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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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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떡'에 해당되는 글 2

  1. 2008.04.22 [사라져가는 것들 55] 방앗간20
  2. 2008.02.25 [사라져가는 것들 46] 썰매18
2008. 4. 22. 19:1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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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어쩌면 실제로 겪지 않았던 일이 우연히 뇌리에 들어와 박혀버린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게 몇 살 때였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주워온 강아지 나이를 어림하듯, 초등학교 2~3학년쯤이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이상한 것은, 막상 따지고 보면 별 일도 아닌 그 장면이, 미처 꺼내지 못하고 굳어버린 손끝의 가시처럼 아픔으로 기억된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리도 깊이 박힌 걸까. 그날 아이는 어머니를 따라 방앗간에 갔었다. 아이의 집은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또 방아를 찧을만한 곡식도 없었다. 그러니 그날 방앗간을 찾은 건 양식을 빌려볼까 해서였을 것이다. 아이의 가족은 여러 날을 제대로 먹지 못한 터였다. 아이의 어머니로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쌀이 있으니 갈 수밖에 없는 곳이 방앗간이었을 것이다. 그들 모자(母子)가 안으로 들어서도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밝은 곳에 있다가 갑자기 들어선 방앗간은 꽤 컴컴해서 처음에는 사물이 구별되지 않았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고막을 찢어놓기라도 할 듯 달려들었다. 잠시 뒤 시야가 좀 트였을 때 꿈틀거리고 있는 커다란 괴물이 맨 먼저 보였다. 구동축과 피대(皮帶, 벨트)가 어지러울 정도로 돌아가고 있었고 시커먼 자루에서는 하얀 쌀이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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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가라는 이 없는 그곳에서, 그들 모자는 망연하게 서 있었다. 비록 가족의 삶을 지키려 찾아갔다고 해도 쌀을 빌려달라는 말이 쉽사리 나올 리는 없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심정 한편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망설임 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통이 명멸하고 있을지. 그런 건 말로서가 아니라 가슴과 가슴으로 전이되는 것이니. 그냥 돌아가자고 말하려, 어머니에게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구름 속에 숨었던 해가 얼굴을 내밀었는지, 열린 창을 통해 햇빛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온갖 부유물을 뚫고 쏜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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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달리는 햇빛은 날카로운 창들 같았다. 그 햇빛폭포가 달려서 멈춘 곳이 하필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그 순간 아이는 갑작스레 햇빛에 드러난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주춤 물러섰다. 그 얼굴은 그동안 알던 어머니의 얼굴이 아니었다. 가난 속에서도 항상 빛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는 어디로 사라지고 한없이 초라한 얼굴 하나가 거기 있었다. 그 얼굴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가로 세로로 달리고 있었다. 착잡함과 부끄러움과 슬픔을 내포한…. 그게 전부였다. 그 외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금세 걸음을 옮겨 햇빛폭포에서
벗어났고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기억에 없다. 하지만 그 날 그 자리에 서있던 어머니의 모습은, 두고두고 기억 속으로 찾아왔다. 세월 가도 해석할 길이 없는 그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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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는 ‘정미소’라는 이름의 기계식 방앗간이 적어도 두세 동네에 하나씩은 있었다. 방앗간은
학교 다음으로 큰 건물이었다. 대부분 신작로 옆에 있었는데 추수철이면 벼 가마니를 실은 소달구지가 쉬지 않고 드나들었다. 물론 방앗간이 벼만 찧는 곳은 아니었다. 설을 앞두고는 가래떡을 뽑았고 가끔 고추방아도 찧었다. 아이들은 동그란 관을 통해 매끈하게 빠져 나오는 하얀 가래떡을 얻어먹는 재미에, 떡을 할 때는 엄마를 따라가곤 했다. 방앗간의 터줏대감은 당연히 발동기였다. 발동기는 어지간한 바위만큼이나 커서 아무나 시동을 걸 수 없었다. 덩치 큰 사내가 쇠를 걸고 얼굴이 벌겋게 될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돌렸다. 처음엔 시~~코~~ 시~코~ 시코하는 소리와 함께 힘겹게 돌아가다가 어느 정도 가속이 붙으면 텅 텅 텅~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렸다. 돌리는 사람의 힘이 달리면 시코 시코 하다가 피이~하고 나자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발동기에는 커다란 구동바퀴가 붙어있었다. 그 육중한 쇠바퀴와 천정 구동축에 걸린 바퀴가 넓적한 피대로 연결되었다. 피대는 8자 모양으로 돌아가면서
천장에 곶감처럼 매달려있는 바퀴들을 돌렸다. 발동기에서 시작한 에너지가 피대를 타고 바퀴들을 돌리고 그 힘으로 쌀도 찧고 고추도 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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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은 힘과 기운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발동기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조용하던 마을이 기지개를 켜며 두런두런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들판을 달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지펴줬다. 방앗간은 가을이 가장 바빴다. 가을걷이가 시작되면서 발동기가 쉴 새 없이 돌기 시작해서 초겨울 찬바람이 들판을 점령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농부들에게는 가장 보람 있는 시기였다. 찧어진 햅쌀이 가마니에 채워질 때 나던 그 향기는 어쩌면 그렇게 달콤했는지. 그렇게 한철을 보내고 겨울이 오면 방앗간은 특별한 날을 빼놓고는 쉬게 마련이었다. 그때부터는 참새와 아이들의 놀이터로 바뀌었다. 방앗간 마당은 소달구지나 드물게는 트럭도 드나들기 때문에 여느 마당보다 넓었다. 그러니 아이들의 놀이터로는 최고였다. 사내애들은 구슬치기, 말뚝박기(말타기)놀이에 정신이 팔렸고 여자애들은 사방치기, 고무줄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방앗간은 또 숨바꼭질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뒤쪽으로 돌아가면 왕겨가 쏟아져 쌓이는 곳이나 각종 장치가 있어 몸을 숨기기 좋았다. 왕겨더미에서 놀다가 온 몸이 껄끄러워 혼이 나기도 했다. 짧은 겨울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놀다보면 광식아, 정자야 부르는 소리가 고샅을 달려 메아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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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는 아픔을 내포한 방앗간이지만 농촌출신들에게는 추억의 보고이자 고향의 깃발이었다. 먼 길을 떠났던 이가 피로를 등에 지고 돌아오는 길에는, 방앗간 발동기 소리가 먼저 반겨줬다. 고갯마루에 서서 아련한 그 소리를 들으면 지친 발걸음에 힘이 솟아 내닫듯 고개를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런
방앗간도 세월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80년대 이후 곳곳에 정미공장들이 들어서면서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방앗간 주인들의 기운이 떨어지는 것과 비례해 수익성도 떨어졌기 때문에 지키려 해도 지킬 수 없었다. 요즘 농가에서는 집에서 먹는 쌀은 개인용 정미기계를 설치하여 필요할 때마다 찧는다. 그렇다고 모든 방앗간이 문을 닫은 건 아니다. 양철지붕은 벌겋게 녹슬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하얀 쌀을 쏟아내는 방앗간은 아직도 꽤 많이 남아있다. 중년의 사내가 된 아이는, 지금도 시골길을 가다가 방앗간이 보이면 멈춰 서서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어머니가 아직 그 자리에 있을 리는 없지만, 어머니가 남긴 슬픔만은 어딘가 떠돌고 있을 것 같아 쉽사리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밥 굶지 않고 살만한 세상이 된지 오래건만, 왠지 견디기 힘든 공복감에 시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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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5. 16:1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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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병구가 낮지만 날카로운 소리로 아이들에게 경고를 보낸다. 순간,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멈춰버린다. 용득이의 코 훌쩍거리는 소리가 폭포소리만큼 크게 들린다. 병구의 지휘에 따라 개구멍을 통과한 아이들이 고양이처럼 조심조심 앞으로 나간다. 내내 뒤를 따르던, 깎아 내버린 손톱 같은 초승달이 구름 속으로 숨는다. 코앞의 손가락도 보이지 않을 만큼 사위가 캄캄해진다. 하지만 아이들에겐 제집 안방처럼 익숙한 길이다. 병구가 날다람쥐처럼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가 맨 마지막 교사(校舍) 뒤로 빨려들듯 사라진다. 숙직실과 가장 먼, 5~6학년 교실 있는 곳이다. 그 뒤를 네 명의 아이들이 꺼병이(꿩새끼)들처럼 따라가 어둠 속에 몸을 감춘다. 병구는 잠깐 숨을 돌리고 나더니 유리창 떼내는 작업을 시작한다. 낮에 걸쇠를 풀어둔 창은 별 저항 없이 창틀에서 분리된다.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아이 둘은 병구를 돕고 다른 두 명은 흩어져 망을 본다. 병구는 유리창을 내려놓은 뒤 익숙한 솜씨로 레일 밑에 드라이버를 찔러 넣는다. 병구가 손에 힘을 주면서 레일과 창틀 사이가 점점 벌어진다. 잠시 뒤 긴 레일 하나가 뽑혀 올라온다. 아이들 사이에서 작은 함성이 터져 나온다. 그때, 웬 놈들이냐?!!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어둠을 찢는다. 이어 둔탁한 발걸음소리가 들리더니 플래시 불빛이 아이들의 얼굴을 핥으며 지나간다. 후닥닥!!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한다. 구름 속에 숨었던 달이 살짝 얼굴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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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모의 끝에 실행됐던 ‘레일탈취’ 작전은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아이들은 겨울만 되면 학교 유리창 밑에 깔린 가이드레일에 군침을 흘렸다. 썰매의 날로 쓰기에는 그만한 게 없기 때문이었다. 썰매 날은 두꺼운 철사를 가장 많이 사용했는데, 물자가 귀한 시골에서 쓸 만한 철사를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헌 스케이트 날로 썰매를 만드는 아이도 있었지만, 그야 말로 언감생심 바라기 힘든 ‘귀물(貴物)’이었다. ‘바께쓰’라 부르는 함석양동이 아래의 철제 링을 빼서 곧게 편 다음 썰매다리에 박아 넣으면 최고의 날이 되기도 했다, 스피드를 내는 데는 그만이었기 때문에 그걸 가진 아이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어디라고 양동이 테두리를 함부로 빼겠는가. 욕심에 눈이 멀어 부모님 몰래 그 짓을 하다가 속옷 바람에 쫓겨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양동이를 버릴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려보지만, 양동이가 못 쓰게 될 때면 철제 링 역시 녹슬고 삭아서 쓸 수 없게 된 뒤였다. 그런 형편이니 아이들은 너나없이 ‘철사병’에 걸려서 돌아다녔다. 결국 학교 유리창이 수난을 당하기 일쑤였다. 레일도둑이 극성을 부릴 무렵이 되면 선생님들도 긴장하기 마련이었다. 철사를 구한 뒤에도 썰매 하나가 완성되기에는 난관이 많았다. 썰매 다리용 각목과 깔판으로 쓸 판자 역시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다리는 아이들 팔뚝 굵기 만한 통나무를 쓰기도 했고, 깔판 역시 가는 통나무를 촘촘히 박아서 만드는 아이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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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매 만들기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과정은 비교적 간단했다. 다리에 철사를 고정시키고 그 다리 위에 판자를 대고 못질하면 기본은 끝이었다. 철사는 구부려서 다리의 앞에 박거나 못을 여러 개 박아 고정시켰다.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어도 썰매를 겨우내 타다보면 철사가 비어져 나오기 일쑤였다. 모양이나 크기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졌다. 썰매 앞에 나무를 덧대거나 장식을 하기도 했다. 작은 아이들은 어른들 손을 빌렸는데, ‘양반자세’로 앉아서 탈 수 있도록 넓게 만드는 게 보통이었다. 대개 초등학교 3~4학년 이상이 되면 스스로 썰매를 만들기 시작한다. 고학년에 올라갈수록 간신히 발을 올릴 만큼 작아졌다. 작을수록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참 썰매꾼’들은 외발썰매를 만들어 타기도 했다. 외발썰매는, 말 그대로 다리를 양쪽으로 두 개 대는 게 아니라 가운데 한 곳에만 만들었다. 균형 감각이 뛰어나지 않으면 올라설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얼음에 닿는 면적이 적은만큼 저항이 적어져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썰매를 만드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스키의 스틱이라 할 수 있는 송곳이었다. 송곳은 가을에 가늘고 곧게 뻗은 소나무를 다듬어 잘 말려두었다가 썼다. 긴 대못의 머리를 두드려 나무에 거꾸로 박고 T자 모양으로 손잡이를 만들었다. 작은 아이들은 짧은 송곳을, 큰 아이들은 긴 송곳을 썼다. 송곳이 길면 썰매를 서서 타야하지만 그만큼 힘을 받기 때문에 스피드를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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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이 되면 아이들은 얼음판에서 살다시피 했다. 겨울에는 아이들이 도울 집안일도 별로 없기 때문에 온종일 나가놀아도 어른들은 별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공부 따위는 까마득히 잊고 놀았다. 방학 내내 놀다가 개학을 앞두고 ‘방학책(탐구생활)’이나 벼락치기로 메워가지고 가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썰매는 강이나 내 혹은 마을 앞 둠벙에서 타기도 했지만, 대개 논에 물을 대어 썰매장을 만들었다. 겨울 초입에 동네에서 가장 큰 논에 물을 적당히 가둬놓으면 최고의 썰매장이 되었다. 자신의 논이 아이들 놀이터가 돼도 뭐라는 논주인은 없었다. 아이들은 아침밥을 먹으면 썰매를 송곳에 꿰어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다. 요즘처럼 방한이 잘되는 옷은 구경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찬바람이 여린 가슴을 파고들고 볼은 빨갛게 얼기 일쑤였다. 그래도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리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날마다 그렇게 신나게 타건만 얼음판에 썰매를 올려놓고 송곳을 불끈 쥘 때마다 가슴은 두근거렸다. 아이들은 세상 끝까지라도 갈듯 씽씽 달렸다. 논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누가 먼저 가나, 혹은 몇 바퀴를 누가 먼저 도나 경주도 했다. 욕심이 앞서서 나동그라지기도 하지만 툭툭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지치면 얼음판 한쪽에서 팽이를 치기도 하고 논둑에 올라 연을 난리기도 했다. 그렇게 놀다보면 금세 점심때가 되었다. 밥을 먹으러 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집에 가봐야 먹을 게 없으니 내처 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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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닥불에 고구마나 가래떡을 구워먹는 재미도 남달랐다.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집에서 몰래 가져온 고구마를 묻어놓으면 조금 뒤 매혹적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호호 불며 껍질을 벗기다 보면 손이니 얼굴이니 온통 깜둥이가 되었지만 노랗게 잘 익은 속살 한입 메어 물면 꿀맛이 따로 없었다. 날이 따뜻할 때는 가끔 얼음이 꺼지기도 했다. 그러면 양말이나 옷을 흠뻑 적신 아이들이 모닥불가로 모여 들었다. 말린다고 널어둔 양말을 불길이 날름 삼키기도 했다. 나일론 소재의 점퍼에 불티가 튀어 숭숭 구멍이 뚫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 아이는 그날 저녁에 경을 칠 수밖에 없었다. 모자나 장갑도 없이 놀다보면 손발에 얼음이 박히거나 살갗이 툭툭 갈라졌지만, 아이들은 얼음판을 떠날 줄 몰랐다. 겨우내 그렇게 놀다 새 학기가 되어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은 냇가의 미루나무만큼 훌쩍 커있었다. 지금은 어딜 가도 썰매 타는 아이들을 보기가 쉽지 않다. 시골에 아이들도 드물거니와 설령 있다고 해도, 그 아이들 역시 학원 가랴 공부 하랴 바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도 TV는 끊임없이 채널돌리기를 강요하고 컴퓨터 속의 게임은 모든 걸 잊을 만큼 자극적이다. 그러니 찬바람 씽씽 부는 들판에 나가 고생을 사서할 아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산골마을을 지나다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거나 팽이 치는 아이들을 만나면 끌어안고 싶을 만큼 반갑다. 부모 손잡고 가서 타는 스키나 눈썰매가 겨울놀이의 전부인 줄 아는 아이들에게, 아빠나 삼촌이 들려주는 썰매 이야기는 먼 옛날의 전설만큼이나 아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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