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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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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6 [사라져가는 것들 98] 석유곤로*30
2009. 2. 16. 10:42 사라져가는 것들

남녘에서 올라온 봄바람이 빈 들판을 가로지를 무렵, 할머니는 수십 년 동안 끼고 있던 금가락지를 손가락에서 빼냈다. 값이 꽤 나가는 쌍가락지였다. 누가 말리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아니, 틈이 있었다고 해도 말릴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표정이 처자식을 베고 전장으로 가는 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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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그것처럼 결의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혼 길에 선 한 여인의 가슴에 슬픔의 강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다는 걸 가족 모두 알 수 있었다. 끼니를 건너 뛸 만큼 어려운 때도 빼지 않던 가락지였다. 당신에게 그 가락지는 친정어머니의 분신과 다름없었다. 임종하는 자리에서 물려받았다고 했다. 잘 간직하라는 당부와 함께…. 그 일이 벌어진 건 아이가 중학교 입학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할머니는 손가락에서 뺀 가락지를 하얀 손수건에 갈무리하더니 아이를 앞세우고 길을 나섰다. 그 길로 삼십 리를 걸어 읍내로 갔다. 반지를 돈으로 바꾼 뒤 맨 먼저 한 일이 방을 얻으려 다니는 것이었다. 아이가 자취할 방이었다. 하지만 돈에 맞춰 변두리만 돌다보니 마땅한 방을 찾기 쉽지 않았다. 결국 산꼭대기에 가장 가까운 언덕을 올라가서야 처마에 내어지은 작은 방을 얻을 수 있었다. 부엌도 있었지만 비나 간신히 가릴 정도로 얼기설기 둘러놓은 수준이었다.

*곤로는 일본말에서 온 것으로 풍로나 화로라고 써야하지만, 그 시절 삶의 모습을 원형에 가깝게 전한다는 의미에서 그대로 표기합니다.

방이 정해지자 할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시장으로 갔다. 거기서 가장 먼저 산 것이 석유곤로였다. “연탄불이 없어도 이것만 있으면 밥을 굶지 않을 게다.” 할머니는 전가의 보도(傳家의 寶刀)를 자식에게 넘겨주는 장수처럼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당신도 말만 들어봤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물건을 파는 사람에게 쓰는 방법을 묻고 또 물었다. 상점 주인이 설명을 할 때마다 아이를 돌아봤다. 네가 쓸 것이니 잘 들어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굶어죽을 일이 없게 만들어주는’ 곤로야말로 괴물처럼 낯선 도구였다. 고향집에서 군불도 때보고 연탄도 갈아봤지만 곤로라는 물건은 친해지기 쉽지 않았다.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하룻밤을 묵으며 석유를 사다 넣고 불붙이는 시범을 보여줬다. 옆에서 볼 때는 그런대로 쉬워보였는데 막상 혼자 해보려니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 말대로 굶지 않으려면 곤로에 불을 켜고 쌀을 씻어 밥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쌀과 반찬거리를 사다놓은 뒤 학교에 다니는 데 필요한 돈만 남겨줬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호떡 하나 사먹을 여유도 없었다. 가난한 손자를 남겨두고 떠나는 할머니 역시 그 좋아하는 인절미 하나 입에 넣지 못하고 먼 길을 허위허위 걸어갔을 것이다.

곤로를 쓰는데 가장 힘든 과정은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손잡이를 움직여 심지를 올리고 성냥을 켠 다음, 연소통을 들고 심지를 보면서 불을 붙여야 하는데, 겁이 많은 아이는 늘 성냥을 던지듯 놓고 연소통을 내려놓았다. 불이 확 번져서 손을 델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그러니 불이 제대로 붙을 턱이 없었다. 그때마다 냄새만 간이부엌을 가득 채웠다. 또 하나 난감한 건 석유를 사러 다니는 일이었다. 8홉들이 병을 들고 석유가게에 갈 때마다 귀찮고도 창피했다. 돈이 있는 집들은 큰 통에다 석유를 사다 썼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병을 채우는 것도 벅찼다. 석유를 곤로에 넣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그냥 부으면 흘러내리기 때문에 플라스틱 펌프를 사용했다.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유량계의 눈금을 보면서 펌프질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눈금이 바닥에 닿은 걸 미처 확인하지 못해 밥을 하는 도중에 석유가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아이는 고향집이 그리웠다. 아이를 곤란하게는 했지만, 사실 석유곤로야말로 취사를 훨씬 편하게 해준 도구였다. 그 전까지는 나무나 연탄불로 밥을 하고 국을 끓여야했다. 하지만 나무는 민둥산을 푸른 산으로 만들겠다는 국가시책 때문에 더 이상 연료로 쓸 수 없었고, 연탄 역시 취사용으로는 그리 적절하다고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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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곤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편리했다.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나더라도 밥을 굶고 나갈 염려가 없었다. 무엇보다 라면 끓일 때 편리했다. 물을 올려놓으면 금세 펄펄 끓으니 자취생들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복음이나 다름없었다. 곤로가 나오기 전에는 밥을 짓기 위해 한 여름에 연탄불을 피우는 경우도 있었다. 곤로의 구조는 맨 아래에 석유탱크가 있고 그 위에 면으로 된 심지를 장착한 원통이 있다. 가운데 튀어나와 있는 손잡이를 좌우로 움직이면 심지가 올라가고 내려갔다. 심지의 조절을 잘 해야 했다. 화력을 강하게 한다고 너무 올리면 그을음이 많이 나고, 석유를 아끼겠다고 너무 내리면 화력이 형편없었다. 심지 위에는 연소통이라는 장치가 달려 있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원통형의 철판으로 불길이 퍼지지 않고 위로 올라가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 위에 덮개와 솥을 얹을 수 있는 삼발이가 있었다. 석유곤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석유가 타면서 나는 냄새와 그을음이었다. 조금 쓰다 보면 심지가 짧아지고 타다 남은 석유 찌꺼기가 눌어붙게 되는데, 찌꺼기가 많아지면 화력도 떨어지고 냄새도 심해졌다. 자동차의 엔진오일을 주기적으로 갈아야하는 것처럼 심지 역시 적절한 시기에 바꿔줘야 했다.

그 덕분에 ‘심지갈이’라는 새 직업이 생기기도 했다. 그 시절 골목에는 “곤로 고쳐요~ 심지 갈아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양은솥이나 냄비 때워요~" "우산이나 양산 고쳐요~” “칼 갈아요~” 와 함께 ‘시대’를 반영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도 유리심지라는 개량심지가 등장하면서 골목에서 잦아들었다. 뿐만 아니라 ‘부엌의 혁명’이라는 칭송까지 들으며 영원히 존재할 것 같았던 석유곤로 자체도 속절없이 떠나야 했다. 금가락지를 팔아 어린 손자 뒷바라지를 했던 할머니가 기어이 새 반지를 끼지 못하고 세상과 이별을 하던 시기에, 부엌을 시커멓게 만들던 그을음도 코를 찌르던 석유냄새도 사라져갔다. 그 대신 깔끔하기 그지없는 가스레인지나 그보다 더 좋은 열기구들이 주방의 주인이 되었다. 세상은 그만큼 편리하고 깔끔해졌다. 그런데도 걱정을 운명처럼 안고 태어난 사람들은 가끔 불안해한다. 너무 편해진 환경이 사람을 나태하게 만들고 퇴화시키는 건 아닌지. 아이들에게 무엇이 고마운 건지조차 가르치지 못하는 건 아닌지. 먼지로 희미해진 눈금을 들여다보면서 펌프질을 하던, 손이 델까봐 무서워하며 심지에 불을 붙이던, “곤로 고쳐요” 소리가 골목길을 휘젓던 시절은 이미 옛날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아날로그적 삶조차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빛의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 한 구석에 여전히 살고 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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