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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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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29 [사라져가는 것들 91] 주막15
2008. 12. 29. 15:4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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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게 주막은 ‘적(敵)’과 동일한 의미였던 것 같다. 스스로의 입에 주막이란 말을 올린 적은 없지만, 그 단어를 들을 때의 본능적 거부감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훗날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들은 이야기들을 조합해보면 고개가 끄떡거려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남편, 즉 내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인생의 황금기가 됐어야 할 시기를 홀어미와 다름없이 보냈다. 비록 일꾼의 손을 빌리긴 했지만 혼자 농사채를 관리하고 혼자 아이들을 키웠다. 할아버지는, 그 동네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진사‧참봉벼슬 정도를 자랑하는 시골의 토호였겠지만)의 아들이었다. 그러니 집에 있어도 손에 흙을 묻힐 턱은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집안을 이끌어갈 어른의 역할까지 필요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처자식을 떠나 반도의 북쪽이나 저 멀리 만주 땅을 유랑했다. 일본제국주의가 이 땅을 유린하던 시기였다. 할아버지가 집을 떠난 게 일제의 압제가 싫어서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니 비밀리에 독립운동이라도 했는지 여부는 더욱 확실치 않다. 집안 그 누구도 그 얘기를 자랑으로 삼지 않는 걸 보면, 그리고 뒷날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런 목적과는 좀 동떨어진 게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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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 한 촌부가 길을 떠나게 된 동기나 목적이 중요한 건 아니다. 이야기의 본질은 ‘할머니가 왜 주막에 포원을 졌나’에 있을 뿐이니까. 문제는 할아버지가 길을 떠날 때 혼자가 아니었다는데 있다. ‘길을 떠날 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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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말하는 건 돌아올 때는 혼자였다는
주장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길에서 부릴 아랫사람을 대동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곁엔 있었던 건 여자였다. 그리고 그 여자가 할아버지의 길동무가 되기 전 신분은 건넛마을 주막집의 주모였다. 할머니와 주막은 그렇게 간접적인 관계밖에 형성하지 못했다. 명색이 반가의 아낙이 주막집 여자를 만날 일도 없었거니와, 성품으로 볼 때 할아버지와 관련된 소문을 들었다 해도 찾아가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주막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못처럼 박고 살았다. 아픔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가슴에 묻고 사는 건 악다구니 치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나라가 해방되고 남북으로 쪼개진 뒤, 빈털터리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객지에서 얻어온 병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을 깨끗이 털어버리고 세상을 달리했다. 비슷한 시기에 마을에서 주막은 사라졌다. 그 마을뿐 아니라 대부분의 동리에서 주기(酒旗)가 내려졌다. 막걸리를 파는 집이나 구멍가게들이 지나는 길손들에게 잔술을 내놓기도 했지만 이미 전통적 주막의 모습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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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는 고통의 근원이 되었지만, 주막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사막을 건너는 나그네에게 오아시스가 그러하듯, 주막 역시 길손들의 허기와 갈증을 해결해줬다. 그래서 주막이라는 단어는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가 지닌 낭만(실상이야 어떻든 간에)이나 고독 같은 요소를 슬그머니 공유하기도 했다. 나그네들은 탁주 한 사발로 마른 목을 축이고 국밥으로 고픈 배를 달랬다. 강나루나 큰 고개 아래에는 반드시 주막이 있었다. 뗏목을 타고 수 백리를 가야하는 물길 곳곳에도 주막은 있었다.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든 두 다리를 밑천 삼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장돌뱅이든 주막에서 먹고 묵었다. 주막은 임진왜란 이후에 관(官)에서 설치한 원(院)이 쇠퇴하고 민간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이들을 위한 주점‧주막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도시에서는 객주나·여각(旅閣)이, 시골에서는 주막이 여인숙의 구실을 했다. 19세기 후반에는 10∼20리 사이에 한 곳 이상의 주막이 있었고 특히 장이 열리는 곳이나 역(驛)이 있는 곳, 나루터, 광산촌 등에 발달했다. 주막에서는 술이나 밥을 사먹으면 보통 숙박료를 따로 받지 않았다. 한 두 칸의 온돌방에서 10여 명이 같이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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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아직도 주막이 남아있을까? 그 흔적을 찾아 경북 예천에 도착한 건, 함박눈 대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겨울 아침이었다. 예천에는 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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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의 ‘마지막 주막’이라 불리
는 삼강주막이 있다. 삼강(三江)은 회룡포를 돌아 나온 내성천과 문경에서 발원한 금천이 예천군 풍양면 삼강나루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00년 전후에 세워졌다는 삼강주막은 삼강나루를 거쳐 가는 길손과 낙동강을 타고 오르내리는 소금 배, 보부상들이 먹고 자는 곳이었다. 삼강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새재를 넘기 위해선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만 했다. 그러니 주막은 늘 문전성시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려했던 날은 가고 지금은 전설만 남아있다. 삼강주막의 마지막 주인이자 이 땅의 마지막 주모였던 유옥연 할머니는 2005년 89세로 타계했다. 유 할머니는 열여섯 살에 시집와 반세기 넘게 주막을 지켰다고 한다. 삼강주막은 유 할머니가 떠난 뒤 오랫동안 방치돼 폐가처럼 퇴락했었는데, 경상북도가 ‘관광 상품’으로 복원했다. 새마을운동 때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었던 걸 다시 초가로 바꾸고 깔끔하게 수리해서 세상에 내놓았다. 최근에는 바깥에 주막 형태의 집을 더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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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안까지 들어가 옛사람의 자취를 흘끔거려본다. 100년의 세월이 남긴 주름살은 아직 곳곳에 남아있지만 비교적 말끔하게 단장돼 있다. 역사를 걷어내고 시대를 입힌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주막의 규모는 ‘손바닥만 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작다. 조금 큰 방 하나에 작은 방 하나, 부엌과 네댓이 앉기에도 좁아 보이는 마루가 전부다. 그리고 역시 손바닥만 한 장독대에 항아리와 독 서너 개가 겨울비 아래 옹송그리고 있다. 뒤편에 싸리를 엮어 두른 뒷간까지 돌아보고 나면 집 구경은 끝이다. 벽에 붙어있는 메뉴를 보니 주막으로서 본연의 역할도 복원한 것 같다. 주인으로 보이는 바깥노인에게 물으니 밥은 없고 막걸리와 전‧도토리묵‧두부 같은 간단한 안주를 판단다. 뜨내기가 주막에 와서 막걸리 한 잔 얻어먹으면 됐지 무얼 더 바라랴. 막걸리와 두부를 주문하니 춥다고 방으로 들어가란다. 방은 서넛이 앉으면 꽉 찰만큼 좁다. 조금 뒤 노인이 쟁반에 놓인 음식을 들이민다. 막걸리 반 되, 생두부, 김치, 간장이 전부인 조촐한 상이다. 주모가 떠난 자리를 주부(酒父 혹은 酒夫)가 메운 것인가. 음식은 보기보다 맛이 괜찮다. 술맛도 그럴 듯하지만 혼자 비우는 술이 그리 입에 붙을 리 없다. 게다가 운전까지 해야 하는 판이니 사진이나 몇 장 찍고 나오는 수밖에. 노인을 찾아 몇 가지 묻지만 의외로 말을 아낀다. "예서 사십니까?“ ”예“ ”혼자 사세요?“ ”예“ ”주모 할머니는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글쎄… 한 오년 됐나….“ 마침 손님 몇이 들이차는 바람에 대화는 거기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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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차피 한번 오면 떠나는 게 사람살이거늘, 더 이상 물을 것도 없다. 다시 둑에 올라 삼강이 만난다는 곳에 시선을 둔다. 사람은 바람 따라 갔어도 강물은 여전히 유장하게 흐른다. 이 물길로 소금배가 지나고 이 길로는 숱한 사람들이 지났겠지. 그들이 남긴 사연은 또 얼마나 많을까. 눈앞에 강을 가로지르는 삼강교가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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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도구들은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대신 반드시 무언가 하나씩 가져간다. 지난 2004년 이 다리가 완공되면서 강을 건너 주던 뱃사공이 떠나갔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유옥연 할머니도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세월은 지우개처럼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지워놨지만 머릿속에는 옛 풍경들이 뭉게뭉게 형상화된다. 둑에서 내려오다 집 뒤에서 주막을 설명하는 입간판을 만난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134호’라는 문구 아래 역사가 적혀 있다. ‘
삼강나루의 나들이객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때론 시인 묵객들의 유상처로 이용된…’ 이제 와서 설명이 화려하면 무엇 하랴. 집도 옛날의 그 집이 아니고 주막을 지키던 이도 강을 건넌지 오랜 것을. 500년 가까운 세월 한 자리에 서서 세상 돌아가는 걸 지켜보았을 회화나무에 기대어 세월의 무상함을 듣는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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