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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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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전화'에 해당되는 글 1

  1. 2009.07.13 [사라져가는 것들 117] 공중전화15
2009. 7. 13. 09:01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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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한 일이었다. 전남 순천의 조계산에 깃들어 앉은 선암사를 찾아가는 길, 승선교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벌어진 사고였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눈앞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라고 할 수밖에. 초여름 햇살을 받은 숲은 황홀하다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햇살을 품에 안은 내에는 물이 아니라 보석이 흐르고 있었다. 돌돌돌 물소리, 쏴아아 바람소리. 나무사이를 비껴들며 숨바꼭질하는 햇빛. 사진 찍는 사람들의 공통적 고질병이라면, 아무리 시간에 쫓겨도 그런 풍경을 절대 그냥 지나지 못한다는 것. 카메라를 꺼내들고 춤추는 빛살무리에 섞여들었다. 결국 신이고 양말이고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문제는 그 순간에 일어났다. 통!!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물속을 들여다보니, 어디서 많이 본 휴대전화가 꼴깍꼴깍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게 아닌가. 얼른 꺼내들고 주워들은 얘기대로 배터리부터 분리했지만 예감이 좋지 않았다. 마침 서울에 연락할 일까지 있었으니 난감한 상황이었다. 배터리를 끼우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실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들은 지식으로는 완전히 마를 때까지는 절대 전원을 넣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단 갈무리해두고 공중전화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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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절집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던 기억으로는 어지간한 사찰마다 공중전화 정도는 있었다. 선암사 역시 6‧25때 소실되었다고는 하지만 대가람이었던 위용이 곳곳에 배어있는 큰 절이다. 하지만 이럴 수가. 아무리 찾아봐도 공중전화는 없었다. 원래 없었던 것인지 관리하기만 힘들고 쓰는 사람이 없으니 철수한 것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마음 급한 나그네에게는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변죽 좋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휴대전화를 잘도 빌려 쓰던데, 세상을 돌처럼 굴러다니면서도 낯가리는 성격을 고치지 못한지라 그마저 쉽지 않았다. 결국 급하게 산을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절을 한 바퀴 돌았다고는 하지만, 공중전화만 찾다 내려왔으니 뭘 보았는지 기억조차 없었다. 몇 번 가본 절이니 다행이지, 처음이었다면 본전 생각 단단히 날 뻔했다. 산을 내려왔지만 공중전화를 찾아야 하는 숙제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연락이 가능할 땐 몰랐지만 불가능해졌다 싶으니 금세 무슨 일이라도 터질 것 같은 초조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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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전화가 없었을 땐 어떻게 살았을까. 하지만 한숨 쉬어본들 무엇 하랴. 세상이 그리 되었으니 맞춰 살아야지.

공중전화를 찾아서 다음으로 달려간 곳은 낙안읍성이었다. 어차피 가려고 했던 목적지 중 하나인데다 사람이 제법 많은 곳이라 공중전화 정도는 있으려니 한 것이었다. 주차장을 벗어나 두리번거리다 가게 근처에서 공중전화를 발견했다. 이리 반가울 데가. 동전을 꺼내들고 달려간 순간. 아뿔싸!!! 그 자리에서 굳어지고 말았다. 단 한 대 있는 게 카드전화기였다. 공중전화카드를 갖고 다닐 턱이 없으니 다시 난감해질 수밖에. 그래서 가게에 들어가 물었다. “혹시 공중전화카드 파나요?” 주인은 별 이상한 걸 찾는 사람을 다 봤다는 듯이 냉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전화를 눈앞에 두고도 통화할 수 없다니. 요즘은 교통카드와 신용카드는 물론 동전을 같이 사용하는 공중전화가 있다는데, 그런 건 전부 도시에만 있는 건지. 평상시 공중전화를 보면 골동품 보듯, 거기에 매달려 통화하는 사람을 보면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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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대 사람 보듯 했던 벌을 받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걸어가는데 아! 찾았다. 매표소 근처에 공중전화가 있었다. 더구나 한 대가 아니었다. 카드용과 동전용 전화가 골고루 서너 대. 이리 반가울 수가…. 전쟁 통에 잃어버린 혈육이라도 상봉한 듯 부둥켜안고 말았다.

통화를 하면서 슬그머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고마운 것을 그렇게 냉정하게 잊고 살았던 것일까. 돌아보면 새삼스럽다. 휴대전화가 일반화되기 이전 세대라면 공중전화에 얽힌 사연 한 둘쯤 갖지 않은 이가 누가 있을까. 동전을 손에 들고 초조한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리던 순간들.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엔 ‘공중전화=첫 사랑’의 등식이 간직돼 있을 것이다. 동전을 하나 넣고 다이얼을 돌릴 때(버튼을 누를 때)의 그 초조함과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솟아오르던 설렘.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이어지던 발신음. 동전이 떨어지는 딸각! 소리와 함께 "여보세요" 하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던 순간의 떨림. 그 목소리가 마침 보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일 때, 심장은 왜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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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덜컥 내려앉았던지. 집 전화라고 그런 순간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공중전화는 그 강도가 훨씬 더했다. 하지만 어찌 기쁨만 있었으랴. 상대방의 호랑이 같은 아버지가 “밤이 늦었으니 바꿔줄 수 없다.”며 매몰차게 끊어버릴 때의 그 절망감이란. 늦은 밤 가로등 아래 공중전화에서 사랑하는 이와 통화하는 긴 머리 아가씨의 발간 볼과 구슬처럼 굴러 떨어지던 웃음은 세월 가도 그림처럼 아름답다.

군인이었던 시절, 외박이나 휴가를 나오면 맨 먼저 달려가던 곳이 공중전화였다.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공중전화를 찾던 수많은 청춘남녀들. 첫눈이라도 오는 날은 전화기 앞의 줄이 끝없이 길어지기도 했다. 물론 좋은 추억만 있었던 건 아니다. 연락할 일은 발등에 불인데 먼저 들어간 사람이 옆집강아지 낳은 잡담으로 시간을 야금야금 잡아먹을 때, 인상을 쓰다가 한숨을 내쉬다가 결국 유리문을 두드리게 되고 싸움으로까지 번진 게 어디 한 두 번이랴. 길을 지나다 동전이 남아있는 공중전화를 발견하고 금덩이라도 주은 듯 반색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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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역시 대부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얼른 달려가 수화기부터 잡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별 용건도 없으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게 웬 떡이냐? 동전이 남았길래 걸었어.” 낄낄거리며 수다를 늘어놓던 일. 도시에서야 공중전화가 제법 흔했지만 시골에서는 귀한 존재였다. 어느 땐 급한 전화 한 통 걸기 위해 먼 길을 걸어야 했다. 읍내에 가면 구멍가게 벽의 나무상자 안에 공중전화가 모셔져 있었다. 주인은 밤이 늦으면 열쇠를 채우거나 아예 떼서 집안에 들여놓기도 했다. 가끔 공중전화의 동전을 털거나 통째로 떼어가는 악당들도 있던 시절이었다.

우리 곁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했던 공중전화가 사라져가고 있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휴대전화의 등장이다.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전화를 통째로 들고 다니는 세상이니 공중전화가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건 당연지사. 쓰는 사람이 없다보니 매년 수백억 원의 적자를 본다고 한다. 쓰든 안 쓰든 관리비용은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서민들이 쓰는 것이니 요금을 한없이 올릴 수도 없고. 유일한 해결책은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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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자체를 줄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영상공중전화 등을 개발하는 모양이지만, 그런다고 해서 공중전화 시대가 다시 올 것 같지는 않다. 늘 바깥세상이 그리운 군인들에게는 유용하게 쓰이겠지만. 언제부터인지 병영에도 공중전화가 놓아져서, 졸병들은 일과 후 집이나 애인에게 전화를 거는 게 낙인 모양이다. 이제는 존재감마저 희미해진 공중전화. 그래도 아주 이별하지는 말자. 가끔은 그 안에 담겨있을 소중한 추억들을 되새겨볼 일이다. 어느 날은 거리를 걷다가 동전이 남아 있는 공중전화가 없는지 두리번거려보기도 하자. 훈련 잘된 강아지처럼 생긴 휴대전화는 잠시 잊어볼 일이다. 오래 전 남이 되어버린 첫사랑의 전화번호를 애써 기억해내며 “그냥… 동전이 남아있길래 걸어봤어” 혼잣말이라도 해보는 것이다. 어찌 알겠는가. 그것만으로도 메마르게 갈라진 가슴에 촉촉한 비가 내릴지.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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