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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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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줄놀이'에 해당되는 글 2

  1. 2010.08.09 [사라져가는 것들 144] 공기놀이6
  2. 2010.04.05 [사라져가는 것들 135] 고무줄10
2010. 8. 9. 09:2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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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땅거미를 동반한 산들바람이 산모롱이를 돌아오면서 들판에 저녁 이내가 깔리기 시작한다. 그제야 장 주사네 마당에 장기판만큼 작아진 몸피로 미적거리고 있던 저녁햇살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느티나무 아래에 퍼질러 앉은 아이들은 움직일 기미가 없다. ‘무찌르자 오랑캐~’ 하늘까지 오를 것 같던 고무줄놀이는 언제부턴가 내팽개치고 공기놀이에 푹 빠져버렸다. 꺾기에 들어가는 순님이의 얼굴이 신대 잡은 무당만큼이나 엄숙하다.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 손등에 얹힌 돌이 떨어질세라, 채어 잡기 좋게 모으느라고 숨조차 아낀다. 잠시 뒤 손등위의 공깃돌을 던지듯 띄우더니, 병아리 덮치는 솔개마냥 잽싸게 낚아챈다. 성공이다!! 기쁨의 환호가 채 가시기도 전, 째질 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광자네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어 마당으로 들이닥친다. 돌아보지 않아도 광자 엄마의 목소리다. 밭에 나갔다가 막 돌아온 모양이다. 등에서 잠든 동생을 추스르며 순님이의 현란한 손동작에 넋을 놓고 있던 광자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다.
“야, 이년아. 애기 잠들면 물도 길어놓고 마루도 좀 훔쳐놓으라고 했더니 여지껏 거기 퍼질러 앉았냐? 내 이년의 다리몽댕이를 분질러버려야지. 말 만한 년이 맨날 쳐 먹고 놀기만 하니….”

광자 엄마의 푸닥거리가 시작되나 싶더니, 공기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후다닥 일어나 뿔뿔이 흩어진다. 모두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와 허겁지겁 정신을 차린 얼굴이다. 부뚜막 부지깽이라도 심부름을 보내야 할 계절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으니 집에 돌아가면 경칠 일만 남았다. 고무줄에서 끝냈어야하는데…. 공기놀이를 하자고 꼬드겼던 명자를 쳐다보는 눈초리에 가시들이 박혀있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랴. 아이들의 발걸음이 추라도 달린 듯 무겁다. 그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도록 만드는 게 공기놀이였다. 여자아이들은 어디든 모여 앉았다 하면 공기놀이를 했다. 마당은 물론 교실, 방안…. 가릴 게 없었다. 특별한 도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돌멩이 다섯 개면 모든 게 해결되니 그럴 수밖에. 그래서 한번 시작하면 제 시간에 일어나지 못하고 혼나기를 밥 먹듯 했다. 다른 놀이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도 공부시작 종소리를 듣지 못하고 공기놀이에 빠졌다가 벌서는 아이들도 있었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도 숟가락 들 정도만 되면 여자아이들의 손에는 공기가 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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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깃돌은 보통 작은 새알만하다. 쓰이지 않는 돌은 없었지만, 특히 하얀 차돌이 인기가 있었다. 알맞은 돌을 주워서 사용하거나 기왓장 같은 것을 손에 맞게 갈아서 쓰기도 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다는 말은 여기서도 통했다. 예쁜 공깃돌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공기놀이에도 제법 복잡한 순서와 규칙이 있는데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했다. 이름도 제각각이었다. 경상북도에서는 ‘짜게 받기’, 경상남도에서는 ‘살구’, 전라북도에서는 ‘공기 따먹기’, 전라남도에서는 ‘닷짝걸이 등으로 불렀고 그 밖에 ’좌돌리기‘, ’조개질‘, ’좌질‘이라고는 이름도 있었다. 용어도 다양했다. ‘콩’은 공기를 받다가 떨어트렸을 때 콩! 하고 얼른 외치면 다시 주울 수 있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미친년’은 공기알을 바닥에 던졌는데 한 개가 비스듬히 서있는 것 가리킨다. 또 ‘반지’는 꺾기를 하는데 공기알 하나가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 끼는 것을 말하고 ‘피아노’는 꺾기를 위해 공기알을 손등 위에 잘 놓으려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데서 나온 말이다. 이밖에도 집어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교묘하게 집는 것을 ‘간빼먹기’라고 하고 공깃돌 하나가 다른 돌에 딱 붙어있는 것은 ‘밥풀’이라고 한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인 순서는 대개 비슷했다. 맨 먼저 ‘초집기’를 하는데 다섯 개의 공깃돌을 손바닥에 쥐어 바닥에 뿌려 놓는다. 그 가운데 한 알을 집어 던져 올리는 동시에 나머지 네 알 중 한 알을 얼른 집고 내려오는 돌과 같이 쥔다. 나머지도 같은 방법으로 하나씩 집는다. 돌을 집을 때 옆의 돌을 건드리거나 던진 돌을 잡지 못하면 실격이 되어 순서는 다음 사람에게 넘어간다. ‘두집기’는 공기알을 두 알씩 집으면 되고, ‘세집기’는 한 번에 세 알을 집은 다음 한 알을 집던가, 반대로 한 알을 먼저 집은 후 세 알을 집는다. ‘막집기’는 손에 다섯 알을 쥐고 한 알을 위로 던지면서 나머지 돌을 바닥에 놓은 다음 떨어지는 돌을 받는다. 이어 받은 돌을 위로 던지면서 바닥에 놓인 네 개의 돌을 한꺼번에 쓸어 쥐는 것과 동시에 떨어지는 돌을 받는다. 이렇게 네 알 집기까지 끝나면 ‘꺾기’에 들어가는데, 먼저 다섯 개의 공깃돌을 던져 손등으로 받는다. 이 때 손등에 얹힌 돌이 셋이면 3년, 다섯이면 5년으로 계산하는데 손등에 얹힌 돌을 그대로 띄운 다음 공증에서 낚아챈다. 손등에 공깃돌이 하나도 얹히지 않거나 던진 돌을 모두 잡지 못하면 실격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한 점수를 먼저 난 사람이 이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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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놀이의 기원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시작된 시기가 무척 오래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가축의 뼈로 만든 둥근 알들을 점치는 도구로 사용했는데, 훗날 놀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증언하듯 그 시대에 만들어진 도자기에서 공기놀이를 하는 신들과 남자들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땅에서도 꽤 오래 전부터 즐겨 왔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우리나라 아이들이 둥근 돌알을 가지고 노는 놀이가 있어 ‘공기’라고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공기놀이는 무척 성행했다. 그러다 1980년대 이후 TV가 집집마다 보급되고 각종 장난감이 쏟아지면서 전래돼 오던 놀이들은 하나 둘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 놀이 중 대표적인 것이 공기놀이다. 요즘도 학교 앞 문방구에서 플라스틱 공깃돌을 판다고 한다. 물론 공기놀이를 즐기는 아이들도 여전히 있을 테고. 하지만 아무래도 옛날의 그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 시절이 그리워 어느 날 순님이, 광자, 명자가 퍼질러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장 주사네 마당을 찾아가보본다. 하지만 느티나무 아래엔 잡초만 무성하고 허리 굽은 노파 하나 먼 하늘에 고단한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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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5. 09:04 사라져가는 것들
가객 장사익은 ‘사람이 그리워서 시골장은 서더라’고 노래했지만 저는 옛 정취가 그리워서 시골장을 기웃거립니다.
내 아버지 어머니와 똑같은 체취를 가진 노인들 틈에 섞여 이리저리 흘러 다니다보면, 거북등처럼 갈라졌던 마음도 어느덧 말끔하게 때워지고는 합니다.
아직도 시골장터에는, 도시를 떠돈 뒤로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들이 어항속의 금붕어처럼 유영합니다.
예고 없이 마주치는 추억들은 가슴을 설레게 하지요.
그들 중 하나가 고무줄이라고 하면, “별 싱거운 사람도 다 있네.” 하고 웃는 분도 계시겠지요?
하지만 제겐, 아니 저와 비슷한 시절을 사신 분들에게는 그리 싱거울 일 만은 아닙니다.
지금은 세월에 묻혀 잊혀져가는 존재가 되었지만, 과거엔 없어서는 안 될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골장 한 모퉁이 잡화코너에 조금 부끄러운 듯 걸려있는 고무줄을 마주치면 금세 머릿속에 주마등이 하나 걸립니다.
코흘리개 아이 때처럼 신명이 전신을 훑기도 하고, 오래 전에 이별한 할머니 생각에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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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장에 갈 때면, 어머니는 고무줄을 잊지 마시라고 몇 번이고 당부하고는 했습니다.
그만큼 아녀자들에게 중요한 게 고무줄이었거든요.
아래속옷을 ‘빤스’도 아닌 ‘사리마다’ 쯤으로 부르던 때였으니, 어쩌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돼버렸는지도 모르겠네요. 
그 ‘사리마다’에는 고무줄이 꼭 필요했습니다.
요즘이야 밴드 처리가 잘 돼 적절한 탄력을 주는 제품이 쏟아지지만, 전에는 고무줄을 넣어야 흘러내리지 않았거든요.
속옷의 윗부분, 지금으로 보면 밴드 처리된 부분에 고무줄이 들어갈 만큼 틈을 만들고, 그 안에 고무줄을 넣습니다.
옷핀이나 가는 머리핀에 고무줄을 매달아 틈새에 넣고 반대쪽까지 조금씩 밀고나간 뒤 양쪽 끝이 만나면 묶어줍니다.
여기엔 조금 값이 헐한 까만 고무줄이 주로 쓰입니다.
지금도 침침한 등잔불 아래서 속옷에 고무줄을 넣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고무줄을 한번 넣었다고 끝까지 입을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속옷 한 장을 만들면 낡아 떨어질 때까지 입던 시절이니, 고무줄이 삭아 끊어지는 일도 흔했지요.
새로 짱짱하게 고무줄을 넣은 속옷을 입고 나서면,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허리에 힘을 주며 으쓱거리기도 했습니다.
엉덩이는 헤져서 몇 번씩 기운 걸 입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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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줄이 꼭 필요한 데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기저귀입니다.
요즘은 대부분 펄프로 만든 일회용 기저귀를 쓰니 천기저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출산을 앞둔 집은 맨 먼저 천기저귀를 준비했습니다.
아기의 여린 피부를 감안해서 소재는 부드러운 면을 쓰지요.
이때 필요한 것이 노란 고무줄입니다.
노란 고무줄은, 까만 고무줄이나 납작한 찰고무줄과는 달리 가운데가 빈 원통형의 고무줄입니다.
다른 것보다 값도 좀 비싸고 탄력도 좋지요.
기저귀를 댄 위에 묶어 흘러내리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너무 탱탱하면 아기가 불편하고 너무 느슨하면 흘러내리기 때문에 잘 조정해줘야 합니다.

사실, 고무줄은 아이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놀이도구였습니다.
남자애들은 고무줄이 있어야 새총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까만 고무줄은 새총에는 잘 쓰지 않았습니다.
찰고무줄이나 기저귀 고무줄에 비해서 탄력이나 내구성이 형편없이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어린 동생의 기저귀 고무줄에 눈독을 들이는 녀석들도 많았습니다.
고무줄 하나 구하기도 쉽지 않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양쪽으로 균형 있게 벌어진 나뭇가지를 자른 뒤, 깎고 다듬어 거기에 고무줄을 묶고 가죽을 대어 새총 하나를 완성하면 세상 모든 새가 내 손 안에 있는 듯 뿌듯했지요.
하지만 새총이 있다고 새가 절로 잡히나요?
가죽에 작은 돌이나 콩을 먹여 참새 떼를 향해 연신 쏘아보지만, 약 올리듯 포롱포롱 날아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참새 중에도 눈치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녀석들이 있어 맞아주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땐 최소 3박4일 자랑거리가 되었지요.
조금 큰 아이들은 나무를 깎아 장난감 권총을 만들기도 했는데, 격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게 탄력 좋은 고무줄이었습니다.
화약을 쓰도록 만든 이 총은 꽤 위력이 있어서 어른들은 ‘위험물건’으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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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들에게 고무줄은 더욱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바로 고무줄놀이 때문이었는데, 이땐 까만 고무줄이 적격이었습니다.
고무줄 여러 개를 이은 긴 줄을 가진 아이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엄마 ‘사리마다’에서 고무줄을 몰래 빼냈다가 종아리에 퍼런 줄 빨간 줄 그은  애들도 있었겠습니까.
아이들은 놀이를 한번 시작하면 해가 저무는 줄도 몰랐습니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해만이냐…‘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삼월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느티나무집 너른 마당에서 부르는 노래 소리가,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어 귓전을 간질이던 시절의 필름은 언제 돌려봐도 가슴 저리도록 아름답습니다.
잘 하는 아이들은 고무줄이 머리 위, 아니 팔을 최대한 뻗을 만큼 높아져도 펄펄 날면서 넘고는 했지요.
개구쟁이 사내 녀석들은 연필 깎는 칼을 갖고 다니다가 몰래 다가가서 고무줄을 끊어놓기도 했습니다.
심술보다는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랬다고들 하는데, 어디 그 심중을 확인할 방도야 있나요.
그 덕분에 오래된 고무줄은 잇고 이어서 철조망 가시 같은 매듭이 수십 개 씩 되곤 했습니다.
지금처럼 리본이 흔하지 않던 시절, 여자아이들의 머리를 묶는 데도 고무줄은 꼭 필요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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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고무줄 정도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더 이상 고무줄이 필요한 놀이를 하지 않지요.
아직도 속바지 정도는 손으로 기워 입는 시골노인들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존재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찮은 물건이 되었는데도, 가끔 까맣고 노란 고무줄을 보러 시골장에 가고 싶으니 이걸 고질병이라고 하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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