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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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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에 해당되는 글 2

  1. 2009.05.11 [사라져가는 것들 109] 칼갈이19
  2. 2008.02.11 [사라져가는 것들 44] 이발사8
2009. 5. 11. 09:19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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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어머니가 마음에 걸려 한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집을 드나드는 문제였다. 아파트는 자기 집을 들어가는 과정도 녹록치 않았다. 10자리가 넘는 숫자를 입력해야 첫 관문을 통과하는데, 80이 다 된 노인의 기억력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간신히 외울만하면 번호를 바꿔버리니 노인들에게는 나들이 자체가 풀기 어려운 시험이었다. 두 번째는 골목의 정서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섭섭함이었다. 단독주택가의 골목에는 온갖 삶이 다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잡상인들은 늘 어디론가 틈입해 들어왔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뭐를 사라, 뭐를 바꿔라’ 하는 소리가 소음에 불과했지만 노인들은 그들의 목소리에서도 고향의 향수를 퍼내고는 했다. 특히 가끔 나타나 “칼 갈아요~ 가위 갈아요~”하고 외치는 목소리는, 어릴 적 친구가 온 것처럼 정겹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칼갈이 노인이 골목을 지나는 날을 은근히 기다렸던 것 같다. 일반 가정집에서 매주 갈아댈 칼이 있을 턱은 없지만, 칼갈이 노인을 불러 세워 냉수라도 한잔 대접해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아들을 따라 아파트로 들어가고 난 뒤, 어머니는 골목을 잃어버렸다. 골목이 상실한 아파트는 견고한 성처럼 노인을 가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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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갈이 노인을 만난 건 종로의 어느 음식점에서였다. 노인은 문가의 한 쪽 구석에 앉아 약속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집에서의 작업이 다 끝났는지, 잘 갈린 칼 서너 자루가 허연 배를 내민 채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칼을 가는 장비들은 그대로 펼쳐진 채였다. 매주 목요일에 노인이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음식점 주인에게 사진촬영과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부탁한 터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초록색 모자를 눌러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노인이었다. 이런 저런 일을 하는 누구라고 밝히자 천진한 웃음으로 맞았다. 평생을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온화한 기색이 얼굴 전체에 배어 있었다. 연세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니 여든 하나(81세)란다. 노인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만나려 했느냐고 물어왔다. 책을 쓰는데 꼭 필요해서 그런다는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전에 한 가지 당부가 앞섰다.
“얼굴 나오는 사진은 좀…. 장성한 자식이 넷인데 아비가 칼을 갈러 다니는 모습이 신문이나 책에 나오면….”
그래서 그렇게 모자를 깊이 눌러쓴 걸까? 얼굴이 안 나오도록 하겠다고 다짐을 하고 나서야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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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해간 질문과는 상관없이 대화가 자연스럽게 풀렸다. 여느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첫머리는 자식들 자랑이었다. 경북 구미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장사(본인은 상업이라고 표현했다)를 하다가 그만둔 뒤 칼갈이는 10년 전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아들 셋 딸 하나 두었는데 모두 대학교육까지 시켰소. 다들 성공했지요. 큰 아들은 **에서 이사까지 지냈고….” 자신이 일궈온 삶에 대한 자랑스러운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자식들 생각해서 이 일을 그만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이게 왜 부끄럽다는 건지. 내가 스스로 벌어먹을 만큼 건강하고 할 만 해서 하는 건데…. 노인이라고 집에만 있어야 하나?” 초반에 사진 이야기를 할 때와는 달리 일에 대한 자부심이 넘친다. 할머니(75세)와 둘이 사는데 생활은 어렵지 않다고 했다. 하루에 얼마나 버느냐고 물으니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재차 묻자 손가락 다섯 개를 내보였다. 5만원이냐는 확인에 고개를 끄떡였다.
“한번은 모 구청 앞에서 칼을 갈고 있는데 잘생긴 신사 하나가 지나가다 말고 서서 바라보는 거요. 그렇게 한참을 보더니 ‘모든 사람이 할아버지만큼만 일을 하면 이 나라가 참 좋아질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갑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이가 바로 구청장 아니었겠소?”
그런 기억이 노인에게는 무척 자랑스러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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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말로는, 아직도 남의 칼을 갈아주러 다니는 칼갈이들이 몇몇 남아있단다. 서로 마주치거나 영역 다툼을 하는 경우는 없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정도로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다니는 곳이 정해져 있어서…. 나 같은 경우는 요일마다 다니는 동네가 다른데, 예를 들면 월요일은 부천, 화요일은 강남 테헤란로, 목요일은 종로… 그런 식으로 돌지요.”
음식점이 주요 고객이다. 일반 가정에서는 칼을 갈아 쓰지 않은지 오래기 때문이다. 칼을 많이 쓰지도 않거니와 무뎌지면 새로 사다 쓰지 구차하게 남의 손에 맡기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에서 나오는 칼은 워낙 오랜만에 갈기 때문에 힘이 더 든단다. 그렇게 무디고 이 빠진 칼들이 나올 때 그라인더가 필요하다. 숫돌만으로는 제대로 갈리지 않기 때문이다. 칼을 가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숫돌에 열심히 문지른다고 갈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덜 갈면 잘 들지 않고, 지나치게 갈면 날이 넘어가거나 안 간 것만도 못하게 된다. 특별한 애로는 없느냐는 질문에, 노인은 별별 사람을 다 만난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고마운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지요. 미용실에 가위를 갈러 가면 어느 집은 할아버지가 고생한다면서 5천원을 쥐어줘요. 2천원이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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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못된 건 나그네가 주인행세를 하는 거지요. 식당에 가서 칼 갈게 없느냐고 물으면 일하는 사람이 쌀쌀맞게 내쳐요. 돌아 나오다 보면, 어느 땐 주인이 와서 ‘왜 그러느냐’고 나무라면서 칼을 내주기도 하지요. 그런 것부터 고쳐야 돼요. 정치판도 그렇잖아요. 나그네가 주인인 양 행세하고….”
한없이 마음 좋아 보이는 노인의 말속에서 하얗게 바랜 뼈가 드러난다. 하긴 세상 인심이 식당을 기웃거리는 칼갈이 노인에게 그리 후할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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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쌓인 것도 많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갈수록 편한 것만 찾게 되지요. 조금 지나면 누가 남의 칼을 갈려고 하겠습니까? 이게 쉬워보여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거든요. 나도 처음 시작할 땐 코피까지 터지고 말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몇 달을 하다보니까 팔에 근육이 생기고 할 만해 집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덕분에 건강하게 살아온 것이지요. 그렇다고 젊은 사람들이 할 리는 없겠지만….”
노인이 자랑스럽게 팔의 근육을 보여줬다. 80대 답지 않은 강건함이 배어있었다. 청년처럼 정정해 보인다는 말에 수줍게 웃더니 팔에 불끈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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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거의 끝나는 기색이자 노인이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갈아놓은 칼을 음식점에 돌려주고, 파란색 배낭에 그라인더와 숫돌과 물통(칼 갈 때 물을 뿌리는)을 챙겨 넣었다. 그러더니 한쪽에 벗어두었던 ‘칼 가위 갑니다’라고 쓰인 팻말을 목에 걸었다. 저 팻말을 숙명처럼 목에 걸고 오늘은 강남, 내일은 종로로 떠도는 노인의 삶은 행복한 것일까 불행한 것일까. 누가 언제 꽂아준 것인지 가슴에 빨간색 카네이션이 선명했다. 장비를 다 챙긴 노인이 두 다리에 힘을 주며 끄응! 소리와 함께 일어섰다. 잠시 침묵하던 세상이 수런수런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인은 생각보다 키가 무척 작았다. 굽은 등에는 인생의 무게가 그대로 얹혀 있었다. 평생 지고 온 삶의 굴곡이 얼마나 강퍅했으랴. 자식들이 성공했다는 것만으로, 한 사람이 지고 온 짐이 덜어지는 것일까. 볼 일이 모두 끝났느냐는 듯, 노인이 작별인사를 담은 눈빛을 보냈다. “뒷모습 한두 장 더 찍을 게요.” 노인이 가타부타 없이 발걸음을 뗐다. 셔터를 누르지도 못하면서, 노인의 뒷모습이 담겨있는 뷰파인더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저벅저벅, 빌딩숲으로 들어선 노인이 조금씩 작아져갔다. 이 땅의 마지막 칼갈이를 보는 듯, 등 굽은 노인 하나를 가슴에 꾹꾹 담는 게 그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칼갈이 노인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준 김은실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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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11. 16:44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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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꺽다리이발소’가 문을 닫았다. 어차피 오늘이냐 내일이냐의 문제였기 때문에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건 아니다. 전화로 소식을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더니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긴 일이 엿처럼 쩍쩍 들러붙었다고 해도, 손님이 들락거린 것이 아니었으니 결과는 마찬가지다. 꺽다리이발소의 주인 김장생씨는, 내가 속해 있는 이발사 모임의 오랜 계원이다. 김씨의 이발소에는 현대이발관이라는 간판이 버젓이 붙어있다. 하지만 김씨의 키가 이발사로는 안 어울릴 정도로 껑충하게 큰데다,“변두리 이발소 주제에 무슨 '현대'냐”고 계원들이 장난삼아 꺽다리이발소라고 불렀다. 세월에 치여 지쳐버린 내 또래 이발사들이라면 너나없이 그런 편이지만, 김씨 역시 몇 해 전부터 문을 닫는다는 말을 자주 해왔다. 하루 종일 혼자 앉아있을 때가 많으니 혈압만 자꾸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이발소 덕에 잘 먹고 잘 자라서 한자리씩 하는 자식들도 이젠 이발사 아비를 그리 달가워하는 것 같지 않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계원들이 말려서 주저앉혔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고, 누가 문을 닫으면 다음은 내 차례지 싶어 내심 두려워하는 속마음도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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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황혼녘의 노인들이 주고객이지만 나도 한 때는 잘 나가던 이발사였다. 이발소가 시내에 있던 젊은 시절, 머리 잘 깎는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밀려드는 손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조수를 두엇 둬야할 만큼 바빴다. 애초에 이발사가 된 건 내 뜻은 아니었다. 평생 밑이 찢어져라 가난하게 살았던 아버지가 이발사 되기를 권했다. 어느 날 “네가 평생 먹고살기에는 이만한 게 없을 게다.”라면서 동네 이발소의 머리감개로 넣어주었다. 머리감개 몇 년 만에 ‘바리캉’을 잡을 수 있었다. 학생들이 검은 교복에 머리를 박박 밀던 시절이니 멋을 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기계충(두부백선)으로 머리에 동전만한 ‘땜빵’이 생긴 아이들도 많았다.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돈이 없어 아이들 머리를 못 깎이다가 명절 때나 돼야 줄줄이 끌고 오는 집들도 있었다. 설이나 추석을 앞두고는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시골에서는 머리 깎은 삯으로 곡식자루를 들고 오기도 하던 때였다.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이발이나 면도가 손에 익을만할 무렵엔 이발소에 갇혀 지내는 게 너무 답답했다. 몇 번 뛰쳐나갈 생각도 해봤지만 결국은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천직이다 싶기도 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아서 별 탈 없이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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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전에 이발소는 황금기만 있을 줄 알았다. 인구는 늘어나는데 남자치고 이발을 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1970년대 말이었던가, 젊은이들 사이에 장발바람이 불어 이발소를 소 닭 보듯 할 때도 밥 굶는다는 이발소는 없었다. 어차피 상투를 틀거나 땋아 내리지 않을 바에야 언젠가는 이발소에 와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높이 솟았던 해라도 석양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게 세상의 이치가 아니던가. 딱히 언제부터라고 꼽기는 쉽지 않다. 이발소에 손님이 줄기 시작했다. 이발소 안에 있으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제법 주워듣는데도, 직접 경험한 게 별로 없으니 세상을 미리 읽고 판단하는 능력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손님이 줄기 시작하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가까운 곳에 서비스 좋은 이발소라도 개업했으려니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손님은 해가 갈수록 줄었다. 그래서 이번엔 내 이발소가 워낙 구식이라 그런가 생각했다. 초현대식 설비에 예쁜 면도사를 두고 안마니 뭐니 극진한 서비스를 하는 이발소들이 자꾸 생겨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발소는 누가 뭐래도 머리를 깎는 곳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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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이발소를 둘러볼 때마다 문제가 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랜 세월 함께 하는 바람에 번들거리는 가죽의자는 그렇다 쳐도, 타일이 떨어져나간 구식 세발대(洗髮臺)와 파란 플라스틱 조루는 내가 봐도 좀 심하다 싶었다. 가죽띠에 썩썩 갈아서 날을 세우는 일자면도기와 십 수 년 써온 바리캉도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시절이 다 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평소에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위생함 같은 것까지 눈에 거슬렸다. 힘닿는 대로 하나씩 바꿔 봤지만 떠난 손님이 돌아오는 기미는 없었다. 가끔씩 초로의 사내들이나 들를 뿐, 학생들까지 내 이발소를 비켜 지나갔다. 이발소에 발길을 끊은 이들이 가는 곳이 미용실이라는 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사내녀석들이 어디 갈 곳이 없어서…. 그렇게 혼자 한탄해보지만, 사실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미용실이 어디 남자들 머리를 깎는 곳이던가. 남자 머리는 싹둑싹둑 잘라내면 안 된다. 사각사각 깎아야한다. 이발한 머리를 보면 그 차이를 금세 알 수 있다.. 하지만 싹둑싹둑이든 사각사각이든 깎는 방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미용실에서 자른 머리는 세련되고, 이발소에서 깎은 머리는 고리타분해 보인다는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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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가에 있던 이발소를 처분하고 시 외곽으로 물러앉은 게 몇 해 전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예 시골로 내려가는 이발사도 있었다. 계원 중 한 사람인 조명수씨가 최근 협회에서 들었다는 얘기는 냉혹한 현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 한때 9만 곳을 헤아리던 이발소가 채 2만 곳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미용실은 12만 곳으로 늘었다고 한다. 아프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꺽다리이발소의 김씨도 이런 현실이 힘겨웠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발소는 이발소고 미용실은 미용실이다. 지금도 내 솜씨를 잊지 못해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꽤 있다. 그들은 내게 머리를 맡기지 않으면 깎다 만 것 같아 찜찜하다고 고백한다. 듣기 좋은 소리로 그러겠지만, 몇몇 사람은 나를 '이발명장(

匠)'이라고 불러준다. 풀빵을 팔아도 사장님 소리를 듣는 세상에, 이발관 주인이라 하여 관장이라든가, 이발소니 소장이라든가, 이용원이니 원장이라 불려본 적 한번 없었다. 그런 이름에 욕심을 내본 적도 없었다. '머리 잘 깎는 이발사'면 족했다. 그래서 명장이라는 이름은, 비록 농담일지라도 날 행복하게 한다. 새삼 화려했던 날의 부활을 꿈꾸는 건 아니지만 아직 가위를 놓을 수 없다. 단 한 명이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곳에서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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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인물은 글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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