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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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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06 [사라져가는 것들 116] 갯배12
2009. 7. 6. 08:58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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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배를 아시나요?
갯벌 위를 다니는 배를 갯배라고 부른다고요?
그럴 듯하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갯배는 강원도 속초에 있는 아바이마을, 즉 청호동에서 건너편 중앙동 나루(5구 도선장)까지 오가는 배를 말합니다.
아바이마을은 1·4후퇴 때 내려온 함경도 일대의 피난민들이 바닷가에 움막을 지으면서 생긴 촌락이라고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고요.
갯배는 순전히 사람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무동력선입니다.
뗏목에 가까운 바지선으로 돛대도 삿대도 없지요.
원리로 따지자면 줄을 매어 나룻배를 움직이는 줄배와 비슷합니다.
육지 양쪽에 쇠줄을 묶고 갈고리 모양의 쇠막대기를 이용해서 줄을 당기면 배가 움직이게 되지요.
30명 이상이 탈 수 있으니 비교적 큰 배인데, 오로지 아바이마을에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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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마을을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청호동에서 중앙동 사이라야 50m가 채 안 되는 짧은 거립니다.
뻥 좀 보태서, 목청 좋은 녀석이 소리 지르면 저쪽의 귀 밝은 사람이 알았다고 끄떡거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지요.
기껏 5분 안쪽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을 왕복하는데, 배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좀 애매한 점도 없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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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갯배를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아바이마을 주민들에게는 수십 년 동안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교통수단이었거든요.
지금이야 조양동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뚫렸으니 오가는데 아무 걱정 없지만, 예전에는 배를 타지 않으면 코앞에 있는 곳을 5km나 돌아가야 했답니다.
갯배가 언제 어떤 계기로 생겼는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운영되었다고 하는데, 속초가 북(北)의 지배에 들었던 시기와 6.25를 거치면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지요.
그 후 청호동에 피란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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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아바이마을도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갯배 역시 이 곳 주민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부터인가 동네사람보다는 관광객이 더 많이 타고 다닙니다.
다리가 놓인 영향도 있겠지만, 관광용으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2000년 가을에 방영된 드라마 ‘가을동화’였다고 하지요.
주인공 은서(송혜교)가 갯배를 타고 가는 장면이 나오면서 유명해졌다고 하던가요.
게다가 이 드라마가 해외로 나가면서 일본인이나 중국인들도 자주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갯배 나루 곳곳은 가을동화로 색칠해져 있었습니다.
‘은서네집 슈퍼’가 퇴색한 간판을 이고 있었고, 갯배 타는 곳이라고 써놓은 큼직한 안내판에도 드라마 주인공들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사랑을 받으니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서글픈 전락이라고 해야 할지 약간은 미묘한 감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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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삯은 200원입니다.
편도라고 써놨지만 왕복한다고 해서 딱히 탓할 생각은 없어보였습니다.
아니 마음만 먹으면 공짜로 타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배는 두 대가 교대로 왕복합니다.
돈을 받는 분도 선장님(?)도 모두 노인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이야말로 오징어 배에서 퇴역한 아바이들이 아닐까 짐작해봤습니다.
배에 타면 누구랄 것도 없이 걸어놓은 쇠막대기를 잡습니다.
‘내가 어찌 저런 걸…’ 잘난 체라도 할라치면 ‘선장 어르신’의 눈총이 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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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도 합니다.

쇠막대기는 끝을 구부려 놓았는데 그 곳으로 쇠줄을 잡아서 끄는 것입니다.
목적지는 허탈할 정도로 금세 도착합니다.
그 짧은 동안에도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쫓기듯 고향을 떠나, 척박한 땅에 깃들여 살면서 갯배를 타야 바깥나들이가 가능했을 아바이들.
갯배 위에 몸을 얹고 돌아보면 늘 희망보다 절망의 무게가 더 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작 돌아가고 싶은 곳은 갈 수 없고, 삶은 보릿가루 입에 털어 넣은 듯 팍팍하고….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의 끝을 부여잡고 험난한 고개들을 넘었겠지요.
아이들은 어디서건 늘 태어나고 자라는 법.
역시 갯배를 타고 학교에 다녔겠지요.
유년의 꿈들이 이 갯배에 고스란히 담겨있을 거고요.
그 아이들이 자라서 오징어 배를 가르는 삶에서 도망치고자 뭍(?)으로 떠날 때도 이 갯배를 탔을 것입니다.
누구는 승리의 깃발을 앞세워 돌아오고 누구는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돌아왔겠지만 갯배는 그걸 가리지 않고 반가이 맞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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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반듯한 갯배는 여전히 쉬지 않고 수로를 오갑니다.
배를 통해 이뤄지는 이별과 눈물이야 더 이상 보기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그 긴 세월 쌓인 사연을 다 잊어버리기야 했을라고요.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 곁에 남아 있을지 장담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바이마을이 곧 헐려버린다니, 갯배 역시 몇 남지 않은 아바이들과 운명을 같이 할지도 모릅니다.
아바이가 없는 아바이마을, 아바이가 타지 않는 갯배는 별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설령 관광 상품으로 살아남는다고 해도 아바이들의 눈물을 실어 나르던 그 갯배는 아니겠지요.
구경삼아 찾아온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도 않은 처지에 괜히 가슴이 찌르르 아팠습니다.
하지만 하늘 한번 바라보며 시인 이상국이 읊었던 <갯배>를 더듬더듬 기억해보는 게 고작이었지요.

우리는/ 우리들 떠도는 삶을 끌고/ 아침저녁 삐걱거리며/ 청호동과 중앙동 사이를 오간 게 아니고/ 마흔 몇 해 동안 정말은/ 이북과 이남 사이를 드나든 것이다/ 갈매기들은 슬픔 없이도 끼룩거리며 울고/ 아이들이 바다를 향해 오줌을 깔기며 크는 동안/ 세계의 시궁창 같은 청초호에 아랫도리를 적시며/ 우리는 우리들 피난의 나라를 끌고/ 마흔 몇 해 동안 정말은/ 우리들 살 속을 헤맨 것이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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