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군산'에 해당되는 글 1

  1. 2009.03.23 [사라져가는 것들 103] 적산가옥24
2009. 3. 23. 10:34 사라져가는 것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년의 걸음은 오늘아침에도 그 집 앞에서 멈춘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집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처럼 조용하다. 읍내의 다른 집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2층집이다. 집 자체가 유난히 높은 데다 유리창이 옥수수 알처럼 빼곡하게 박혀있다. 1층은 창틀에 변화를 줘서 모양을 냈고, 2층은 사각형의 창틀이 ☐☐☐ 이어져 있다. 1층과 2층 사이에는 함석으로 된 처마를 내었고, 지붕 역시 함석으로 덮었는데 낮은 삼각형 꼴이다. 높지 않은 담장에는 덩굴장미들이 우르르 손을 내밀었다. 붉디붉은 꽃들이 활짝 피어, 세월을 겨울옷처럼 두르고 있는 건물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대문은 따로 달지 않았기 때문에 집 안쪽, 작은 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곳에는 자전거 두 대가 세워져 있다. 하나는 조금 크고 하나는 작다. 소년은 그 자전거의 주인들을 잘 안다. 하나는 소년 또래의 남자 아이 것이고, 조금 낮고 빨간 것은 동생인 여자아이가 타는 것이다. 그들과 한 번도 이야기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자전거를 타고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보았다. 집안에서 인기척이 나자 소년이 재빨리 골목으로 숨는다. 유리문이 드르륵 열리고 중학교 교복차림의 소녀가 나온다. 걸을 때마다 단발머리가 찰랑거린다. 골목에 숨은 소년의 얼굴이 발갛게 익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침마다 서성거리던, 그 소녀가 살던 독특한 형태의 집을 적산가옥이라고 부른다는 걸 소년이 알게 된 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다. 청년이 되어 읍을 찾았을 땐 이미 그 집이 세상에서 지워진 뒤였다. 물론 얼굴을 붉히며 몰래 훔쳐보던 소녀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단발머리 흩날리며 자전거를 잘도 타던 그 소녀의 집이 사라지면서 그 읍에서 적산가옥이란 이름의 집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적산(敵産)이란 말 그대로 적의 재산이란 뜻이다. 즉, ‘자기 나라의 영토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의 재산, 또는 적국인(敵國人) 소유의 재산’을 말한다. 우리에게는 1945년 광복이 되고 일본인이 물러가면서 남겨놓고 간 집들을 뜻한다. 쫓기듯 돌아가면서 살던 집까지 짊어지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주인 없는 가옥들이 남게 된 것이다. 서로 차지하겠다고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집들을 거두어 민간에 불하(拂下)하는 과정에서, 친일파들이 혜택을 보기도 하는 등 뒷말이 많았다. 서울에도 회현동․청파동 등에 이 적산가옥이 꽤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나마 항구도시나 과거에 항구였던 곳을 가면 적산가옥을 볼 수 있다. 항구는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서 수탈한 농산물 등을 집하하고 운반하는 기지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전북 군산, 충남 강경, 경북 구룡포 등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멈춰버린 시간이 박제되어 가로수마다 걸려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어느 동네에 들어서면 100년 전 쯤으로 돌아간 듯, 이질감이 들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군산은 적산가옥이 유난히 많은 동네다. 군산항은 일제 때 중부지역의 관문 역할을 했다.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반출하는 기지가 되면서 한때 일본인이 1만 명 가까이 살 정도로 번성했다고 한다. 군산시 내항(內港) 주변에는 일본인 포목상 히로쓰(廣津)가 살았다는 ‘히로쓰 가옥’을 비롯해 적산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다. 히로쓰 가옥은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하야시의 집으로, ‘타짜’에서는 평경장이 고니를 가르치던 집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또 1909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유일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도 있다. 이밖에도 신흥동·장미동·영화동 일대에 100채가 넘는 적산가옥들이 있다. 내항 주변에는 독특한 건축양식의 관공서도 볼 수 있다. 그 중 옛 조선은행 건물이 특히 눈에 띈다. 1923년에 지었다는 이 건물은 해방 이후 두부공장‧술집 등으로 전전하다 10여 년 전 불이 난 뒤 방치돼 폐가처럼 변했다. 지금도 ‘플레이보이’라는 네온사인 간판과 노래방의 흔적이 늙은 말의 털 빠진 등짝처럼 허허롭게 붙어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적산가옥들이 군산 못지않게 많이 남아 있는 곳이 강경이다. 지금은 논산시에 소속된 조그만 읍에 불과하지만 한 때는 큰 항구였다. 1600년경에는 평양‧대구와 함께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동해안의 해산물 집산지가 원산이었다면 서해안은 강경이었다. 서해에서 나는 조기‧갈치‧홍어 따위의 온갖 수산물이 모여들면서 전국 장사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주막‧여각 따위로 흥청거렸다고 한다. 장날이면 읍에서 10리 밖까지 좌판이 이어질 정도로 대규모 장이 섰다. 지금도 강경에 가면 그 시절 누렸던 영화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특히 해마다 김장철이 시작되기 전이면 젓갈을 사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다. 해산물을 보관하기 위해 발달했던 염장(鹽藏)기술의 끝물이 젓갈로 남은 것이다. 그래서 강경은 어디를 가나 젓갈 파는 집들이 늘어서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곳에도 군산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강경은 현대화의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남긴 잔재들이 비교적 원형대로 보존됐다. 붉은 벽돌로 지은 한일은행을 지나, 호남병원 자리에까지 이르면 어느 시대 어느 거리를 걷고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특히 지난날 상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리 골목길을 지나다보면 대동전기상회(大同電氣商會), 신광양화점(新光洋靴店), 화신양복점(和信洋服店) 등의 간판이 그대로 남아있다. 모두 일본식 집들의 이마에 붙어 있는 것들이다. 상권이 옮겨가는 바람에 장사를 접은 지 오래라 간판 위에 페인트칠을 해놓거나 너무 낡아버렸다. 하긴, 그래서 더욱 눈길이 간다. 적산가옥이 아니더라도 이곳은 골목마다 낡은 이발소, 무너져가는 창고 등이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활동영화 필름처럼 이어진다. 그 풍경 속을 걷노라면 약간 노곤해지면서 원인 모를 행복감이 전신을 감싼다. 개발을 염원하는 주민들에게는 돌 맞을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한때 거세게 불었던 새마을운동도 이 읍의 느리게 가는 시계를 바꿔 놓지 못했다. 적산 가옥이 비교적 튼튼하게 지어진 것도 오늘날까지 남게 된 원인 중의 하나다. 부서질 일이 없으니 조금씩 손을 보면서 살아온 것이다. 이 적산가옥이야말로 보는 관점에 따라서 정 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끄러운 역사의 잔재이기 때문에 지우개로 지우듯 모두 없애 버리는 게 옳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잘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틀리다고 할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개인의 의견을 말하라면 당연히 보존 쪽에 한 표를 던진다. 식민지시절 일본인들에 의해 지어진 집이라고 해도 엄연히 우리 땅에 있는 건축물이다. 우리의 흙이나 나무로 만든 것은 물론 벽돌 한 장에도 이 나라 백성들의 땀이 배어 있을 것이다. 건축공법의 연구라는 측면에서도 보존해 전해줄 필요가 있다. 눈에 보이는 건물 한 둘 사라진다고 모든 것이 백지처럼 깨끗해지는 건 아니다. 부끄러운 것일수록 가슴에 새기고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 치욕도 역사다.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