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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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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에 해당되는 글 2

  1. 2011.04.25 [사라져가는 것들 159] 내매교회
  2. 2011.04.13 [사라져가는 것들 158] 금강마을8
2011. 4. 25. 10:25 사라져가는 것들

헛헛한 마음으로 내성천 강변길을 오른다. 알게 모르게 강은 원래의 형태를 잃어 가는 중이었다. 하류 쪽의 모래를 얼마나 퍼냈는지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다리의 교각은 뿌리까지 드러낸 흉한 모습이다. 금강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댐에 물이 차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저 강은 자신이 물에게 길을 열어주는 통로가 아니라 물을 가두는 감옥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무거운 발걸음으로 찾아가는 곳은 경북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의 내매라는 작은 마을이다. 영주시에 속해 있지만 봉화에서 20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 그곳에 105년 역사를 지닌 내매교회가 있다. 물론 곧 수몰될 위기에 처해 있는 곳이다. 이 골짜기에 100년도 더 된 교회가 있다니. 좁은 다리를 위태롭게 건너 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열한 시가 조금 넘었다. 빨간 벽돌의 아담한 교회 건물이 빨려들 듯 눈에 들어온다. 높은 종탑과 작은 부속건물이 둘, 비교적 단출하다. 큰 마을도 아니고 아무리 둘러봐도 그 옛날 교회가 터를 잡을만한 곳은 아니다. 일요일, 예배시간이라 교회 주변은 고요하다. 교회 옆집의 개만 요란하게 제 본분을 다한다. 그렇다고 내다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계단 아래 백목련이 막 봉우리를 터트리려다가 낯선 기척에 주춤한다. 짓던 개마저 허무한 짓임을 깨달은 뒤 세상은 고요 속으로 누워버린다. 예배가 끝날 때까지 교회를 돌아보기로 한다. 오석(烏石)으로 만든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비가 먼저 눈길을 잡는다. 창립 100년을 맞던 2006년에 세워졌다고 쓰여 있다. 내매교회를 그렇고 그런 시골교회 중 하나쯤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긴 세월 쌓인 사연도 첩첩이고 배출한 인재도 많다. 설립자는 강재원이라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교회를 세우기 전 대구에 나가 살았는데, 그곳 약령시에서 미국선교사 배위량의 전도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대구지역 최초의 교회인 대구제일교회를 다니다가 1906(고종 43) 내매마을로 돌아왔다. 고향에 오자마자 그는 유병두라는 사람의 사랑방을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자신의 집에 십자가를 달고 예배처소를 만들어 주일예배를 드린 것이 내매교회의 시작이었다. 경북북부에서 설립된 최조의 교회였다. 초기에 부흥사 길선주, 김익두 목사 등을 초청하여 부흥회를 여는 것은 물론 개화운동과 신농법 교육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내매교회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건 교회가 배출한 인물들이다. 목회자로는 영락교회를 공동설립하고 새문안교회에서 24년간 목회활동을 한 강신명 목사, 계명대학교를 설립한 강인구 목사, 창신대학교 강병도 학장 등이 이 교회 출신이다. 또 강진구 삼성반도체 회장, 강신주 삼성전자 사장 등 기업인 10여명도 배출했다. 100주년 기념비 앞에서 교회의 자취를 훑고 있는데 찬송가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열 명 남짓? 나중에 물어보니 전부 스무 명이 좀 넘는다고 한다.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던 아주머니 한분이 마당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한다. 왠지 기다렸다는 것 같은 표정이라 잠시 의아해진다.
오늘 오시기로 한 분이지요?”
? 아뇨. 목사님을 좀 뵈러사전 약속은 안했는데요?”
누군가 나하고 비슷한 목적으로 인터뷰 예약을 했던 모양인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낯선 사람이 카메라를 메고 서성거리니 당연히 오기로 한 사람으로 생각한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를 맞이한 사람은 목사 사모였다.

사모가 안내한 곳은 교회 왼편에 있는 자그마한 부속건물이다.
여기가 바로 내명학교에요.”
내명학교? 교회에 학교가 있었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예습을 덜 하고 온 탓이다. 사모의 설명이 이어진다. 사립내명학교는 내매교회 강병주, 강석진 목사가 주축이 되어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에 설립한 학교다. 경북 북부지방에서는 최초의 기독 사립학교였고 순흥학교와 풍기학교에 이어 영주에서 세 번 째 초등학교였다. 개화기의 신문화 도입과 문맹퇴치에 크게 기여한 것은 물론, 일제 때 궁성요배를 거부하다 박해를 받는 등 항일운동의 모태가 됐다고 한다. 수몰예정지를 찾았다가 우연하게 유서 깊은 문화재급 초등학교를 만난 셈이다. 단층으로 된 건물뼈대는 그 때 그대로지만 지붕이나 외장은 세월 따라 대부분 바뀌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 자그마한 공간이다. 교실이었다는 곳은 방으로 쓰고 있지만 과거의 체취가 제법 남아있다. 100년 전에 이곳에서 공부했을 학동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떠났을 그분들은 자신들이 글을 깨우치고 꿈을 키우던 이 곳이 물에 잠길 거라는 사실을 알까.

교실이었던 곳을 둘러보는데 신도들과 인사를 마친 목사가 들어온다. 올해 68세의 함오호 목사다. 다짜고짜 어쩌다 이 궁벽한 곳까지 와서 목회를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한다. 교회와 학교의 역사와 배출한 인물들을 소개하던 그에게 수몰과 관련된 질문을 하자 담아뒀던 말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이렇게 유서 깊은 교회가 물에 잠기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있나요. 수몰 자체를 막을 힘은 없다고 해도 가까운 곳으로 옮겨서 보전할 방법이라도 찾아야지요. 우선 문화유산으로 지정돼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전국 각지에 있는 내매교회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와 학교를 이전복원해서 기독교 역사의 교육장과 박물관으로 활용하자는 운동을 펼쳐지고 있다고 한다. 함 목사는 청와대와 문화관광자원부 등 각계에 근현대사 유산 영구보존 청원서를 보내고 있다.
많은 기관에서 긍정적인 회신이 오고 있습니다. 다행이지요. 수몰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최선을 다해봐야지요.”
그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기를 소망해본다. 105년의 역사를 몽땅 수장시키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는 없는 것이니.

학교에서 나와 예배당으로 들어가 본다
. 교인들이 떠난 예배당은 고요에 잠겨 있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두 손을 모아 집주인에게 인사를 한다. 이 교회를 스쳐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과도 교감을 나눈다. 2000년 전쯤 한 성인이 겪은 고난으로도 세상은 결국 구원받지 못한 것인가. 목사 부부와 인사를 나누고 강가로 돌아오는 길,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을 때는 저 작은 교회가 물에 잠겼을 것이라 생각하니 발걸음이 무겁다. 물속에 잠겨서도 종소리 울려 퍼지고 찬송가소리 들려올까. 다시 내성천을 따라 곳곳을 훑어본다. 오래 전에 지어진 평은역도, 수백 수천 년 사바세계를 지켰을 돌부처도, 세월을 이고 진 고가들도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데 무심한 봄꽃들만 아우성으로 피어난다.

posted by sagang
2011. 4. 13. 16:02 사라져가는 것들

소백산맥의 남쪽 기슭, 경북 봉화군에서 시작해서 영주안동·문경과 예천을 거친 뒤 용궁(龍宮) 남쪽에서 낙동강과 만나는 길이 106.29km의 강. 내성천(乃城川)에 대한 사전적 설명이다. 용궁이란 단어가 잠시 시선을 끌지만, 지명이란 게 조금씩 과장되기 마련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 뜻 정도는 금세 잊어도 좋다. 내성천의 진가를 아는 이들에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한마디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특히 무섬(물 위의 섬이란 뜻)마을이라 불리는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서 바라보는 강은 넓은 모래밭, 외나무다리와 어울려 빼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내성천은 뱀 모양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전형적인 사행천이다. 산을 만나면 산을 감싸 돌고 들판을 만나면 들판을 어루만지며 소리 없이 흐른다. 우당탕탕! 급하게 달려가는 기세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래서인지 강을 따라가다 보면 어디가 상류고 어디가 하류인지 자주 헷갈리게 된다. 물 흐름을 한참 들여다봐야 어디서 어디로 흐르는지 가늠할 수 있다. 내성천을 무엇보다 내성천답게 만드는 건 풍성한 금빛 모래다. 강가에 앉아 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래알들이 사르르 사르르 흘러내려가는 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내성천을 모래강이라 부른다. 물과 함께 금빛 모래가 흐르는 강.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큰 축복이다.

 
그 아름다운 강을 막는단다. 이름 하여 영주댐. 완성되면 영주시 평은면과 이산면 일부를 물속에 가둔다는 댐 공사가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다. 소위, 4대강 사업의 일환이라고 한다. 전기를 생산하는 것도 아니라는데, 대체 그 골짜기에 왜 댐이 필요할까? 여기저기 알아봐도 시원한 대답은 없다. 다목적댐이란다. 용수확보, 홍수방어, 수질개선, 관광자원 확보 등 목적은 줄줄이 많은데 딱히 고개가 끄떡거려지지 않는다. 영주가 물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고 내성천이 홍수로 자주 범람한다는 기록을 본적도 없다. 수질개선이야말로 서천 쇠가 웃을 말이다. 그대로 떠먹어도 좋을 만큼 그 맑은 물을 개선한다니. 그렇다면 관광자원? 지금 그대로가 천혜의 자원이다. 댐을 막는 대신 세계자연문화유산 지정운동이라도 하는 게 훨씬 생산적일 것이다. 그런데도 왜 금모래가 흐르는 길을 막으려고 하는 것일까. 모래도 모래지만 더 걱정되는 건 물속에 고스란히 잠길 유구한 역사와 문화다. 강을 중심으로 생겨난 마을마다 수백, 수천 년을 머금은 유물이 지천이다. 물에 잠기기 전에 어딘가 옮겨놓기야 하겠지만, 태자리를 떠난 순간 박제로 전락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유서 깊은 안동 장씨의 집성촌, 금강마을은 통째로 잠긴다고 한다. 어찌 사람의 흔적뿐이랴. 강가를 지켜온 왕버들, 강둑을 집 삼아 살던 수달, 자유롭게 헤엄치던 물고기들. 그들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지금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까?

 

멀리서 보는 금강마을은 물속 마을처럼 고요했다
. 행정지명으로는 경북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지만, 보통 금강(錦江)마을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비단 같은 강이 흐르는 마을이다. 물이 휘돌아 섬처럼 생긴 곳이라 제법 긴 다리를 건너야 마을로 들어설 수 있다. 오랜 전통을 자랑이라도 하듯 맨 먼저 운곡서원(雲谷書院)유허비가 객을 맞이한다. 낮은 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제법 너른 들판, 전체적으로 안온하면서도 만물을 품에 싸안는 느낌의 지형이다. ‘전통의 얼 금강마을이란 이름의 마을유래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조선 선조(宣祖)때 장여화(張汝華) 선조께서 굶주림에 지쳐 쓰러져 있는 노승을 구제한 일이 있는데 훗날 그 노승이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마을의 터를흔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선조 재위기간이 1552~1608년이니 언뜻 계산해 봐도 터를 잡은 지 400년이 넘는다. 마을 안쪽도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농사철이니 두엄 내는 경운기소리라도 들려야 할 텐데 그 흔한 강아지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는다. 곳곳에 빈집도 눈에 띈다. 마을길을 올라가다 고색창연한 집을 한 채 만난다. 안내판에 장씨 고택이라 쓰여 있다.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이 집은 조선후기 민가건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형 기와집으로. 
집의 뼈대는 멀쩡해 보이지만 곳곳에 퇴락한 흔적이 역력하다
. 생기를 띤 것이라고는 아우성치며 솟아오르는 잡초뿐이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는데 중문 안쪽 방에서 소리가 들린다. 라디오 같기도 하고 TV소리 같기도 하다. 빈집이 아니었구나. 대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주인을 불러본다. 한참 뒤에 방문이 열리고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한분이 나온다. 걸음이 불편해 보인다. 인사를 하니 경계의 기색도 없이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여기서 혼자 사세요?”
이리와 앉아요
자제분들은 도시로 나가고요?”
그렇지요
이 큰집을 혼자 지키시려면 적적하지 않으세요?”
별 수 있나요. 죽을 때까지 지키다 가는 거지
수몰된다고 이사 가라고 안 해요?”
한참 시끄럽더니 요샌 조용하네. 금방 가라고야 하겠어요? 물이 차려면 한참 걸릴 텐데.”
그래도 어디로 갈지 준비는 하셔야 할 텐데
가기는 어디로 가요. 사는 대로 살다가 갈 데 없으면 저승길로 가야지.”

노인과의 대화는 한참동안 이어진다
. 올해로 여든 셋, 수도리 무섬마을에서 스무 살에 시집 와 63년을 살았다고 한다. 시집오기 전에는 일본에서 공부도 했다. 공직생활을 하는 남편을 따라 대처에 나가 살기도 했지만 남편의 은퇴 뒤에는 금강마을을 떠난 적이 없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자식들은 영주와 서울로 나가 살고 있다. 이 참에 자식들과 함께 사시는 게 어떠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고 만다. 허리와 다리가 좋지 못해서 오래 걸을 땐 보조기를 사용한다. 그래서 집 앞의 텃밭도 손을 못 댄다고 살포시 한숨짓는다. 댐이 완성되고 물이 차오르면 노인은 갈 곳이 없다. 다른 이들은 보상을 받아서 영주니 어디니 간다고 하지만 금강마을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살 만큼 살다가 가면되지가 입에 붙었다. 자신의 삶터에서 남은 생을 마치겠다는 욕심밖에 없는 이 노인을 밀어내는 게 대체 누군지. 노인은 모처럼 찾아온 젊은 손이 반가운 모양이다. 인터뷰는 곁다리고 말벗을 하다가 예정된 시간을 한참 넘기고 만다. “점심이라도 해야 할 텐데걱정하지만 차려낼 만큼 변변한 밥상이 없음을 섭섭해 하는 눈치다. 되레 미안해진 객이 얼른 일어서는 수밖에.

바깥마당까지 따라 나온 노인의 길고도 긴 전송을 뒤로 하고 마을길을 걷다 다시 할머니 한 분을 만난다. 인사도 차리기 전에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아들이라도 보듯 반갑게 맞는다.
이사 가라니 섭섭하시지요?”
왜 안 그려. 열 몇 살에 시집와서 70년을 산 동넨데.
어디 가서 사실 건데요?”
저 건너 어디로 가라는데.”
저 건너가 어디쯤 될까. 어디까지 물이 차오르고 어디부터 새 동네가 될까. 노인의 손끝을 따라가는 나그네의 눈길도 허허롭다. 마침 바깥노인이 나오기에 인사를 했더니 웃음으로 답한다.
그래도 올해 농사는 지으실 거죠?”
노인은 말없이 고개만 끄떡인다. 이분들의 미래가 보상 받은 돈 아들딸에게 나눠주고 도시 언저리를 전전하는 잉여인간의 모습이 아니기를.
길을 재촉해 낮은 산등성이를 오른다. 다 오르고 보니 마을 바로 너머가 댐 공사현장이다. ! 신음소리가 절로 나온다. 굴삭기가 연신 강바닥을 파고 덤프트럭이 부지런히 오간다. 잘려진 산과 파헤쳐진 강이 무참하게 널브러져 있다. ‘건설이라는 이름의 파괴현장에서 나그네의 발걸음은 얼어붙고 만다.

언덕 위에는 제법 세월을 머금은 과일나무들이 꽃눈을 틔우고 있다. 올 봄, 주인은 가지치기를 건너 뛴 모양이다. 밭가의 굵은 산수유도 노란 꽃을 지천으로 내뱉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미륵당에 들러보지만 미륵은 어디로 떠나고 금줄만 빈집을 지키고 있다. 미리 옮겨둔 것일 게다. 미륵이 이사를 가야하는 세상에도 미래불은 오는 걸까? 오후 햇살이 자리를 편 무덤 앞에서 할미꽃을 만난다. 조금 전에 만났던 할머니들을 꼭 닮았다. 무덤 앞에는 비석 대신 이장공고팻말이 붙어있다. 물속에서는 할미꽃들도 꽃을 피워내지 못하겠지. 구제역이 다녀간 우사(牛舍)에는 소들의 울음소리가 간데없다. 저곳에 송아지들이 다시 들어올 일은 없을 것이다. 허청거리는 걸음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다. 의관댁, 만연헌, 장석우 가옥, 까치구멍집. 마을 전체가 유적이고 문화재다. 누가 이런 마을을 물속에 수장시킬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다른 곳에 옮기면 되지라고 쉽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문화유산이 아니다. 배어있는 숨결이나 혼은 날아가고 껍데기만 남은 건축물일 뿐이다. 돌아오는 길, 다리를 건너 차를 세우고 다시 마을을 한번 바라본다. 강은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 마을은 봄 햇살 속에 푹 잠겨 있다. 햇빛을 머금은 금모래들이 반짝,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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