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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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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2.31 [Healing Travel 나를 치유하는 여행 8] 아! 매창②
2012. 12. 31. 08:3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영원히 살다

 

매창. 그녀는 죽었으되 죽지 않았습니다. 삶의 끝머리까지 지극한 사랑을 놓지 않음으로써, 뭍 남성들의 가슴속에 펄럭이는 깃발로 살아있습니다. 헌데, 후세의 장삼이사 중 하나는 여전히 궁금합니다. 그녀는 그만큼의 사랑으로 행복했을까요?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늘 공허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녀의 무덤에는 봄날의 병아리 같은 햇살이 곱게 내리고, 무덤의 주변은 소나무들이 각박하지 않은 표정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저만치 서 있는 아파트들이 눈에 걸리지만,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들을 물릴 수는 없으니, 그 또한 풍경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매창의 무덤이 있는 매창공원은 부안군청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행정지역으로는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에 그녀 곁을 끝까지 떠나지 않았던 유일한 친구, 거문고와 함께 묻혀있습니다. 공원 곳곳에는 매창, 유희경, 허균의 시는 물론 후인들인 정비석, 이병기, 송수권 들의 시비가 서 있습니다. 이리저리 서성거리다가 벤치에 앉습니다. 공원 한쪽의 정자에서는 거문고 소리 대신 노인들의 고함이 허공에 흩어집니다. 고스톱을 치다가 뭔가 어긋난 모양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배나무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화우(梨花雨) 대신 노랗고 붉은 낙엽만 펄펄 날아다닙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는 축축한 갯내음이 따라왔습니다. 저만치 바다에서 온 소금바람입니다. 이 바람이야말로 봄마다 배꽃을 흩날리고, 매창의 숨죽여 우는 밤들을 지켜본 그 바람일 것입니다.

 

매창이 세상을 뜰 무렵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녀를 묻어 준 이들 역시 민초였습니다. 부안의 사당패와 아전들이 외롭게 죽은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에 묻고 해마다 풀 뽑고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물론 매창의 죽음을 애달파한 이들이 그들 뿐만은 아닙니다. 시인풍류객한량들도 슬픔을 함께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슴 무너지는 아픔을 기록으로 남긴 이가 바로 허균입니다.

 

계생은 부안 기생이다. 시에 능하고 글도 알았으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천성이 고고하고 깨끗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가까이 지냈지만 어지러운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 사귐이 오래 가도 변치 않았다. 지금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한 차례 울고 난 후, 율시 2수를 지어 그를 슬퍼한다.

 

哀桂娘

 

妙句土甚擒錦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개암사 일주문

한 남자의 애도가 눈물겹습니다. 한 여인의 시재(詩才)를 그렇게 오래, 그렇게 절절하게 사랑한 남자, 허균은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부안의 기생 매창의 죽음은 그렇게 기억되기도 하고 또 잊히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무덤은 모진 비바람에도 스러지지 않고 세월을 견뎠습니다. 그 이면에는 또 숨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마을의 나무꾼들이 벌초를 하고 무덤을 돌봤다고 합니다. 근세에 들어서도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에 들어오면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아 한바탕 굿으로 그녀의 넋을 기렸다지요. 그녀가 죽은 뒤 45년 뒤(1655)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습니다. 그 비문의 글씨들이 희미해질 무렵인 1917년에는 부안의 시인들의 모임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긴 4척 높이의 비석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 뜻은 계속 이어져서 지금도 부안 사람들은 매창의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은 시집의 발행입니다. 매창이 떠나고 58년 뒤인 1668, 그가 지은 수백 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던 58편을 모아 <매창집>을 간행합니다. 58년 뒤의 58편이라. 저는 또 우연한 일치에 괜히 집착합니다. 목판본 시집을 발행한 곳은 생전에 그녀가 자주 찾았던 개암사(開岩寺)였습니다. 아전들이 앞장섰다고 합니다. 절에서 기생의 시집을 만들어?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목판인쇄 기술을 가진 곳은 절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매창집의 간행은 아름다운 시편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행운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 세계 어디에서도 여성 시집이 단행본으로 발간된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 시집이 얼마나 인기가 좋았던지 너도나도 찍어달라는 바람에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판을 불태워버렸다고 하네요. 이렇게 아까울 데가. 지금 생각하면 개암사 스님들도 좀 그렇습니다. 형편이 그 지경이면 돈을 좀 받고 팔 든가 할 것이지 태워버릴 건 뭐란 말입니까. 매창집 한 권은 수십 년 전 하버드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됐습니다. 참 멀리도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개암사 매창집은 단 두 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버드 도서관에, 또 하나는 간송미술관에.

 

개암사 대웅전

이왕 매창과 개암사의 인연을 이야기했으니 그녀의 발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볼 일입니다. 그녀는 생전에 인근 사찰을 자주 찾았습니다. 소식 없는 임에 대한 그리움과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달래기에는 산사가 적격이었겠지요. 관기의 신분이었으니 허락 없이 멀리 떠날 수도 없는 처지였으니까요. 그녀가 혼자 찾은 곳은 주로 개암사나 월명암 등이었습니다. <등월명암(登月明庵)>이라는 시도 그때 나왔겠지요. 가을이 터질 듯 무르익은 개암사는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적요합니다. 지금은 땅을 뚫고 나오거나 장막을 열고 새 세상을 여는 계절이 아닙니다. 갈무리하고 덮고 묻고 이별의 편지를 쓰는 계절입니다. 희게 바란 손을 흔들어 안녕이라고 말할 때입니다. 사랑을 잃고 병들어가던 여인, 매창이 가장 사랑한 계절도 이쯤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400년 살았다는 매화나무

 

개암사는 내소사와 함께 능가산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고찰입니다. 유래는 아득한 삼한시절로 올라갑니다.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성을 쌓으며 왕궁의 전각을 짓고 동쪽을 묘암, 서쪽을 개암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 후 백제무왕 35(634)에 묘련대사가 궁전에 절을 지으며 동쪽을 묘암사, 서쪽을 개암사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남아있는 건물에도 궁전의 흔적이 담겨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통일신라 때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중수하면서 고려 때에는 건물이 30여 채에 이르는 대가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이라고 시절의 바람이 그냥 지나갔을까요. 지금은 대웅보전 등 몇 채의 건물만 있는 소박한 사찰일 뿐입니다. 매창도 이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걸음걸음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 유희경을 절절히 담았겠지요.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하나 가슴만 먹먹할 뿐입니다. 다리를 건너고 오래 산 나무와 그 잎들을 흔드는 바람 사이를 지나 계단을 오릅니다.

 

계단 끝에서 맨 먼저 만난 것은 산마루에 우뚝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바위입니다. 바로 울금바위입니다. 이 바위에는 모두 3개의 동굴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 원효방이라는 굴 밑에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괸다고 하지요. 원래는 물이 없던 곳인데 원효대사가 수도를 시작하면서부터 샘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이 울금바위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끝까지 항전한 백제군의 지휘본부가 있던 곳입니다.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한 우금산성(禹金山城)에서 백제 유민들이 항전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어쩌면 매창도 저 바위를 보기 위해 절을 찾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봅니다. 세월이 가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변함없는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을 가슴에 담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대웅전은 단청을 하는지 쇠파이프에 몸을 기대고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절이라도 공사장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제 고집인지라 이만치에서 너른 마당을 서성거립니다.

 

마당에는 늙고 볼품없는 나무 한 그루가, 밭은기침이라도 토할 듯 허리를 구부리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행려노인처럼 세상의 관심에 비껴나 있습니다. 건성으로 대놓은 부목이 나무를 더욱 초라하게 합니다. 하지만 기왓장에 써놓은 문구를 발견하고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개암사에 오신 불자님께 감사드립니다. 4백년 된 매화꽃이 아름답지요. 들어가지 마세요. 아파해요이 초라한 매화나무가 400년을 살았다는 말이군요. 매창이 세상을 떠난 지 402. 그렇다면 어린 매화나무와 매창이 만났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매화의 이름을 빌어 호를 지은 매창으로서는 더욱 반갑지 않았을까요. , 인연이란. 쪼그리고 앉아 늙은 매화나무에게 묻습니다.

부안 기생 매창을 보았는지요.”

매화나무가 바람도 없이 잎을 흔듭니다. 저는 그렇다는 뜻이라고 해석합니다.

곱더이까?

제가 이렇게 속물입니다. 기껏 묻는다는 게. 물음은 개떡 같아도 대답은 찰떡처럼 돌아옵니다.

사랑을 향한 마음이 참 장하더이다.”

 

사랑하는 여인, 매창. 그녀의 모습이 단풍 숲 사이 작은 길로 작아집니다. 뒤 한번 돌아보는 법 없더니 소실점을 지나면서 기어이 뒤태를 지웁니다. 저는 지독했던 사랑 하나에게 자꾸 손을 흔듭니다.

 

 

봄새라 치위는 가시지 않아

 

별드는 창가에 옷을 깁노니

 

숙인 머리에 눈물이 떨어져

 

옮기는 실귀가 말없이 젖는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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