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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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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23 [사라져가는 것들 64] 징검다리19
2008. 6. 23. 11:05 사라져가는 것들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曾孫女)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개울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소년은 개울둑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황순원의 <소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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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위에 생겨난 마을은, 어느 곳이나 비슷비슷한 풍경을 품고 있었다. 마을 뒤로 나지막한 산들이 어깨를 겯고 달리고, 앞으로는 작든 크든 내(川) 한 줄기가 구비구비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산자락을 따라서, 산을 닮아 둥글둥글한 초가집들이 점-점-점 들어서 있었다. 물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이,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촌락이 형성되려면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강 또는 내였다. 물이 흘러야 논밭을 적시어 농사를 짓고 물고기도 잡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을 앞을 흐르는 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징검다리였다. 큰 강에는 나룻배나 줄배가 오가고 다리를 놓기도 했지만, 그리 깊지 않은 내에는 대부분 징검다리가 놓아졌다. 징검다리는 돌을 사람의 보폭에 맞게 듬성듬성 놓아 내를 건널 수 있게 한 가장 원시적인 다리형태다. 과거에는 이 징검다리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소통하고 왕래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 요소였다. 마을사람들이 장에라도 가려면 이 징검다리를 건너야 하는 것은 물론, 냇물이 나누어놓은 이 마을과 저 마을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다음 날부터 좀더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소년의 가슴 한 구석에는 어딘가 허전함이 자리 잡는 것이었다.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한 어떤 날, 소년은 전에 소녀가 앉아 물장난을 하던 징검다리 한가운데에 앉아 보았다. 물 속에 손을 잠갔다. 세수를 하였다.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검게 탄 얼굴이 그대로 비치었다. 싫었다.

소년은 두 손으로 물 속의 얼굴을 움키었다. 몇 번이고 움키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고 말았다. 소녀가 이리로 건너오고 있지 않느냐.

'숨어서 내가 하는 일을 엿보고 있었구나.' 소년은 달리기를 시작했다. 디딤돌을 헛디뎠다. 한 발이 물 속에 빠졌다. 더 달렸다.

(황순원의 <소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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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징검다리가 영구적인 다리는 아니었다. 큰물이 한번 지나고 나면 돌이 저만치 휩쓸려 내려가거나 위치가 들쑥날쑥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물이 빠진 뒤에는 동네사람들이 함께 모여 징검다리를 보수했다. 아침에 학교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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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나 장에 나가는 어른들이 건너야 할 다리기 때문에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강이나 내는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터였다. 특히 여름이면 종일 물속에서 살다시피 했다. 내의 수심이 일정한 게 아니라 둠벙처럼 꽤 깊은 곳도 있고 넓고 얕게 흐르는 곳도 있어서 지루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 곳에서 물장구도 치고 자맥질도 했다. 또 수초 사이에 손을 넣어 물고기를 잡았다. 손이 빠른 아이들은 금세 한 꿰미를 잡아냈다. 조금 큰 아이들은 집에서 고추장을 훔쳐다가 매운탕을 끓이기도 했다. 또 아예 내를 막아 물을 퍼내고 물고기를 통째로 잡기도 했다. 그 작업은 꽤‘대공사’였기 때문에 날을 잡아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모였다. 물속에서 놀다가 지치거나 추워지면 징검다리 위에 나란히 앉아 옥수수서리·수박서리 모의를 하기도 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에 단련된 징검다리는 검게 빛났으며 햇볕을 온 몸으로 받아 무척 따뜻했다.


"윤 초시 댁도 말이 아니야, 그 많던 전답을 다 팔아 버리고, 대대로 살아오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더니, 또 악상까지 당하는 걸 보면……." 남폿불 밑에서 바느질감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증손(曾孫)이라곤 계집애 그 애 하나뿐이었지요?"

"그렇지, 사내 애 둘 있던 건 어려서 잃어버리고……." "어쩌면 그렇게 자식복이 없을까."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도 변변히 못써 봤다더군. 지금 같아서 윤 초 시네도 대가 끊긴 셈이지.……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황순원의 <소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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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나 내가 젖줄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늘 어머니의 품처럼 부드러운 존재는 아니었다. 큰 비라도 내리면 강과 내는 악마로 돌변했다. 시뻘건 흙탕물은 세상을 모두 삼킬 듯 쿵쾅거리며 대지를 달렸다. 논둑을 무너뜨려 애써 가꾼 벼를 휩쓸고 지나는가 하면, 다 익은 과일이나 돼지 같은 가축들을 쓸어 가기도 했다. 물은 가끔 사람도 꿀꺽 삼켰다. 특히 아이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산에 나무가 별로 없던 시절, 집중호우가 내리면 냇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불어났다. 비가 많이 올 땐 선생님들이 하교를 못하게 통제하지만 몰래 빠져나오는 아이들이 있었다. 내에 물이 불어있어도 매일 다니던 길이니, 아이들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간당간당 머리만 남은 징검다리에 올라서고는 했다. 그러다 수위가 더 상승하고, 중간쯤에서 어지러워진 아이가 발을 헛디디는 순간 비명도 못 지르고 빨려 들어갔다. 물이 빠진 다음 수십 리 떨어진 하류 쪽에서 몰라보게 변해버린 시신을 건지기도 하지만 영영 찾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유령처럼 냇둑을 헤매는 그 집 부모들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봐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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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고향의 내와 징검다리는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은 더욱 짙어지기 마련이다. 봄이면 수양버들 긴 머리 풀어 내리고 여름엔 아이들의 함성이 병아리 솔개처럼 솟아오르던, 그리고 가을이면 떨어진 나뭇잎이 맴돌이하며 흐르던 고향의 내. 겨울에 냇물이 얼고 그 위에 눈이 내리면 까맣게 도드라진 징검다리는 얼마나 아름답던지. 하지만 이제 진정한 의미의 징검다리는 사라졌다. 청계천에 놓인 징검다리를 구경삼아 건너볼 뿐이다. 설령 남아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다니기 위한 징검다리는 아니다. 깊은 산골에도 번듯한 시멘트다리가 놓여지고 그 위로 차가 씽씽 달린다. 그 맑던 물도 악취를 풍기며 흐른다. 작은 내들까지 시멘트로 발라놓는 바람에 물은 관 속을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물장구를 치거나 징검다리 위에 벌거벗고 앉아 깔깔거리던 아이들도 사라졌다. 누구말대로, 사무치도록 그리운 것은 찾아보지 말고 가슴 속에 묻는 게 나을지 모른다. 수레바퀴처럼 건조하게 돌아가는 도회지의 삶 속에서, 어릴 적 향수를 에너지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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