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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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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름'에 해당되는 글 2

  1. 2009.05.04 [사라져가는 것들 108] 똥장군15
  2. 2008.12.22 [사라져가는 것들 90] 뒷간13
2009. 5. 4. 09:0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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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배아버지 석두씨의 별명은 ‘장군’이었다. 이마에 별이 번쩍번쩍 빛나는 장군이었으면 좋았으련만, 불행하게도 앞에 ‘똥’자가 붙은 별 볼일 없는 장군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 돌배는 늘 놀림거리가 되었다. “돌배아버지는 장군이래요~ 똥장군이래요~” 아이들은 그 노래를 입에 달고 다녔다. 놀림이 지나쳐 울음을 터뜨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돌배가 제 아버지에게 아이들의 횡포를 일러바쳤음직도 하건만 달라진 건 없었다. “그깟 녀석들이 뭐라고 하든 못 들은 척 해라.” 그 정도의 대답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워낙 희로애락을 내색하는데 인색하기도 했거니와 타인의 시선 따위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 그였다. 석두씨의 직업은 농부이자 ‘똥퍼’였다. 도시에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면서 "똥 퍼~!" 소리치던 사람들이 있었듯이 시골에도 똥장군이나 똥지게를 지고 남의 집 똥을 퍼주는 이가 있었다. 농촌이라고 해서 모두가 똥장군을 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동네에서는 석두씨가 그 일을 도맡아서 했다. 그래서 별명이 장군이 된 것이었다. “여보게, 석두. 우리 집 뒷간이 차버렸네.” 한마디만 하면 석두씨가 나타나 깔끔하게 비워주었다. 퍼달라고 시킨 사람 집 밭에 거름을 내게 되면 약간의 노임을 주면 되고, 그냥 가져가라고 하면 그걸로 계산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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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봄날 이른 아침, 지게에 똥장군을 얹고 밭으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분명 석두씨였다. 마을에는 석두씨가 이 밭 저 밭에 뿌린 인분냄새가 가장 먼저 봄을 알렸다. 농사철이 시작되면 그는 아침마다 똥장군을 지고 밭으로 갔다. 그가 놀아도 되지 않을 만큼 인분은 늘 생산되었다. 석두씨는 자신의 땅이 없었다. 농사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였지만, 농부에게 땅이 없다는 건 군인에게 총이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림으로 받은 가난이 지긋지긋해 소싯적에 도시로 나갔지만 결국 만신창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떠날 때와 달라진 건 아내와 젖먹이 하나가 뒤를 따라왔다는 것이었다. 한 끼의 밥이 급급한 사람에게 가족은 희망이 아니라 삶의 무게였다. 모처럼 찾아온 고향에서 그와 그의 식솔을 기다린 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처절한 현실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넋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도조(賭租)를 주기로 하고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시작했다. 석두씨는 하늘이 낸 농부였다. 척박한 땅에 씨를 뿌려도 기름진 땅보다 소출이 훨씬 많았다. 해가 갈수록 그에게 땅을 맡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워낙 부지런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결정적 배경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똥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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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분이야말로 농작물에게 가장 좋은 비료다. 사람이 땅이 낸 채소나 곡물을 먹으면 배설물로 나오고 그 배설물은 다시 흙을 살찌워 식물들의 영양소가 된다. 인분이 천연퇴비가 되고 이 퇴비로 키운 곡식이 밥상에 오름으로써 인간과 자연 사이에 끊임없는 순환이 이뤄지게 된다. 그게 원활하게 유지될 때 세상이 순리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농부들은 똥을 귀하게 여겼다. 지금이야 볼일을 보고 레버 한번 당기면 배설의 흔적까지 지워지지만, 전통적 뒷간은 똥을 모으고 발효시켜 거름으로 만드는 기능에 초점을 뒀다. 완전한 발효를 위해서 밭 근처에 구덩이를 파서 인분을 보관하기도 했다. 가끔 그 구덩이가 아이들에게는 함정이 되기도 했다. 똥을 퍼다 놓고 시간이 지나면 그럴듯한 거죽이 만들어지는데, 그게 단단해 보이기도 하거니와 색깔이 땅과 구분이 잘 안 될 때도 있다. 그래서 찬찬치 못한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어놀다가 얼떨결에 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 아무튼 석두씨가 뛰어난 농부가 될 수 있었던 건 이 인분관리를 잘 한 덕분이었다. 그는 온 동네를 뒤져 인분을 모으고, 그걸 적절하게 발효시켜서 가장 알맞은 때에 밭에 내었다. 그러니 작물들이 잘 자라지 않을 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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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진 인분을 퍼 나르는 도구가 바로 장군이었다. 똥지게라 부르는, 물지게처럼 생긴 도구를 많이 썼지만 냄새를 차단하고 좀 멀리 이동하기 위해서는 장군이 제격이었다. 장군에 오줌을 담으면 오줌장군, 똥을 담으면 똥장군이 됐다. 원래 장군은 분뇨를 운반하기 위해서만 쓰인 것은 아니었다. 술이나 물, 간장 등을 담거나 나를 때도 유용하게 쓰였다. 옹기처럼 주로 질그릇으로 구워서 만들었다. 한쪽 끝은 둥글게 처리하고 다른 끝은 평평하게 만들어 필요에 따라 세워둘 수 있도록 했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지름 30Cm, 길이 60Cm 정도가 보통이었다. 물론 그보다 큰 것도 많았다. 볼록하게 나온 배 쪽에 좁은 아가리가 있어서 그곳으로 내용물을 담았다. 다 담은 뒤에는 짚 등으로 아가리를 틀어막아 내용물이나 냄새의 유출을 막았다. 장군을 나무판자로 짜서 만들기도 했다. 나무장군은 배를 약간 부르게 만들어서 가운데에 아가리를 붙인다. 몸통에 얇게 쪼갠 대를 둘러서 고정시키고 아가리에는 단단한 나무를 깎아 박는다. 나무장군은 질그릇과 달리 쉽게 깨지지 않기 때문에 공사장 같은 곳에서 물을 나르는 데 많이 썼다. 그러나 쓰지 않을 때 나무쪽이 오그라들고 조각이 나기 때문에 불편한 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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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농가에는 어지간하면 똥장군이 하나씩 있었다. 부지런한 농부는 비료를 사지 않아도 인분이나 퇴비로 밭농사 정도는 훌륭하게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 땅 어디에 가도 똥장군을 등에 진 농부를 찾을 수 없다. 아니,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그랬다. 그리되기까지는 화학비료의 대량공급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냄새도 없고 언제든지 사서 간편하게 뿌릴 수 있는 비료가 쏟아져 나온 뒤로 애써 똥을 모으고 발효시키거나 퇴비를 만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더구나 급격한 산업화의 진행에 따른 탈농업화로 흙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배설물을 멀리하는 데만 골몰해왔다. 그러니 생명을 살찌우게 하는 원천인 똥이 귀해 보일 리 없었다. 잘 삭은 인분을 골고루 뿌리고 그 구수한 냄새와 함께 자라나는 작물을 바라보는 걸 낙으로 알았던 늙은 농부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들 눈에는 똥이 들어가지 않은 땅에서 나는 모든 작물이 도깨비가 만들어 낸 허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생태계 순환에서 벗어난 땅은 갈수록 척박해져 갔다. 그것은 일종의 재앙과도 같았다. 화학비료만으로 키운 채소와 곡물을 먹으면서 사는 사람들의 심성도 갈수록 강퍅해져갔기 때문이다.

평생을 똥장군과 함께 살았던 석두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 아버지가 싫어 일찌감치 도회지로 나갔던 석두씨의 외아들 돌배는, 새로 쓴 묘에 풀이 마르기도 전에 아버지가 평생 모아둔 땅을 남김없이 처분했다. 돌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뒤 그 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은 없었다. 주인 잃은 똥장군 하나가 외롭게 빈집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posted by sagang
2008. 12. 22. 18:31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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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오이냐! 내 새끼.
할머니, 가면 안 돼? 끝까지 거기 있어야 돼!
원, 녀석두, 걱정말래두 그러네.

한밤중에 뒷간 앞에서 벌어지던 풍경입니다.
뒷간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건 아이지만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할머니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형이나 동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다가 배가 살살 아프고 뒤가 묵지근해지면 처음엔 애써 참다가도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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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간으로 갈 수밖에 없지요.
오줌이야 급하면 요강을 쓰거나 마루 끝에 서서 토방에 내갈기기도 하지만 어디 큰 걸 볼 때야 그럴 수 있나요.
결국 머나먼 뒷간까지 가서 볼 일을 보려면 식구 중 하나를 깨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육친이라도 자다가 난데없이 찬바람 쏘이는 걸 좋아할 사람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가느니 마느니 하다가 결국 똥이 엉치 끝에 걸리면 그제야 누군가가 따라나서게 되는 것이지요.
뒷간에 전등이 걸린 시절이 아니었으니 도착하고 나서도 고난은 끝나지 않습니다.
달이라도 휘영청 밝은 날이라면 달빛에 의지하지만, 코앞의 손가락도 안 보이는 날이면 더듬더듬 찾아들어가야 합니다.
등불이나 촛불을 들고 가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때도 많거든요.
이럭저럭 옷을 내린 뒤 쪼그려 앉고 나면 밖에 사람이 서 있어도 왜 그리 무섭던지.
뒷간에 몽당 빗자루 귀신이 산다는 말도 생각나고, 손이 불쑥 나와 ‘파란종이 주랴, 빨간종이 주랴’ 한다는 이야기도 생각나고….
혹시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그냥 들어가기라도 할세라, 자꾸 자꾸 말을 시키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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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간은 요즘의 화장실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배설물을 처리하는 곳’이라는 목적은 똑같다고 해도 형태나 사용방법이 워낙 달라 동일시하기는 좀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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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라고도 많이 불렀지만 이젠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쓰지 않는 말이 되었습니다.
뒷간은 ‘뒤(똥)를 보는 집’ ‘뒤에 자리한 집’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뒷간과 사돈집은 멀수록 좋다’ 말이 있습니다.
뒷간은 가까우면 냄새가 나고 사돈집은 가까우면 말썽이 나기 쉬우므로 경계하라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먼 것도 정도가 있지, 어느 집은 한참을 가야 뒷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즉, 집 울타리 밖에 한뎃뒷간을 짓는 것이지요.
어지간한 시골집에서는 대부분 한뎃뒷간을 뒀습니다.
냄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또 위생상의 필요 때문에 그랬겠지만, 급할 때는 거기까지 가는 게 보통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행세께나 한다는 집에서는 뒷간을 이원화하기도 했지요.
여성 전용의 안뒷간과 남성 전용의 바깥 뒷간을 따로 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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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뒷간의 이름도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영 뜻을 알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정랑, 서각, 정방, 정낭, 청측, 청방, 변방, 청혼, 측간, 측실, 측청, 혼측, 혼헌, 통시, 회치실….
절에서는 근심을 푸는 곳, 혹은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해우소라 부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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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요.
부잣집이나 지체 있는 집에서는 뒷간도 그럴 듯하게 지었습니다.
벽돌을 쌓거나 목재를 써서 짓고, 겉에는 회칠을 하고 문도 짱짱하게 짜서 달았지요.
반대로 서민들의 뒷간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나무로 기둥 네 개를 대충 세우고 거적으로 얼기설기 둘러쳐 바람만 막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나무를 써서 짓는다고 지어도 찬바람이 제 맘대로 드나드는 건 마찬가지였고요.
더구나 문은 대충 얽어매기 때문에 바람결에 홀로 춤을 추거나 장단을 맞추기 일쑤였지요.
뒷간을 잿간이나 창고와 함께 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좌변기도 조금만 더러우면 구역질을 해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말만 들어도 기절할지 모르지만, 가장 재미(?) 있었던 건 두 발을 놓는 바닥이었지요.
커다란 독을 바닥에 묻고 널빤지 두 개를 가로질러 놓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장마철에는 물이 들어가 넘치기 일쑤고, 여름에 엉덩이 내놓고 앉아 있으려면 냄새와 쉬파리‧모기들의 무차별 공세 때문에 뒷간을 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습니다.
변비라도 걸려 오래 쪼그리고 앉아있으면 저려오는 다리와 옷에 배는 그 독한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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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통농경사회에서 이 뒷간이야말로 보물창고였습니다.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거름의 생산지가 바로 이 뒷간이었기 때문이지요.
즉, 뒷간은 거름공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놀러 나가는 아이들에게 이르곤 했지요.
“똥은 꼭 집에 와서 싸거라”
똥은 밥이었습니다.
똥이 거름이 되고 그 거름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를 먹고 살아가니 소중할 수밖에 없었지요.
오죽했으면 오밤중에 남의 집 뒷간을 뒤지는 ‘똥 도둑놈’도 있었겠습니까.
새벽녘, 미처 날이 밝기도 전에 똥장군을 지고 밭으로 나가는 농부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요.
지금은 유기농을 하는 극소수의 사람을 빼놓고는 똥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농사에 똥을 쓰고 싶어도 쓸 만 한 걸 구하기도 쉽지 않지요.
요즘은 시골에도 수세식 화장실이 많이 보급되고 정화조가 설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순회의 틀을 벗어난 땅도 자꾸 각박해진다고 합니다.
화학비료를 무더기로 주지 않고는 영 소출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 이유로 세상도 갈수록 각박해진다고 하면 억지일까요.
뒷간의 풍경마저 지독하게 그리울 때가 있는 걸 보면 아주 헛소리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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