지런한 아이들은 가을부터 조금씩 모아두기도 했다. 장작을 잘게 쪼갠 것이나 솔방울도 많이 쓰였다. 잘 마른 쇠똥을 쓰는 아이들도 있었다. 쇠똥은 불을 붙이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한번 붙고 나면 오래 타고 불땀도 좋았다. 불이 붙은 나무를 꽂아 넣거나, 깡통에 밑불을 놓고 그 위에 나무를 채워 빙빙 돌리면 처음엔 연기가 솟다가 어느 순간 불꽃이 날름날름 혀를 내밀었다. 쉭쉭~ 소리를 내며 깡통이 돌아갈 때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을 맛볼 수 있었다. 불을 제대로 피우지 못했거나 돌리는 힘이 시원치 않으면 중간에 꺼지기도 했다. 그런 땐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집에서 쓰려고 만들어 놓은 숯을 몰래 가져오는 아이도 있었고, 빨리 불을 붙여보겠다고 석유를 훔쳐다 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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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밤, 아니 달빛이 풍성한 밤이라도 마찬가지였지만 여러 아이들이 나란히 서서 깡통을 돌리는 광경은 불꽃놀이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인공의 불빛이 잘난 체만 하지 않으면 그 어떤 불빛도 사람의 가슴에서 희망이 되는 법이다. 깡통을 돌리는 방법도 다양했다. 처음에는 일정한 원을 그리며 1자 형태로 돌리다가 속도를 빨리하기도 하고 늦추기도 하고, 조금 능숙해지면 머리 위로 원을 그리며 수평으로 돌리기도 하고 누운 8자를 그리기도 했다. 오랜 세월 연마한 고수들은 손 바꿔 돌리기, 가랑이 사이로 손 바꿔 돌리기처럼 신기(神技)에 가까운 기술을 구사했다. 그러다가 원심력이 극에 달했을 때 깡통을 놓아버리면 깡통은 불티를 날리며 멀리 날아갔다. 그 깡통이 바닥에 떨어져 불꽃을 피워 올릴 땐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판을 울렸다. 깡통돌리기는 보통 냇둑이나 논두렁에서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뒷산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나무 없는 민둥산이 많던 시절이었다. 물론 어른들은 성화였다. 산불이 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농촌에 가도 쥐불놀이를 보는 건 쉽지 않다. 시골길을 지나다 들판에 연기가 나서 달려가 보면 등 굽은 노인이 논두렁을 태우고 있을 뿐이다. 저분들마저 떠난 뒤, 언젠가는 쥐불놀이라는 단어조차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쓸쓸히 발길을 돌리곤 한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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