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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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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10. 08:5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중순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소금 꽃이 필 때까지

 

염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큰길 옆 휴게소 마당에 눈처럼 소금을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뙤약볕이 내리 쪼이는 염전에서 대파(소금물을 미는 고무래)질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보다는, 소금도 팔고 대처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테니까요. 하지만 제 말은 괜한 억지입니다. 염부에게 소금을 만드는 일은 내림굿과 같아서,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태양도 바람도 염부도 기다리는 시간일 뿐입니다.

 

 

이곳은 전남 부안읍 진서면 진서리. 보통은 그냥 곰소라고 부릅니다. 부안읍에서 서남쪽으로 60리 정도 떨어진 바닷가 마을입니다. 원래 곰소염전으로 이름을 좀 날렸지만 최근에는 지척에 있는 곰소젓갈단지가 더 유명해졌습니다. 대처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젓갈을 사러 올 정도니까요. 저는 곰소염전의 석양에 반해서 이곳을 가끔 찾아옵니다. 그런데 아직도 풀지 못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왜 곰소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설마 산에 사는 곰 때문에? 충남 공주의 옛 이름이 곰나루(熊津), 곰재니 웅산(熊山)이니 이 들어간 지명이 곳곳에 있으니 한번 넘겨짚어 보는 것입니다. 헌데, 확인을 해보니 그 설마가 맞는답니다. 지금은 육지인 곰소가 옛날에는 세 개의 섬이었다고 하네요. 그중 한 곳에 곰 두 마리가 살았답니다. 섬에 곰이 산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지청구부터 앞세울 일은 아닙니다. 전설은 현실보다 더 너른 품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쩌다가 섬이 육지가 됐을까요? 여기서부터는 전설이 아닌 역사의 영역입니다. 이곳 역시 일제의 수탈기지였다고 합니다. 농산물을 반출하는 항구로 쓰기 위해 진서면 연동마을과 곰소, 작도마을을 연결하는 제방을 쌓고 도로를 만들었답니다. 그 와중에 곰은 어디론가 떠났겠지요.

 

오늘은 일진이 썩 좋지는 않은 날입니다. 날씨조차 확인하지 않고 길을 떠나는 제 준비성 탓이지요. 우선 하늘이 저를 반기지 않습니다. 구름이 저렇게 잔뜩 끼었으니, 염전으로서는 뒷짐이나 지고 있을 수밖에요. 오늘따라 바람도 마뜩치 않고 철도 어긋나 있습니다. 염전이라고 사시사철 소금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보통 4월 중순에 시작해서 9월말까지 바닷물을 졸이는데 지금은 이미 10월입니다. 하지만 곰소염전은 아직 소금걷이를 끝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을 햇볕도 잘만 거둬 쓰면 소금가마나 만들어내니까요. 그 증거로 결정지에는 막 엉기고 있는 소금이 보입니다. 염전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염창(소금창고) 옆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무언가 기다려볼 심산입니다. 원래 염전은 기다림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으니까요. 이곳에서 바다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타래 풀 듯 길길이 뻗어 나간 수로들이,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염분 가득 머금은 바닷물을 데려 오겠지요.

 

바닷물을 가둬두면 소금이 생기는 줄 알지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복잡한 절차와 숱한 땀이 필요합니다. 먼저 수문을 열고 바닷물을 저장지에 가두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저장지의 바닷물은 곧 증발지로 갑니다. 1차 증발지에서 어느 정도 졸여진 소금물은 또 2차 증발지로 보내집니다. 갈수록 수분이 증발하면서 염도가 높아지지요. 2차 증발지를 거쳐 염도가 정점에 오른 바닷물은 마지막으로 결정지에 도착합니다. 볕이 좋은 날 새벽에 결정지로 들어간 소금물은 하루 종일 졸이고 졸여져 저녁 무렵이 되면 하얗게 엉기기 시작합니다. 이걸 일러 소금 꽃이 핀다고 하지요.

 

소금 꽃은 홀로 피어나는 게 아닙니다. 햇볕은 물론 적당한 바람과 염부의 땀과 시간을 품어야 피는 꽃입니다. 염전에서는 바닷물만 졸이는 게 아니라 시간도 함께 졸입니다. 시간의 정수(精髓)가 순백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지요. 그래서 6각형의 작은 결정들을 들여다볼 때마다 경탄을 아낄 수 없습니다. 소금은 계절, 햇볕, 바람은 물론 만들어지는 시간에 따라 굵기와 맛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북서풍이 부는 날 엉긴 소금은 입자가 단단하고 굵으며 동풍이 부는 날 거둔 소금은 밀가루처럼 곱습니다. 조건에 따라 맛이 쓴 소금도 있고 짜기만한 소금이 있는가 하면 짜면서 향기로운 소금도 나옵니다. 좋은 소금을 만들려는 염부의 일상은 고단합니다. 별이 지기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바닷물과 씨름합니다. 그들이 흘리는 땀은 소금만치나 짭니다. 염부의 몸이 까맣게 탈수록, 더욱 하얗고 맛좋은 소금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소금을 만드는 과정이 매번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비라도 내리면 염부들은 마음까지 까맣게 탑니다. 애써 조린 소금물에 빗물이 섞이면 만사 헛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노심초사해도 바닷물을 열 말 가두면 한 되의 소금밖에 안 나온다고 합니다. 한여름 햇볕이 좋을 때는 사나흘 만에 거두기도 하지만 봄가을은 보통 열흘에서 스무 날까지 걸립니다.

 

엉기기 시작한 소금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긍정적인 밥> 발췌)

 

강화도에 삶터를 튼 시인 함민복은 소금 한 되를 300원짜리 싸구려 인세에 비했지만, 시도 소금도 눈물 겹게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소금 속에 담겨 있는 열 말의 바닷물도 기억해야 합니다. 소금은 생명입니다. 얼마나 귀했으면 하얀() ()이라고 불렀을까요. 고대 중국이나 로마에서는 국가 전매품으로 아무나 거래할 수 없었습니다. 인류사에서 소금 전쟁도 드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았지요. 제 할머니 역시 소금을 보물처럼 귀하게 여겼습니다. 어렵게 소금 한 포대를 들여놓으면 토방 기둥에 기대놓고 간수를 받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쓴맛 나는 간수를 빼야 소금이 제 맛을 내거든요. 물론 그렇게 받아놓은 간수도 두부를 만들 때 응고제로 긴요하게 쓰였습니다. 요즘은 무기약품의 중요한 자원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오가는 길에 소금포대를 한 번씩 쓰다듬었습니다. 사랑만 주면 소금포대가 쑥쑥 자라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 많던 염전도 보기 어려워진지 오랩니다. 소금의 질이 좋기로 소문난 곰소염전도 새우양식장으로 둔갑하고 80ha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싼값으로 무장한 중국산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사양길의 염전들, 오래 묵은 존재 특유의 진득함으로 시대의 격랑에 맞서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요. 자신의 역할을 방기(放棄)해본 적 없는 그 진득한 존재들이 생명을 보듬어왔다는 사실은, 자주 망각의 늪 빠져 존재를 지웁니다. 그게 안타까워 저는 저무는 염전에 오랫동안 시선을 담가두고 있습니다.

 

 

염부는 끝내 오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대파질이 들어있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건 포기한지 오래지만, 이런 기다림의 시간은 달콤하고도 쌉쌀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염전에 비친 구름과 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게 전부입니다. 누군가 제 기다림을 헤아린 걸까요?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마치 이불 개듯 차곡차곡 구름을 걷어내기 시작합니다.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지만 저로서야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반가운 일이지요. 기다림은 이렇게 예기치 않는 행복을 주기도 합니다. 갈라진 구름 사이로 벌건 해가 얼굴을 내밉니다. 고대하던 곰소염전의 석양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정지에서 혼자 자맥질하는 저녁 햇살이 수돗물을 그냥 틀어놓은 듯 아깝지만, 지금은 일을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저녁나절의 햇볕은 바닷물을 졸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쪽 하늘이 벌겋게 타오르면서 염전에도 황금빛이 깔리기 시작합니다. 저도 분주해집니다. 얼마나 별렀던 풍경인데요. 부리나케 둑으로 올라가 셔터를 누릅니다. 산그림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와 키를 부풀립니다. 먼 산들은 자꾸 흔적을 지워가고 붉은 해는 거친 숨을 몰아쉽니다. 어느 순간 주변 공기가 팽팽해지더니 붉은 덩어리가 툭, 하고 떨어집니다. 빈 하늘에 대고 마지막 셔터를 누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맹렬한 공복이 전신을 훑습니다.

 

작고 허름한 식당을 골라 들어갑니다. 오래 떠돈 자들은 호화로운 음식점을 피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허름해 보이는 집에서 의외로 입에 맞는 음식을 만날 가능성이 높거든요. 이 동네는 젓갈백반이 유명합니다. 1인분이라는 게 조금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굶을 수야 없지요. 손님은 저 하나뿐입니다. 젊은 여자와 허리 굽은 안노인이 단 하나의 손님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고부간일까, 모녀간일까? 심심한 저는 괜한 걸 점쳐봅니다. 저만치 서서 밥 먹는 걸 지켜보던 노인이 다가오더니 젓갈을 고루고루 더 얹어놓습니다. 젊은 여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노인의 마음이 음식의 맛을 더합니다. 이런 경우도 악순환이라고 하나요? 즐거운 악순환이겠지요. 먹으면 또 채우고, 준 사람 실망할까봐 또 열심히 먹고. 입안이 짜고 매운 기운으로 얼얼할 지경입니다. 노인과 나그네의 은밀한 거래는 젊은 여자의 등장으로 끝나고 맙니다. 주방에서 나오던 여자의 눈동자가 고등어 뱃바닥처럼 하얗게 변합니다. 노인은 생선전의 고양이처럼 슬금슬금 뒷걸음질 칩니다. 아마 초범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혼자 오는 손님만 보면 저러신다니까.” 젊은 여자가 입속에서 웅얼거립니다.

 

그녀 역시 야박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요. 혼자 먹는 밥상에 짜디짠 젓갈을 자꾸 얹으면 결국 남지 않겠느냐는 걱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노인들 마음이 어디 그런가요? 자식 같은 사람은 자식이나 진배없고, 그 입에 밥이 들어가면 흐뭇한 것이지요. 옛날 제 할머니가 그랬고, 지금의 제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괜히 무람해진 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집니다. 혼자 서 있던 가로등이 씨익 웃습니다. 밤은 까만색으로 자꾸 무게를 더합니다. 숙소로 가는 길, 바람은 차갑지만 마음은 포근합니다. 새 울음소리가 제법 깊어졌습니다. 숙소의 창문을 조금 열어놓습니다. 희미하게 비껴드는 달빛을 당겨 덮고 모처럼 꽃잠에 빠져듭니다.

 

posted by sagang
2012. 12. 3. 08:3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중순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조기가 우는 까닭

 

왕포마을 전경. 바다가 저만치 멀다.

지금은 썰물때,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 멀고 파도소리 오랜 추억처럼 아득합니다. 작은 배 몇 척이 갯벌에 누워 쪽잠을 청합니다. 지난 밤 제법 먼 길을 다녀왔는지 온몸에 고단함이 덕지덕지 붙어있습니다. 바닷가 마을엔 가을이 일찍 와 있습니다. 은행에서 저금 찾듯, 나무에서 갖가지 색깔을 인출해 치장한 잎들이 훨훨 날아오릅니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허공에 가득합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이별의 아픔은 없습니다.

 

 

왕포(旺浦)마을. 한때는 왕포(王浦)라고 불렸다니, 왕에 어울리는 무언가 있을 법해서 한 바퀴 돌아보지만 그저 조용한 어촌일 뿐입니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전북 부안군 진서면 문호리. 변산반도 국립공원에 속한 조그만 마을입니다. 제가 이 마을을 찾은 건 마실길을 걷기 위해서입니다. 마실길은 서해의 진주라 부르는 변산반도를 따라 걷는 해안 둘레길입니다. 개복숭아 꽃 곱던 지난봄, 3구간 1코스인 아홉구비 돌아가는 길을 걸은 뒤 그 풍경에 반해 오늘은 3구간 2코스의 출발점에 섰습니다. 왕포에서 곰소염전까지 이어진 길의 이름은 제방 따라 청자골 가는 길이랍니다. 이름들도 참 예쁘게 짓습니다. 12km 거리에 3시간 걸린다고 써놨는데 걸어봐야 알 일입니다. 걷는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고독은 고통이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내 그림자와 대화하며 걷는 시간은 세상에 오로지 나 하나가 존귀한 충만의 시간입니다. 출발 직전, 느닷없이 정적을 깨는 소리에 풍경은 저만치 물러나고 각박한 삶이 코앞에 섭니다. 골목 안쪽에서 주민들끼리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담장 밖으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오가는데 걸리적거렸던 모양이지요? 그런 것도 싸움이 될까 싶은데도 목소리는 갈수록 날이 섭니다. 퍼붓는 쪽은 원주민인 듯 하고, 수세에 몰린 쪽, 염치없이 나뭇가지를 담 밖으로 내보낸주민은 타지에서 들어온 모양입니다. 시골살이를 꿈꾸고 있는 제게는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싸움 구경이 발목을 잡아도 갈 길은 가야지요. 낮은 담 사이 골목길을 따라 마을을 벗어납니다. 길은 언덕을 향해 굼실굼실 앞서 갑니다. 사람 대신 늙은 감나무가 나그네를 전송합니다. 누군가 감춰뒀던 보석을 달아 놓은 듯, 작은 감들이 가지마다 반짝거립니다. 언덕에 오르자 저만치 바다가 보입니다. 바닷물은 아직도 멀리 있습니다. 저 바다를 칠산바다라고 부릅니다. 연평어장과 함께 우리나라 2대 조기어장으로 이름을 날렸지요. 그리 오래지 않은 날인데도 지금은 전설처럼 멀기만 합니다. 전설, 이라고 소리 내어 말했더니 갑자기 조기울음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칠산바다 때문이겠지요. 당신은 조기가 운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저는 설마 했는데, 관해기(주강현 지음, 웅진지식하우스)라는 책을 보니 정말로 조기 우는 이야기를 써놓았습니다. 산란 때면 시끄러워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지요. 그 울음의 정체는, 참조기가 부레 근육을 움직여서 주기적이고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신호라는데, 그걸 운다고하는 것이지요. 어부들은 그 조기울음을 고기 잡는데 이용했다고 합니다. 구멍 뚫린 대나무 통을 바닷물에 넣은 뒤 울음소리로 위치를 파악해서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제겐, ‘부레음이라는 과학적 설명이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그저 울음으로 기억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지요. 조기들은 왜 우는 것일까요? 무슨 사연이 그리 많아 바다를 짜디짠 눈물로 적셨을까요.

 

영광굴비 혹은 법성포굴비라는 불세출의 이름을 남긴 칠산바다는, 법성 근역의 칠뫼(七山)부터 변산반도 앞 위도까지 아우르는 넓은 바다입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은 그 북쪽 끝에 가까운 곳이지요. 칠산바다는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부 특유의 과장법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조기가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 증거로 일찍이 신안 지도군수를 지낸 오횡묵(吳宖默)이라는 이는 1897년에 제작한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刷錄)>칠산바다에는 배를 댈 곳이 없고고기를 사고팔며 오가는 거래액이 가히 수십만 냥에 이른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연평어장이 그렇듯 칠산어장도 지금은 쓸쓸한 바다일 뿐입니다. 영광굴비, 법성포굴비도 칠산바다 출신들은 아니지요. 잠을 앗아갔다는 조기의 울음소리도 어깨를 들썩이게 했을 <풍장소리>도 그저 바람결에 몸을 싣고 빈 바다나 오갈 뿐입니다.

 

얼시구 좋다. 절시구 좋와, 얼시구나 좋네.

헤헤 허야허아 허어 허어허어 좋와요.

칠산바다에 들어온 조구

우리배 망자(網子)로 다 들어왔다.

에헤 좋네. (중략)

들물에 천냥, 썰물에 천냥

안안팟 네물에 사오천냥 실었다.

에헤 좋와요.

에헤 허아허아 허아 허아허아 좋와요. (하략)

 

조금 높은 언덕에서 바라보면 여러 길들이 각기 제 방향으로 달려가는 게 선명합니다. 어느 길은 술 취한 50대 가장의 넥타이처럼 풀어져 있고 또 어느 길은 사관생도의 바지 주름처럼 절도 있게 뻗어나갑니다. 세상은 낮잠에라도 든 듯 조용합니다. 낯선 발자국소리에, 노란 햇살이 놀란 꺼병이처럼 갈대숲으로 숨습니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을 나눈 강아지

길은 긴 제방과 만납니다. 제방 옆 작은 집 마당에서 꼬박꼬박 졸던 개 한 마리가 나그네를 보더니, 사위 맞는 장모 걸음으로 달려옵니다. 아까 동네에서 만났던 개들의 앙칼진 경계는 애당초 배운 적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봄 이곳에서 보았던 강아지들 중 한 마리인 것 같습니다. 조막만 하더니 제법 커서 걸음마저 으쓱거립니다. 어미와 형제는 모두 떠나고 혼자 남은 모양입니다. 달려들어 비비고 뛰고 온갖 재롱을 다 떱니다. 만남만으로도 감격스럽다는 몸짓입니다. 개와 저 사이의 벽은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경계를 지우고 마음을 내려놓은 만남만큼 편안한 게 있을까요. 소통이니 화합이니 하는 수사의 번거로움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아무리 행복해도 나그네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지요. 아쉬운 걸음을 떼는데 녀석이 졸졸 따라옵니다. “애야, 그러다가 길 잃을라.” “걱정 마세요. 동네에서 길 잃는 개 봤어요?” 그도 그렇군요. 제방 중간쯤에서 쓸쓸하게 돌아가는 녀석을 인사 차 불렀더니 금세 돌아서서 달려옵니다. 저도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안 부르고 그냥 갔으면 큰일 날 뻔 했지요. 그런 반복이 여러 번 계속되다 제방 끝쯤 닿아서야 진짜 이별을 합니다. 사람이나 개나 외로움이 주는 고통은 뼈에 각인되는 것 같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라고, 숙명 같은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해도, 행복으로 치환하는 경지는 여전히 멀기만 합니다.

 

관선마을 전경

길은 길을 밟으며 자꾸 앞으로 갑니다. 관선(觀仙)마을이라는 작은 동네를 지나면서 자꾸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풍경이 낯설지 않은 걸 지나서, 언젠가 이 길을 걸어간 것 같다는 기시감마저 듭니다. 무엇 때문일까? ! 순간 떠오른 기억 한 자락에 무릎을 치고 맙니다. 정말 그렇군요. 어릴 적 할머니와 걷었던 그 길을 꼭 닮아 있습니다. 할머니와 걷던 길수룽구지로 가던 길. 그 길이 수십 년 만에 제 앞에 돌아와 있습니다. 할머니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제게 애써 가벼움을 두른 한마디를 던집니다. “수룽구지 안 갈라냐?” 저는 달다 쓰다 따라 나섭니다. 가부 간을 대답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만한 아이였으니까요. 그런 때 할머니 곁에 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수룽구지는 조그만 포구였습니다. 조금 전 지나온 왕포나 관선마을과 비슷했지요. 어촌보다는 산촌에 가까웠던 제 고향에서는, 손이 잠시 남으면 그곳으로 새우젓이나 비린 것을 사러갔습니다. 돈은 밭에서 거둔 푸성귀나 시금털털한 과일이면 충분했습니다. 농촌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과 어촌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들은 쉽게 교환이 됐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빈손이었습니다. 속바지에 달아놓은 호주머니에는 아끼고 별렀던 동전 몇 닢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소주 두어 잔 값, 어린 손자이자 동행인 제 입에 물릴 사탕 두어 개 값. 그것만 가지고 허위허위 걸었습니다. 저도 그 뒤를 허위허위 걸었습니다. 워낙에 말이 많은 분은 아니었지만 그런 날에는 침묵이 길었습니다. 그렇게 걸은 길이 십리였는지 이십 리였는지는 지금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린 저에게는 조금 벅찬 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들을 지나고 산을 넘어 걷다보면 갯내음이 먼저 달려와 코를 찌르고, 곧 이어 저만치 작은 포구가 나타납니다. 그곳이 바로 수룽구지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해도 할머니는 갯것을 사고파는 곳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두어 평쯤의 허름한 가게, 그 시절엔 그런 곳을 송방이라고 불렀습니다. 할머니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소주를 시켰습니다. 제 입엔 ‘10리사탕이라고 부르던, 단단하고 하얀 사탕을 물렸습니다. 가게 주인이 병마개를 빼고 작은 유리 잔 가득 소주를 부어주면, 할머니는 조금 전 다급했던 시간을 까맣게 잊기라도 한 듯, 조금씩 조금씩 아껴가며 마셨습니다. 대포나 다모토리(선술집에서 큰 잔으로 파는 소주를 가리키는 우리 말)에는 어림도 없는 눈깔만한 잔. 가슴에 일렁이는 불길을 잡기에는 턱도 없었겠지만 그 순간 할머니에게는 소중한 약이었을 겁니다. 저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쪽마루 끝에 앉아 작은 사탕 하나를 아끼면서 빨았습니다. 안주는 가게에서 내놓는 새우젓이 전부였습니다. 소주와 새우젓, 지금 생각하면 어색한 조합이지만 갯가에서는 별로 낯설 것도 없었습니다. 10리는커녕 앉은 자리에서 녹아버린 사탕 때문에 허무함에 시달리던 저는 새우젓을 곧잘 집어먹었습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우리 손자 새우젓 도가에 장가보내야겠네.”라며 웃었습니다. 농담이라도 빌려 손자의 허기를 달래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송방에서 나와 할머니가 가는 곳은 작은 배 몇 척이 노고를 내려놓는 포구였습니다. 그곳이라고 당신을 기다려주는 게 있을 리는 없습니다. 바다 쪽에 시선을 두고 하염없이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가끔 당신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확인하려고 애써봤지만 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무심하게 오가는 갈매기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멀리 떠가는 배나 구름을 보고 있는 것도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울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조바심으로 저는 애먼 신발코를 바닥에 툭툭 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울지 않았고, 대신 갈매기가 머리 위를 맴돌며 끼룩끼룩 울었습니다. 당신도 어린 손자의 초조를 알고 있었겠지요. “이젠 그만 가자.” 어느 순간 치마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생솔가지를 태운 듯 매캐한 내음이 묻어있었습니다. 비린 것 한 손 들지 않은 가난한 귀가는 쓸쓸했습니다. 소주 두어 잔 외에 하루 종일 빈 속이었을 할머니의 걸음은 자주 허청거렸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그렇게 흔들리는 걸음과 달리 당신의 표정은 조금 편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 단순한 소풍이 할머니에게는 설움 받힌 가출이었고 최소한의 일탈이었고 오욕을 덜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방탕과 방랑 사이를 오가다 빚더미만 남겨놓고 떠난 남편, 현실에 무너진 큰 아들, 집을 떠나 소식조차 없는 작은 아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잊지 않는 빚쟁이들. 무엇보다 남들이 씨를 뿌리고 거두는 수많은 논과 밭이, 한때 자신의 소유였다는 기억이 가장 큰 절망이었겠지요. 하지만 할머니는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었습니다. 소라껍질 같은 단단함이 그나마 집을 지탱하는 힘이었으니까요. 저를 불러 수룽구지에 가는 날은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었겠지요. 소리 없는 통곡을 위해 나선 길이었겠지요. 산길 하나 넘으며 화를 삭이고 들길 하나 건너며 원을 내려놓고나머지 찌꺼기는 바다에 떨치는. ! 늦은 깨달음은 더욱 큰 아픔입니다.

 

수룽구지가 수룡동이라는, 의외로 멋진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먼 훗날 알았습니다. 차를 타고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을 지나는데, 길가의 수룡동이라는 입간판이 시선을 당겼습니다. 저는 그 수룡동이 과거 할머니와 가던 수룽구지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음운변천을 거쳐 수룡동이 수룽구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느낌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확신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수룽구지의 실체에 대해 약간의 의심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어릴 적 꿈속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을까. 가족 중에도 수룽구지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는 수룡동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송방이라 부르던 가게와 갈매기 날던 선창과 설움 가득하던 하늘을 확인하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렸지만, 그냥 미뤄두기로 했습니다. 첫 사랑은 만나지 않는 게 좋다고 하듯이, 환상 같은 기억 하나쯤은 남겨둘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길이 없을 것 같은 절망이 온몸을 조일 때, 비린내 나는 선창에서 보았던 할머니의 처연한 눈을 생각합니다. “우리 손자 새우젓 도가에 장가보내야겠네.” 이명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마음을 기댑니다.

 

어쩌다 보니 길 이야기가 옛날이야기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하필 오늘 같이 기분 좋은 걸음에 왜 그 칙칙하던 날이 떠올랐을까요. 살다 보면 이를 악물고 갈무리해서 삭혀야 하는 아픔이 있고 털어놓아서 덜어지는 아픔도 있습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또 절실하게 그리운 역설의 먼 시간. 오늘은 수십 년 지고 다니던 짐 하나 내려놓고 갑니다. 짐 내려놓기는 여행길 내내 계속 될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를 떠나는 진정한 목적 중 하나가 내려놓고 가벼워지기이고, 가벼워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치유니까요.

 

논길을 지나고 억새들이 바람결에 수런거리는 모롱이를 도니 다시 바다가 나옵니다. 이제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만치 보이는 작은 항구가 곰소항이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젓갈단지, 그리고 곰소염전이 나옵니다. 작은 항구, 손이 아닌 눈으로 만져보기 위해 이만치 떨어져 앉습니다. 혼자 걷다보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기 전에 준비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아직도 바다는 멀리 있습니다. 긴 이별에 지친 갯벌은 침묵으로 엎드려 있습니다. 침묵으로아니군요. 침묵만 본 건 제가 부주의한 탓이었습니다. 갯벌은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폐타이어, 플라스틱 조각, 슬레이트, 가스통까지 온갖 쓰레기가 진을 치고 있는 이 죽은 듯한 갯벌에도 작은 생명들의 화려한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손톱만한 게, 짱뚱어, 그리고. 살아있는 것들이 전해주는 충만과 열락(悅樂). 힘을 내어 다시 휘적휘적 걷습니다.

 

 

 

posted by sagang
2012. 5. 14. 08:30 길따라 바람따라

 

‘길따라 바람따라를 연재합니다. 지자체나 개인, 단체에 의해 끊임없이 이 생겨나거나 복원되고 있지만 아직 그 길들을 통칭할 만한 이름은 없습니다. 제주도에 올레길이 생기더니 지리산과 북한산에 둘레길이라는 명찰을 단 길이 태어났고, 또 어디엔 마실길이 또 어디엔 자드락길, 자락길이또 아직은 이름 없는 길, 잊혀진 길들도 많습니다. 주말마다 그 길들을 순례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보다는 길을 걸으며 저만의 시각으로 본 풍경,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 숨어 있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과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출발지인 모항 어촌체험관에서 바라본 개펄

 

 

변산마실길 안내도. 확인하실 분은 클릭!

 

시인 김춘수가 꽃이라고 부른 순간 꽃이 꽃이 되었듯이, 길은 사람의 발자국과 만나면서 비로소 길이 된다. 꽃이 꽃이 되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듯이, 길도 길이 되기 전에는 그저 산이고 들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길은 사람과 대지가 설레는 몸짓으로 나눈 교감의 흔적이다. 길은 또 망각의 존재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순간, 스스로 흔적을 지우며 다시 산이 되고 들이 되고 물이 되고 풀과 꽃받이가 된다. 그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걷는다.

  풀과 낮은 꽃들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이곳이 바로 갯벌체험관

출발지 근처에 있는 안내도와 이정표. 거리표시는 제각각이었다.

 

 

나무마다 저렇게 안내 리본이 달려있다.

 

길을 만나기 위해 새벽길을 달린다. 오늘의 목적지는 전라북도 부안, 그 중에서도 변산반도 일대다. 천지에 길 아닌 곳이 없거늘 굳이 그곳까지 가는 이유는? 당연히 만나고 싶은 길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부안, 특히 변산반도 국립공원은 우리 땅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 중 하나다. 우리나라 최고의 반도공원인 이곳은 흔히 말하는 천혜(天惠), 즉 하늘이 선물한 땅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적절히 안배된 바다와 산, 그리고 숱한 섬들. 해수욕장만 해도 위도해수욕장 모항·상록·격포·고사포·변산섬은 또 어떤가. 위도·식도·정금도·달루도·대외치도·소외치도. 국가어항으로 격포항과 위도항이 있다. 전나무 숲길로 유명한 내소사는 고졸한 멋으로 사시사철 손짓한다. 그리고 곰소염전과 솔섬. 저녁 무렵 그 앞에 서보라. 아름다운 앞에서 몸이 떨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는 해안절벽이다.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 같은 채석강, 중국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가 놀았다는 적벽과 닮은 적벽강. 이쯤에서 마쳐야 한다. 부안 자랑을 하자면 길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날이 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출발하자마자 산길로 이어진다.

산길에는 당연히 묘지도 있고. 햇살이 곱다.

위에는 마실길 가는 길이라 써놓고 아래에는 위험지역이니 접근금지란다.

 

변산 마실길은 변산반도 국립공원의 외변산에 생긴 길이다. 마실은 마을(을 가다)’의 사투리. 추억의 샘을 자극하는 이름이다. 트레킹의 시작을 마실길의 3구간 1코스의 출발점인 모항어촌체험관으로 잡았다. 이곳에서 시작해서 왕포까지 11km를 걸어갈 계획이다. 이 길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 없다. 먼저 걸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을 보면서 가장 아름다울 것 같은 코스 하나를 찍었을 뿐이다. 물론 채석강과 적벽강을 거쳐가는 코스 역시 빼어난 풍경을 자랑하지만 이미 그곳은 여러 번 다녀왔기 때문에 대상에서 제외됐다. 자동차를 어촌체험관 주차장에 두고 배낭에 비상식량과 물을 챙긴 뒤 씩씩한 걸음으로 출발한다. 그깟 11km 정도야. 수년 간 전국을 누비질 하듯 돌아다닌 내게는 걷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마실길은 총 4구간으로 이뤄져 있다. 노을길이라 이름 붙여진 1구간은 새만금 서두터-대항리패총-고사포 해수욕장-성천마을-하섬전망대-채석강 코스. 체험길이라는 이름의 2구간은 해넘이공원-이순신 세트장-상록해수욕장-솔섬-모항 갯벌체험장. 문화재길인 3구간은 모항-마동방조제-작당마을-진서리도요지-곰소염전. 자연생태길인 4구간은 곰소염전-구진마을-호암마을-호암저수지-줄포 자연생태공원까지다.

 

나무들 사이로 바다가 손짓한다.

걷다 보면 이런 비석도 만나고

꽃들과 한참 놀았다.

 

어촌체험관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국도를 조금 걷다가 바로 해안 쪽 소로로 들어선다. 나뭇가지에 마실길 리본을 달아두었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길 안내 리본은 물론이고 코스 지도, 이정표 등이 어린아이라도 찾아갈 만큼 친절하게 준비돼 있다. 길을 조성한 이들의 정성과 수고로움에 감사를 표한다. 그래도 하이에나처럼 냉혹한 내 눈은 옥에 티를 하나 발견하고 혼자 흐뭇해한다. 안내판 하나에 변산 마실길 가는 길해놓고 바로 밑에는 위험지역 접근금지라고 써놓았다. 여보세요, 아저씨! 저더러 가라는 말입니까, 가지 말라는 말입니까. 조금 걷자 길은 산을 향해 머리를 들이민다. 나뭇가지의 여린 잎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가 가슴까지 파랑으로 채색해준다. 길에는 참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작은 꽃들 사이를 조심조심 지나니 봄 햇살을 듬뿍 머금고 누워있는 묘지가 나타난다. 어느 분인지 저승에 가서도 팔자가 좋다. 늘 파도소리와 갈매기를 벗할 수 있을 테니. 조금 더 걷자 비석 하나가 반긴다. 사물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고 쓰다듬다보니 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하지만 어떠랴. 어차피 이들을 만나러 온 것을. 

 

길이 깔아준 양탄자. 미안해서 조심조심 걸었다.

아우!! 뛰어들고 싶다.

다 걷어내지 못한 철조망이 날카로운 이빨로 으르렁거린다.

산 속 오솔길이지만 전혀 험하지 않다. 산과 바다 사이에는 철조망이 쳐진 곳도 있다. 전에 쳤던 것을 미처 거두지 못한 모양이다. 미처 날카로움을 갈무리하지 못한 가시들이 냉랭한 눈길도 틈입자를 지켜보고 있다. 얼마 전까지 이 곳은 군사지역, 즉 민간인 통제구역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자연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돼 있다. 이데올로기가 낳은 불행은 가끔 이렇게 의외의 선물을 잉태하기도 한다. 전쟁 따위는 망각한 잔잔한 바다가 은빛 비늘을 반짝거리며 손을 흔든다. 구릉을 하나 넘어서니 느닷없이 개활지가 펼쳐진다. 누군가 농사를 짓다 묵힌 듯, 풀만 아우성치며 솟아오르는 묵정밭이 쓸쓸하다. 길은 연초록의 풀들을 양탄자 대신 내어 드문드문 찾아오는 손님을 환영한다. , 푹신하고 황홀한 이 감촉. 이렇게 마구 밟아도 되는 거야? 미안하기 그지없지만 돌아서 가는 길이 따로 없으니 신세를 지는 수밖에. 가지를 제멋대로 뻗은 개복숭아 나무가 연분홍꽃잎을 살짝 열었다. ‘자 붙은 이름과는 안 어울리게, 시집온 다음 날 새벽 우물가에 나온 새색시처럼 다소곳하다. 나무와 풀과 꽃과 새와 놀아주느라 걸음은 자꾸 늦어진다. 오가는 사람이 없는 길에서는 적막도 친구가 된다.

 

중간 중간 나타나는 작은 백사장(?)

길에서 만난 옹달샘.

굴 혹은 조개 캐는 아낙들

 

철조망 너머로 혹은 철조망이 걷힌 자리에 군데군데 작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이 길이 마실길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에는 민간인은 들어갈 수 없었던, 숨겨진 해수욕장이었을 것이다. 여름 날 가족이나 친구끼리 와서 오붓하게 쉬고 가기에는 딱 좋을 것 같다. 이참에 두어 평 말뚝이나 박아두고 갈까? 이마에서 송글송글 땀이 솟아날 무렵, 작은 옹달샘을 만난다. 주둔하던 군인들이 물을 긷던 샘터일까? 지금은 갈잎들이 차지하고 앉아 몸을 적시고 있지만 청소만 잘 해주면 길을 걷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감로수가 될 것 같다.(마실길을 관리하는 관계자가 이 글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잠시 산길에서 벗어난 길은 바닷가에 새로운 길을 연다. 저만치 굴을 따는 아낙네 둘이 햇볕 아래에 정물처럼 앉아있다. 걷기 시작한 이후 처음 만나는 사람이다. 달려가 말을 걸고 싶을 만큼 반갑지만 그들은 굴을 따야 하고 나는 길을 걸어야 한다. 이 길에서는 사람도 그저 풍경일 뿐이다.

 

구름은 저렇게 아름답고

드디어 대숲을 만나다.

저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바닷가의 자갈들은 모처럼 만난 나그네가 반가운지, 발길마다 덜그럭거리며 노래를 한다. 길은 다시 산으로 향한다. 이 구간의 바다 풍경은 아름답다는 말의 한계를 실감할 만큼 황홀하다. 서해에도 이런 색깔의 물이 있었나? 옥색으로 빛나는 바다 위에 작은 어선들이 점점점 떠 있다. 이곳의 어부들은 물고기 대신 보석을 낚아 올릴 것 같다. 한참 걷다보니 느닷없이 대숲이 나타난다. , 여기구나. 사실 3구간 1코스를 선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인터넷에서 발견한 이 대숲 사진이었다. 시누대들이 빽빽하게 터널을 이루고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서늘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싼다. 어릴 적 시누대를 깎아 연을 만들고 칼싸움도 하던 생각이 난다. 대숲은 제법 길게 이어진다. 중간에 군인들의 막사로 쓰였음직한 시멘트 구조물도 나타난다. 건물이 제법 큰 것을 보니 분대 병력 이상이 생활했을 것 같다. 지금은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문만 비바람에 늙어가고 있다.

 

산을 내려오니 이런 제방이...

마동마을을 설명하는 입간판

아무도 없는 방조제를 걷는다.

대나무터널을 나오니 드넓은 개펄이 눈앞에 펼쳐지고 길은 길게 이어진 방조제로 향한다. 산길의 끝에서 입간판을 발견한다. ‘옛날 선비가 이곳을 유람하던 중 유유동의 말재를 넘어 마동을 지나다 말이 쉬기에 알맞은 곳이라 하여 마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동네 유래를 적어놓은 것이다. 말이 쉬기 좋은 곳이라 해서 마동(馬洞)이라딱히 전설이랄 것도 없고 크게 특별할 것도 없는 내용이지만 길손에게 무언가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와 닿는다. 숱한 길들이 생겨나고 복원되고 있지만 단순히 걷기만을 위한 길은 별 의미가 없다. 세월에 묻혀 잊어버린 이야기들을 캐내고 그걸 잘 포장해서 걸어놓을 때, 그 길에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나마 구전이 가능한 노인들이 세상을 뜨기 전에 채집하는 일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외지 사람들을 부를 목적으로 길을 만드는 지자체에게 충고 삼아 하는 말이다. 그나저나 뭔가 좀 이상하다. 몸은 최소한 7~8km는 걸었다고 말하는데 이정표는 여전히 절반도 못 왔다고 쓰여 있다. 거리를 재는 센서에 이상이 왔나? 어쨌든 걷고 또 걷다보면 목적지가 나타날 터. 긴 마동방조제의 끝은 차도로 이어진다. 모처럼 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로 올라선다. 고맙게도 인도 에 가드레일을 설치해놓았다.

 

 

잠시 차도와 조우. 인도를 잘 분리해 놓았다.

작당마을의 우물

근사한 카페를 지나친 길은 다시 몸을 낮춰 마을로 들어선다. 출발 이후 처음 만나는 마을이다. 헌데 동네 풍경이 범상치 않다. 수백 년은 묵었음직한 느티나무와 세련된 집들. 특히 언덕 위 느티나무 곁에 지은 집은 어지간한 별장은 울고 갈 만큼 근사하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역시 마을을 설명하는 입간판이 있다. ‘마을 뒷산 까치봉에서 까치 자웅이 마을로 내려와 정자나무에 둥지를 틀면서부터 풍어의 전성기를 이룬 칠산어장의 요충지로 각처에서 모인 등불들이 밤이면 꽃밭처럼 장관을 이뤄어법은 에헤야~ 데헤야~ 숨 쉴 곳 찾기 어려운 만담조로 늘어지지만 내용은 금세 이해가 간다. 까치가 둥지를 틀면서 풍어를 이뤘고 그 덕분에 마을 이름이 작당마을이 됐다는 얘기겠지. 왠지 느티나무마다 까치집이 주렁주렁 열렸더니. 까치에 얽힌 전설도 전설이지만 칠산어장의 요충지였다는 기록에 더욱 눈이 간다. ‘고기 반 물 반이라는 허풍까지도 허풍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조기가 많이 잡혔다던 어장. 칠산바다에 대한 이야기는 많고도 많다. ‘칠산바다 조기튀난 제주바당 복쟁이 튄다라는 제주 속담도 있다. 칠산바다 조기가 뛰니 제주바다의 복어가 뛴다는 뜻이렸다. 오버하지 말고 분수껏 살라는 얘기겠지. 저 앞바다 어디쯤에 어선들이 힘차게 오가고 불끈불끈 힘줄이 튀어나온 어부들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경로당이 예쁘다.

부럽고 또 부러웠던 언덕 위의 집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걷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부수적으로 제공한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경로당이 예쁘다. 그 옆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다. 식수로 쓰지는 않지만 잘 단장돼 있어 보기 좋다.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언덕 위 느티나무집으로 자꾸 눈길이 간다. 저런 집에서 살아봤으면. 아침마다 느티나무에서 좋은 글이 하나씩 뚝뚝 떨어질 것 같다. 할머니 한분이 저만치서 걸어오길래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더니 고개만 까딱하고는 그냥 지나간다. 최소한 어디서 왔수?”쯤의 반응을 기대했는데 좀 무색하다. ‘이 생긴 뒤로 마을을 지나는 나그네들이 많아서인가? 조금 더 안 쪽으로 들어가니 할머니 두 분과 아직 할아버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젊은 초로의 아저씨가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 중 할머니 한 분이 소쿠리에 가득 담긴 무언가를 다듬는다. 그냥 지나갈 수 있나. 인사를 하고 말을 붙인다.

할머니 뭘 다듬으세요?”

이거? 민들레라우

나물해 드시려고요?”

아니, 약에 쓰려고

초로의 아저씨가 거든다.

서방 해줄라고 이렇게 열심히 다듬는대요. 이게 거시기에 그렇게 좋다네

거시기에 좋다고? 거시기가 뭐지? 아저씨의 짓궂은 웃음으로 봐서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니 저 아저씨, 일은 안하고 쓸데없이 앉아서 누님들을 놀리고 있구먼.

 

길을 잘못 들어 느닷없이 걷게 된 갈대 길.

바닷가에는 쭈꾸미 포획용 소라껍질이

개펄...바다...그리고 배

아저씨와 비밀이라도 나눠가진 듯, 묘한 웃음을 미처 지우지 못하고 마을을 벗어난다. 한참 걸어가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이게 아닐 텐데. 길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로 향해 있다. 그 흔하던 이정표도 없고 나무마다 달렸던 리본도 안 보인다. 표식을 놓친 건 아닌지 잠깐 돌아가 보기도 하고 수풀까지 뒤져보지만 마실길은 감쪽같이 꼬리를 감췄다. 마을을 벗어날 때쯤 안내판이 좀 부실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아무래도 차도는 아닌 것 같다. 목적하는 방향과 비슷하다고 짐작되는, 제방으로 연결되는 작은 길로 내려간다. 기대하지 않았던 갈대밭이다. 사람이 다닌 지 오래인 듯 길은 이미 흔적을 지워가고 있지만 갈대 사이를 걷다보니 예상 못했던 선물을 받은 듯 행복해진다. 우리네 삶도 가끔은 이렇게 길을 잃을 필요가 있는 것일까? 뜻밖의 행운을 만날 수도 있을 테니. 아서라, 말아라, 이제 모험을 할 나이는 지났거늘.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걸음을 재촉한다. 제방으로 올라가 한참 걷다가 다시 나무에서 리본을 발견한다. 집 나간 강아지라도 만난 듯 반갑다. 안도감이 드니 맥주 한 잔 생각이 간절하다. 저만치 보이는 동네에는 구멍가게라도 있을까? 걸을 때마다 고민하는 부분이 짐을 꾸리는 것이다. 좋아하는 맥주를 충분히 지고 다니면 좋겠지만, 그러다가는 짐에 눌려서 발병 나기 십상이다. 그래도 이렇게 시원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을 때 마시는 맥주는 그 자체가 천국인데. 중간중간 나그네를 위한 가게를 두면 안될까? 물고기를 입에 가득 문 갈매기 한 쌍이 맥주나 그리워하는 중생을 비웃기라도 하듯 머리 위를 선회한다.

 

이곳이 왕포마을

왕포마을의 동백

왕포마을을 벗어나서 과수원길을 걷는다.

제방이 끝난 곳에서 만난 마을 이름은 왕포마을. 이름 한번 거창하다. 이정표를 찾아보니 아직도 5.9km밖에 걷지 못한 것으로 돼 있다. 오늘따라 내 걸음이 왜 이리 더딘 거야. 길옆에 활짝 핀 동백이 자꾸 놀다가라고 손짓하지만 오래 눈길을 줄 시간이 없다. 지금부터는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왕포마을을 지나면서부터는 차도를 따라가다 보니 걷는 재미가 반감된다. 권선마을이라는 곳을 지나친 뒤 잠시 다리쉼을 하는데 이정표가 눈에 띈다. ‘모항 갯벌체험장 7.5km’ ‘곰소염전 5.3km’ 가만, 가만!! 뭔가 이상하다. 부랴부랴 프린트 해 온 안내 팸플릿을 꺼낸다. 어어? 이게 뭐야. 안내서에는 모항 갯벌체험장에서 왕포마을까지가 11km이고, 다시 왕포마을에서 곰소염전까지 12km로 돼 있다. 합하면 23km인데 눈앞에 있는 안내판 숫자는 합쳐봐야 12.8km밖에 안 된다어라? 왕포마을? 조금 전 지나온 그 마을이잖아. 그곳이 오늘의 목적지인데 왜 까마득하게 몰랐지? 맞다. 이정표 때문이다. 이정표에는 분명 5km 밖에 걷지 못한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니 11km를 걷기로 한 나로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11km5km로 둔갑한 사연은 뭘까? 아무튼 한참 지나치고 말았다. 왠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더라니. 더 걸은 게 억울한 게 아니라, 엉터리 이정표가 당혹스럽다. (뒤에 확인해보니 모항 갯벌체험장 출발지에 서있는 안내도에도 곰소까지 23km로 돼 있고 바로 옆의 이정표에는 12.5km로 돼 있었다. 어느 장단에 춤을?)

 

나를 돌아서게 한 이정표. 갯벌체험장 7.5km 곰소염전 5.3km라고 적혀있다.

나물 캐러 가는 할머니를 보면서 마음을 달래야지.

이제 돌아가야 한다. 갈 때는 버스를 타기로 했으니 버스 정류장까지 되짚어 걸어 올라간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다. 버스정류장에는 과일과 채소를 가득 실은 트럭이 한 대 서 있고 아저씨는 큰 비닐봉투에서 나물을 꺼내 작은 봉투에 나눠담고 있다.

여기서 모항까지 가는 버스 있을까요?”

딱 한 마디 대답하더니 얼른 트럭을 몰고 가버린다.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 좋으련만. 내가 강도같이 보이나?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는 올 기미가 없다. 이러다가는 다음 일정이 펑크 날 것 같다. 혹시나 싶어서 가져온 택시 전화번호를 꺼내 한참 망설이다가 전화를 건다. 위치를 대고 모항까지 택시비를 물으니 15천원이란다. 생각보다 싼 편이다. 블로그에서는 채석강까지 3만원 정도한다는 정보가 있었는데. 할 수 없지. 딱 오늘만 택시로 돌아가기로 한다. 대신 다음 여행지에서는 벌칙으로 걸어서 돌아가기로.

 

관선마을. 이곳에서 돌아섰다.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 내 배낭만 쓸쓸하다.

택시 안에서 기사에게 버스가 안 왔던 이유를 듣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안 오지요?”

, 그렇네요

그럴 이유가 있어요. 이 코스를 다니는 버스회사 사장이 돈을 떼어먹고 튀었거든요. 어차피 정부에서 받는 50% 지원금으로 운영하는 게 시골버스인데, 사장이 튀어버렸으니 기사들만 골탕을 먹었지요

기사들만 골탕 먹은 건 아니다. 나처럼 버스를 타고 출발지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도 골탕이다. 아니, 정말 난감한 건 버스에 의지해서 장이라도 봐야하는 촌부들이다. 왠지 버스정류장에 누군가를 규탄한다는 표어가 덕지덕지 붙었더라니. 택시를 타니 모항까지는 금방이다. 짧지만 길었던 일정은 끝났다. 아름다운 풍경은 아름다운대로 가슴에 남고, 해프닝은 또 해프닝대로 가슴에 남는다. 걷는다는 행위, 가장 원초적인 몸짓은 걸은 만큼의 뿌듯함으로 내 안에 기록된다.

 

 

 

[꼬리] 마실길을 걷고 난 뒤에 다음과 같이 코스가 변경됐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 뉴스대로라면 그날 걸은 곳은 6코스 쌍계제 아홉구비길이었고 역시 11km였습니다. 찾아가실 분들은 아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부안군은 종전의 변산 마실길인 새만금전시관~부안자연생태공원 664구간 7코스와 내륙 마실길 746코스를 연결해 총 길이 14013코스로 연장, 개통키로 했다.

명칭도 부안 마실길로 통일키로 결정했으며 지역특성을 고려해 노선명도 변경됐다.

부안 마실길은 1코스-조개미 패총길(새만금전시관~송포, 5km), 2코스-노루목 상사화길(송포~성천, 6km), 3코스-적벽강 노을길(성천~격포해수욕장~격포항, 7km), 4코스-해넘이 솔섬길(격포항~솔섬, 5km), 5코스-모항갯벌 체험길(솔섬~모항해수욕장, 9km), 6코스-쌍계제 아홉구비길(모항해수욕장~왕포, 11km)이다.

7코스-곰소 소금밭길(왕포~곰소염전, 12km), 8코스-청자골 자연생태길(곰소염전~부안자연생태공원 11km), 9코스-반계선비길(개암사~우동마을, 14km), 10코스-계화도 간제길(계화도~석불간, 16km), 11코스-부사의 방장길(석불산~부안댐, 24km), 12코스-바지락 먹쟁이길(변산해수욕장~부안댐, 10km), 13코스-여인의 실크로드(성천~유유저수지~격포항, 10km)로 확대됐다.

이 같은 마실길을 탐방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총 34시간 30분 정도로 한번에 완주하는 데는 34일이 필요하다.

(나머지는 생략)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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