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와 군밤을 파는 성소피아 성당 앞의 노점상 지하궁전이라 불리는 예레바탄 예레바탄 입구
성소피아 성당에서 나오니 길에는 노점상들이 진을 치고 있다. 그런데 리어카에서 파는 군것질거리가 예사롭지 않다. 군밤과 구운 옥수수. 이건 코리아 콘셉트인데? 이 나라 사람들도 저런 걸 좋아하나 보다. 아니면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건너 예레바탄 지하저수지로 향한다. 소위 지하궁전이라고 일컫는, 이스탄불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소다. Yerebatan에서 Yere는 ‘땅에’라는 뜻이고 Batan은 ‘빠지다’라는 뜻이란다. 결국 ‘땅 속에 빠진 궁전’이란 말인데 지하저수지 치고는 제법 호사스런 이름을 얻은 셈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가 물을 저장하기 위해 532년에 건설했다고 한다. 성소피아 성당을 지어 놓고 “오! 솔로몬이여~” 어쩌고 하며 감격을 금치 못했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지하 저수지는 궁전이라는 말이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길이가 140m, 폭 70m, 높이 9m로 8만t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이 적에게 포위될 경우를 대비하여 물 비축용으로 지었다는데, 당시 도시 규모와 인구를 짐작할 수 있다. 물은 도시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베오그라드 숲에서 끌어왔다고 한다. 이 저수지에는 336개의 대리석 기둥이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병사들이 열병하듯 서 있는데, 기둥마다 조명을 받아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재미있는 건 기둥의 모양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예레바탄의 기둥들.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르다. 천형처럼 거꾸로 선 메두사의 머리 맨 오른쪽 '수공'이란 글씨가 보이는지. 점심을 먹은 카페거리. 오른쪽 조금 흔들린 여인들이 바로 헤매던 동포 이스탄불의 거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지하 저수지에서 나오니 더 이상 걷기 어려울 만큼 허기가 진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이런 때 쓰라고 나온 게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가 이스탄불에 가면 꼭 들러보라고 추천해 준 음식점이 생각난다. “성소피아 성당에서 길을 건너자마자 만나는 골목을 한참 들어가면….” 그렇다면 이 근처인데. 문제는 ‘한참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음식점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다. 골목에는 카페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는데 그 집이 그 집 같다. 에라, 모르겠다. 입구 쪽에 있는 카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아무리 좋은 집이 있다고 해도 찾아갈 힘이 없을 만큼 배가 고프다. 케밥과 맥주를 한 잔을 주문해 허겁지겁 점심을 때운다. 케밥보다는 시원한 맥주가 입에 더 반갑다. 서울 가면 이놈의 맥주 마르고 닳도록 마셔야지. 맥주회사들 잘 들어. 나 귀국하기 전에 여유분 좀 만들어놔야 할 거야. 입에 케밥을 구겨넣고 맥주를 들이키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아가씨 둘이 왔다 갔다 한다. 점심식사를 하려는데 어느 집이 마땅한지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해서 느닷없이 “이 집 음식 먹을 만 해요”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온다. 친구들끼리 터키 중부를 돌고 와서 마지막으로 이스탄불을 탐색하는 중이란다. “혹시 두 분은 안 싸웠어요?” 함께 온 사람과 헤어지고 혼자 유령마을 카야쾨이를 찾아왔던 아가씨가 생각나서 물었더니 “싸울 일이 있어야지요.” 하며 까르르 웃는다. 그래, 싸울 일이 뭐 있을까. 좋은 경험 하자고 떠난 여행, 힘들고 피곤할수록 양보하고 배려하면 될 것을.
톱카프 궁전의 문들
톱카프 궁전 내부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 불리는 근위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예니체리 마당이라고도 부른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정원에는 잘 손질된 녹색 잔디가 깔려 있다. 잔디 위에 큰 그늘을 내리고 있는 플라타너스에서 잎이 하나 둘 떨어진다. 아, 이젠 이곳에도 어쩔 수 없이 가을이 오려나보다. 그래, 명색이 10월인데…. 그러보니 나뭇잎들도 조금씩 누런 색깔을 띠고 있다. 내 나라에는 지금쯤 가을이 깊겠다. 길지도 않은 여행에 벌써 향수병이 들었나? 잡념을 털어버리려 얼른 두 번째 문인 ‘평안의 문’을 지난다. 이곳에서 제2 정원을 만나는데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궁전의 시작이다. 이 정원에서는 출정식, 공주의 결혼식 등 각종 국가행사가 치러졌다고 한다. 또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한 디반 건물과 왕실 주방건물도 있었다. 왼쪽으로는 하렘 입구가 있다. 술탄의 어머니, 부인 등 여자들만 생활하는 하렘은 아랍어 ‘하림’이 어원으로 ‘금지된 곳’이라는 뜻이다. 즉, 황제 이외의 남자들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이 하렘에는 약 250개의 방이 있다. 한번 하렘에 들어간 여자는 죽어서나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하니 황제의 눈에 띄어 하룻밤 함께 하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으리라. 희망치고는 참 비참한 희망이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슐레이만 시절에는 하렘에 머무는 여인이 1000여 명에 이르렀고 황제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아가는 비밀 통로도 있었다고 한다.
궁전내부의 이곳 저곳. 맨 아래 사진 수도꼭지는 황제가 밀담을 할 때 보안을 위해 틀어놓았다지.
저렇게 바다가 코앞에 있다.
난 지금 유럽에서 아시아를 건너다보고 있다. 대륙과 대륙이 이리 지척이구나. 저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얼마나 많은 질곡이 있었을지. 궁전의 해안 쪽 끝에는 규율을 어긴 하렘의 여인들을 자루에 넣어 바다에 던지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참 끔찍한 일이다. 자유와 희망 따위는 약에 쓰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일생을 마쳤을 여인들. 아름다운 바다가 지척인데도 죽기 위해서나 갈 수 있었다니. 이젠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 누가 발목에 납덩이라도 매달아놓은 듯, 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제2정원으로 다시 나와서 마루에 엉덩이를 붙이고 다리쉼을 한다. 엄청난 인파 속에서 나 혼자 이방인인 것 같은 느낌에 잠시 쓸쓸해진다. 홀로 하는 여행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우울한 기분이 들 때. 그땐 얼른 훌훌 털고 일어서야 한다. 톱카프 궁전에서 나와 그랜드바자르로 가고 싶었는데 마침 일요일은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아쉬울 데가 있나. 이스탄불까지 와서 실크로드의 종착점이었다는 그곳을 그냥 지나치다니. 유럽의 물산이 아시아로 전해지고 아시아에서 온 물품들이 유럽으로 넘어간 곳이 바로 그랜드바자르다. 30만m²의 거대한 면적에 출입구만 20개가 넘고 입점한 점포가 5000개를 헤아린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하다. 이스탄불로 가기 전에 그랜드바자르를 들른다고 했더니 누군가가 “거기 들어갔다가 잘못하면 길 잃고 못나올 수도 있어요” 겁을 주길래 코웃음을 쳤는데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에미뇌뉘 선착장에서 본 풍경들. 저 갈라타 다리 1층에 한 많은 고등어 케밥집이 있다.
갈라타 다리 위에서 낚시질 하는 사람들. 저 아이 큰 낚시꾼 될게다.
다리 1층에는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과 바들이 진을 치고 있다. 저곳에서 그 유명한 고등어 케밥을 판다는데. 잠시 서서 입맛을 한 번 다셔보지만 결국 그냥 지나친다. 조금 전에 밥을 먹은 것도 문제지만, 그곳을 들를 만한 시간이 없다. 조금만 여유가 있다면 고등어케밥에 맥주 한 잔 하면서 석양을 즐길 수도 있을 텐데. 다음에 올 땐 오늘의 아픔을 반드시 보상 받고 말리라. 다리 한 가운데로는 트램 철로가 있고, 양쪽 난간에는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남녀노소, 아니 여자는 없다. 암튼, 온갖 사람이 없이 쏟아져 나와 다리 아래로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다. 정말 물고기가 잡히는 것일까? 다가가 보니 숭어처럼 생긴 물고기들이 그릇마다 잔뜩 들어 있다. 어떤 꼬마 아이는 피라미를 닮은 작은 물고기를 장난감 삼아 갖고 놀고 있다. 너 크면 큰 낚시꾼 되겠다. 갈라타 다리를 건너서 찾아갈 곳은 갈라타 탑. 신시가지를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다. 골목길을 따라 15분쯤 걸어올라가니 갈라타 지역의 가장 높은 곳이라 짐작되는 곳에 탑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굳이 이 갈라타 탑을 찾은 것은 탑 자체가 아름다워서라기보다는 이스탄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528년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항구를 지키기 위한 감시탑으로 세웠는데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됐다고 한다. 그걸 갈라타 지구를 차지한 제노바 자치구가 1348년에 ‘타워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이름으로 재건축했다. 한 때는 포로 수용수나 기상관측소로도 쓰였다니, 팔자가 드난살이로 평생을 마친 여인만큼이나 험했던 모양이다.
갈라타 탑에서 바라본 이스탄불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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