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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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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25 [사라져가는 것들 159] 내매교회
2011. 4. 25. 10:25 사라져가는 것들

헛헛한 마음으로 내성천 강변길을 오른다. 알게 모르게 강은 원래의 형태를 잃어 가는 중이었다. 하류 쪽의 모래를 얼마나 퍼냈는지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다리의 교각은 뿌리까지 드러낸 흉한 모습이다. 금강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댐에 물이 차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저 강은 자신이 물에게 길을 열어주는 통로가 아니라 물을 가두는 감옥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무거운 발걸음으로 찾아가는 곳은 경북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의 내매라는 작은 마을이다. 영주시에 속해 있지만 봉화에서 20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 그곳에 105년 역사를 지닌 내매교회가 있다. 물론 곧 수몰될 위기에 처해 있는 곳이다. 이 골짜기에 100년도 더 된 교회가 있다니. 좁은 다리를 위태롭게 건너 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열한 시가 조금 넘었다. 빨간 벽돌의 아담한 교회 건물이 빨려들 듯 눈에 들어온다. 높은 종탑과 작은 부속건물이 둘, 비교적 단출하다. 큰 마을도 아니고 아무리 둘러봐도 그 옛날 교회가 터를 잡을만한 곳은 아니다. 일요일, 예배시간이라 교회 주변은 고요하다. 교회 옆집의 개만 요란하게 제 본분을 다한다. 그렇다고 내다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계단 아래 백목련이 막 봉우리를 터트리려다가 낯선 기척에 주춤한다. 짓던 개마저 허무한 짓임을 깨달은 뒤 세상은 고요 속으로 누워버린다. 예배가 끝날 때까지 교회를 돌아보기로 한다. 오석(烏石)으로 만든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비가 먼저 눈길을 잡는다. 창립 100년을 맞던 2006년에 세워졌다고 쓰여 있다. 내매교회를 그렇고 그런 시골교회 중 하나쯤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긴 세월 쌓인 사연도 첩첩이고 배출한 인재도 많다. 설립자는 강재원이라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교회를 세우기 전 대구에 나가 살았는데, 그곳 약령시에서 미국선교사 배위량의 전도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대구지역 최초의 교회인 대구제일교회를 다니다가 1906(고종 43) 내매마을로 돌아왔다. 고향에 오자마자 그는 유병두라는 사람의 사랑방을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자신의 집에 십자가를 달고 예배처소를 만들어 주일예배를 드린 것이 내매교회의 시작이었다. 경북북부에서 설립된 최조의 교회였다. 초기에 부흥사 길선주, 김익두 목사 등을 초청하여 부흥회를 여는 것은 물론 개화운동과 신농법 교육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내매교회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건 교회가 배출한 인물들이다. 목회자로는 영락교회를 공동설립하고 새문안교회에서 24년간 목회활동을 한 강신명 목사, 계명대학교를 설립한 강인구 목사, 창신대학교 강병도 학장 등이 이 교회 출신이다. 또 강진구 삼성반도체 회장, 강신주 삼성전자 사장 등 기업인 10여명도 배출했다. 100주년 기념비 앞에서 교회의 자취를 훑고 있는데 찬송가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열 명 남짓? 나중에 물어보니 전부 스무 명이 좀 넘는다고 한다.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던 아주머니 한분이 마당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한다. 왠지 기다렸다는 것 같은 표정이라 잠시 의아해진다.
오늘 오시기로 한 분이지요?”
? 아뇨. 목사님을 좀 뵈러사전 약속은 안했는데요?”
누군가 나하고 비슷한 목적으로 인터뷰 예약을 했던 모양인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낯선 사람이 카메라를 메고 서성거리니 당연히 오기로 한 사람으로 생각한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를 맞이한 사람은 목사 사모였다.

사모가 안내한 곳은 교회 왼편에 있는 자그마한 부속건물이다.
여기가 바로 내명학교에요.”
내명학교? 교회에 학교가 있었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예습을 덜 하고 온 탓이다. 사모의 설명이 이어진다. 사립내명학교는 내매교회 강병주, 강석진 목사가 주축이 되어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에 설립한 학교다. 경북 북부지방에서는 최초의 기독 사립학교였고 순흥학교와 풍기학교에 이어 영주에서 세 번 째 초등학교였다. 개화기의 신문화 도입과 문맹퇴치에 크게 기여한 것은 물론, 일제 때 궁성요배를 거부하다 박해를 받는 등 항일운동의 모태가 됐다고 한다. 수몰예정지를 찾았다가 우연하게 유서 깊은 문화재급 초등학교를 만난 셈이다. 단층으로 된 건물뼈대는 그 때 그대로지만 지붕이나 외장은 세월 따라 대부분 바뀌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 자그마한 공간이다. 교실이었다는 곳은 방으로 쓰고 있지만 과거의 체취가 제법 남아있다. 100년 전에 이곳에서 공부했을 학동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떠났을 그분들은 자신들이 글을 깨우치고 꿈을 키우던 이 곳이 물에 잠길 거라는 사실을 알까.

교실이었던 곳을 둘러보는데 신도들과 인사를 마친 목사가 들어온다. 올해 68세의 함오호 목사다. 다짜고짜 어쩌다 이 궁벽한 곳까지 와서 목회를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한다. 교회와 학교의 역사와 배출한 인물들을 소개하던 그에게 수몰과 관련된 질문을 하자 담아뒀던 말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이렇게 유서 깊은 교회가 물에 잠기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있나요. 수몰 자체를 막을 힘은 없다고 해도 가까운 곳으로 옮겨서 보전할 방법이라도 찾아야지요. 우선 문화유산으로 지정돼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전국 각지에 있는 내매교회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와 학교를 이전복원해서 기독교 역사의 교육장과 박물관으로 활용하자는 운동을 펼쳐지고 있다고 한다. 함 목사는 청와대와 문화관광자원부 등 각계에 근현대사 유산 영구보존 청원서를 보내고 있다.
많은 기관에서 긍정적인 회신이 오고 있습니다. 다행이지요. 수몰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최선을 다해봐야지요.”
그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기를 소망해본다. 105년의 역사를 몽땅 수장시키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는 없는 것이니.

학교에서 나와 예배당으로 들어가 본다
. 교인들이 떠난 예배당은 고요에 잠겨 있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두 손을 모아 집주인에게 인사를 한다. 이 교회를 스쳐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과도 교감을 나눈다. 2000년 전쯤 한 성인이 겪은 고난으로도 세상은 결국 구원받지 못한 것인가. 목사 부부와 인사를 나누고 강가로 돌아오는 길,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을 때는 저 작은 교회가 물에 잠겼을 것이라 생각하니 발걸음이 무겁다. 물속에 잠겨서도 종소리 울려 퍼지고 찬송가소리 들려올까. 다시 내성천을 따라 곳곳을 훑어본다. 오래 전에 지어진 평은역도, 수백 수천 년 사바세계를 지켰을 돌부처도, 세월을 이고 진 고가들도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데 무심한 봄꽃들만 아우성으로 피어난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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